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나는 이맘때면 기분이 무척 좋아진다. 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유세하는 것 같지만 한 여름 폭염 속에서 나이든 사람이 농사일을 하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닌데, 이제 그 긴 터널의 끝이 보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난 두 해 동안 여름 내내 수시로 찾아드는 허리통증에 시달렸는데, 그래도  올해는 훨씬 견딜만한 수준에서  여름 레이스를 완주하게 되어 더욱 기쁘다. 전에 대학에 있을 때는 연구실 창문 밖에서 매미가 낮게 나르며 긴 울음을 이어가면 가을 개학이 멀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런데 시골 살면서 가을이 다가 오는 것은 아침, 저녁, 눈으로, 귀로, 그리고 냄새로, 오관을 다 동원해 온몸으로 느낀다.

 

                             II.

며칠 전 부터 주위의 풍정이 확연히 달라졌다. 무엇보다 그 색깔이 달라져서, 하늘, 산과 들판, 그리고 가까운 바다에 서늘한 가을빛이 감돈다. 아직 한낮의 땡볕이 따갑지만, 주위를 돌아보면 이미 여름이 아니다. 하루가 다르게 하늘이 드높게 올라가고, 그 청명한 빛이 가슴까지 서늘하게, 또 가득 차게 만든다. 벼가 빠르게 익어 들녘이 점차 황금색으로 물드는가 하면, 얼마 전 까지 사람들로 북적이던 바닷가에는 인적이 끊겨 처연한 느낌마저 든다. 집집마다 앞, 뒤뜰에서 빨간 고추 말리기에 바쁘고, 추석이 가까워 오면서 대추가 붉은 색을 띠우며 빠르게 여문다. 곧 가을밤을 정겹게 만드는 귀뚜라미 울음소리의 향연이 펼쳐질 것이다.

 

시골에 살면서, 좋은 것 중에 하나는 매일 매일 ‘민낯’의 자연을 경험하는 것이다. 서울에 살 때는 태풍, 홍수, 폭설 등을 언제나 남의 얘기처럼 뉴스를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번개, 벼락, 천둥, 그리고 '마른 장마'를 직접 몸으로 가까이  감지하며, 계절의 흐름을 시시각각 체감하며 산다. '더욱이 농사를 짓자면, 자연의 위력과 신비, 그리고 그 배품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게 된다. 도시 사람은 사람의 무리 속에 파묻혀, 또 그들과의 어울림 속에서 사는 <사회적 인간>이다. 그들에게 자연은 저만치 떨어져 있는 관찰의 대상이자 주변적 현상이다. 하지만 시골 사람에게는 자연과의 교섭이 그의 일상적 삶의 과정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자연적 인간>이다. 그래서 내가 특히 여름과 겨울 새벽에 컴퓨터를 켜면, 가장 먼저 열어보는 것이 일기예보이다.

 

                                III.

신기한 것은 가을이 가까우면 나는 가을 특유의 냄새를 맡는다. 말이나 글로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한 느낌인데 여름과는 확연히 다른 냄새를 온몸으로 느낀다. 여름 냄새는 땀내 나는 강열한 인간 냄새였는데, 내 후각에 스며드는 가을 냄새는 어딘가 탈속(脫俗)한 듯, 영적이고 종교적이다. 거기에는 ‘경건’, ‘명상’, ‘성찰’ , '구도'(求道)를 연상시키는 깊숙하고, 그윽한 영성의 세계가 깃들어 있다. 호젓한 산사(山寺)에 가까이 다가간 느낌이다.

 

그러나 이러한 느낌은 나만의 것이 아닌 게 분명하다. 세계인이 즐겨 애송하는 가을시의 대표작, 마리아 라이너 릴케의 <가을날>도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태양 시계 위에 던져 주시고,

들판에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로 시작하지 않는가.

 

그런데 가을시 중에서 내 심금을 가장 울리는 시는 역시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이다. 나는 특히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라는 대목에 이르면, 그 절절한 염원에 온통 가슴이 저려온다. 압권(壓卷)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이는 것이 아닐까.

 

9월 첫날에 그의 시를 여기 옮겨 본다.

 

.

가을의 기도

 

                                                              김현승(金顯承)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時間)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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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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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9.04 01:59 Address Modify/Delete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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