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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YS를 추억하며

2018. 11. 23. by 현강

           I.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 3주기가 되었다. 나는 그의 문민정부에서 교육부장관으로 1년 8개월 동안 일했기 때문에 그에 대해 남다른 감회를 느낀다. YS는 정치인으로서 한국 현대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논의와 평가는 그동안 다양하게 펼쳐졌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정치학자로서 나는 장관으로 있는 동안 비교적 지근거리에서 YS의 정치적 리더십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그래서 할 얘기가 많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의 인간적 면모와 연관해서 내가 겪은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할까 한다.

 

         II.

나는 1995년 말, YS로부터 임명장을 받을 때 처음 그를 대면했다. 그 전날 개각발표하기 약 1시간 전 그로부터 전화를 받고, 10여분 대화를 나눴던 것이 그와의 사전 접촉의 전부였다. 그러나 워낙 오랫동안 언론을 통해 그를 자주 접했던 탓에 초면임에도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후 내가 장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그와는 많은 공식적, 비공식적 만남이 있었다. 특히 내가 YS대통령 공약사업인 <5.31 교육개혁>의 주무 장관이었기 때문에 다른 장관들 보다는 잦은 접촉이 있었던 편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와 단둘이 대면해서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눌 기회는 별로 없었다. 그 때문에 그와는 <일의 관계>를 넘어서는 인간적 상호작용은 거의 없었던 기억이다.

 

YS의 리더십 스타일이 부처 일에 일일이 간섭하기 보다는 장관을 믿고, 그에게 일을 맡기는 편이였으므로 나는 장관직을 수행하면서 대통령을 의식하거나 눈치를 보는 일이 별로 없었다. 특히 당시에 청와대의 내 상대역이 박세일 수석이었는데(그 때, 그는 청와대에서 가장 진보적인 인사였다), 그와는 오래 가까운 사이였고 그가 매사에 나를 적극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에 청와대를 부담스럽게 느낀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장관으로서 나의 정책자율성은 매우 높았고, 인사에 관한 권한도 컸다.

 

그런데 하루는 우연히 마주친 동료 O장관이 내게 “영감님(대통령)이 왜 자네를 그렇게 좋아하지?” 라며 말을 건네는 게 아닌가. O장관은 나와 중고등학교 동창으로, YS와는 5년 임기를 같이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나는 반신반의하면서 “그럴 리가” 했더니, 그는 “아냐, 내가 괜히 빈말 하겠나”라고 답했다. 나는 쑥스러워 더 묻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III.

이후 나는 장관직에서 물러나서 연세대로 돌아갔고, YS도 임기말에 IMF 사태로 큰 홍역을 치루고 상도동옛집으로 귀환했다. 나는 실의에 젖어있을 그를 부담 없이 한번 찾아뵙고 싶었다. 그런데 댁을 몰라 박세일 수석에게 동행을 청했더니, 그가 흔쾌히 앞장을 섰다. 그래서 이름만 듣던 상도동댁을 찾아갔다. 집이 생각보다 크지 않았고 조촐했다. 응접실도 무척 수수하고, 약간 협소한 느낌이었다. 어느 한구석도 대갓집 분위기가 없어 편했다. YS가 매우 반겨서 정말 잘 왔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몇 년 후, 가친이 돌아가셨다. 그런데 세브란스 빈소에 아무 예고도 없이 YS가 문상을 오셨다. 나는 황망히 그를 맞으며 “웬일이시냐”고 했더니, “그럼 내가 와야지, 누가 오나” 고 담담히 대답했다.

일이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 후 내 아들이 명동성당에서 결혼을 하는데, YS의 K 비서실장이 내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는 “각하가 곧 식장으로 떠나십니다”라는 게 아닌가. 나는 크게 놀라서 그에게, “백번 고마운 일이나, 격에 맞지 않으시고 송구스러워 내가 불편하다”며 제발 말려달라고 간청을 했다. 얼마 후 K실장이 겨우 그를 안으로 다시 모셨다고 전화가 왔다,

 

             IV.

2003년 12월 중순을 넘어 갈 즈음, 이수성 전 국무총리가 내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는 연말도 되었으니 문민정부 때 함께 일했던 장관들이 한번 YS를 모셨으면 좋겠다며, 23일 저녁으로 날짜를 정했으니 꼭 나오라고 말했다. 나는 참석하겠다고 답하면서 오랜만에 YS를 만나게 되어 내심 무척 기뻤다.

 

그런데 그 후 며칠 사이에 예상치 못했던 일이 빚어졌다. 내가 노무현 참여정부의 교육부총리로 입각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개각 발표 날이 YS를 뵙기로 한 23일, 바로 그날이었다. 나는 무척 괴로웠다. 그날 그 모임에 참석하자니 우선 YS를 뵙기가 민망했다. YS 입장에서 볼 때, 내게 얼마간 배신감이 들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더욱 그러했다. 그렇다고 불참하지니 그것도 예가 아니었다. 나가겠다고 약속해 놓고 불편한 자리라서 피한다는 게 얼마나 얄팍한 일인가.

그날 온 종일 가슴에 그늘을 안고 지냈다. 그러잖아도 온 가족이 반대하는데 입각을 결정해서 마음이 불편하기 그지없는데, 이 일까지 겹치니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고민 끝에 결국 나는 그날 저녁 YS를 뵙기로 결정했다. 그러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하게 느껴졌다. “가야지, 가서 YS의 언짢은 눈총을 받는 편이 낳지”.

 

나는 시간에 맞춰 약속장소로 나갔다. YS는 미리 와 계셨다. 나를 보자 YS는 손을 번쩍 들고 빙긋이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모두가 들을 정도로 큰 소리로 “내가 오늘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어. 아니, 안 장관을 발탁하다니. 내가 노무현 대통령을 다시 봤어. 정말 기쁜 날이야”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오늘은 내 옆에 앉으시게”하며, 옆 자리를 내 주었다.

 

예상을 뛰어 넘는 YS의 반응에 나는 무척 놀랐고, 크게 감동했다. 그는 역시 큰 구경(口徑)의 정치가였다. 그러면서 나는 그가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숱한 격랑을 헤치며 우뚝 솟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그 특유의 금도( 度)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 순간 나는 그의 좌우명 '대도무문(大道無門) '을 떠 올렸다.

 

 

서거 3주기를 맞아 여유 만만한 모습으로 빙긋이 웃는 YS가 무척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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