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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유럽의 다문화화와 그 긴 그림자

2011. 8. 21. by 현강

        I.
유럽의 주요 도시에는 대중교통이 잘 발달하여 있다. 그래서 웬만하면 지하철이나 전차, 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그런데 <빈>에서 지하철이나 전차를 타면, 예전 보다 무척 시끄럽고 떠들썩하다. 주위를 둘러보면, 터키나 동남유럽, 중동, 아프리카 등지에서 온 이국인들이 많이 눈에 뜨이고 이들이 거침없이 제 나라 말로 떠들어대는 통에 차내가 어수선하기 이를 데 없다. 정작 들려야 할 독일 말은 거의 들리지 않는다. 이들 외국인은 한결같이 당당했고, 거리낌이 없었다. 그리고 보면, 오스트리아인 친구가 지하철에서 자신이 이방인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는데, 크게 과장한 것은 아닌 듯싶다.

예전의 <빈>에서는 패스트 후드라면, 겨자에 찍어 먹는 소시지가 고작이었다. 간혹 피자집이 있었지만, <멕도날드>와 같은 미국식 간편식도 드물었다. 그런데 이번에 놀란 것은 거리마다 터키식 <케밥>과 봉지 컵에 담은 볶은 중국 <누들>이 넘치고 있었다. <빈>의 명물인 토요 벼룩시장이나 우리 재래시장 격인 <나쉬마르크트>(Naschmarkt)에 가도, 인종전시장에 온 듯하고, 왁자지껄하며 흥정하는 모습도 마치 중동의 <바자르>를 찾은 느낌이다. 전통 오스트리아풍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돌이켜 보면, 예전에도 런던이나 파리 같은 유럽의 대도시에는 이주 외국인들이 많았다. <빈>도 한때 대제국의 수도였고, 동구, 중동지역과 가까워 이주 외국인이 많았던 도시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제 이주민의 수나 다양성, 그리고 그들의 생활양식과 문화가 현지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20년, 30년 전과 비할 바가 아니다. 다 민족화, 다 문화화는 이미 무서운 속도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보니 내가 지난 글 <추억여행>에서 <빈>이 예전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다는 얘기는, 도시의 외관, 즉 , 일견해서 눈에 비치는 전경(前景)에 불과하고, 그 안에서 진행되는 삶의 동태(動態)는 크게 요동치며 변하고 있었다. 다문화 현상은 비단 <빈>이나 오스트리아만의 문제가 아님은 물론이다. 그것은 이제 글로벌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이제 서유럽 전역에 퍼져 있었다.

  II.
이들 외국이주민도 따져 보면 그 연원과 구성이 다양하다. 외국노동자들과 그 가족, 2세, 3세가 주종을 이루지만, 유럽현대사가 토해낸 무수한 난민, 망명자들, 그리고 세계화가 몰고 온 다국적 기업 관계자들, 다양한 부문의 장사꾼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이들 외국이주민 중 유독 현지인의 정서를 자극하는 부류는 이른바 3D업종에서 궂은일을 하며 자신들과 판이한 방식으로 삶을 꾸려가는 이주노동자들이다. 대부분 현지인들은 이들 외국노동자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들이 오늘 누리는 경제적 풍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이들 <다른 이> (die Anderen)들의 수가 이제 너무 많고, 그들을 머리에 떠올리면, 일단 <지겹고 짜증 난다>는 반응이다.

 최근 오스트리아의 가치/태도 조사(2008년)에 따르면, “일자리가 부족하게 되면 외국인들을 제 나라로 쫓아내야 한다”는 입장이 1999년에 46%였는데, 2008년에는 49%로 늘었다. “외국인들도 이제 그들의 생활양식을 어느 정도 내국인에 맞춰야 한다”라는 답변도 1999년의 72%에서 2008년에는 80%로 늘었다. 또 응답자의 66%는 이주자 때문에 안전이라는 맥락에서 사회체제에 부담 된다고 말한다. 이처럼 외국인에 대한 현지인들의 적대감이 계속 증폭되는 추세다. 그런데 실제로 이들 외국노동자의 대부분은 경기변동과 관계없이 어렵사리 자리 잡은 새터에 계속 붙박이로 살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 아예 고향에 가족은 물론, 일가친척까지 불러들이기가 일수다. 그런가 하면 이들 중 많은 이가 자신의 기존 종교와 문화 및 생활양식을 고수하며, 주류사회와 다른 하나의 하위문화(subculture)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주류문화와 자주 긴장과 갈등을 겪는다. 1997년 유럽연합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매우 인종주의적”(quite racist)으로 분류되는 인구가 벨기에(22%), 프랑스(16%), 오스트리아(14%)에 이른다. 이들 나라에서 넒은 의미의 인종주의 유형에 속하는 인구는 대체로 50%에 육박한다.

  III.
그런데 최근 바로 이때 현지인과 이주민 간의 갈등의 골에 집요하게 파고들어 정치적으로 대박을 터뜨리고 있는 세력이 이른바 극우 민족주의 정당들이다. 1990년대를 기점으로 오스트리아의 하이더(Joerg Heider)의 자유당, 프랑스 프펭(Le Pen)의 국민전선, 네덜란드의 포튠(Pim Fortuyn)의 지지자들 등의 극우 세력은 화려하게 정치 무대에 등장했다. 이들 우파 포퓨리즘은 ‘열린 세계’와 ‘하나의 유럽’을 지향하는 유럽연합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 외국인을 통한 ‘위기’와 ‘위협’을 강조하며, 민족성체성과 배타성의 맥락에서 유럽인들의 내면에 숨어 있는 인종주의와 외국인협오증(Xenophobia)에 강하게 불을 지핀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 “경제는 개방되는데, 사회는 폐쇄된다”라는 Holifield의 ‘자유주의 패러독스’가 그대로 들어맞는 느낌이다.

 그간의 각종 태도조사에 따르면, 외국인 적대감은 흔히 얘기하듯 경제적 위기에서 경제적 가치박탈과 미래에 대한 비관적 전망에서 비롯되기보다 오히려, 문화적, 이념적으로 동기화되는 경우가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럽사회 내면에 깊숙이 박혀있는 구조적 편견이나 전통주의 부활의 측면이 강하다고 본다. 대체로 외국인 적대감을 강하게 피력하는 사람들은 정치체제와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이 높고, 보다 본질적으로 정치에 대한 신뢰상실과 소외감 내지 ‘정치적 아노미’를 경험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들 중에는 변화하는 사회의 다양성, 즉 사회적 다원주의와 아룰릴 수 있는 있는 능력이 결여된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에서는 1999년 총선에서 외국인에 대한 적대적 입장을 공공연히 표방하는 극우 민족주의 정당인 자유당이 유효투료의 26. 9%를 얻어 이듬해에 연립정부에 참여하는 공전의 대형사고가 터졌다. 특히 많은 이들을 경악시켰던 것은, 사회민주당의 전통적 정치고객인 노동자들이 사민당보다 오히려 자유당에 더 많은 표를 던졌고, 30세 이하의 젊은 층이 자유당을 가장 많이 선호했다는 것이다. 이후 오스트리아에서 자유당의 거센 바람은 얼마간 잦아들었지만, 아직도 그 정치적 잠재력은 만만치 않다. 유럽 사민주의의 대표논객이었던  Kreisky 오스트리아 전 총리의 말대로, 우파정당의 대두 그 자체 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극우정당들에게 의제를 선점당한 기존의 정당들이 스스로 ‘우경화’ 되거나 그들과 동맹을 맺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는 유럽의 정치지형을 구조적으로 바꾸는 큰 파란을 예고하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유럽의 각국 정부들도 이민에 대한 법적 규제를 강화하는 추세다. 근년에 벨기에가 ‘부르카’ 금지법을, 그리고 스위스가 이슬람식 첨탑 금지법을 제정한 것도 이를 흐름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유럽을 휩쓸고 있는 금융. 경제위기의 소용돌이 때문에 크게 진통을 겪고 있는 유럽연합으로는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우파 민족주의의 파고는 최대의 복병이 아닐 수 없다. 최근 노르웨이 연쇄 테러사건이 극우민족주의가 만든 비극임이 밝혀지면서 유럽통합의 꿈은 다시 흔들리고 있다.

  IV.
그렇다면 주류사회의 외국인 적대감을 줄이고, 이들 이주외국인을 보다 성공적으로 큰 사회 내에 통합할 수 있는 방도는 무엇인가. 외국인을 수용하는 정책유형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동화(assimilation) 모형과 통합(integration) 모형이다. 전자는 이주자들에게 그들 고유의 문화와 종교, 생활양식들에서 벗어나 주류문화에 동화할 것을 기대하는 관점이다. 다시 말해 새터에서 살아남으려면 너희가 주류문화에 빨리 동화하라고 강제하는 입장이다. 이에 반해 통합모형은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의 맥락에서 그 나라에 존재하는 다른 문화의 존재와 그 독자성을 인정하면서 자연스레 사회통합을 추구하는 입장이다. 자주 인구에 회자하는 ‘salad bowl' ’ethnic mosaic', 'rainbow coalition' 등이 바로 이러한 정책관점이다. 그간 유럽 여러 나라는 대체로 동화모형에 의지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히 실패했다. 이제 남은 것은 통합모형이다.

결국, 두 모형을 가르는 관건은 다원주의의 수용 여부(與否), 내지는 다원주의적 능력의 존부(存否)에 달렸다고 볼 수 있다. 통합모형의 경우, 문화와 종교의 다양성, 그리고 그 차이를 당연시하는, 다시 말해 ‘다양하다’라는 것이 정상적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따라서 통합모형의 경우, 사회 내에 분리와 배제를 최소화하고, 정치.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참여의 기회를 늘리며, 무엇보다 종교적 차이에 대한 인정과 그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무엇보다 통합과정에서 야기되는 크고 작은 긴장과 갈등을 지나치게 금기시하거나 특히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 내지 수단화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이를 위하여 다문화주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확산시키고, 교육과정 및 대화와 소통을 통하여 그 사회내의 <성찰적 다원주의>(reflektierter Pluralismus)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옛날에는 사회내의 소수자들은 얼마간 자신들을 감추고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나 이제 그들도 수가 늘고 사회가 열리면서 거침없이 자신을 드러내며 자주 주류사회에 맞선다. 그런 가운데, 극우 민족주의는 비등하고 전체사회는 ‘우경화’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만시지탄이 있지만, 바로 이 소용돌이 속에서 유럽은 통합모형을 슬기롭게 실천해야 한다. 그 길은 멀고 험하기 이를 데 없다.

  V.
유럽 얘기가 길어졌지만, 따지고 보면 그게 유럽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 경우도, 이미 2007년에 체류 외국인 100만 명을 넘었고, 하루하루의 일상 속에서 다문화사회의 도래를 몸으로 느끼고 있다. 앞으로 이주민의 수는 계속 늘어갈 것이고 이에 따른 사회적 갈등과 통합 문제는 주요한 정치의제로 등장할 개연성이 크다. 이와 더불어 사회경제적 격차의 심화, 정치의 신뢰상실, 주변국가와의 교류 증가, 역사와 영토 등 민족문제의 대두와 같은 제반 조건은 극우 세력의 성장에 좋은 토양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유럽의 오늘에서 우리는 적지 않은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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