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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아침햇살

2013. 8. 31. by 현강

         I.

얼마 전 한 지인이 내게 시골에서 살면서 자연이 주는 혜택 중에 무엇이 가장 좋으냐고 물었다. 나는 곧바로 ‘햇살’이라고 대답했다. 상대방은 조금 의외라는 듯, “햇살이라니, 한 여름 땡볕이 좋다는 말인가”라고 물었다. 나는 “이곳 햇살은 도시의 햇볕과 달라. 투명하고 신비해. 제일 좋기는 아침햇살이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거든”했다.

 

         II.

여기서는 사계절 내내 햇살을 느끼며 산다. 때로는 강렬하고 때로는 미약하지만 대기가 깨끗한 탓에 아무런 여과 없이 위에서 내려 쬐는 햇살은 언제나 맑고, 신선하다. 우리 집 거실 천정이 유리창인 이른바 천창(天窓)인데, 이를 통해 들어오는 밝고 신비한 햇살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오는 은총이나 축복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한 겨울에도 햇살이 거실 깊숙이 찾아와 암울한 계절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말끔히 씻어준다. 늦봄이나 초가을 내가 비원(祕苑)이라 부르는 우리 집 뒤뜰의 평상에 한가로이 앉아 약간의 시원한 바람과 함께 살며시 얼굴에 와 닿는 따사한 햇살을 느낄 때면, “아, 이게 행복이지”하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 살며, 햇살이 모든 생명력의 원천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런데 도시인들은 일상 속에서 그것은 별로 느끼지 않고 사는 게 아닌가. 아니 인위적 환경 속에서 상처받은 햇살은 자연적 조화의 산물인 이곳의 햇살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을까.

 

강렬한 햇빛은 사람을 지치게 만들고, 피부를 손상시켜 도시인들이 금기시하는 게 사실이지만, 사람의 몸은 적정량의 천연의 자연 햇빛을 필요로 한다고 한다. 뼈를 건강하게 하고 면역체계를 강화하는 비타민 D를 합성하기 위해 그러하고, 특히 우울증 치료에 햇빛만큼 좋은 게 없다고 한다. 자살예방에 특효라고 하는데 수긍이 가는 얘기다.

 

 

         III.

햇살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아침햇살이다. 아침 농터에서 일하다가 온몸으로 맞이하는 아침햇살은 정말 아름답고 순수하다. 박명(薄明)이 걷히면서 서서히 온 누리로 퍼져 나가는 아침햇살은 환하게 웃는 간난 아이의 순진무구한 모습을 닮았다. 티 없이 맑고 순결하다. 세상을 정화하는 느낌이다. 그리고 만민에게 우호적이다. 아마도 가난하고 힘겨운 사람들에게 더 힘이 되리라 생각된다. 여름 한낮 시골의 햇볕은 워낙 강렬하다. 그래서 일하러 나갈 때 늘 얼굴에 햇볕 차단제를 바른다. 그러나 아침에는 물론 아무것도 바르지 않는다. 고귀한 아침햇살을 맨 얼굴로 맞이하기 위해서이다. 아침햇살은 자연스럽게 몸속으로 스며들어 사람의 심신을 변화시키는데, 그것을 인위적으로 차단하다니 말이 안 되는 얘기가 아닌가.

 

아침햇살과 연관하여 전에 강원도 교육감을 지낸 분에게 재미있는 얘기를 들은 게 있다. 춘천시 서면 금산리에 박사 마을이 있는데, 이곳에서 많은 박사를 배출해서 유명하다는 것이다. 한승수 국무총리도 이곳 출신이라고 했다. 그런데 유독 이 마을에서 어떻게 수많은 박사를 배출했는지 교육감님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이 마을이 예전에는 살기가 어려워서 많은 동네 부인들이 너나없이 아침이면 장사하러 춘천으로 나갔다는 것이다. 그들은 춘천가는 길목에서 매일 예외 없이 아침햇살을 품에 안았고 그 신성한 기운이 많은 수의 큰 인재를 잉태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럴듯한 얘기라 기억에 남았다.

 

 

         IV.

이번 여름의 폭염은 정말 대단했다. 작렬하는 땡볕 속에 잡초는 더 기승을 부려 농사짓는 사람들은 무척 힘들었다. 한낮에는 일하기 어려워 아침, 저녁에 밭에 나가게 되는데, 저녁 늦은 시간까지 더위는 여전했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일은 8월 중순 폭염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처럼 폭발적 생명력을 자랑하던 잡초도 더 이상 힘을 못 쓰고 잠시 주춤했다는 사실이다. 폭염 속에 사람도 지치고, 산천초목도 시들한 가운데, 농부에게 최대의 공적인 잡초마저 기가 떨어진 것이다. 그 상황이 마치 링 위에서 치열하게 격돌하던 권투선수 두 명이 너무 지쳐 서로 얽혀 붙어 싸우는 시늉만 하며 잠시 쉬는 형국이었다. 묵시적인 휴전이라고나 할까. 자연의 조화가 이렇듯 재미있다.

 

열대야를 보내고도 한 여름의 새벽은 그나마 얼마간 청신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아침햇살은 여전히 아름답고 순수하다. 비록 그것이 한 낮에 이르러 땡볕으로 바뀔지라도 여름날 아침 온 몸으로 느끼는 아침햇살은 나에게 자연과의 합일, 원초적 생명력, 일상 속의 행복감을 일깨운다.

 

요즈음 아침이면 이미 가을을 느낀다. 멀리서 이영훈/이문세의 “가을이 오면 눈부신 아침햇살에 비친, 그대의 미소가 아름더워”가 들릴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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