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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다시 계절을 느끼며

2014. 4. 29. by 현강

                               I

   1990년 8월 말, 나는 연세대학교 교무처장직을 그만두면서 인수인계를 마치고 본관건물을 나왔다. 높아 가는 하늘을 바라보고 “아 여름이 가고 있구나”라고 영탄(詠歎)하듯 마음으로 읊조렸다. 그러면서 지난 2년 간, 격무에 시달려 한 번도 제대로 계절을 느껴보지 못했음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이후 내가 두 번 장관직을 끝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퇴임식을 마치고 종합청사를 나오면서 제일 처음 온 몸으로 느낀 것이 계절의 향기였다. 한동안 잊었던, 아니 잃어 버렸던 계절을 되찾는 기분이었다.

 

   사람이 마음에 빈 구석이 없으면, 춥고 더운 것은 느껴도 진정으로 계절과 만나지 못한다. 따라서 계절을 느낀다는 것은, 인간의 삶이 여유를 되찾아 자연과 함께 숨 쉬며 본연의 궤도에 진입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활 속에서 계절을 의식한다는 것은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II.

  7년째 속초/고성에 살면서, 가장 기쁜 일은 매일 매일 계절을 느끼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큰 도시에서는 아름다운 계절이 도시인의 바쁜 일정 속에 묻히고, 높은 빌딩 숲에 가리고, 에어콘 바람에 날라 간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계절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에 그대로 녹아있다. 더욱이 농부들은,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가 노래하듯, 절기에 따라 농사일에 힘써야 하니 일 년 내내 계절과 동행하지 않을 수 없다. 농촌에서는 사람을 만나는 일 보다 자연과 만나는 일이 잦다. 그런데 그 자연은 바로 계절 속에 살아있는 자연이다. 눈앞에 병풍처럼 펼쳐지는 설악의 연봉도 철따라 옷을 갈아입기 때문에, 계절마다 다른 모습이다. 깊은 겨울,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첫사랑의 연모(戀慕)를 닮았다. 뒤뜰에 꽃봉오리가 아침에 바르르 떨었는가 싶었는데, 저녁이면 벌써 꽃망울이 터진다. 이렇듯 계절을 시시각각 만나며, 자연의 미세한 변화를 일상 속에서 오관으로 느끼고, 마음에 새길 수 있다는 것이 시골생활의 환희이자 신비다.

 

                              II.

  그런데 나는 내 처가 크게 아파 작년 10월 하순부터 몇 달 동안 서울에 머물면서. 다시 계절과 멀어졌다. 때가 겨울이기도 했지만, 대도시에서 마음이 편치 못하니 마치 내가 몇 달 동안 검회색 장막 속에 둘러싸여 덧없이 표류하는 느낌이었다. 다행이 내 처 건강이 얼마간 회복되어 한 달 전 다시 시골로 돌아왔다. 4월의 따스한 봄볕아래 흙을 고르고, 비료를 주고, 씨앗을 뿌렸다. 일하다가 가끔 허리를 펴고, 천하명품 울산바위의 위용을 바라보며, 찬란한 봄을 만끽했다. 정말 사람 사는 것 같이 한 열흘을 보냈다.

 

  그러다가 아차 실수해서 발목을 다쳤다. 별게 아니거니 했는데, 병원에 가니 발목 골절이란다. 기브스를 해서 운신이 어려워졌는데, 앞으로도 한 달은 이렇게 지내야 된단다. 집안에 틀아 박히게 되었으니 계절과 다시 멀어졌다. 엎친데 겹친 격으로 초등학교에서 중, 고, 대학까지 함께 다녔던 절친한 친구가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와의 온갖 추억이 되살아나 주체하기 어려운 감회와 충격 속에 며칠을 보냈다. 그 와중에 ‘세월호’ 참사가 터졌다. 참으로 슬프고, 부끄럽고, 미안하고, 분격한 감정들이 한꺼번에 치솟았다. 겉보기에 그럴듯한 오늘 우리의 모습이 모래위에 쌓아 올린 누각이라고 생각하니 기가 막히고,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런 가운데, 바깥의 찬란한 봄빛이  회색빛으로 변하면서, 다시 계절을 잃은 심경이다.

 

                                       III.

  돌이켜 보면, 4월 초 며칠을 제외하면, 지난 반년 동안 나는 마음의 여유를 잃어 계절을 통째로 잊고, 잃고 살았다. 여름에 일하고, 겨울에 글 쓰는 내 생활 리듬도 완전히 깨져, 지난 반년 동안 글 한줄 제대로 못 썼다. 모든 게 아쉽지만, 그래도 70대 중반 노부부가 그렁저렁 어려운 고비를 함께 넘기고 새 봄을 맞았으니, 보기에 따라 ‘선방(善防)'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오랜 봄 가뭄 끝에 밤새 반가운 비가 내리고 있다. 이제 흐트러진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문밖에 깃들어 있는 계절을 품에 안을 채비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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