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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혜화동 연가(戀歌) (2)

2018. 11. 1. by 현강

                         

                       I.

혜화동 로터리에 이르렀다. 이곳은 혜화동의 모든 것이 시작되고 마무리되는 글자 그대로의 터미널이다. 모든 만남, 때로는 반가운 얼굴, 혹은 달갑지 않은 얼굴과의 해후도, 그리고 그와의 헤어짐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저녁녘이면 직장인들은 여기서 버스나 전차에서 내려 자신의 보금자리로 향했고, 다음 날 아침 어김없이 다시 이곳을 찾았다. 이 일대에 사는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이 로터리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처음으로 이성에 대해 눈을 떴고, 로터리 주변의 프라타너스 그늘에서 사랑이 움트고, 익어갔다. 그러다가 이별의 아픔을 경험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 일대에서 젊은 날을 보낸 많은 이들의 뇌리에는 혜화동 로터리를 배경으로 한 갖가지 추억과 낭만이 수백 장의 사진첩으로 겹겹이 쌓여있다. 혜화동 로터리는 특히 내가 중. 고등학교에 다닐 때, 여러 해 동안 안국동-광화문으로 가는 버스의 시발점이자 종점이었기 때문에 그 나이 때에 있었음 직한 숱한 추억이 그 주변에 깃들어 있다.

 

로터리 오른 쪽 코너에는 유서깊은 혜화동 우체국이 있다. 여기서부터 반월형으로 둥글게 돌아 전차길에 이르는 길이 혜화동 로터리에서 가장 사람들이 붐비는 지점이다. 버스가 여기서 정차하고, 상점들이 밀집해 있기 때문에 로터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혜화동 로터리라고 하면 곧장 이곳이 연상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곳의 대표적 명소는 혜화동 우체국, 동양서림, 그리고 중국집 금문 (金門)이다. 그래서 나는 무엇보다 이들이 아직 남아 있는지, 또 있다면 어떻게 변했는지가 크게 궁금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들 셋이 모두 의연히 제 자리에 옛 이름을 그대로 지닌채 건재하다는 사실이다. 그 뿐만 아니었다. 그 왼쪽 건너편에 파출소와 주유소도, 그리고 동양서림 바로 옆에 자리한 약국도, 그리고 저 멀리 전차길 가까이에 빵집 까지도 옛날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여봐라는 듯이 한눈에 들어왔다. 한마디로 큰 그림은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상가의 업종과 배열이 반세기 저 너머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고, 세월따라 디테일은 달라졌지만 그 변화의 폭도 그리 크지 않아 옛 모습을 회상하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가슴이 따듯해 졌다. 분명 여기서 고속 질주하던 시간이 아주 느리게 감속 운행한 것이 분명했다. 성형수술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잔주름의 아름다운 여배우의 모습을 연상했다.

이 한폭의 그림을 보면서, 나는 급속한 세상 변화에 아무 고민없이 즉응(卽應)하기 보다 제 고유의 모습을 지키면서 적절하게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도 역시 혜화동 특유의 문화와 전통의 힘이 아닐까 생각했다.

 

                             II.

가장 먼저 나를 반긴 것은 혜화동 우체국이었다. 신식건물로 새 단장을 했고, ‘살아있는 우체국(Live Post)’ 이란 이름으로 이제 우편업무와 더불어 그 안에서 커피도 팔고 지역홍보도 하는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우리 세대에게는 혜화우체국은 바로 그 앞에서 1947년 몽양 여운홍이 피살되었기 때문에 더 기억에 남는다. 어렸을 때, 내 가까운 형이 혜화초등학교 때 바로 그 극적인 현장을 목격했다며 몇 차례 실감 나는 연기를 내게 선보였다. 그래서 나는 한때 마치 내가 그 장면을 직접 본 것처럼 착각이 들기도 했다.

 

동양서림 역시 옛 이름을 그대로 지닌 채, 크게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그 자리에 건재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이 책방은 내가 중학교 입학했던 1953년에 역사학자 이병도의 따님이자 장욱진 화백의 부인인 이순경 여사가 <호구지책으로> 문을 열었다고 들었다. 이후 동양서림은 60 여년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책을 통해 이 지역에 지식과 문화의 향기를 전파해 온 혜화동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이 서점은 현재 <서울 미래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고 한다. 쇠락일로의 종이책 서점이 격변하는 세월 속에서 모진 풍파를 겪으며 온라인과 전자책 시대까지 한 곳에 버텨왔다는 것은 정녕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개인적으로 내가 이 서점에 남다른 애착을 느끼는 까닭이 있다. 중고등학교 시절, 하교길에 바로 동양서림 앞에서 버스에서 내렸는데, 마치 일과처럼 으레 책방으로 직진했다. 그래서 적어도 반 시간 이상, 어떤 때는 두어 시간 동안 그 안에서 서성이며 신간 잡지와 각종 서적들을 골라 읽다가 어둑어둑할 때쯤 책방을 나오곤 했다. 그렇듯 이 서점에서 공짜로 책을 읽으면서 나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통찰력을 키우고, 지적, 정서적 잠재력을 함양했다. 장사하는 책방을 자신의 독서실로 활용했던 나의 몰염치와 안면몰수에 대해 서점 측은 한 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뒤에 이 서점에 발걸음이 잦았던 문인, 지식인들이 무척 많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인 김수영, 성춘복, 그리고 고대 김준엽 총장도 이 서점의 단골 손님이었다고 들었다.

 

역사를 자랑하는 중국집 금문(金門) 여전히 그 자리에, 옛 이름, 옛 모습을 그대로 지닌 채 엄존하고 있었다. 70년 전에 화상(華商)이 처음 문을 연 이래 이 음식점은 이 일대에서 얼마간 고급진 중국집으로 알려져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평소에 이 집을 드나든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웠고, 친지 중 누가 상급학교에 합격하거나 인근의 학교를 졸업할 때 비로소 하객 중 하나로 이곳을 찾곤 했다. 가까운 동네 형이 보성고등학교 졸업할 때 따라갔다가 이곳에 들려 고구마탕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인근 동숭동(대학로)에는 서울 문리대과 법대, 의대를 겨냥했던 유명 중국집 진아춘(進雅春)과 공락춘(共樂春)이 있었다. 그러나 1975년 서울대학교가 옮겨간 후 잘 나가던 이 두 집은 모진 서리를 맞았다. 그래서 공락춘은 이미 역사에서 사라진지 오래고, 까마득한 옛날 1925년에 문을 열어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던 진아춘은 몇 번 자리를 옮겨 명륜동 어디서 아직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III.

혜화동 우측 로터리에서 내가 잊지 못할 장소의 하나는 명륜동을 향하는 코너 2층에 있었던 <전원(田園) 다방>이다. 이름부터 낭만적인 그 곳은 내가 대학교 다닐 때 혜화동 일대의 많은 친구들과 늘상 모여 정담을 나누며 살갑게 교류하던 아지트였다. 현재도 예전처럼 아래층에는 빵집이, 그리고 이층 바로 전원다방 자리에는 <A Twosome Place>라는 커피집이 있었다.

 

내가 다녔던 K 고등학교 동기들이 혜화동 일대에 많이 살았는데, 그 중 다수가 전원다방 단골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수시로 그곳을 찾았다. 아무 때나 그곳에 가면, 한 두 명 반가운 얼굴들을 만날 수 있기에 굳이 별도의 약속 없이도 그 곳을 향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20대 초 황금기, 풋풋하고 싱그럽던 우리는 거기에서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며 우정을 키웠다. 젊은 날의 꿈과 사랑, 고뇌와 낭만을 논하고, 나라와 세상 걱정도 하고, 때로는 연애상담도 했다. 대학교 2학년 때 4.19, 그리고 다음 해에 5.16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격랑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자주 열정적으로 정치토론도 하고, 암담한 현실에 대해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많은 일이 전원다방에서 이루어졌다. 나는 거기서 뻐끔담배를 배워 20년 동안 줄담배를 피었다. 그런가 하면 우리 몇몇은 이 다방에서 대학 입학 후 첫 여름방학에 강원도 무전여행을 모의했고, 결국 결행했다. 돌이켜 보면, 그 시절 우리는 때로는 지나치게 진지했고, 또 어떤 때는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듯 미성숙했기 때문에 더 애착이 가는, 우리의 젊은 날, 옛 모습이 오늘 사무치게 그립다.

20년 전 쯤인가, 우리 자칭 이른바 <전원다방파()>들 중 쉽게 연락이 되는 친구 6.7명이 시내에서 함께 모였다. 개중에는 자주 만나던 친구도 있었지만, 오랜만에 보는 얼굴도 있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에 어깨가 조금 처져있었으나 옛날의 호기는 여전했다, 이제 환갑이 가까우니 자주 만나자는 약속을 나누며 헤어졌다. 그리고 다시 10 여년이 지나 몇 해 전에 재회했다. 모두 은퇴했고 인생의 황혼길에 있었다. 깊게 주름진 노안(老顔)을 서로 마주 보며 쓸쓸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화제가 혜화동 전원다방에 이르면서 점차 목소리가 높아지고 환한 웃음꽃이 피기 시작했다. 전원다방을 촉매로 우리는 서서히 20대 초의 약동하는 청년으로 회춘(回春)하고 있었다.

                                   

                                    IV.

옛 전원다방 앞에서 택시를 기다리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천만다행인 것은 1970년대 초에 이곳에 등장했던 흉물스러운 고가도로가 그간 사라져 시야가 훤히 트였다는 사실이다. 옛날이나 다름없이 한가한 느낌을 주는 건너편 로터리는 그 일대의 가톨릭타운을 이어주는 주요한 연결고리다. 시선을 혜화동성당으로 향하면서 나는 다시 옛 추억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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