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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무엇이 좋은 질문인가

2013. 7. 31. by 현강

                             I.

   1964년 서독의 게르스텐마이어(Eugen Gerstenmaier, 1906-1986) 하원의장이 한국을 방문해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게르스텐마이어는 신학자로 히틀러에 항거하여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던 서독의 존경받는 정치인이었다. 의례적인 질의응답이 오갔는데, 갓 대학을 졸업한 듯 앳된 얼굴의 <Korean Times>의 L 기자가 유창한 독일어로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의장님께서 한독 간의 특별한 관계를 말씀하시며 특히 양국 간의 긴밀한 문화교류의 필요성을 강조하셨는데, 서독이 국제 문화협력을 위해 세계 곳곳에 세우고 있는 괴테-인스티튜트(독일문화원)가 아직 한국에는 없다는 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게르스텐마이어 의장은 꽤나 난처한 낯빛으로 깊은 유감을 피력했다. 그리고 가능한 한 빠른 기간 내에 독일문화원을 한국에 설립하도록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는 덧붙여서 “그런데 당신은 어디서 그렇게 좋은 독일어를 배웠습니까?”라고 신기한 낯빛으로 물었다. L기자의 질문은 그날 기자회견의 백미였다.

 

   몇 달 후, L기자는 게르스텐마이어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독일 베를린 대학에 유학을 갔다. 그리고 몇 년 후 마침내 독일문화원이 한국에서 문을 열었다. L기자는 베를린 대학에서 언론학 석사를 마친 후, 다시 건축학으로 전공을 바꿔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한동안 독일에서 활동하다 귀국해서 S 대학에 재직하며 글 잘 쓰는 건축학 교수로 이름을 날렸다.

   L 기자, 훗날 L 교수가 독일에 체제하는 동안 게르스테마이어 의장은 그를 아들처럼 총애하고 알뜰히 보살폈다. 정곡을 찌른 좋은 질문 하나가 맺어 준 아름다운 인연이었다.

 

 

                        II.

   돌이켜 보면, 나는 학창 시절 수업시간에 선생님께 질문을 했던 기억이 별로 없다. 부끄럼을 많이 타는 성격 탓이었던 것 같다. 교수가 된 후에도 학회 연구발표나 학술회의에서 내가 지정 토론자인 경우 외에는 따로 질문을 하지 않는 편이었다. 중뿔나게 나서는 것 같이 보이기 싫어서 스스로 자제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유익하고, 인상적인 질문을 하면 무척 고무되는 느낌을 받았고, 그 사람이 다시 보였다.

  

   스스로 질문을 잘 하지 않으면서, 나는 강의할 때나 연구발표를 할 때, 다른 이가 내게 질문을 하는 것은 무척 반겼고, 내심 고맙게 생각했다. 질문을 통해 내 강의에 대한 이해 정도와 발표에 대한 반응을 가늠할 수 있고, 또 대답하는 과정에서 내 강의나 발표에서 미흡했던 점을 적절하게 보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질문을 통해 자신이 미처 생각지 못했던 점이 깨우쳐지거나 새로운 정보와 영감을 얻을 때도 적지 않다. 간혹 공격적, 도전적 질문에 접하기도 한다. 그럴 때도 그것이 고삐 풀린 거침없는 논박의 길을 열어 주제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고, 역동적인 토론 분위기를 견인할 수 있기 때문에 유의미한 결실을 가져 올 때가 많다. 따라서 질문을 통한 참석자 및 청중과의 격의 없는 지적 상호작용은 강의나 발표의 완성도를 높이고 담론의 질적 수준을 격상하는 데 매우 필요하다고 본다.

 

 

                           III. .

   정년퇴직한지 오래 됐지만 요즈음도 가끔 특강을 하는 기회가 있다. 대체로 강의가 끝나면 질문 시간이 주어지는데, 서로 눈치만 보며 선득 나서서 첫 번째로 얼음을 깨는 사람이 없을 때가 많다. 그러면 나는 으레 다음과 같이 질문을 유도한다.

   “여러분, 어렵게 생각마시고 편안하게 아무 질문이나 하세요. 쉽고, 무식한 질문일수록 좋은 질문입니다. 너무 유식한 질문은 제가 알아듣지 못하니까요.”

그리고 좋은 질문에 대해서는,

   “정말 좋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제게도 큰 공부가 됐습니다.” 라거나 “제 입장을 더 부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셔서 무척 고맙습니다” 라고 질의자를 칭찬하거나 고무하는 멘트를 한 마디 씩 한다.

또 주최 측에서 시간 관계로 질의를 종결하고자 하는데, 참석자나 청중 중 아직 질문을 더 하기 위해 손을 들고 있는 사람이 있을 때면,

   “오늘 질문을 하지 못하면 집에 돌아가셔서 잠을 이루기가 어려우신 분이 계시면 마저 질문을 하십시오. 그래야 저도 집에 가는 발걸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라고 주최측의 양해를 구하며, 가능한 한 마지막 질문까지 받으려 애쓴다.

 

                           IV.

   내가 좋아 하는 질문을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로 목마른 질문일수록 좋다. 질의자 중에는 지적 갈증을 느끼거나, 꼭 필요해서 아니면 발표자의 견해에 이의가 있어 질의를 하는 경우이다. 이럴 때는 대체로 낯빛이나 음성에 이미 얼마간의 절박성과 진정성이 배여 있다. 그러나 실제로 어떤 이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무가치한 질문을 남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자기 과시형 질문자들이다. 발표장 마다 나타나서 영양가 없는 질문을 남발하는 단골 질문자가 그런 사람이다.

 

   두 번째로 쉽고, 간략하고 명료해야 한다. 어떤 이는 질문을 하면서 과다하게 현학적, 수사적 표현이나 난해한 언어를 구사하고 현하구변(懸河口辯)의 장광설(長廣舌)을 일삼는다. 이럴 때면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기조차 어렵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유식과 현학은 뽐낼 수 있을지 모르나 질문자로서는 바람직한 경우가 아니다.

 

  세 번째로 좋은 질문은 주제와 연관하여 영감을 자극하거나 새로운 지적 탐색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질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상투적 질문은 마땅치 않다. 오히려  얼마간 엉뚱한 질문이 발표자와 참석자 모두에게 지적 상상력을 풍성하게 하고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다.

 

   질문은 질문하는 내용 이상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질문 속에 질의자의 지적 수준, 인품, 그리고 그의 삶의 철학이 배여 있는 경우가 많다. 유익하고 수준 높은 질문을 하면서 지나치게 도발적이거나 안하무인격의 태도로 발표자나 좌중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렇게 되면 질문 자체의 의미가 평가절하되기 십상이다. 실제로  꼭 필요한 질문을, 적시에, 절도 있게 한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는 지식과 정보, 통찰력 못지않게 질의자의 인품과 삶의 깊이가 개재된다.

 

   영화나 연극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주연 못지않게 일품 조연이 중요하듯, 좋은 질문은 좋은 대답을 유도해서 강의나 발표회 자체를 성공으로 이끄는 신비의 마력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디언스의 경청(傾聽)이 필수적이나, 이에 부가해서 회의장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역동성을 진작시키기 위해서는 좋은 질문이라는 묘약이  덧붙여질 필요가 있다.

 

 

                            V.

   앞에서  언급했던 L기자의 질문은 다소 도발적이었으나, 적시에 나온 꼭 필요한 질문이었다. 국익의 관점에서도 그러했다. 게르스텐마이어 의장에게는 또한 세계어가 아닌 자신의 모국어,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젊은이를 지구 반대편에서 만났다는 사실이 꽤나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이 휴머니스트 게르스텐마이어의 심금을 울렸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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