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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응답하라 1959

2014. 1. 27. by 현강

                                                       I.

   핸드폰에 문자 메시지 음이 울려, 열어보니 ‘55년전 무전여행팀 재회’ 알림이었다. 모임을 주선하겠다던 S군이 약속장소와 일시, 그리고 참석자 명단을 보낸 것이었다. “아니, 벌써 55년이 지났다니”, “정말 어제 같은데”, 하도 믿기지 않아 헛웃음이 절로 났다. 풋풋했던 청춘들이 반백년에서 또 다섯 해를 더해 칠십대 중반에 다시 만나는 것이었다.

     ' 응답하라 1959'

                                                    

                                                     II.

   1959년, 7월 대학입학 후 처음 맞는 여름방학 때 일이다. 연세대에 함께 입학한 K고등학교 출신 8명이 강원도 동해안을 일주하는 무전여행을 떠났다. 중고등학교를 같이 다녔고, 대부분 집이 혜화동 근처였기 때문에 모두 개구쟁이 때부터 가까웠던 친구들이었다. 속초-강릉-포항을 거쳐 경주-대구까지 갔다가 서울로 되돌아오는 10여 일 간의 긴 여행을 함께 했다. 명색은 여행경비 없이 떠나는 무전여행이었다. 그런데 워낙 오래된 일이라 그 때 그 때 인상적인 장면들 몇 커트만 기억의 창고에 남았고, 그 것들마저 오랜 흑백사진처럼 빛이 바래 어느 것 하나 그리 분명치 않았다.

 

   여덟 명 중, 한 명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한 명은 미국에 거주하기에, 또 다른 한 명은 몸이 불편해서 참석을 못하고, 나머지 다섯 명만 자리를 같이했다. 그날 함께 만난 다섯 명은 그런대로 개별적으로 가끔 소식을 나누던 친구들이었으나, ‘무전여행’이라는 주제를 달아 모두 함께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우리들은 우선 55년 전 각자의 ‘토막 기억’들을 쏟아놓고, 그것들을 함께 채로 처서 걸러 가며, 당시의 실제 상황을 복원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모두의 기억들이 실로 중구난방이어서 논란을 거쳐 하나하나 정리했다. 말하자면 역사의 재구성 작업이었다. 몇 마디 나누다 보니, 여덟 명이 서울서 함께 떠난 것이 아니라, 사전에 아무런 의론 없이 따로 네 명씩 두 그룹이 떠났는데, 여행 첫날 저녁 속초에서 우연히 만나, 함께 동행 하게 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모두 함께 떠난 줄 알았는데, 정황증거로 보아 그게 사실이었던 듯하다. 다음 여행이 명색만 무전여행이었지, 실제로는 ‘무전여행’과 거리가 멀었다는 데 모두 동의했다. 우리 여정 중 두 곳에 일행의 가까운 친척집이 있어 융숭한 대접을 받았는가 하면, 도중에 친구 집에도 들려 도움을 받았고, 실제로 우리들 각자의 호주머니도 그리 가볍지 않았다는 것을 모두 인정했다. 자주 텐트에서 자며, 밥을 해 먹기는 했으나, 그 과정이 무척 재미있었지, 그리 곤궁하거나 고달프지 않았다는 게 중론이었다. 말하자면 ‘가짜’ 무전여행이었음이 판명되었다

 

  다음 당시에 우리가 겪었던 극적인 일들을 서로의 기억창고에서 끌어내어, 서로 보태고 빼고, 때로는 고쳐가며 한바탕씩 웃었다. 한밤 중 차로 아스라한 낭떨어지 옆길을 따라 평해(현 백암)온천으로 향하던 일, 안인 해수욕장에 천막을 쳤다가 동네 주먹들과 시비가 붙어 일촉즉발에서 제3자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궁지에서 벗어난 일, 붐비는 밤 완행열차에서 겪었던 일 등 함께 체험했던 사람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일화들을 저마다 주워섬기며 유괘하게 웃었다. 망(望) 80의 노인네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반백년 너머 ‘신화처럼 숨을 쉬는’ ‘동해바다’로 되돌아갔으니, 할 얘기, 묵은 사연, 농담거리가 오죽 많겠는가. 저마다 옛 기억을 더듬으며, 목청은 높였다. 그 날만은 우리 모두가 한창 때 싱그러운 20대 청년이 되었다.

 

 

                                                    III.

   얘기도중 U군이 느닷없이 내 얘기를 끄집어냈다. 내가 당시로는 매우 드믄 3대 독자 외아들이였고, 옹골차지 못해  혼자 제 밥도 찾아 먹지 못하는 타입이라 친구들이 언제나 특별이 배려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밤 완행열차를 타서도 자기들은 차간 구석구석 바닥에 웅크리고 자면서도 가까스로 힘들게 내 좌석을 하나 마련해서 따로 앉혔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참 자다 보니, 내가 그 좌석에 없더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내가 보이지 않아 모두 놀라 찾아 나섰더니, 열차와 열차를 잇는 사이 공간으로 옮겨 가서 그곳에서 큰 대자로 자고 있더라는 얘기였다. 아무리 좌석이 비좁아도 친구들이 어렵게 마련해 준 귀한 자리을 버리고, 뭇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에서 다리 뻗고 자고 있으니 그게 어디 될 법이나 하냐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나는 그 기억이 날듯 말듯 분명치 않았다.

   돌이켜 보면, 그 당시 나는 꽤나 얼뜨고 세상물정을 몰라 항상 친구들의 비호를 받았던 것 같다. 대학 초학년 때, 부산에 갈일이 있었는데, 친구 B군이 어린아이 물가에 보내는 기분이라며, 직접 서울역까지 동행해서 차표를 사서 좌석에 앉히고, 그것도 모자라 일일이 주의를 주고, 기차에서 내려갔던 기억이 난다. 외국 유학 갈 때도, 친구마다 저 얼뜬 놈이 여권을 제대로 지니고 목적지에 내릴지 모르겠다고 크게 걱정을 했다. 그날 그 얘기를 들으며, 그 여행 중에도  친구들이 나를 배려하고 극진히 보살폈다는 것을 다시 깨닫고 마음으로 고마웠다.

 

 

                                                  IV.

   그 때 여행 첫날 아침 새벽에 서울을 떠났는데, 진부령 너머 속초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어스름 무렵이었다. 그런데 요즈음은 동서울터미날에서 버스를 타면 2시간 10분이면 속초에 다다른다. 세상은 무척 빨라졌고, 크게 달라졌다. 그 사이 우리들은 파파 할아버지가 되었다. 그리고 나도 삶의 터전을 옮겨 동해바다 근처, 설악산 기슭에 살고 있다. 그날 나는 나의 강원도, 그것도 동해와의 인연이, 마치 미리 점지된 듯,  그렇게 오래 되었다는 것을 다시 절감했다. 헤어지며, 매년 5월 9일에 다시 만나 옛 이야기를 나누자고 약속했다. 혼자 생각했다. 우리가 몇 번이나 함께 더 모일 수 있을까. 아니 내년에는 도시 몇 명이나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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