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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대학강단 반세기

2015. 2. 1. by 현강

                                             I.

 

     얼마 전 제자 한 명이 내게 “선생님, 대학 강단에 서신지 얼마나 되셨어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내가 “내가 대학원을 졸업하고 첫 강의를 시작했으니, 가만있자, 그게 1965년 봄이니, 아이고 50년이 되었네” 라고 대답하다가 내 스스로 깜짝 놀랐다. 정말 “아니 벌써”다.

 

    1965년 2월 나는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을 졸업하고, 같은 해 3월 한양대학교에서 행정학을 가르치면서 대학 강단에 처음 섰다. 물론 시간강사였고, 그해 10월에 유학길에 올랐으므로 강사생활이 일단 한 학기로 그쳤지만, 그 때 일이 어제처럼 생생하다. 스믈 다섯, 홍안의 청년이었다.

 

                                           II.

   그런데 강사로서 첫발을 내 딛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한양대학교에서 내게 학교의 공식 추천서를 가져 오라고 했다. 나는 내심 켕기는 데가 있어서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경으로 행정대학원에 가서 당시 교무과장 Y 교수님께 청을 드렸다. 그랬더니, 그는 어두운 얼굴로 “원장님께 말씀을 드려봐야겠네”하며 2층 원장실로 올라 가셨다. 조금 있더니 Y 교수께서 상기된 얼굴로 내려오시더니 “원장님이 자네를 보자고 하시네”하셨다. 나는 일이 어긋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며 심호홉을 한번 하고 원장실을 두드렸다.

 

   K 원장님은 이미 꽤나 흥분해 게셨다. 나를 보자마자, 대뜸 “안군, 자네 엄감생신 내가 자네를 대학 강의를 하도록 밀어 주리라고 기대했나? 자네는 절대 안 되네. 자네는 우리 사회에서 어디를 가도 말썽을 필 친구야. 지금이 어느 시절인데 학부도 아니고 대학원에서 동맹휴학을 주도하고 선언문까지 쓴 작자가 공식 추천서를 신청해, 당치도 않네. 당장 나가게” 하시는 게 아닌가. 당시 일이 동맹휴학에 까지 이른 데는 학교 측의 책임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내심 원장님이 너무 하시다 싶었지만 어른과 다툴 수가 없어 불편한 심경으로 원장실에서 물러 나왔다.

 

   대학원 마지막 학기에 행정대학원의 미래 위상에 대해 학교와 학생 간에 갈등이 첨예해 져서 끝내 동맹휴학에 이르렀던 큰 사건이 있었다. 그 때 K 원장님은 나를 주동자로 지목하시고 강력하게 퇴학을 주장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A 교수님을 비롯한 다른 교수님들이 “그 놈은 앞으로 학자가 될 재목이니 퇴학만은 면하게 해 주자‘고 주장하셔서 구사일생으로 졸업을 했다. 그래서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하신데, 바로 그 문제아가 학교의 공식 추천서를 요구하니 화가 더 치밀어 오르셨던 모양이다.

 

   나는 그런 사정을 한양대 측에 해명할 수도 없어 강사 되기를 일단 포기하고 유학 준비만 전념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뜻밖에 개학 사흘을 앞두고 한양대서 강의 나오라고 연락이 왔다. 나는 뛸 듯이 기뻤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대학 강단에 서다니. 세상을 향해 고맙다고 큰 소리라도 치고 싶은 심경이었다.

 

                                          III.

 

   첫 강의라 열심히 준비했다. 강의 내용을 몇 번이나 되 뇌여 보고, 온갖 질문에 대비했다. 그리고 중간 중간에 삽입할 몇 가지 농담꺼리도 마련했다. 그 뿐이랴. 큰 거울 앞에서 자연스런 포즈도 취해 보고, 목소리도 가다듬어 보았다.

 

     강의 첫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강의실을 찾았다. 학생들이 왁자지껄하며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교단에 올라섰는데도, 보는 등 마는 등 소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칠판에 내 이름을 커다랗게 한문으로 쓰고 교탁을 몇 번 크게 두드렸다. 그러자 비로소 학생들이 조용해지고,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나를 처다 보았다. 그 때 한 학생이 대뜸 내게 물었다.

    “미안하지만, 교수님, 연세가 어떻게 되셨어요?”

이미 예상된 질문이었기에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왜? 자네 예쁜 누님이라도 있나?”

그러자 온 강의실이 웃음바다가 되고, 분위기는 삽시간에 화기(和氣) 모드로 바뀌었다. 내 딴에는 열강을 했고, 학생들도 잘 따라 주었다. 개중에는 나 보나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몇몇 노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성공적으로 첫 강의를 마치고 나니 다시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제 막 내가 평생 걸어야 할 장도(壯途)의 첫걸음을 디뎠다는 생각에 감개무량했다. 그리고 아무나 붙잡고 한껏 자랑하고 싶은 심경이었다.

 

   집에 오는 길에 어려서부터 자주 다니던 삼선교 근처의 치과에 들렸다. 사랑니가 아팠던 기억이다. 몇 년 만에 나를 만난 의사 선생님은 매우 반기셨다. 그리고는 대뜸 나에게 요사이 무엇을 하냐고 물으셨다. 나는 마침 잘 됐다 싶어, 그간 대학원을 마치고 오늘 대학에서 첫 강의를 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얼마간 호기있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은근히 ‘아직 어린 나인데 참 대단하다’며 크게 축하해 주시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아, 그랬군‘ 하시며, 별다른 감흥을 보이지 않으셨다. 그리고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왜, 재주 있는 친구가 고시를 봐서 판. 검사가 되든지, 고위 관료가 되지, 선생 할 생각을 했나?” “대학교수래야 월급도 몇 푼 안 되고, 어디 세상이 알아주기나 하나?”하는 게 아닌가.

 

  그 분의 대학교수관(觀)은 내겐 충격적이었다. 나는 온 몸에 힘이 빠지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그 때까지 내겐 실로 꿈의 직업인 대학교수직을 그렇게 까지 폄훼하는 이야기를 들어 본 기억이 없었으므로 얼마간 모멸감마저 느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 이것이 보통의 한국인이 대학교수에 대해 갖는 일상적 인식일 수 있겠구나’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러면서 ‘그래도 어떠랴, 내가 갈 길인데, 내겐 이 길이 필생의 천직(天職)인데’라는 비장한 결의가 샘솟았다. 아울러 이 땅에서 대학교수를 꿈꾸는 일이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험난한 가시밭길이라는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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