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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63년만의 해후

2015. 2. 22. by 현강

                                          I.

  지난 8일(일) 오후 불현듯, 아니 조금 엉뚱하게, 초등학교 동창 한명 생각이 떠올랐다. 부산 피난시절 보수산 중턱 피난민 학교 판자집 가교사에서 1년 가까이 함께 공부했던 R이라는 친구였다. 공부 잘하고 매사에 자신만만했던 친구였다. 나의 맞수였던 기억이다. 무척 가까이 지나다가 중학교 들어가면서 헤어졌다. 나는 K 중학교에 그는 S 중학교에 진학했다. 다 60여 년 전 까마득한 이야기다.

 

  그런데 언젠가 그와 중. 고등학교 같이 다녔던 지인에게 R의 소식을 물었더니, 그가 S대 법대를 나와 도미해서 미국 어느 대학에서 사회학 교수가 되었다고 알려주었다. 이후 그 얘기를 머리에 담아두었다가 가까운 S대 사회학 교수에게 혹시 R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R은 현재 미국 동부에 있는 R 대학에 재직 중인데, 몇 년 전 자기 대학에 교환교수로 1년 다녀갔다는 것이었다. 그 얘기 들은 지도 이미 10년도 더 되었다.

왜 다 늦게 그 친구 생각이 났을까, 아마도 옛 향수 때문이겠지  자문자답하면서, 나는 갑자기 그의 근황이 무척 궁금해졌다. 그래서 혹시 하고 구글에 그의 이름을 쳐보았다.

 

  의외로 구글에는 그에 관해 적지 않은 자료가 있었다. 그는 이미 은퇴해서 R 대학 명예교수로 교포사회에서 이런 저런 활동도 하며, 그가 사는 제법 큰 도시에서 시장 고문도 하고 있었다. 사진도 나왔는데, 옛 모습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내친 김에 이것저것 뒤적였더니, S 대학 미주 동창회 옛 간부 명단에서 그의 이메일 주소가 나왔다. 의외의 수확이었다. 나는 곧장 그에게 이메일로 아래의 글을 보냈다. 세월은 오래 흘렀지만, 분명 나를 기억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R 교수께

 

부산피난 시절 초등학교에 같이 다녔던 안병영이네.

그간 잘 있었지.

만난 지 워낙 오래되었지만 어렸을 적 옛 친구이니 그냥 말을 놓겠네.

 

자네가 R 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친다는 얘기는 전부터 알고 있었네. 오늘 자네 생각이 나서 혹시 하고 구글을 쳐 보았더니 근황도 나오고 이메일 주소도 나와 반가운 생각에 소식을 전하네.

사진을 보니 그래도 옛 모습이 많이 남아 있었네. 자네가 워낙 공부도 잘 했고 어른스러웠지. 자네 부산집에 놀러갔던 생각도 나네.

 

어쩌다가 우리가 다 교수가 되었고, 이제 70대 중반에 들어섰네.

나는 연세대를 퇴직하고 , 이곳 속초/고성에 와서 벌써 8년 째 살고 있네. 조그만 농사를 짓고, 겨울에는 글을 쓰며 편안히 지내네.

한번 소식 전해 주기 바라네. 언제 한국에 오면 한번 만나세.

 

부디 건강하고, 좋은 일 많기를 비네.

 

                               까마득한  옛 친구 병영이가

 

  글 쓸 때는 가슴은 벅찼는데, 감성의 물기가 빠진 꽤나 밋밋한 글이 되어버렸다.

 

                                        II.

 

     그런데 참 세상은 빨랐다. 다음 날(9일) 나는  R로 부터 아래와 같은 이메일 답신을 받았다. 수신자 이름을 앞세우지 않고 그대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그의 글투에서 씩씩하고 단도직입적인 옛날 R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났다.

 

지난 토/일요일 (7-8일)에 내 처남과 같이 평창에 들려 왔는데, 아쉽기 그지없네..

지금 서울에 와있으나 15일에는 돌아가야 할 예정인데, 어떻게라도 한번 만나보고 싶으이...  우선 나의 휴대전화번호부터 알리고 ... 010-xxxx-xxxx. 

 

철없던 시절을 되돌려 볼 때마다 떠오른 이름, 준수한 얼굴... 또 정부일 한 것도 알고 있었고 몇 차례 신문기고도 보았지...  옛적에도 언제나 나에게 무엇이나 가르쳐 주었던 안병영... 

벌써 내가 연락을 했어야 할 것을 .... 전화 한통 주시게..  얼굴은 나중에 보더라도, 목소리라도 ... 기다리고 있을께

 

  나는 곧장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신기하게도 우리는 전혀 격의가 없었다. 그냥 한동안 뜸하다가 얼마만에 통화하는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60여년의 시간의 간격을 한 숨에 뛰어넘는 느낌이었다. 내가 내일 고려대학교에서 열리는 심포지움 참석차 서울에 왔다고 얘기하니 그는 당장이라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데 일정조정이 여의치 않았다. 내가 심포지움 일정 때문에 내일은 온 종일 고려대학교에 머물러야 하고 모래 아침에는 불가피하게 고성으로 되돌아가야 할 형편이었고, 그도 다음날 피치 못할 선약이 있었다. 아쉽기 짝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그냥 두 사람 간에 인연이 다시 엮어진 것으로 만족하고 다음에 만나기로 조율했다.

 

  R은 전화를 끊으면서, "병영아! 그런데 어떻게 너는 목소리도 옛날 그대로냐"라며 여운을 남겼다.  나는 혼자 생각했다. 그가 내 목소리를 기억하다니. 그냥 그럴싸한 느낌이겠지. 그렇다면 그게 음조(音調)일까, 아니면 음색(音色)일까.

 

 

                                      II.

 

 10일 아침 10시 고려대학교 경영관에서 예정대로 동아일보와 고려대학교가 공동주최하는 <21세기 미래한국>에 관한 네번 째 심포지움이 열렸다. 주최측 인사말씀에 이어 내가 기조강연을 했다. 그런데 강연 도중 청중석을 살펴보니, 저 뒤편에 낯익은 백발의 노신사 한 사람이 빙그레 웃으며 나를 바라 보고있는 게 아닌가. 한 눈에 R임을 직감했다. 구글 사진에서 이미 얼굴을 익혔으나, 멀리 보아도 그는 내 추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R의 모습 그대로였다. 머리는 은빛이었으나 얼굴에는 아직도 젊은 기운이 역동하고 있었다.

“자식, 아직 멀쩡하네” 혼자 속으로 생각했다. 얘기를 강연을 하면서도 자꾸 눈길이 그에게 쏠렸다. 그러면서 추운날씨에 선약에도 불구하고, 행사장까지 찾아 준 그의 우정이 무척 고마웠다.

                               

 

  강연이 끝나자, 나는 곧장 그에게 달려가 손을 맞잡았다. 실로 63년만에 극적인 해후였다. 그런데 심포지움 다음 순번 논문발표가 곧바로 이어져 나는 내 자리로 돌아가야 했기에, 급히 몇 마디 정담을 나누고 작별인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무척이나 아쉬웠다. 그러면서 나는 그가 내 머리에 문뜩 떠 오른 후, 만 이틀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이루어진 이 번개불 만남이 정말 한 편의 드라마 같다는 생각을 했다.

 

 

14일 밤 R이 다음날 미국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내게 고성으로 전화를 했다. 우리는 이미 빛바랜 옛날 사진처럼 퇴색해 아득한 기억을 하나하나 더듬으며, 어린 시절 이야기를 길게 나눴다.

 

 내가 그에게 물었다.

 “ 너 그때 내게 집안 심부름으로 혼자 기차타고 대전 갔다 왔다고 큰 소리를 쳤는데, 이제 이실직고해라. 그거 ‘뻥이었지’ . 전쟁 통에 그게 말이 되니 ”

 

  그러나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때 그래서, 너 많이 쫄았구나”

 

   70대 중반의 노동(老童)들이 실로 이런 유치찬란한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내며 키득키득 웃었다. 우리는 세월도, 나이도 잊은 채, 동심으로 돌아가,  60여 년 저편 길고 모진 세월의 계곡을 너머 부산 <국제시장>근처에서 노니며, 정처 없이 시간여행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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