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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마침내 스마트폰?

2019. 2. 26. by 현강

                         I.

  얼마 전 교육부에 같이 있던 분이 나를 찾아와서 함께 담소를 나누던 중, 내 핸드폰이 울려 전화를 받았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분이 대뜸,

  “아니 한때 교육정보혁명에 앞장서던 분이 아직 폴더폰이라니요. 요새 그 폰 쓰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어요. 빨리 바꾸세요.” 라며 펄쩍 뛰었다.

나는 무안해서 하루에 한, 두 번 전화하고 받는 게 고작인데, 무슨....” 하며 얼버무렸다. 그러면서 스스로 내가 문명의 이기에 대해 감수성이 무딘 편이라는 것을 자인했다.

 

                      II.

  그런데 보다 근원적으로 따져 보면, 모든 게 내가 기계치(機械癡)라는 데서 시작하는 것 같다. 나는 누구나 쉽게 사용하는 전기 기구나 전자제품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절절맨다. 내 손이 가면 으레 고장이 나거나 오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집에서 그냥 수동으로 한 번에 작동되지 않고 절차가 조금 복잡한 각종 전기.전자 및 생활용품들은 내 손에서 거리가 멀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전구를 갈아 끼거나 부서진 의자를 고치는 일도 다 내 처의 몫이다. 내 손이 가면 더 말썽이 나니까  아예 건드리지 못하게 한다. 홈뱅킹은 물론 버스표 인터넷 예매도 할 줄 모른다. 길가의 자판기도 사용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내가 만사에 워낙 서툴러서 그랬는데, 그러다 보니 테크놀로지에 적응하기를 꺼리는, 아니 얼마간 그것을 혐오하는 러다이트(ludite)’가 되어버린 것 같다.

 

  나는 자동자 운전도 못한다. 실제로 처음부터 아예 배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연구년에 내가 갈 외국 대학을 선택할 때도, 대중교통이 좋은 도시, 교수 아파트가 대학 구내에 있는 대학을 찾았다. 내가 살 집을 오랫동안 연희동에서 찾았던 것도 내가 봉직했던 연세대학교에 걸어서 다니기 위해서였다. 여행을 좋아하는데, 웬만해선 혼자 외국여행 하는 것은 꺼린다. 출입국 절차나 항공기 갈아타는 과정을 생각하면 정부터 떨어지기 때문이다.

 

 

                             III,

  그러나 꼭 해야 하는 일은 비록 그것이 기계/전자 놀이라도 작심하고 한다. 내가 인터넷을 1990년 즈음부터 시작했는데, 당시 내 나이 또래의 동료 교수들 대부분이 컴맹이었다. 시대의 흐름으로 보아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료 교수들에게 앞으로 교수 노릇을 제대로 하자면 이것 못하고는 불가능하다며 극구 권했던 기억이다. 그에 앞서 내가 학교에서 교무처장 보직을 맡고 있었는데, 그 때도 유능한 전산 전문가 직원을 활용해서 주요한 교무자료를 많이 전산화했다. 그래서 교무위원회에 올리는 안건들을 한결같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전산자료로 뒷받침해서, 사안마다 처장이 누누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도록 했다.

 

  두 번 교육부장관을 하면서도 나는 교육정보화에 온 힘을 기울였다. 교육정보화에는 여.야가 따로 없고, 이 혁명적 변화과정에서 한발 늦으면 영원히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그 성과는 실로 놀라웠다. 20044월 칠레 센티에고에서 열렸던 APEC 교육장관회의에서 내가 <E-learning in Korea>라는 주제 발표를 했는데, 뒤이은 토론에서 각국의 장관들이 이의 없이 한국의 교육정보화 수준이 세계에서 가장 앞섰다는 것을 공인했다. 그 때 벅차던 감회는 지금도 새롭다. 내가 주도했던 1997EBS TV 수능방송과 2004EBS 인터넷 수능방송이 성공적으로 출범할 수 있었던 것도, 그동안 쌓아 온 교육정보화의 저력 때문이었다.

 

 

                       IV.

  이처럼 내가 내 평생직업을 위해 필수라고 느꼈을 때, 혹은 국정에 참여하면서 그것이 '나라의 운명'과 결부된다고 생각할 때, 결연하게, 또 재빨리 평소에 꺼리는 기계/전자놀이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 놀이는 내겐 거기 까지였다. 그것이 그냥 내 일상의 필요와 편익을 위한 것이라면, 나는 늘 그것 없이 견디는 편을 택했다. 조금 불편해도 천성적으로 기계에 매달리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 핸드폰이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 나갈 때, 대학도 그 거센 바람에 휩쓸렸다. 강의가 끝나면 모든 학생들이 부산하게 핸드폰부터 챙겼고, 복도나 교정에서도 핸드폰을 귀에 달고 다녔다. 나는 학생들에게, “자네들, 그러다가 생각하는 능력을 잃게 된다고 수없이 경고했다. 그러나 마이동풍이었다.

 

  나 자신은 핸드폰 없이 쭉 지냈다. 그러다가 정년퇴직하고, 2007년에 이곳 속초/고성으로 귀촌했다. 당시 이곳에 연()착륙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서울과 필요 이상 교류를 하지 않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핸드폰이 없어서 별로 불편하거나 아쉬울 게 없었다. 그런데 내가 워낙 산을 좋아해서 자주 설악산에 오르는데, 서울의 자식들이 내가 맨몸으로 산행하는 것을 무척 걱정했다. 급기야 핸드폰을 사 들고 와서 지참할 것을 강요했고, 거절할 이유가 마땅치 않아 내가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 때, 그 애들이 나를 설득했던 명분인 즉, “그것 없이 아버지는 편할지 몰라도, 우리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우격다짐으로 핸드폰을 사용하게 된 지도 어언 10년이 넘었다.

 

  그러나 내 구식 핸드폰은 전화를 걸고 받을 때, 글자 그대로 (phone)’으로 쓰일 뿐 다른 용도로는 쓰이지 않는다. 늘 지니고 다니지도 않는다. 그래서 어쩌다 전원이 끊어져도 2, 3일 모르고 지내는 일이 허다하다. 그런가 하면 가끔 핸드폰으로 내게 긴 글이나, 동영상, 사진들을 전송하는데, 내 구식 폴더폰으로는 그것들이 잘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결례할 때도 적지 않다.

SNS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옛날에 한 선배의 성화 때문에 페이스북에 등록을 했는데, 곧 그게 실수인 것을 알았다. 수많은 사람이 친구요청을 하는데, 그들 모두와 소통하자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 정성이 필요했다. 거기서 노닥거리기에는 내 여생이 짧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장 끊었다.

 

 

                        V.

그런데 나는 요즈음 스마트폰으로 말을 바꿔 탈까 고민하고 있다. 내 마음을 크게 움직인 것은 스마트폰의 사진 기능 때문이다. 이곳 동해안, 설악산의 풍광이 일품인데, 그것을 담으려면 번번히 사진기를 따로 들고 나가야 한다. 그런데 요사이 스마트폰 사진기능이 출중해서 그것 하나면 족할 것 같다. “마침내 스마트폰?”이 될지, 아니면 어쩌다 스마트폰?”이 될지 모르나, 스마트폰 자체는 이제 폴더블로 바뀌는 마당에늦깎이로  때 지난 스마트폰이라도 하나 장만할까 목하 궁리 중이다.

 

이래저래 처음 귀촌할 때 내가 가졌던 단순한 삶(simple life)”에 대한 순수한 꿈은 자꾸 허물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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