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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주례 이야기

2011. 10. 15. by 현강
        I.
   교수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제자들 결혼식 주례를 자주 서게 된다. 나도 지난 세월 동안 300번 가까이 주례를 섰다. 그러다 보니 한창 주례를 자주 섰던 50대 때는 학자로서, 또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가장 바쁜 시기였는데, 모처럼의 주말마다 한, 두 차례 주례하다 보니 여러 가지로 생활에 지장이 컸다. 결혼은 인륜지대사이므로 주례는 그 전 과정에서 추호도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래서 자주 하더라도 매번 긴장하고 적잖은 신경을 써야 한다. 그리고 일단 주례를 맡기 시작하면 누구는 해 주고 누구는 마다할 수가 없어 그 횟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주례는 우리나라에서 교수가 피할 수 없는 업보거니 생각했다.

    부끄럽지만, 나는 첫 주례를 38세에 섰다. 본의 아니게 일이 빚어졌다. 연세대 행정대학원에서 내게서 논문지도를 받은 제자인데, 하루는 신붓감을 데리고 나를 찾아와서 주례를 부탁했다. 나는 펄쩍 뛰며 말도 못 붙이게 해서 돌려보냈다. 그런지 며칠이 지나 그 제자가 다시 찾아와서, 주위에서 아무리 찾아보아도 마땅히 부탁할 분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더 찾아보라고 돌려보냈다. 선배 교수들로부터 주례는 가능하면 늦게 시작해야 한다는 말을 수없이 들어 왔을뿐더러, 스스로 생각해도 이제 결혼 10년차의 인생 초년병이 감히 주례를 선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며칠 후, 그 제자가 내 강의를 함께 들었던 친구 몇 명과 함께 몰려 와서, 내일이 결혼식인데 그간 아무리 노력해도 주례자를 찾지 못했으니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당사자는 아예 눈물까지 보였다. 한 시간 이상 승강이 끝에 정말 울며 겨자 먹기로 주례를 맡기로 했다. 그러면서 스스로 일생일대에 실수라고 생각했지만, 그때는 별 도리가 없었다. 그 이튿날, 나는 조금이라도 나이 들게 보이려고 이마로 내렸던 머리도 뒤로 올리고 목소리, 옷매무새까지 한껏 신경을 썼다. 그러나 하객들이 “신랑 친구가 주례를 보나 봐”라고 수군거렸다는 후문이다.

     II.

    주례를 많이 섰지만, 한 번도 결혼식장에 늦게 가거나 크게 실수한 기억은 없다. 그러나 몇 번 아슬아슬한 일이 몇 번 있었다.
    한 7, 8년 전 일이다. 결혼식장이 서울대학교 근처 어디였는데, 식이 시작하기 약 1시간 전에 신랑 친구 두 명이 나를 데리려 연희동 우리 집으로 왔다. 때가 일요일이었고, 예식 시간은 오후 5시였는데, 시간이 바튼 것 같아 서둘러서 떠났다. 그런데 웬걸 차가 마포부터 밀리더니 여의도에 들어서자 길이 막혀 아예 차가 움직이질 않았다. 큰 행사가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발을 구르며 초조하게 기다렸지만 별로 나아질 기색이 없었다. 시계를 보니 결혼식 시작이 20분도 채 남지 않았다. 신랑 친구들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때 생각이 난 게 <퀵 서비스> 였다. 보기에는 좋지 않지만 퀵 서비스로 가면 시간에 댈 듯했다. 그래서 신랑 친구들에게 퀵 서비스에 연락을 해 보라고 청했다. 그랬더니, “아니 선생님이 그 뒤에 타시려고요?”하고 물었다. 내가 “그게 문제냐, 빨리 연락해 봐라.”고 재촉했다. 그런데 몇 군데 연락해 보아도 여의치 않았다. 모두 가동 중이거나, 여의도는 안 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급해져서 “그래, 자네들 여기서 이렇게 앉아만 있을 텐가”하고 소리쳤지만 별도리가 없어 보였다. 그때 나는 무언가 시도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친구들에게 “어떻게든 내가 시간에 닿아 보겠으니 자네들끼리 오게나.”하고 차에서 내렸다.

    나는 근처의 택시정류장으로 뛰어갔다. 길이 완전히 막혔으니 행사 끝나기만 기다리며 택시 기사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봉천동 쪽으로 급히 가는데, 어떻게 샛길로라도 저를 데려다 줄 분 안계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모두 고개를 모로 저는데, 늙수그레한 기사 한 분이 “어디 한번 가 봅시다.”하고 호기 있게 나서는 게 아닌가. 그분은 실로 운전에 달인이었다. 꽉 막힌 여의도 한복판에서 아파트 숲을 헤치며 이리 저리 샛길로 나서더니 얼마 안 가 대방동 다리를 건너는 게 아닌가. 이후에는 일사천리로 예식장으로 달렸다. 예식장에 막 도착하니 시작 2분 전이었다. 나는 그 운전기사에게, “정말 대단하십니다. 큰 일하셨습니다.”라고 상찬하고 충분히 사례를 했다. 그리고 황급히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모두 반겨 맞았지만, 웬 걸 아무도 주례자가 늦을까 걱정했던 기색이 전혀 없었다. 당연히 제시간에 대 오겠지 했던 듯하다. 나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차분한 걸음으로 주례석으로 다가갔다. 결혼식이 끝나고 신랑, 신부와 기념사진을 함께 찍고 있는데, 그 때야 저 뒤편에서 신랑 친구 두 명이 뛰어들어오고 있었다. 시간을 보니 5시 25분이었다.

     III.

   한 6년 전 얘기다. 당시 행자부 사무관이었던 P군 결혼식 때 일이다. 나는 신랑과 신부를 미리 함께 만난 자리에서 시간과 장소를 미리 수첩에 써 놓았는데, 결혼식 당일 수첩을 보니 예식장소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당연히 연세대 동문회관이거니 생각했다. 졸업생들이 대체로 그곳을 선호하고, 또 내가 운전을 못 하기 때문에 대체로 차를 보내라고 하는데, 그런 약속을 하지 않은 것을 보니 집에서 가까운 동문회관이 확실한 것으로 여겼다. 그날 조금 일찍 동문회관으로 향했다. 그런데 막상 그곳으로 가보니 웬걸 그 시간에 다른 커플의 결혼이 예정되어 있었다. 나는 급히 집으로 전화해서 혹시 내 책상위에 청첩장이 있냐고 물었다. 없다는 것이다. 시간을 보니 예식시작 25분 전이었다. 최악의 경우가 예상되면서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느낌이었다.

    혹시 하고 내 전화번호부 수첩을 뒤져 보았다. 예상대로 P군의 전화번호는 거기도 없었다. 그런데 수첩을 들추다 보니 P군과 비슷한 때 졸업했던 당시 정통부의 S군 전화번호가 있는 게 아닌가. 그래서 급히 S군에게 전화하고 혹시 P군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제 1년 후배인데, 그러잖아도 오늘 그 친구 결혼식입니다. 강남에 모 예식장이라는데 저는 갈 형편이 되지 못해 가질 못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알겠네.”라고 급히 전화를 끊으면서, 정말 천우신조(天佑神助)라고 생각했다. 예식 시작까지는 단 20분이 남았다. 택시기사에게 정황을 설명하고 빨리 달리라고 청했다. 그날도 일요일이었는데, 택시가 마치 거짓말처럼 신호등에 한 번도 막히지 않고 시원스럽게 도심을 빠져나가 아슬아슬하게 제 시간에 예식장에 닿았다. 택시에서 내리면서, 나는 마치 지옥에서 헤어난 기분이었다. 온몸이 땀에 촉촉이 젖어 있었고, 입술이 바짝 말라 있었다.

IV.

   주례를 오래 하다 보니 이런저런 일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재작년에는 드문 경사가 있었다. 내가 30년 전에 주례를 섰던 진주 경상대학교 Y 교수의 큰딸을 내가 또다시 주례 선 일이 그것이다. 같은 사람이 부모의 결혼과 그 자식의 결혼 모두를 주례하는 일은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Y 교수는 당시 내 연구실 조교였었는데, 이 친구 고향이 진주라서 그곳에서 결혼식을 거행했다. 당시만 해도 진주가 꽤 먼 곳이었다. 밤기차를 타고 여수를 거쳐 새벽에 진주에 도착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번에도 진주에서 결혼식을 했는데, 비행기로 쉽게 도착했다. 내가 Y교수 딸의 주례를 한 게 어제 같은데 Y교수는 벌써 외손자 재롱에 세월 가는 줄 모른다니 인류롸 세대는 이렇게 이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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