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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세밑에

2014. 1. 1. by 현강

                          I.

   7년 만에 처음으로 서울에서 저무는 해를 보낸다. 최근 몇 년 새해 첫날이면 으레 집에서 가까운 봉포 앞바다에 나가 막 솟아오르는 앳된 해를 맞았는데, 올 해는 그게 안 되니 꽤나 아쉽다. 그래도 서울에 오니 정초에 가족과 친지를 두루 만날 수 있어 그 점은 좋다.

 

  세밑이 되니 어쩔 수 없이 지난 한 해를 돌아보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마냥 늦장을 부리던 책이 출판되어 오랜 체증이 내려간 느낌이고, 그런대로 건강을 지키며 한 해를 보내니 그것도 다행한 일이다. 내 처의 건강이 아직 시원치 않으나 크게 우려했던 수술 자체는 잘 된 듯 하고, 하루하루 회복 중에 있으니 시간이 가면 쾌차해 질 것이다. 동갑내기인 우리 내외는 똑같이 내일이면 일흔 넷인데, 이 나이에 뭐 그리 완전한 것을 기대할 것인가. 이 정도면 그런대로 B+는 되지 않을까.

 

 

                          II.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우리 세대는 모진 세월을 숨가쁘게 꾸역꾸역 살아왔다. 전형적인 농업사회에서 태어나, 산업사회와 후기 산업사회를 겪었고,  일제와 건국의 소용돌이, 한국동란을 거치며 산업화와 민주화 시대의 주역으로 뛰었다. 그 과정에서 무수한 환희와 좌절, 영욕이 교차했고, 때로는 생사를 넘나드는 힘겹고 아슬아슬했던 절체절명의 순간도 적지 않았다.

 

   얼마 전 고등학교 동창 한 친구의 글을 보니, 고교 3학년 때 자기 반 친구들이 65명이었는데, 그 중 20명 이상이 이미 고인이 되었고, 20명 가까운 동창이 외국에 거주하고 있고, 나머지 20여명이 국내에 생존해 있다고 한다. 나는 그 글을 접하며, 옛 친구들이 이제 이승과 저승, 그리고 외국과 국내에 고르게 포진해 있구나 했다. 이들 한명 한명의 생애를 깊숙이 들여다보면, 아마도 그들 개개인이 하나같이 굴곡진 시대와 시린 세파에 시달리며 실로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냈으리라. 이미 죽어간 친구들은 그들 생의 마지막 순간에 저마다 무엇을 생각했을까. 현재 이국땅에서 병석에 누워있을 친구들은 또 얼마나 외롭고 허전할까. 그렇다면 국내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친구들은 과연 행복할까.  적지 않은 이가 이 세밑에  백팔번뇌의 깊은 계곡 속에서 헤매고 있지 않을까.

 

                                  III.

  인생이 생.노.병.사라는데, 태어나서 이제 살만큼 살았으니, 남은 것은 병(病)과 사(死) 밖에 없을 듯 하다. 다만 병과 사의 틈 사이에서 쥐꼬리 만큼 남은 여생을 얼마나 가치있고, 보람되게, 그리고 가능하면 좀 더 존엄하게 엮어 갈수 있을지, 그것이 남은 숙제가 아닐까 싶다. 개중에는 이 옹색한  삶의 빈틈을 의미있게 크게 키워 인생의 종장(終章)을 아름답게 꾸민 이들도 없지 않은데. 내게도 그런 기회가 주어질 수 있을지.

 

 

* 글을 여기까지 쓰는데 막 라디오에서 <제야의 종>이 울린다. 정녕 또 한 해가 가고 있다. 서른 세 번의 종소리와 더불어  세상에 우리 주변의 온갖 거짓과 위선, 증오와 갈등이 다 사라지고, 우리 모두가 새해에  ‘말갛게 씻은 얼굴 고은 해’ 처럼 청신한 영혼으로 거듭 태어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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