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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지식인과 진영(陣營)

2013. 12. 3. by 현강

                                               I.

    꽤나 늦장을 부리던 필자의 새 책 <왜 오스트리아 모델인가>(문학과 지성사)가 드디어 출간되었다. 내가 오스트리아에 주목한 주요한 이유는, 이 나라의 중도통합형 모델은 지나치게 신자유주의에 치우친 영미의 처방이나, 스웨덴 등 북유럽 여러나라의 진보적 처방보다 양극정치의 여울 속에서 허덕이는 우리에게 더 적실성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중도지향의 <합의와 상생>, <융합과 재창조>로 유럽의 변방국가에서 대표적 강소부국으로 도약한 이 나라의 국가모델이 한국의 정치인, 정책전문가를 비롯해서 언론인, 시민운동가, 그리고 많은 지식인들에게 영감과 성찰을 선사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II.

    언제부터인가, 적어도 1987년 민주화 이후 누가 나에게 내 <이념의 주소>를 물으면, 나는 ‘중도개혁주의자’라고 답하곤 했다. 그러면서 시대가 지나치게 <평등>을 지향하면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과도하게 <자유>에 경도되면 <평등>의 가치를 부각시켰다. 1987년 민주화의 열풍 속에서 평등의 파고가 높을 때 내가 <자유민주주의의 변론>(전예원)을 썼고, 1992년 신자유주의의 격랑이 세계를 휩쓸 때 <자유와 평등의 변증법>(나남) 쓴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가 김영삼 정부에 교육부장관으로 발탁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민주화 지향의 지식인이라는 점 말고는 이념적으로 정권과 잘 맞지 않는다는 말을 많이 했다. 후에 안 얘기지만, 당시 정보기관에서는 내 <좌파적 성향(?)> 때문에 내게 고급정보 제공을 제한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교육부총리로 참여정부에 참여했을 때, 많은 이가 <노무현 코드>와는 너무 거리가 멀다는 평을 했다. 청와대에도 나를 경원시하는 <386>들이 적지 않았다. 당시 교육부 출입기자들이 내게 <코드>가 무엇이냐고 물어 서슴없이 <나는 국민코드입니다>라고 답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지식인은 정치적, 사회적 책임이 막중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자신의 이념적 지향을 밝힐 수는 있으나, 그것이 가져다주는 사회적 파장에 대해 깊이 사고해야 하고, 따라서 가능하면 이념적으로 지나치게 편향된 행동은 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권위주의시대에는 당연히 체제 민주화의 편에 서야 하지만, 민주화 이후, 특히 사회가 어느 정도 성숙하게 되면, 지나치게 편향된 이념적 자세는 삼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지식인이 좌든 우든 공공연히 어느 진영 (陣營)에 속해 진영논리의 창출과 그 확산에 앞장 서는 것은 매우 우려되는 일이다. 한번 교조주의의 늪에 빠져 이념적 폐쇄회로에 갇혀 버리면, 그는 이념의 기수이자 전사이지, 그 때는 이미 그가 비판적 지식인의 원래의 모습, 즉 자유로운 영혼이 아니기 때문이다.

 

 

                                                 III.

    한국정치의 양극화현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실제로 따져 보면, 서구 여러나라에 견주어 볼 때, 여당과 야당의 이념적 거리는 그리 멀지 않고, 정책적 관점도 수렴 가능한 선에 있을 때가 많다. 그런데 현실정치에서는 여야는 이성적 토론보다는 ‘언술적 극단주의’로 흐르고, 상호 소통을 거부하며 대결적 자세를 취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그러다 보니 주요 쟁점마다 여야의 당론이 양극으로 갈라져 타협과 합의 보다는 갈등과 제로섬으로 치닫게 된다. 그 바람에 중도적 성향이 우세한 일반 시민들은 현실적으로 대안을 잃게 된다. 이른바 ‘안철수 현상’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양극화, <진영화> 현상은 정치권에만 두드러진 게 아니다. 언론계, 시민사회, 종교계에도 <진영화>가 깊숙이 진행되었고, 정신적으로 가장 자유로워야할 지식인들마저 많은 이가 어느 진영에 귀속되어, 쟁점이 부각될 때마다, 편향된 <진영의식>을 거침없이 표출한다.

 

    <진영>은 수렁과 같은 것이라서, 거기에 발을 디디면, 한없이 깊숙이 빠져 들어가 좀처럼 헤어나기가 어렵다. 그곳에는 같은 색깔의 언론과 시민단체들이 있고, 열광, 환호하는 <동지>와 <우군>이 있다. 그리고 차가운 이성을 녹여주는 강렬하고, 따듯한 이념의 <품>이 있다. 그 뿐인가 그러다가 그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 정치적 기회도 있다. 허나 거기서 발을 빼는 순간, 그는 그 모든 것을 잃고, 배신자로 낙인찍힌다. 그 때문에 한번 루비콘강을 건너면, 되돌아오기란 생각하기 어렵다.

    진영은 따지고 보면, <적과 동지>의 세계관이다. 흑백논리와 독선이 판치고, 이성을 마비시키는 정신적 폐쇄회로이자 저들만의 차단된 생활세계이다. 따라서 진영에 속한 지식인은 시간과 더불어 점차 진영의 포로가 되어, 진영의 이익에 복무하는 전사가 된다. <수렁에 빠진 지식인>은 이미 지식인이 아니다.

 

 

                                                IV.

    오스트리아는 제1 공화국(1918-1938)에서 정치 엘리트는 물론, 전 국민이 좌, 우, 즉 <붉은 진영>과 <검은 진영>으로 갈라져 치열한 갈등을 빚다가 1934년 급기야 양측이 총칼을 들고 내전을 겪었던 나라다. 당시 양 <진영>에서는 이념적 극단주의자들이 주도했다. 그러나 제2차 대전 후, 좌우의 정치엘리트들이 통절한 반성을 하고 <합의와 상생>을 길을 걸어, 경제발전, 사회평화와 정치안정을 이룩하고 유럽의 대표적 강소부국으로 비약적 발전을 이룩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이 나라 국민이 그들을 철옹성처럼 강고했던 <진영>과 <진영의식>에서 제대로 벗어나 자유인으로서 큰 숨을 쉬며 정치적 이성을 되찾은 것은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V.

    나는 늘 양극화의 여울에서 허덕이는 한국정치가 활로를 찾기 위해서는 중도적 정치공간이 넓어져야 된다고 주장해 왔다. 좌, 우가 중도에서 만나 토론하고 타협하고 합의해야 생산적 정치가 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 이를 위해 지식인들이 <진영>에 귀속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중간에 넓은 공간을 만들어 거기서 무언가 한몫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2003년 인터넷 신문 <업코리아>를 창간했던 것도 바로 이 중도정치의 꿈 때문이었다. 나는 두 번 장관으로 국정에 참여하면서도 결코 그 정권의 친정, 즉 <진영>에는 발을 들여 놓지 않았다. 외롭고, 힘겨웠지만 그게 내 <길> 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내 생각과 행태가 내 젊었을 때의 학습과 체험, 그리고 성찰에서, 즉 그 옛날 (1965-1970) 오스트리아 유학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정년퇴임이 가까워서였다. 그 때부터 나는 오래 잊었던 세월과 그간 멀리했던 나라를 다시 열심히 탐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재작년 작심하고 오스트리아를 방문했다. 70세에 결행한 40일의 공부여행이었다. 내 머리 속에, 그리고 가슴 속에 고이 담겨져 있던 ‘보물단지’를 꺼내 온 세상에 펼쳐 보고 싶어서였다. 이후 2년 여, 늙마에 이 책을 쓰는 일은 고된 작업이었다. 그러나  글을 쓰면서 나는 무척 행복했다. 그게 일생 추구했던 <내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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