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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오스트리아 유학과 <가을앓이>

2015. 2. 5. by 현강

                                                  

  아직까지도 내가 가장 자주 받는 질문이 왜 미국으로 유학을 가지 않고 유럽으로 유학을 갔느냐, 또 유럽 중에서도 영국, 독일이나 프랑스와 같은 큰 나라가 아니고 동구 가까이에 있는 작은 나라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갔느냐는 질문이다.

 

  내가 유학을 가던 1960년대에 한국에서 ‘외국’은 미국이었다. 따라서 외국유학하면 누구나 당연히 미국을 연상하던 시대였다. 그런데 미국유학은 내게 처음부터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다. 마치 모두가 대세를 따라 우르르 몰려가는데 내가 무턱대고 따라갈 이유는 없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었다. 거기에는 주류가 되는 것 보다 비주류에 속하는 것을 편해 하고, 공인된 해답 보다 어딘가 숨어 있을 대안 찾기를 즐기는 내 성격 탓도 있었을 것이다. 미국은 역사와 학문적, 지적 전통이 일천하고, 제도 실험의 경험이나 정책사례의 다양성도 떨어지기 때문에 자연과학도라면 몰라도 사회과학 공부하는 사람이 굳이 그곳으로 유학을 가야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나는 미국보다는 유럽을 선호했다. 그러던 중, 오스트리아 가톨릭계통의 장학생 선발시험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선 시험과목이 독일어와 서양사였는데, 둘 다 자신이 있었다. 독일어는 고등학교 이후 손에서 떼지 않았고, 서양사는 워낙 어려서부터 즐겨 탐구하던 취미과목이었다. 그래서 마치 그것이 나를 위해 차려놓은 밥상인 듯해서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무엇보다 오스트리아라는 나라가 내 영감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나는 일찍부터 <세기말 빈(Wien)>의 예술과 문화에 크게 매혹되어 있었다. 그리고 비록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대제국에서 인구 7백만이 약소국가로 전락해지만 나치의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한 1930대 중반까지, 의학 및 자연과학과 더불어 심리학과 정신분석학, 논리학과 철학, 경제학과 법학 등 주요 학문분야마다 고유한 학파를 형성하며 학문과 지성문화에서 세계에 앞서가던 빈 대학의 학문적 전통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유럽 변방의 이 작은 나라의 큰 지성문화가 나를 크게 사로잡았다. 특히 프로이드, 후설, 비트켄슈타인, 노이라트, 슘페터, 포퍼, 켈젠 등 20세기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가장 독창적 이론가들의 아이디어가 같은 시기, 같은 도시에서 싹트고 영글었다는 사실이 내겐 실로 풀기 어려운 수수깨끼였다. 그런 의미에서 한 때 빈은 14, 5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에 비견되는 천재의 도시였다. 그래서 그곳에는 무언가 독창적인 학문적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신비의 샘이 있을 것 같았다.

 

  또 하나, 당시 이 작은 나라 오스트리아가 나를 사상적으로 전율시켰던 것은 동서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나라가 기적처럼 성취한 <중립화 통일>이었다. 동서냉전의 전초지로서 4대 연합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던 이 나라가 10년간의 끈질긴 정치협상에 의해 중립화 통일을 이룩했다는 사실은 실로 냉전시대가 기록한 가장 반( 反) 냉전적인 개벽(開闢)의 신화였다. 그것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고 엄혹한 군사정권하에서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던 분단국가의 젊은이에게 한줄기 빛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곳에 가면 천형(天刑)처럼 나를 옥죄는 냉전의식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무언가 통일지향의 새로운 해결책이 섬광처럼 내 머리를 때릴 것 같은 상념에 젖었다. 그 모든 것이 나를 고무하고 설레게 하였다.

 

   그러나 막상 시험에 합격해서 그곳 유학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나는 다시 고정관념으로 가득 찬 한국의 차디찬 현실의 장벽과 다시 마주해야 했다. 주변에 많은 이들이  나의 오스트리아 유학에 대해 매우 의아해 하며 탐탁찮게 생각했다. 대체적인 반응은 “아니, 음악도 아닌데 왜 하필 비엔나로 가?”이거나 “잘 생각해 보게, 세상이 미국세상인데, 거기서 공부하고 돌아오면 일자리나 있겠나?”, 아니면 “쓸데없는 모험이네. 남들 하는대로 하게나”였다. 마음으로 축하해 주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그 보다 놀란 것은 대부분의 교수님들조차 오스트리아의 학문전통이나 지성사에 대해 아는 분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나는 내가 대학원에서 공부했던 행정학과 같은 실용적인 학문보다는 정치사상과 같은 철학 공부를 하고 싶었다. 또 그것이 유럽 학문에 진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동안 기능과 실천에 역점을 두는 실용학문을 하다 보니 보다 본질적인 것, 심오한 이론적인 것에 대한 갈증 같은 것이 너무 컸다. 이 점도 내가 유럽을 선택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 꿈은 공부하는 과정에서 뜻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주변의 반응에 대해 조금은 실망스러웠으나, 나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미국 학풍은 이미 학부와 대학원에서 그런대로 제법 익혔으니, 이제 옛 대륙 유럽에 가서 고전을 익히고 오랜 역사 속에서 온갖 풍상을 다 겪은 숙성한 생각에 맞서고 싶다는 기대와 열망에 크게 들떠 있었다. 말하자면 신대륙을 향해 먼 뱃길에 나서는 항해사의 올골찬 결의 같은 것이 내 내면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러면서, 분명히 이러한 나의 외로운 결단이 언젠가 내게 학문적으로나, 내 삶의 양식에 긍정적인 보상을 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1965년 10월 4일 마침내 나는 유학길에 올랐다. 3대 독자 외아들이 연세든 조부모님, 부모님을 뒤에 두고 떠나는 발걸음은 무척이나 무거웠다.  동갑네기 여자친구에게 공부 빨리 끝나고 오겠다는 빈말은 남겼으나, 당시 상황으로 보아 다시 두 사람의 인연이 이어지기는 하늘의 별따기 같은 일이었다. 떠나기 전날 저녁, 혜화동 로타리에서 그녀와 작별했다. 소슬한 가을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데 김포 공항으로 가는 길가에 하늘하늘 피어있는 코스모스가 나를 더욱 처연하게 만들었다. 그 후유증인가. 아직도  10월 초 찬바람이 불어오면, 예외 없이  슬픈 감정이 솟구쳐 가슴이 저려오고,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며칠을 헤맨다.  이 모진 <가을앓이>는 아마 평생갈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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