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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어느 불자의 보시(布施) 이야기

2015. 8. 1. by 현강

                 I,

 

언론계 출신인 내 가까운 친구 S는 독실한 불자(佛者)다. 천주교 신자인 나도 그를 따라 이곳저곳 전국의 사찰을 자주 찾는다, 고즈넉한 산사의 법당에서 나는 서양 작은 마을의 오래된 옛 성당이나 공소를 찾았을 때와 흡사한 느낌을 갖을 때가 많다. 아래 글은 오래 전에 S로 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인상적으로 뇌리에 남아 그에게 당시의 상황을 다시 물어  여기 옮긴다. II의 화자(話者)는 S다,

 

                         II.

1993년 11월, 한국 불교계의 큰 별 성철스님이 입적하셨다. TV를 통해 성철스님의 다비식을 지켜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그의 다섯 상좌 중 한 분이 눈에 익어, 자세히 살펴보니 TV화면에 등장한 W 스님은 나와 중학교 동기동창으로 재학시설 무척 가깝게 지냈던 죽마고우 K가 아닌가. W 스님이 “면벽좌선 10년”으로 유명한 선승으로 해인사 선원장을 지냈다는 것은 한참 후에 알게 되었다. 그가 절에 들어간 이후 외부와의 접촉을 일체 끊고 오직 수행에만 전념했기에 그동안 수소문을 해도 행방이 묘연했던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스님을 만나보고 싶어졌다.

 

그해 12월 어느 날 나는 집사람의 해인사 참배 길에 대신 안부를 전하고 가까운 시일 안에 뵐 수 있을지 물었다. 그로부터 일주일후쯤 마침 상경할 일이 있으니 그때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1993년 12월 중순 여의도에서 저녁을 함께하며 40년만의 해후를 즐겼다. 그는 가볍게 술 한잔을 나눌 만큼 소탈했고 정다움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시간가는 줄도 모른 채 정담을 나누었다. 모처럼의 짧은 만남이 무척 아쉬웠다.

 

마침 이날은 월급날이라 내 속 주머니에는 두툼한 월급봉투가 들어 있었다. 이대로 헤어지기가 섭섭해 수표한장(10만원)을 꺼내 스님의 주머니 속에 불쑥 집어넣어주었다. 스님은 “무슨 돈을 내게 주느냐, 기자가 웬 돈이냐“고 극구 사양했지만 나는 ”모처럼 서울에 왔으니 요즘 잘나가는 책도 사보고 남대문시장도 둘러보고 영화도 한편 관람하고 내려가라“고 권했다.

나는 절에 다니면서 여러 스님들과 교류했다. 나는 평소 스님이라고 산속에만 묻혀 살 것이 아니라 세상과 자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 심정으로 스님에게 감히(?) 용돈을 드린 것 이다.

 

그날 밤 그렇게 스님과 작별했다. 밤늦은 시간 귀가해 집사람에게 W 스님과 만난 얘기를 나누고 월급봉투를 내놓았다. 봉투를 열어본 집사람이 큰돈 한 장이 빈다는 것이었다. 나는 월급봉투를 일일이 세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100만 원이 모자란다는 것이었다. 나는 봉투 속에 100만 원 짜리 수표가 들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10만 원 짜리 수표 한 장을 스님께 건낸 것이 전부인데 ....... 나의 불찰이었다. 10만원이 100만 원이 되었으니 참으로 난감했다. 당시로서는 100 만원이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집사람은 내가 월급을 타면 둘째 놈에게 그동안 미뤄왔던 컴퓨터를 사주기로 굳게 약속했던 터라 평소에 안 하던 바가지까지 긁었다. 심지어는 “스님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면 안 될까”라고 까지 말했다.

 

다음날 아침 이른 시간에 스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S기자, 무슨 그런 큰돈을 내게 주었어”. 그러나 나는 “그래 잘못 갔어, 10만원만 제하고 나머지 90만원을 돌려주게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 대신 “유용하게 쓰도록 하게” 라고 짤막하게 속에도 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쏟아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는 게 아닌가.

 

그 날 아침 출근길, 도로확장공사장을 지나게 되었다. 도로 한편에서는 크레인이 대형 H빔을 반대편 도로로 운반하고 있었다. 그런데 크레인 기사의 조작실수로 들어올린 H빔이 공중에서 도로 한가운데로 떨어지면서 내 승용차를 덮쳤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고 나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 119구조대가 도착, 찌그러진 차문을 부수고 어렵사리 나를 끄집어내는 순간 눈을 떴다. 승용차는 악살박살이 났는데, 나는 외상 하나 없이 멀쩡했다. 천운이었다. 지켜봤던 모두가 기적이라고 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부처님 고맙습니다” 를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아웅산 사건 때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후, 꼭 10년 만에 다시 한번 죽음의 골짜기를 벗어난 것이다. 그러면서 어제 저녁 스님에게 의도치 않게 크게  보시(?)한 공덕이 날 살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났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스님은 지병을 앓고 있었는데 늘 주머니가 비어있는 학승이라 누구에게 손 내밀 수가 없어 차일피일 수술을 미루다가 마침 목돈이 생겨 입원 수술을 받게 되었고 그 이후 건강을 회복 했다는 것이다. 그 소식에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나무 관세음보살”이 나왔다.

 

                           III

위의 이야기를 역시 불자인 C형에게 전했다. 불교에 공부가 깊은 C형은 곧장 이를 '부주상(不住相) 보시의 위력'과 ‘인과의 엄중함과 불보살의 가피력’으로 설명했다. 부주상보시란 상(相)애 얽매이지 않는 조건없는 보시를 의미하는데, 그 복덕이 마치 동방 허공을 젤 수 없음과 같이 한량없다고 한다. 또 인간이 겪는 세상만사는 내가 지어 온 업(業, 인과)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인데, S형의 착한 마음, 보시하는 마음이 곧 불보살의 마음이기 때문에 그런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빚어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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