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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농사 여담(餘談)

2013. 6. 28. by 현강

                                        I.

   지난 겨울은 무척 길고 혹독했다. 그 바람에 그간 몇 년간 애써 키웠던 여러 그루의 나무를 잃었다. 집 앞의 5년생 앵두나무는 이제 제법 큰 나무로 자라 작년에는 제법 풍성한 수확도 거뒀는데 두 번 태풍에 밑동이 크게 흔들리더니 끝내 긴 겨울을 견뎌내지 못했다, 재작년 가을 양양 5일장에서 사온 3년생 감나무 두 그루도 끝내 모진 겨울을 건너뛰지 못했다. 나무마다 다 나름대로 사연이 있다. 그래서 멀쩡하던 나무가 병들거나 죽으면, 그와의 첫 인연까지 복기(復棋)되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런 가운데 지난 겨우 내내 내 마음을 가장 조리 게 했던 것은, 작년 초 지리산 600m 고지에서 블루베리 농장을 하는 제자 Y군이 내게 보내 온 100 그루의 묘목이었다. 말이 묘목이지 크기가 손가락만한 가녀린 어린 나무모들이었는데, 100개를 한 상자에 담아 멀리 지리산에서 설악산까지 보내 왔다. 그 정성이 고마워 작년 내내 아침, 저녁으로 물을 주며 지성으로 가꿨다. 그런데 새 봄이 찾아와 다른 나무 들은 모두 새 잎이 돋아 연두색으로 옷을 갈아입는데, 이놈들은 앙상하게 말라 죽은 처연한 모습이었다. 아무런 생존의 숨결을 느낄 수 없었다. 마음으로 몇 번 포기하면서도 ‘그래도 혹시’해서 계속 물을 주며 살아나기를 고대했다. 그렇게 4월 하순에 이르자 나도 ‘이젠 정말 끝났다’ 고 어렵게 마음을 접었다. 그러나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물주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웬걸 4월 말, 몇몇 나무 밑동에서 파릇파릇 새 싹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옆에 핀 잡초거니 하고 다가갔더니 그게 제 몸에서 비롯된 생존의 첫 징표였다. 나는 오딧세우스의 귀환만큼 반가워 “여보! 블루베리가 살아났어”하고 크게 소리쳤다. 이후 지리산 블루베리의 2/3 가량이 기적처럼 되살아나 씩씩하게 잘 자라고 있다. 그 중 몇 몇은 연약한 가지에 주체하기 어렵게 한, 두 송이의 열매를 달기까지 했다. 마치 내게 ‘이젠, 아무 걱정 마세요’하고 속삭이는 듯하다. 어제는 지나다가 거기서 잘 익은 블루베리 몇 개를 따 먹었다. 감회가 남달랐고, 다른 곳의 블루베리 보다 맛도 한결 좋았다.

 

  나는 아직 모진 겨울을 나지 못하고 죽은 약 1/3의 지리산 블루베리를 뽑아내지 않고 그대로 그 자리에 놓아두고 있다. 장난삼아 혼자 ‘전사자 묘역’이라고 정하고, 아침, 저녁 물 줄때도 의례(儀禮)처럼 그 놈들에게도 물길을 보낸다.

 

 

                                             II.

  작년에 딸기를 시험 삼아 한 이랑 심었는데, 이놈들이 워낙 잘 뻗어 올해는 네 이랑으로 크게 넓혔다. 농사는 곧잘 되었는데, 잘 익었다 싶으면 새들이 날라 와 쪼아 먹는다. 그런데 이 새들이 대단한 미식가라서 빨갛게 완전히 익은 놈만 골라 먹고, 그것도 한 입만 쪼아 먹고는 바삐 날라 가 버린다. 그래서 나는 올 봄에 온전하게 잘 익은 딸기를 먹은 적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조금 덜 익은 놈을 미리 따 먹던가, 아니면 새들이 조금 쪼아 먹고 남긴 잔해(殘骸)를 찝찝한 대로 그냥 먹게 된다. 그러다 보니 최상품은 미식가 동네 새들 몫이고, 허드레 하품은 내 차지가 된다. 힘들게 농사해서 동네 새들에게 헌상하는 일을 계속해야 할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III.

  식품이 생산되어 소비자의 식탁에 오르는데 소요된 거리를 푸드 마일리지(food mileage)라고 한다. 그런데 내 경우 여름철 내가 섭취하는 음식의 큰 부분이 텃밭에서 손수 재배한 싱싱한 야채와 과일이니 푸드 마일리지는 제로에 가깝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다양한 식품으로부터 몸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는데, 흔히 계절과 지역의 특성에 맞는 에너지를 섭취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요즈음 이른바 로칼 푸드의 중요성이 강조되는데, 나는 식품을 제철에, 제 텃밭에서 손수 가꾸어 먹으니 매우 행복한 존재다.

 

  텃밭의 야채나 과일은 무엇보다 신선해서 좋다. 최상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여름 밥상에 자주 오르는 상추나 쑥갓, 고추, 오이 등은 식사 바로 전에 내가 텃밭에 가서 직접 따온다. 토마토나 딸기도 마찬가지다. 그리곤 매 식사 때 마다 아무 드레싱 없이 큰 사발 분의 샐러드를 그냥 곁들어 먹는다. 또 마당일을 할 때면 주전부리하듯, 오가며 과일 열매를 따 먹는다. 얼마 전까지 딸기, 앵두, 보리수가 한창이었는데, 요즈음은 오디와 블루베리가 제철이다. 그 자리에서 직접 따먹으니 완벽한 푸드 마일리지 제로가 아닌가.

 

  여름에는 날이 더워 새벽 농사일이 필수다. 새벽일을 마치고, 아침 식탁을 위해 텃밭에서 야채를 챙길 때면, 옛날 유럽에서 살 때 이른 아침마다 동네 빵집에 가서 갓 구은 빵을 사 오던 생각이 난다. 나는 그 때 갓 구은 빵 특유의 따스, 고소하고, 신선한 풍미를 무척 좋아해서 꼭 아침이면 그것을 위해 약간의 발품을 팔았다. 그러기에 영국 수상을 지낸 대처 여사도 늘 자신의 부군과 딸을 위해 이른 아침이면 동네 빵가게에 걸어가서 갓구운 빵을 사왔다는 얘기가 이해가 간다. 그런데 이제 옛날 그 아침 빵을 푸드 마일리지 제로의 신선한 야채와 과일이 대신하고 있다. 이른 아침, 갓 구은 빵, 신선한 야채는 모두 <처음>과 <갓>, 그리고 <직접>을 상징하기에 언제나 <가공>과 <거리>와 <간접>를 거쳐야 하는 도시의 삶과는 차이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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