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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장기려, 그 사람

2015. 11. 18. by 현강

어제 저녁 CTS 기독교 TV 아트홀에서 장기려 박사 추모 20주년 특집 다큐 영화 <끝나지 않은 사랑의 기적 장기려> 시사회가 열렸다. 나는 여기 참석해서 큰 울림을 받았다.

 

평생 무소유의 삶 속에서 가난한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했던 그는 우리 시대에서 예수에 가장 가까이 갔던 사람이 아닐까. 그는 영양 부족한 환자에게 <닭 두 마리 값>을 처방했고, 돈 없는 환자에게 병원 뒷문으로 도망갈 길을 열어 주었다.

 

그런가 하면 그는 당대 최고의 명의로써  한국 최초로 간 대량절제 수술에 성공했고, 나라 보다 20여년 앞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창설하여 가난한 이웃들에게 의료혜택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런 의미에서 <바보 의사 장기려>는 수월성과 창의력 면에서도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운 탁월한 인물이다.    

 

그는 평생 이북에 두고 온 사모님을 그리며 혼자 외롭게 지냈다. 육남매 중 둘째 아들 장가용의 손만 잡고 피난길에 올랐는데, 그 아들이 훗날 서울의대 교수로 아버지의 대를 이었다, 손자도 할아버지의 족적을 따라 외과의사가 되었고, 증손자도 현재 외과의 수련의 과정에 있다. 손자 역시 국내외 그늘진 곳을 찾아 의료봉사에 앞장서며 <장기려 정신>을 이어가고 있으니, 사랑과 봉사, 헌신과 나눔이 이 집안의 유전자가 아닌지.  

 

장기려 선생은 언제나 자신에 앞서 다른 이를 배려했고, 일생 어떠한 특혜도 거부했다. 정원식 총리의 주선으로 이북의 사모님을 뵐 기회가 주어졌으나, 모든 이산가족이 함께 가족상봉을 할 수 있을 때 까지 기다리겠노라며 끝내 고사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노년의 사모님 모습을 담은 사진이라도 전해 받았는데, 다른 이들은 그렇지도 못하지 않느냐고 술회했다. 세속적으로 따지자면, 그는 이처럼 누구도 못 말릴 천하의 ‘바보’였다.

 

어제 시사회에서 노인 목사님 한분이 옛날 평양 교회에서 젊은 장 박사님이 사모님과 듀엣으로 찬송가를 부르시던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또 장 선생이 북한에 두고 온 사모님을 그리는 애절한 글도 소개되었다. 그에 관한 모든 사연은 한결같이 우리의 심금을 울리면서 어찌 그리 아름답고, 슬프고, 또 안타까울까.

 

나는 생전에 장 박사님을 한 번도 뵙지 못했다. 그러나 젊어서부터 멀리서 그를 흠모하며, <성자(聖者) 장기려>와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것을 행복하게 생각했다. 1995년 12월 21일 내가 교육부장관이 되었는데, 그 나흘 후 성탄절 날  장 박사님이 소천하셨다. 나는 빈소를 찾으면서, 예수님이 자신이 태어난 날을 간택해서 이 분을 부르셨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많은 특강과 강의에서 장기려 선생을 언급했다. 그러나 비교적 짧게, 그리고 담담하게 애기하려고 애썼다 그 분 말씀을 시작하면, 금방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울컥해져서 길게 이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를 생각하면, 늘 가슴이 벅차지만,  언제나 부끄럽고 죄스럽다.

 

장기려, 그 분은 우리 시대가 나누어 짊어져야 할 갖가지 무겁고 힘겨운 짐들을 홀로 외롭게 지시고 험난한 비탈길을 오르셨던 분이다. 우리가 이런 의인(義人), 현자(賢者)를 또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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