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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아름다운 청년이군!

2014. 6. 9. by 현강

                                 I.

   대학 교단에 30 여년 서다보니 이런 저런 제자들과 얽힌 일화가 많다. 거기에도 어쩔 수 없이 인간의 희노애락과 삶의 명암이 얽혀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시간과 더불어 미화되어 아름다운 추억으로 뇌리에 남아있다. 아래 소개하는 일화는 오래전 내 첫 번째 장관하던 때에서 시작해서 이후의 교수시절, 그리고 오늘까지 이어지는 긴 드라마 이다. 이야기가 길어 독자들이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인데, 나에게는 인연(因緣)이라는 개념을 생각하게 하는 매우 아름답고, 소중한 삶의 체험이다.

 

                              

                                 II.

  내가 교육부장관에 취임한지 두어 달 지난 1996년 초, 나는 MBC TV의 “어린이에게 새 생명을”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소아암, 백혈병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기 위한 일종의 ‘디너 쇼’ 였는데, 투병 중의 어린이들과 더불어 유명 연예인, 정치가, 사회인사 등이 함께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행사 도중 나는 바로 옆에 앉았던 까까머리, 하얀 얼굴, 가녀린 몸매의 소년과 얘기를 나눴다. 얼핏 10살 미만으로 보였는데 나이를 물어보니 15살이라서 깜짝 놀랐다. 뇌종양으로 수술 후 항암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무척이나 연약해 보여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밝게 웃고, 이야기도 곧잘 했다. 프로가 끝날 무렵, 나는 이경용이라는 이름의 그 꼬마에게서 전화번호와 주소를 받았다.

 

  그 날 이후, 경용이의 핏기 없는 해맑은 얼굴이 자주 떠올랐다. 눈에 밟힌다는 얘기가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그래서 이따금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걸 때 마다, ‘혹 그의 병세가 악화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에 가슴이 조였다. 그러나 경용이는 언제나 반갑게 전화를 받으며, 낭랑한 목소리로 “괜찮아요, 나아지고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경용이 엄마와도 대화를 나눴다. 다행히 조금씩 차도가 있다는 말씀이셨다.

 

 

                                     III.

   이후 나는 장관을 그만두고 대학으로 돌아왔다. 1998년 9월 학기 학부 강의는 1학년 <한국정부론>이었다. 수강학생이 100명이 훨씬 넘어 대형 강의실에서 마이크로 강의를 해야 했다. 그래서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누가 한 학기 동안 마이크를 책임져 주어야 하는데, 어디 자원병 없나”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내 얘기가 떨어지기 무섭게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들며, “제가 맡겠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런데 실제로 강의 마이크를 책임진다는 일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강의시간에 앞서 매번 대학 사무실에서 마이크를 받아와 강의에 차질이 없게 장치를 해야 하고, 강의가 끝나면 마이크를 사무실에 되돌려 주어야 하기 때문에 여간 부지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원강이라는 이름의 사회과학계열 1학년 학생은 무척 세심하게 이 일을 성실히 수행했다. 강의 탁자위에 마이크는 언제나 볼륨이 제대로 조율이 되어 있었고, 강의 도중 어쩌다 마이크에서 잡음이 들리거나 문제가 생기면면 부리나케 뛰어 와서 적절히 손을 보았다. 완벽한 ‘기계치’인 내게 없어선 안 될 존재였다.

  그 학기 강의를 하면서 나는 이 친구가 이렇게 고생을 했는데, 혹시 성적이라도 나쁘면 미안해 어쩔까하는 걱정을 자주 했다. 나는 언제나 이름을 가리고 채점을 하기 때문에, 점수에 사적 감정이 개입될 수 없고, 혹 그것이 가능하더라도 마이크 수고를 점수에 가산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이원강 군의 한국정부론 점수는 당당히 A학점이었다.

그 학기 이후 이원강군은 눈에 띠지 않았다. 1학년을 마치고 군에 갔으려니 생각을 했다.

 

  그리고 두 해가 흘렀다. 2001년 8월, 여름 방학 때라 가끔 연구실을 걸렀다. 그 날도 하루를 쉬고 다음날 연구실을 나갔다가 대학 사무실에 들렸더니, 여직원이

  “그러잖아도 연락을 드리려했어요. 어제 학부형이라는 아주머니 한 분이 어린 자제와 함께 오셔서 케이크를 놓고 가셨어요”라며, 내게 조그만 쪽지를 건넸다. 거기에는 전화번호와 함께 <이원강 엄마>라고 쓰여 있었다. 마이크 수고를 했던 이원강 군이 떠올랐다. 원강이 어머님이 웨 나를 찾아 오셨을까 무척이나 의아해 하면서, 곧바로 전화 다이얼을 돌렸다.

  그런데 웬걸 전화를 받는 쪽 여자 분 목소리가 무척 귀에 익었다. 의아했다. 그래서 내가 그녀에게 원강이 어머님이냐 확인을 하자, 저쪽에서 “ 네, 맞아요. 교수님, 경용이가 병원에 왔다가 꼭 선생님 뵙겠다고 해서 찾아뵙던 거에요”라는 게 아닌가.

  나는 잠시 혼란스러워져서 머뭇거렸다. 그리고는 “아니 그럼 이원강 군이 경용이 형이란 말씀이세요”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저 쪽에서 “ 그럼 교수님 아직까지 원강이가 경용이 형인 것을 모르셨었어요”라며 되묻는 게 아닌가. 나는 너무 놀라 “세상에 이런 일이,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 거짓말 같은 인연이네요”라고 대답했다.

 

 

                                III.

그 해 10월, 이원강 군이 제대를 하고 내 연구실을 찾았다. 그리고 아래와 같이 그 간의 내력을 이야기 했다.

 

  원강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그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동생 경용이가 뇌종양을 앓게 되었다. 계속 생사를 넘나들었다. 가뜩이나 가난한 살림에 동생마저 중병에 걸리니 집안이 말이 아니었다. 세상이 원망스럽고 삶의 의욕도 떨어져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 1,2 등을 다투던 원강이의 성적은 크게 떨어졌다. 그런 가운데, 무엇보다 기득권세계에 대한 불만이 증폭되어 마음속에는 늘 모든 기성권위와 권력과 부를 가진 자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럴 즈음, 병원에 입원 중이던 경용이가 “어린이에게 새 생명을”에 출연했다. 경용이가 그곳에 다녀 온 후, “교육부 장관님이 전화하셨어”라고 말할 때도, 원강이는 “흥, 인사치례로 한번 전화 한 거야. 분명 또 연락하지 않을 거야”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안 장관이 가끔 연락을 하여 경용이를 위로하고 크리스마스 때는 작은 선물을 보내자, 마음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시의 생각을 원강이는 이렇게 표현했다.

 

  “대한민국의 명문대 교수이자, 장관까지 하는 사람이 왜 어쩌다 스치듯 만난 죽어가는 아이에게 이렇게 따듯한 관심을 보일까? 이 나라의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사람들은 다들 자기들 잘 먹고 잘사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줄 알았는데, 다 그런 것은 아닌가 보다”

  “제게 교수님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였어요. 교수님을 보면서 왠지 대한민국에 희망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나도 공직자의 길을 걸으면 어떨까. 공직자가 되어 대한민국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으면 보람된 일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샘솟았어요. ”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새 꿈이 피어오르면서, 인생의 새로운 이정표가 그려지는 듯 했다. 칠흑 같이 어둡게만 느껴졌던 세상도 다소 밝게 보이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원강이는 마음을 단단히 다잡고 다시 공부에 매진했다. 무엇보다 경용이의 병세가 호전되어 회생 가능성이 높아 진 것도 그가 생각을 바꾸는데 크게 작용을 했다. 성적은 다시 가파르게 올랐고, 수능시험도 곧장 치렀다. 지망대학과 학과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를 고려하던 중, 자신의 마음속에 공직에 대한 열망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면서 기왕이면 아픈 경용이에게 위로가 되었던 안 교수가 재직하는 연세대로 가기로 작정했다. 다행히 원강이는 행정학과가 속해있는 사회과학계열 98학번으로 합격했다.

 

  부모님과 경용이가 안 교수를 찾아가 꼭 인사를 드리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교수 앞이 어려웠고, 개인적으로 인사를 드리는 것이 민망한 어린 20살이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1학년 2학기에 안 교수 강의를 신청했다. 그 첫 시간에 안 교수가 마이크 책임 질 학생을 찾기에 이게 기회다 싶어 손을 번쩍 들어 자원을 했다. 그렇게라도 자신이 마음에 품었던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러자 안 교수는, 만면에 웃음을 띠우며,

   “아름다운 청년이군” 이라고 화답을 했다. 그 말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한창 1학년 때라 노는데 정신이 없었으나, 안 교수 마이크 심부름은 성실히 했고, 안 교수 과목만은 열심히 공부했다. 그래서 성적이 인색하기로 이름난 안 교수 과목에서 A 학점을 따서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이듬해 4월 원강이는 군에 입대했다. 군대에 가기 전에 안 교수를 찾아 자신이 경용이 형이라는 것을 밝히려 했으나, 끝내 부끄러워 그러지 못했다.

 

 

                                          IV.

   이원강 군은 이후 3학년 때 내 과목을 하나 더 들었다. 그 때는 강의 첫 시간에 내가 아예 그를 똑바로 처다 보며, “그럼 누가 마이크 심부름을 하지”라고 물었다. 원강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제가 맡겠습니다”라고 크게 대답했다. 나는 속으로 “뭔지 짜고 치는 고스톱 같네”라고 생각하며 웃었다.

 

  이후 이원강 군은 2005년 12월에 행정고시 일반행정 서울시직열에 당당히 합격했다. ‘고시계’에 합격수기를 쓰면서 나와의 인연도 언급했다. 졸업까지는 아직 한 학기가 남았기 때문에, 그는 연수에 들어가지 않고 학기 내내 낮에는 강의를 듣고, 저녁이면 신림동 고시촌 학원에서 ‘행정학’을 가르쳤다. 인기가 드높아 수강생이 미어진다는 소문을 들었다. 어려운 집안 경제에 보탬이 되기 위해 불가피하다는 얘기도 함께 들었다.

 

   그동안, 원강이 동생 경용이는 오랜 투병 끝에 뇌종양을 극복했다. 아직 호르몬 치료 등을 받고 있으나 이미 완쾌됐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는 아동 암병동에서 함께 암과 싸우던 어린 환우 20명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 힘든 가운데 경용이는 그간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공인중개사 자격시험도 합격해서 생활전선에서 열심히 뛰고 있다. 씩씩하고 사내다운 형과 달리, 30이 넘었는데도 경용이는 아직도 미소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들 형제들과의 인연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이원강 군은 2008년에 같은 해 행정고시 재경직에 합격한 서울대 경영학과 출신의 재원과 결혼했고, 내가 주례를 섰다. 줄곧 서울시청에 근무하면서, 2년간 미국에 유학, 석사를 취득했고, 그동안 두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시청에서도 유능한 중견 공무원으로 정평이 나있다. 그는 국세청에 근무하는 아내와 함께 공직자로서의 삶에 보람을 느끼며 열심히 살고 있다.

   며칠 전 경용이와도 통화를 했다. “건강해요, 교수님 아무 걱정 마세요”. 경용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맑고 밝았다.

 

 

                                           V.

  이원강, 이경용 형제는 한 때 어둠 속을 해매였으나,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의 빛을 쫓아 힘차게 앞날을 개척한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청년들’이다. 이들 우애깊은 형제들의 오늘의 모습은 너무나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은 보잘 것 없는데, 그들은 그 작은 것을 크게 받아 들였고, 아름다운 성취를 통하여 내게 너무 큰 기쁨을 선사했다. 내가 공직, 교직 생활 속에서 그들을 만난 것은 행운이자,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 이 글을 쓰면서, 내 편의대로 기억을 재구성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래서 이원강 군에게 글을 미리 보내

    감수(監修)(?)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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