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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슈뢰더>가 주는 교훈

2015. 6. 22. by 현강

                         I.

몇 주 전, TV 채널을 돌리다가 화면에 전 독일 총리 슈뢰더(Gerhard Fritz Kurt Schroeder, 1998-2005 재직)의 얼굴이 나와 급히 채널을 고정시켰다. 그가 방한하여 <제주포럼>이라는 데서 전직 대사하던 분과 대담을 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내가 워낙 과문(寡聞)해서 그가 한국에 온 것도 몰랐는데, 화상으로나마 그를 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아쉽게도 대담 프로그램은 꽤나 진행된 듯 했으나, 나는 눈을 모으고 귀를 곤두 세웠다.

 

슈뢰더는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현존 정치인들 중 하나다. 총리시절(2003년) ‘아젠다 2010’으로 불리는 총체적 국가개혁을 추진하여, 통일후유증으로 경제부진의 늪에 빠져 허덕이던 독일을 다시 일으켜 세워 오늘 유럽 제1국으로 재탄생하게 한 장본인이 바로 그였다. 그의 개혁정치가 소속당인 사민당(SPD)과 자신의 견고한 지지기반인 노동계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이루어 진 것이기에 더 갚진 것이었다. 슈뢰더는 이 인기 없는 구조조정의 정치적 대가로 ‘아젠다 2010’ 추진 2년 만인 2005년 총선에서 패배하고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II.

대담 내내 슈뢰더는 그 특유의 달변과 열정적 모습으로 자신의 생각을 진솔하게, 그리고 명백하게 표현했다. 그 대화에서 두 가지가 특히 내 마음을 움직였다.

하나는 독일통일과 연관해서였다. 슈뢰더는 통일로 가는 여정에서 사민당 총리였던 브란트(Billy Brandt, 1969-1974 총리재직)의 동방정책(Ostpolitik)의 기여를 지나치게  내세우지 않고, 오히려 1990년 독일통일 당시 기민당 출신의 헬무트 콜(Helmut Kohl, 1982-1998 재직) 총리의 기여를 크게 강조하며 매우 높게 평가했다. 주지하듯이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서독의 동독 및 폴란드 등 동유럽 화해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고, 그것은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로 이어져 독일통일의 길목을 닦았던 혁신적 정책이었다. 따라서 사민당 출신의 범용한 정치인이었다면,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브란트의 동방정객을 우선 한껏 치켜세우고, 대신 통일 당시의 소련 및 동구의 붕괴상황 등을 에둘러 강조하며 상대 당 총리인 콜의 통일주도력은 적당한 수준에서 언급하는 데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명불허전(名不虛傳), 슈뢰더는 역시 달랐다. 그는 브란트의 동방정책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고, 독일통일의 대업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콜 수상의 상황판단과 실질적 기여를 힘주어 강조하며, 콜의 업적을 크게 상찬했다. 그의 평가는 객관적이고 정확했다.

 

두 번째는 ‘아젠다 2010’와 연관해서였다. 슈뢰더가 이 역사적 개혁정치를 추진하던 당시 자신의 정치적 결단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구경(口徑)이 큰 '대정치가' (‘statesman')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냈다. 그는 “나라가 당이나 정권 보다 더 중요했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며, 정치인에게 국익이 모든 것에 앞선다는 점을 역설했다. ’아젠다 2010‘의 골자는 경직된 노동시장을 유연화하고, 허리띠를 졸라매는 방향으로 연금과 사회보장제도를 크게 쇄신하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유럽의 병자’로 까지 지칭되던 독일의 경제체질을 바꾸기 위해 불가피한 강력 처방이었으나, 여기에는 엄청난 인내와 희생이 따라야 했고, 무엇보다 이 인기 없는 개혁을 밀어붙이다가는 총선에서 패배하게 될 우려가 무척 컸다. 그러나 슈뢰더는 불퇴전의 결의를 가지고 개혁 추진에 수반하는 모든 위험을 감수했고, 그 결과 총선에서  패배의 쓴잔을 마셨다.

 

                                   III.

1944년생인 슈뢰더는 빈한한 집안 출신으로 14세 때 학교를 중퇴하고, 17세부터 견습생으로 일하면서 야간학교를 다녔다. 이후 괴팅겐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로 일하다가 정계에 입문한 자수성가형 정치인이다. 슈뢰더는 일찍이 1963년 독일 사회민주당(SPD)에 입당한 후, 한 때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하여 과격노선을 걷다가, 1990년 니더작센주 주총리를 거치면서 이념적 편향에서 탈피하여 당내 중도좌파의 지도자로 크게 도약했다. 1998년 총선에서 ‘새로운 중도노선’을 표방하며 통일독일의 주역인 막강 헬무트 콜을 꺾고 총리가 되었고, 2002년 재선에 성공했다.

 

슈뢰더는 그의 인생역정과 총리시절, 그리고 그 이후의 행보를 통해 ‘신념있는 정치인’의 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정파적 이해관계, 눈앞의 단기적 이익, 그리고 달콤한 포퓰리즘의 유혹을 떨치고 국리민복과 공익의 관점에서 긴 호홉, 큰 걸음으로 새로운 정치항로를 개척하여 왔다. 그는 통일독일의 주역 헬무트 콜의 정치적 유산을 바르게 승계하면서 ‘아젠다 2010’을 통하여 결연한 의지로 통일과정이 빚어낸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는 데 헌신했다. 오늘 기민당 메르켈(Angela Merkel, 2005-현재 재직) 총리가 누리고 있는 경제적 호황도 따지고 보면 그 뿌리가 바로 슈뢰더의 개혁정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IV.

역사적으로 볼 때, 독일정치사는 이념정당 간의 치열한 갈등으로 점철된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정치는 적정 수준의 이념 및 정책갈등을 통해 정치의 역동성을 유지하면서, 국가이익의 관점에서 효율적 갈등관리와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체제능력을 크게 신장했다. 연정(聯政)과 대연정도 그 중요한 방편이었다. 이러한 능력은 특히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 더욱 빛이 났다. 그 결과 독일 정치는 정권이 바뀌어도 지난 정권의 성과를 슬기롭게 승계하며 단절 없는 전진을 계속할 수 있었다. 라인강의 경제기적, 동서독 화해, 독일통일, 금융위기 극복, 그리고 최근의 지속적 호황 등이 그 중요한 성과였다.

 

눈앞의 이. 불리에 일희, 일비하지 않고 국가이익을 위해 패배를 불사했던 슈뢰더의 정치적 리더십도  바로 독일 정치의 이러한 체제능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범례이다. 그를 매개로 당파를 초월해서 콜-슈뢰더-메르켈의 정치가 자연스럽게 이어가며 생산적으로 축적되었고, 그 결과 독일은 자타가 공인하는 유럽의 종주국의 지위에 올랐다.

 

                                 V.

그렇다면 한국정치의 오늘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정당 간, 정당 내 계파 간 이념 및 이익갈등은 날이 갈수록 증폭되고 이러한 갈등은 조정되지 못한 채 적체되어, 국리민복에 기여할 수 있는 주요 개혁 정책에 대한 정치.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불임(不妊) 정치’가 일상화된 지 오래다. 그 결과 정권이 바뀔 때 마다, 성과의 승계와 축적 대신 불연속과 단절이 거듭되고, 국민들은 이 과정에서 정치에 대해  희망 보다는 좌절을 경험하게 된다.

최근 악화일로 하는 한국정치의 난맥상을 목도하면서 부디 한국의 여야의 정치인들이 슈뢰더의 ‘큰 정치’를 유익한 학습교본으로 삼아 새롭게 거듭 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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