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단상

두루 고맙습니다

2011. 9. 19. by 현강

                 I.
   지난 7월 말경, 장마가 오락가락할 때다. 내가 이틀간 서울에 다녀와 보니 집 뒤 창고 옆에 택배로 보내진 선물상자가 있었다. 그런데 포장지가 비에 흠뻑 젖어 보낸 분의 주소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찢긴 조각에서 겨우 ‘전남’이라는 두 글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내용물은 무화과였는데, 속 포장에서도 정성스런 손길이 느껴졌다. 물이 조금 배었지만 먹기에는 지장이 없었다. 두 식구가 고마운 심경으로 맛있게 먹으면서도, 머리에는 온통 누가 보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러면서 택배 기사들에게 우리가 집에 없을 때는 따로 연락하지 말고 물건을 창고 옆에 놓아두라고 한 것을 후회했다. 외진 시골집이니 누가 가져갈 리도 없어 서로 편하자고 그런 것인데, 그러다 보니 어떤 택배회사에서 전달한 것인지 확인할 도리가 없었다. 이후 배달 온 택배기사 몇 명한테 문의했지만, 모두 모르겠다는 대답이었다. 그렇다고 전남에 있는 친지들 한 분 한 분에게 전화로 혹 내게 선물을 보냈느냐고 확인할 수도 없는 게 아닌가. 혹 선물 보낸 분이 선물 잘 받았느냐고 연락을 할 수도 있을 텐데 하고 기다렸지만 그런 일도 없었다. 이래저래 마음이 답답한 가운데 아직 무화과 선물의 주인공을 알아내지 못하고 있다. 혹시 그분이 이 글을 보게 된다면, 즉시 자진 신고하셔서 내 안타까운 마음을 풀어 주기 바란다.

   살다보면, 이와 비슷한 일을 경험할 때가 간혹 있다. 연세대 교수로 재직할 때 겪은 일이다. 한번은 동료 몇 분과 학교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하고 있는데, 저편에 앉아 있던 어떤 분이 내게 반갑게 눈인사를 했다. 나도 황급하게 답례를 하면서, 낯이 익으니 연대 교수 중 한분이거니 생각을 했다. 그런데 식사 후 음식 값을 내려 하자, 식당 주인이 “아까 저 편에 앉았던 분이 미리 지불하고 가셨는데요.” 하는 게 아닌가. 나는 당황해서 식당 주인과 동료 교수들에게 혹시 그 분이 누군지 아느냐고 물어 보았지만, 모두 고개를 모로 저였다. 나 자신도 그분의 얼굴을 다시 떠 올려 보려고 애써 보았다. 서로 인사를 나눌 때는 익숙한 얼굴 같았는데 되새겨 보니 전혀 그분 얼굴 모습이 재구성이 되지 않았다. 내가 워낙 사람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면치’(面痴)인 것도 아마 일이 이렇게 큰 이유일 것이다. 아마도 그 분은 나도 자기를 알리라 생각하고 호의를 베풀었을 터인데, 정작 호의를 입은 나는 고맙다는 인사도 할 수 없으니 답답하고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아직도 그분은 내 마음 속에 확인 안 된 고마운 분으로 남아있다.

    언젠가 내가 소속했던 학회에서 1박 2일의 지방 세미나가 있어 참석했다. 세미나가 끝나자 그곳에서 멀지 않은 명승지를 다녀오는 부대 프로그램이 있으니 뜻이 있는 분은 참여하라는 주최측의 공고가 있었다. 나는 모처럼의 기회라 참가 신청을 했다. 가는 도중 참가비를 걷는데 학회 간사가 “교수님 것은 다른 분이 내셨어요.” 하는 게 아닌가. 내가 놀라 그 분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간사가 “그 분이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하셔서 말씀드릴 수가 없어요”라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재차 묻기도 그렇고 해서, 누굴까 하고 버스에 가득 찬 참가자들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몇 사람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있어도, 딱히 저 분이다 할 사람은 드러나지 않았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학회 간사에게 “그 분에게 내가 정말 고마워한다.” 는 얘기를 전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생각해 보면 그래도 이 경우는 고맙다는 말씀을 전했으니 나은 편이었다. 그러나 직접 고마움을 표하지 못한 미안한 감정은 아직 남아 있다.

          II.

   우리가 살면서 항상 알게 모르게 남의 도움을 받는다. 그때그때 고마운 마음을 제대로 피력할 수 있으면 괜찮은데, 위의 경우처럼 이러 저러한 사정으로 그게 불가능한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런가 하면 간혹 부끄럽거나 겸연쩍어서, 혹은 체면 때문에, 아니면 건방진 생각으로 고마움을 전하는데 인색했던 경우가 적지 않다.
  
돌이켜 보면, 내 경우도 별로 남에게 베풀지도 못하면서 상대방의 호의에 고마움을 전하지 못했거나, 고마움의 표현이 미흡하거나 미숙한 경우가 너무 많았던 것 같다. 이 글을 통해 이런 모든 경우에 대해 진심으로 미안한 정과 고마운 마음을 함꼐 전한다.

'삶의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례 이야기  (0) 2011.10.15
덕수궁에서 만나요  (3) 2011.10.02
제3의 물결  (1) 2011.09.05
유럽의 다문화화와 그 긴 그림자  (3) 2011.08.21
추억여행  (5) 2011.08.0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