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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5

가장자리에서 체험한 68 혁명 이 활짝 피었다 덧없이 스러지던 바로 그해, 1968년, 파리, 베를린, 그리고 버클리 등 서방 세계의 곳곳의 대학가는 학생들이 주도하는 반권위주의 사회혁명의 돌풍에 휩싸였다. 훗날 ‘68세대’로 불리는 이들은 ‘기성의 모든 권위’에 반대했다. 서구형 소비사회, 권위주의 정치, 전통적 규범, 베트남 전, 대학의 커리큘럼, 언론권력, 모두가 그들의 치열한 저항의 표적이었다. 영국 가디언지는 1968년을 ‘세계역사를 바꾼 저항의 해’라고 명명했다. 유럽에 유학중이던 나는 그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에서는 얼마간 비켜서있었으나,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그 뜨거운 열기를 느끼며 거친 해일의 향방을 주시했다. 가장 치열한 곳은 파리였다. 프랑스의 5월, 파리의 거리는 혁명의 불길 속에 있었다. 자주관리, 꼼뮌, 페미니.. 2014. 2. 28.
프란치스코 교황의 새 어록 I. 얼마 전 내가 잘 아는 수녀님에게서 아래와 같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재미있는 일화를 들었다. 최근 젊은 나이로 주교가 되신 서울교구의 Y신부님이 로마로부터 주교로 결정되었다는 통보를 받고 황급히 교황님께 편지를 보내, “저는 아직 나이도 젊고, 학식도 부족할 뿐 아니라 덕이 크게 모자라니 부디 뜻을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간곡한 청을 드렸다는 얘기다. 그랬더니, 교황님이 “나이는 세월이 가면 자연히 먹는 것이고, 당신이 무식한 것은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바이며, 세상 어디에도 덕이 있는 주교는 없으니 그냥 받으시게”라고 답장을 하셨다는 것이다. 수녀님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오랜만에 기분 좋게 웃었다.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뭔가 의아하게 느껴져 “수녀님, 그게 사실이에요. .. 2014. 2. 16.
눈폭탄 내 처가 아직도 재활치료를 받고 있어 나도 그동안 주로 서울에 머물었다. 그러다가 지난 7일(금) 고성으로 내려 가려는데, 영동지역 대설특보가 내려 큰 눈이 지날 때 까지 한 주 더 그냥 서울에 있기로 했다. 마침 이웃집 부인께서 친절하게도 눈폭탄 맞은 우리 집 주변의 사진 몇 컷을 보내 주시며, 주위 풍경이 '가히 환상적'이라고 말씀하신다. 영동의 겨울은 서울 보다 비교적 따듯한데, 2월 중순이후 매년 한, 두차례 폭설이 내린다. 눈에 폭삭 갇히면, 지척의 옆집도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딴 동네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벌써 눈이 1m가 쌓였다는데, 아직도 계속 내리고 있다니, 우리집 유리 천장이 멀쩡할지 은근히 걱정이 된다. '별일 없겠지' 2014. 2. 10.
프라하의 봄 1968년 4월의 ‘프라하의 봄’과 그 해 8월의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은 내가 빈 유학시절(1965-1970), 바로 어깨너머 이웃나라에서 극적으로 벌어졌던 무척이나 충격적인 역사 드라마였다. 그 과정을 숨죽이며 옆에서 지켜보았던 나는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감동과 비탄어린 좌절을 함께 경험했다. 스메타나, 카프카, 마사리크의 조국 체코는 ‘프라하의 봄’을 계기로 두브체크, 하벨, 쿤데라의 이름을 역사에 새겼다. ‘프라하의 봄’은 1968년 4월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제1서기 두브체크가 주도하는 개혁파가 당 중앙위 총회에서 지향의 혁신적 강령을 채택하고, 체제민주화에 박차를 가하면서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소련의 브레즈네프는 이 자유화의 숨결이 동토처럼 얼어붙은 동유럽 공산국가들에게 미칠 영향을.. 2014. 2. 6.
연세춘추 주간 발령(1976.3) 1976년 3월 나는 연세춘추 및 Yonsei Annals(영자신문) 주간에 임명되었다. 당시 엄혹한 유신체제 아래서 연체춘추는 연세대학교의 마지막 남은 민주화의 보루였고, 대학언론 중 제 목소리를 내던 거의 유일한 매체였다. 나는 민주언론의 명맥을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했고, 그러자니 공안당국으로부터 말 못할 핍박을 받았다. 이후 2년 가까이 엄청난 스트레스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냈고 몸은 9kg나 빠졌다. 아래 사진은 1976년 3월 25일자 Annals에 게재된 주간 발령 기사이다. 36세 홍안의 청년은 곧 눈앞에 닥쳐올 암울한 내일을 전혀 예상치 못하고 환하게 웃고 있다. 2014. 2.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