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올해가 4.19혁명이 일어난 지 쉰 한번째 되는 해이다. 그 화사했던 봄날, 핏빛 민주주의의 축제가 이미 반세기가 지나 저 너머 꿈결처럼 아련한 옛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당시 나는 연세대학교 정외과 2학년인 스무 살 청년이었다. 4.19 열풍이 지나간 후 한 열흘쯤 지나서, 교내 학생신문인 <연세춘추>에 기자로 들어갔다. 민주혁명의 열기가 나를 대학언론으로 이끌었던 것 같다. 5월 2일(월) 입사 후 첫 편집회의에 참석했다. 막 새로 배포된 연세춘추를 나누어 보며 회의를 하였는데, 아직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던 터라 모든 기자가 마치 열병 걸린 사람들처럼 무척이나 흥분돼 있었다. 논의가 다음 호 편집기획에 이르렀을 때, 한 선배 기자가 목소리를 높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음 호에서 <백양로>에 나온 ‘민족의 어머니’ 찾기 캠페인을 벌일 것을 제안합니다. 저희 4.19 취재과정에서 가장 인상적인 일이었잖아요. 그 분이 학부모인 것만은 확실하거든요.”

그러자 왁자지껄하는 가운데 모두 좋은 생각이라고 폭발적으로 동의했다. 뭔지 다른 기자들은 잘 아는 내용인 듯했다. 어리둥절해진 나는 급히 연세춘추의 인기코너인 <백양로>로 눈이 갔다. 거기에는 다음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연세춘추 제 202호, 단기 4293년 5월 2일)

그 글을 읽는 순간 내 머리가 하얗게 비워지는 느낌이었다. 바로 내 어머니 얘기였던 것이다. 매사에 부끄럼을 탔던 나는 우선 얼굴이 달아 견딜 수가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할 수 없이 내가 입을 떼었다.

 “말씀을 안 드릴 수 없어 드리는데, 실은 그분이 제 어머님입니다. 글의 앞 대목은 좀 과장이 있지만, 내용으로 보아 제 어머니인 게 확실합니다. 아현동 고개부터 데모대와 함께 하셨던 게 사실이고요. 이미 확인이 되었으니 부디 이 캠페인은 거두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내 얘기가 떨어지자, 방안은 놀라움과 흥분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리고 모두 이제 사람을 찾았으니, 캠페인은 그만두더라도 <전면 인터뷰>를 해야 한다고 야단이 났다. 

얼마 후 내가 다시 일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그냥 덮어 주십시오. 제 어머니가 인터뷰에 응하실 리도 없고요. 정 이 얘기를 키우신다면 제가 신문사를 나가겠습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얼마 후 P 편집국장이 결론을 내렸다.

 “아쉽지만, 여기서 이 얘기는 마무리합시다. 그래도 한마디는 해야겠네요. 안기자, 정말 대단한 어머니 두셨네요. 부럽습니다.”  

       II.

1960년 4월 18일, 자유당 독재와 3.15 부정선거에 저항하여 시위를 벌이던 고대생들을 경찰과 정치깡패들이 습격하여 무차별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전 대학가는 분노에 휩싸였다. 마치 거대한 폭발을 앞두고 타오르는 활화산 같았다.

그날 밤 어머니께서 내 방에 오셨다. 불안한 낯빛이 역력하셨다. 그러면서 내일 큰일이 터질 게 분명한데, 나도 참여할 것이냐고 물으셨다. 내가 “물론이죠. 이 지경에서 제가 어떻게 빠져요.”라고 답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걱정이 태산 같다며, “자중자애해라. 네가 삼대독자인 것도 명심해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곤  “네가 데모를 하면 나도 함께 하겠다.”라며 방을 나가셨다. 

이튿날 새벽 나는 돈암동 집을 나섰다. 머뭇거리다가 자칫 부모님과 승강이를 할 것 같아 아예 일찍 나선 것이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학교는 데모 준비로 분주했다. 11시 가까이에 전교생이 신축한 강당 앞에 모였다. 함께 불퇴전의 결의를 다지고 백양로를 따라 전진했다. 당시 연세대 전교생이 4천 명 미만이었는데, 어림짐작으로 그 반 이상이 참여했던 것 같다. 정외과가 앞장서는 바람에 나도 세 번째 줄에서 구호를 외치며 달려 나갔다. 데모대가 신촌 로터리로 가는 중간 지점쯤 오른편에 있었던 <하바나> 제과점 옆을 지날 때였다. 마침  고교 동창인 의예과 최정규 군이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내가 “정규야”하고 크게 소리치며 데모대에 합류하라고 손짓을 했다. 하얗고 앳된 얼굴의 정규는 수줍은 웃음을 띠우며 오른손을 가볍게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착하고 여린 친구라 나는 그가 데모대에 참여하지 않고 그냥 학교로 갔거니 했다. 그리고 우리는 질풍처럼 돌진했다. 그런데 운명의 신은 너무 가혹했다. 바로 이 최정규가 4.19일, 연세대학교의 유일한 희생자가 될 줄이야. 
  
이대를 지나 아현동 고개로 향하면서 우리는 계속 애국가를 합창했다. 많은 학생이 목맨 목소리로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렀다. 나는 계속  북받치는 속울음을 참느냐고 애를 썼다. 해방 후 첫 한글세대인 우리가 그간 학교에서 어설프게나마 민주주의를 배우고 이제 목숨을 걸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거리로 나섰다는 것이 스스로 너무 감동적이었다. 그 벅찬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순수하고 고귀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살신성인(殺身成仁)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서대문에서 광화문으로 향하는 길목은 노도처럼 밀려오는 데모대로 완전히 막혔다. 연세대 데모대는 어쩔 수 없이 도심 외곽을 한 바퀴 돌아 오후 1시가 넘어서야 뒤늦게 원남동, 안국동을 거쳐 옛 경기도청 앞, 동십자각 근처까지 진출했다. 현재 정부 중앙청사가 있는 건너편 무기고에는 많은 경찰이 포진하고 우리를 향해 총을 쏘아 대고 있었다. 그곳에서 피아간에 공방이 몇 시간 계속되었다.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쓰러졌다. 흰 가운의 의대생들이 피 흘리며 쓰러진 사상자들을 옮겼다. 그날 데모대의 규모에 비해 연세대의 희생자 수가 의외로 적었던 것은, 길이 막혀 우회하다보니 시간이 지체되어 경무대 가까이에서 벌어진 가장 치열한 피의 격돌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구호를 외치고 함성을 지르다가 다음 순간 몸을 땅바닥에 바짝 엎드리는 동작을 수없이 되풀이하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면서 끝내 우리는 이곳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봄꽃처럼 산화(散花)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간간이 내가 죽으면 슬퍼하실 조부모님, 부모님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오후 6시가 가까워지자, 피아간의 공방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경찰의 총격도 점차 가라앉았고, 지칠 대로 지친 학생들도 더는 진출이 불가능하자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때마침 멀리서 연기가 하늘로 치솟는 것이 보였다. 데모대가 정부 기관지로 온 국민 증오의 표적이었던 <서울신문> 사옥을 불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총격은 멈췄지만, 광화문 일대는 아직 흥분의 도가니였고, 한마디로 아수라장이었다. 나는 뒷길이 덜 위험할 듯해서 같은 돈암동 친구 P군과 중학동 골목으로 급히 접어들었다. 그때 한적한 골목 저 끝에서 “저놈들 잡아라.”하고 소리치며 경찰관 두 명이 총을 겨누며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게 아닌가. 무기고에서 막 해산하던 경찰관들이었다. 목소리와 행동으로 보아 술 취한 듯싶었다. 우리는 사력을 다해 뛰었다. 그러다가 골목을 꺾으면서 허술한 구멍가게 옆문으로 급히 숨어 들어갔다. 다행히 경찰관들은 그냥 지나쳤다. 

저녁 7시가 넘어 어둑어둑할 때 집에 도착했다. 내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노심초사하던 온 가족이 모두 춤추듯 기뻐했다. 안방으로 들어가니 어머님께서 누워 계셨다. 나는 “어디 아프시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께서 “말마라, 오늘 모자가 함께 일 치루는 줄 알았다.”라고 말씀하셨다.

      III.

어머니는 그날 아침 내가 일찍 집을 나선 것을 확인하고, 계속 연세대학교로 전화를 거셨다고 한다. 그러다가 연세대 데모대가 학교에서 출발했다고 하자, 급히 택시를 잡아타고 신촌으로 향하셨다. 그러면서 택시기사에게 “오늘 내가 댁의 차를 대절하였으니 시종 행동을 같이 하자”고 말씀하셨다는 얘기다. 

어머니가 연세대 데모대와 만난 곳이 아현동 로터리였다. 택시를 세워두고 급히 내려 데모대로 달려가셨다. 로터리를 돌면서 데모대의 속도가 조금 줄어든 틈에 앞줄부터 데모대를 헤집으시며 나를 찾으셨던 것 같다. 한복차림의 중년 부인이 데모대에 가운데 끼었으니 금방 눈에 띄었던 모양이다. 그러면서 학생들 손을 잡고, “조심해야지, 조심해야지” 하고 안타까워하셨다. 그러니 <백양로>에 쓰였던 ‘민족의 어머니’ 운운은 기자의 상상해낸 결과인 것 같다. 여하튼 그 소용돌이 속에서 어머니는 끝내 나를 찾지 못하셨다. 

데모대의 속도가 빨라지자, 어머니는 다시 택시를 타고 그 뒤를 따라 결국 중앙청 앞까지 가셨던 모양이다. 그리고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 학생들이 계속 구호를 외치자 놀란 어머니는 정말 “아이구, 얘들아, 앉아라 앉아”하고 목청껏 외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정말 모든 학생이 ‘내 아들’로 보이셨다는 말씀이었다. 이후 나를 따로 찾으려 애쓰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러니 <백양로>의 뒷부분은 사실 그대로 기술되었다고 보인다. 

그러던 중, 그날 한양대가 데모에 참여하지 않아, 혼자 거리로 뛰어나와 연세대 데모대에 합류했던 한양대생 한 명이 달려 나와 어머니를 힘껏 잡아챘다. 그 학생 눈에는 정작 학생들보다 데모대 앞에서 학생들보고 앉으라고 소리치는 내 어머니가 훨씬 더 위험해 보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끌려 나가지 않으려고 버티는 어머니를 강제로 택시에 태워 오후 4시경 돈암동 집으로 모시고 왔다. 그러면서 그 학생은 우리 식구에게 “죄송합니다. 그냥 계셨으면 무사하실 수가 없어 이렇게 무리를 했습니다. 시골에 계신 제 어머니 생각에 그만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라며 머리를 조아렸다는 것이다. 우리 가족이 하도 고마워서 이름이라도 알려 달라고 하니, “집을 알았으니, 나중에 한번 꼭 찾아뵙겠습니다. 다시 데모를 해야지요.”하며 부리나케 뛰쳐나갔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그때 비틀린 손 때문에 한동안 고생을 하셨다. 이후 우리 가족은 그 고마운 한양대생이 한번 찾아오기를 학수고대했지만, 그에게서 다시 아무 연락이 없었다. 

      IV.

이른바 <4.19세대>인 나에게 4.19는 순백의 백합처럼 온갖 순수한 정신의 결정체이다. 그때를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순수로부터 멀어져 가는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또 스스로를 채찍질 한다. 그런 의미에서 4.19는 우리 세대가 인생행로에서 <그 때 처럼>하며 되돌아 보는 꺼지지 않은 혼불이다.

나는 더욱이 그 역사적인 날, 어머니와 함께했던 아름다운 추억을 소중하게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날이면 <하바나> 앞에서 미소 짓던 최정규의 하얀 얼굴이 함께 떠오른다. 그래서 4.19가 돌아오면 더 애잔한 심경에 젖는다.


'삶의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업가형 총장과 학자형 총장  (0) 2011.05.08
'단순한 삶'을 향한 여정  (0) 2011.05.01
어머니와 함께 한 4.19  (4) 2011.04.19
이스라엘의 추억(2)  (4) 2011.04.08
이스라엘의 추억(I)  (3) 2011.03.25
연구년을 보내고 있는 M교수에게  (1) 2011.03.14
글쓴이 현강재 현강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현강재 현강 2011.04.19 17:52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서차관님, 그러잖아도 내가 김광규 시인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글 말미에 달았다가 빼었습니다. 그와는 일면식도 없지먼 나와 같은 1941년생, 당시 문리대생이었습니다. 저도 김시인의 시를 무척 좋아합니다. 위의 시를 통해 우리 모두가 '순수'를 잃고 속화되어 가는 자신들을 되돌아 보며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저는 4.19의 주제어는 '순수'라고 생각합니다.

  2. 신광식 2011.04.20 21:54 Address Modify/Delete Reply

    '어머니와 함께한 4.19'를 읽고 깜짝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왜 그런 사실을 내가 이제 알게 되었는지 분명 현강이 그 당시
    우리 몇몇에게는 애기 했을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아니면
    내가 기억력이 쇄퇴해서 그런가?...그도 아니면 현강이 숨기고
    있었던것인가, 햇갈린다. 아무튼 어머님은 대단하신분임을 새삼
    확인하지 않을수 없었다.그아들에 그어머님..자상하고 총명하셨던
    어머님을 다시 회상해 본다.

  3. 서남수 2011.04.22 11:42 Address Modify/Delete Reply

    4.19 현장의 모습을 이렇게 생생하게 그려주신 글은 처음 접해 봅니다. 직접 경험하지 못한 저로서는 약간은 박제화된 4.19였는데 부총리님 글을 통해 뒤늦게 그 생동감이 절절이 느껴집니다. 부총리님의 나라 사랑의 열정이 어디서 비롯했는지도 추측이 됩니다. 우리나라의 모든 어머니가 다 훌륭하시지만 부총리님 어머님은 참으로 특별하게 대단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 현실을 둘러보면 왠지 김광규 시인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생각납니다. 풍요의 댓가인지도 모르겠지만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4. 서남수 2011.04.22 11:57 Address Modify/Delete Reply

    4.19가 난 해에 9살이었던 저는 그에 대한 아무런 느낌과 기억이 없습니다. 그 순수한 시대 정신을 처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말씀드린 김광규 시인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는 시를 접하면서였습니다. 다소 막연했던 그 순수성의 구체적인 내용을 부총리님의 이번 글을 통해 확실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5.16과 그 이후의 정치사회적 변화를 통해서 그 순수의 시대정신은 장렬하게 그러나 소리소문없이 조용하게 사라져갔지만, 최근 중동 지역의 자스민 혁명을 바라보면서 그것이 다시 부활하는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온몸을 던져 불의에 저항하는 인간의 순수성은 과연 어디서 오는 것일까? 겨우내 죽은 듯 동면하던 창밖의 나뭇가지에서 파란 신록의 순들이 돋아나는 것을 바라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