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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갤러리

가장자리에서 체험한 68 혁명

2014. 2. 28. by 현강

<프라하의 봄>이 활짝 피었다 덧없이 스러지던 바로 그해, 1968년, 파리, 베를린, 그리고 버클리 등 서방 세계의 곳곳의 대학가는 학생들이 주도하는 반권위주의 사회혁명의 돌풍에 휩싸였다. 훗날 ‘68세대’로 불리는 이들은 ‘기성의 모든 권위’에 반대했다. 서구형 소비사회, 권위주의 정치, 전통적 규범, 베트남 전, 대학의 커리큘럼, 언론권력, 모두가 그들의 치열한 저항의 표적이었다. 영국 가디언지는 1968년을 ‘세계역사를 바꾼 저항의 해’라고 명명했다. 유럽에 유학중이던 나는 그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에서는 얼마간 비켜서있었으나,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그 뜨거운 열기를 느끼며 거친 해일의 향방을 주시했다.

가장 치열한 곳은 파리였다. 프랑스의 5월, 파리의 거리는 혁명의 불길 속에 있었다. 자주관리, 꼼뮌, 페미니즘 등의 진보적 개념이 물결쳤고 격한 토론과 해방의 외침이 전 사회를 뒤흔들었다. 격렬한 학생시위가 있었고 노동자들이 매우 빠른 속도로 이에 합류했다. 드골정부는 경찰력을 동원하여 진압하려 했으나 오히려 운동의 열기에 불을 붙여 결국 프랑스 전역의 학생들과 전 노동자 2/3에 해당하는 노동자 파업이 이어졌다. 드골정부는 반정부운동자들에 대항하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했고, 한 때는 정부 붕괴직전까지 몰렸다. 그러나 국회해산이후 6월 총선에서 혁명적 사태는 급반전, 드골주의자가 승리를 거두면서, 화염이 얼마나 뜨거운지 모르고 저지른 68세대의 신좌파 유토피아 불놀이 축제는 덧없이 끝났다.

한때 파시즘과 손잡았던 기성세대(이른바 ‘39세대’)에 대한 총체적 항거였던 68 학생혁명은 현상(the status quo)을 바꾸지 못했으나, 전후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려온 서구사회에게 자신을 성찰하는 값진 기회를 주었고, 무엇보다 사회의식과 규범체계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학교와 가정에서 권위주의가 사라졌고, 여권이 신장되었으며, 대학은 열렸고, 환경운동이 보편화되었다. 그 세찬 흐름 속에 시민사회는 크게 강화되었다. 서구세계에서 평등, 성해방, 인권 등의 진보적 가치가 전면에 등장한 것도 이 때 부터이다. 세계를 뒤흔든 젊은 상상력, 68 사회변혁운동은 실패한 듯, 성공한 혁명이다. 역사는 이렇게 우회적으로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68혁명의 전설적 학생리더로 유럽 현대사의 아이콘이 된 두 사람은 독일의 루디 두치케(1940년생)와 프랑스의 다니엘 콘 벤디트(1945년생)이다. 두치케는 피습으로 입은 상처로 시달리다가 1979년 죽었고, 벤디트는 현재 유럽의회의원으로 유럽의 환경운동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다.

 

 

 

 

 

 

 

 

 

 

     

 

베르린에 두치케 거리가 생겼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그의 거리가, 생전에 그가 그토록 통렬히 비판하던 독일의 우익 언론재벌 악셀 스프링거 거리 옆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정치 지향과 머리 색갈 때문에 '붉은 다니(Dany le Rouge, Danny the Red)'로 불리던 열혈청년 다니엘 콘 벤디트의 옛 모습은 간데없고 세월따라 호호야(好好爺)의 모습이다. 현재 유럽의회의 'European Greens-European Free Alliance'의 공동의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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