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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해방, 그리고 70년

2015. 8. 15. by 현강

                            

                                       I.

신기하게도 내 뇌리에 각인된 내 생애의 첫 기억이 바로 1945년 8월 15일 해방되던 날 서울 거리의 역동적 모습이다. 1941년 9월생이니 그 때가 만으로 네 살 되기 얼마 전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때지어 돈암동 전찻길 쪽으로 몰려가는 극적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된다. 파도처럼 밀려가는 사람들의 물결, 그리고 거기서 분출하는 환희와 열광의 도가니가 어린 나에게 꽤나 충격적으로 감지되었던 것 같다. 앞뒤 없이 그 장면만 오롯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훗날 내가 엘리아스 카네티의 <군중과 권력>을 읽으면서, 내 뇌리에 불현듯 떠오른 것이 바로 그날 군중의 모습이었다.

 

나는 내 눈에 비쳐진 생애 첫 기억이 해방, 바로 그 날이라는 사실에 얼마간 의미를 두고 싶었다. 그래서 혼자 지각이랄까, 의식의 차원에서 내가 진정한 ‘해방둥이’라고 늘 생각했다. 그 때부터 내가 제 정신으로 생각하며 세상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 후, 세월이 유수처럼 흘러  70년이 지났다.

 

돌아보면 지난 70년은 실로 격변의 시간이었다. 해방과 분단, 독재와 민주, 전쟁과 평화, 전통과 초현대, 절대빈곤과 풍요, 향리문화와 세계화를 두루 경험했다. 많은 이가 한국의 오늘의 모습을 ‘기적’이라고 찬탄한다. 옳은 얘기다. 그러나 그 고단한 행로의 뒤안길에서 우리가 수없이 겪었던 ‘절망'과 ‘분노’, ‘‘한숨'과 '눈물’, 그리고 가슴에 깊숙이 맺힌 ‘한’을 오늘의 젊은 세대가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 70년의 시간은 많은 이에게 ‘희망’의 푯대를 향한 승리의 행군이기 보다, 꾸역꾸역 살아 온 모진 인생, 돌아보기조차 진저리나는 숨 가쁜 세월이었던 것도 함께 기억해야 될 것이다.

 

                                       II.

나는 세는 나이로 5세 때 해방을 맞았고, 10세에 6.25, 20세에 4.19를 온몸으로 겪으며 청년기로 접어들었다. 이후 청, 장년기에 한국 역사의 가장 역동적인 시간인 산업화와 민주화의 고된 여정을 동행했고, 학계와 관계를 거쳐, 이제 노년에 들어 외진 시골에 와서 ‘인생 3모작’을 실험하고 있다. 70년 세월 동안, 오스트리아에 5년, 독일에 1년, 미국에 1년, 캐나다에 1년 모두 8년을, 띠엄 띠엄  여러 나라에서 살며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익혔다..

 

내 평생 직업이 학자, 그것도 사회현상을 공부하는 사회과학자라는 것을 고려하면, 시(時), 공(空)의 차원에서 한 생애에 이처럼 격변하는, 미증유의 극적인 세월을 몸소 체험하고 다양한 나라에서 해외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인생 3모작을 실험할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내 공부의 맥락에서, 엄청난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정치경제학자들은 사람의 의식을 가장 크게 뒤흔들어 놓은 것이 전쟁과 경제공황이라고 한다. 그런데  나는 지난 70년 동안 그것들을 포함하여 그 보다 몇 겹의 다양하고,  역동적인, 그리고 복합적이고, 다차원적인 사회변화에 접하고, 이를  살아있는 학습자료로 삼아,  이론과 실천의 세계에 종사했다. 그리고 이제 저만치 떨어진 변방에서, 자연의 품속에서 그에 기대어,  빈마음으로 큰 세상을 내다 보고 있다. 사회과학자로서 넘치는 행운이다. 

 

                                       III. 

따지고 보면 고되고 신산한 세월이었지만, 70년 간의  삶의 여정이 내게는 최상의 공부거리였다. 그런데, 그 좋은 학습자료를  제대로 요리할 줄 몰라 내  안목과 통찰력이 여전히 보잘 것 없고, 사고와 학문의 깊이와 폭도 지극히 얕고 협소하다.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또한  내 능력의 한계  때문이니 이제와서 무엇을 탓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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