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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이스라엘의 추억(2)

2011. 4. 8. by 현강

     I.

1996년 가을, 내가 이스라엘 공식방문에서 잠시 짬을 내 비공식적으로 두 번째 찾아갔던 곳은 텔 아비브에서 그리 멀지않은 곳에 위치한 작은 키부츠(kibbutz)였다. 그런데 워낙 시간에 쫓겨 그곳에 한 시간도 채 머물지 못했다. 한번 휙 돌아보고 책임자와 몇 마디 나누는 정도에 그쳤다. 그래서 면담, 토론 등을 통해서 보다 유용한 연구자료를 얻어 보려했던 당초의 내 계획은 무산됐다. 아쉽지만, 도리가 없었다.

그날 내가 방문했던 키부츠에서 얻은 전반적인 인상은, 한 때 샤피로(M. E. Spiro)가 <유토피아로의 모험>이라고 명명했던 키부츠 정착촌이 이제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는 느낌이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평화로웠고, 집단관리 방식이나 생활양식에서 바깥세상의 빠른 변화에 대응하려는 나름의 노력이 엿보였으나, 기대했던 키부츠의 전설적인 열정과 활력은 이미 찾아보기 어려웠다. 낙조를 보는 느낌이 역력했다. 키부츠는 인류가 시도했던 사회주의 실험의 마지막 희망이기도 했는데, 이처럼 쇠락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키부츠에 대한 나의 지적 관심은 오래되었다. 아래의 글에서 이미 실패로 귀결된 국가가 주도한 사회주의의 역사적 실험을 개관하고, 키부츠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보며 사회주의 공동체의 내일을 전망하고자 한다.

    II.

나는 1970년대 초 이래 북한, 소련, 동구 등 공산권 연구를 계속하면서 국가체제로서 사회주의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일찍이 간파했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이미 내가 유럽에서 공부하던 1968년 바로 지척에서 벌어졌던 <프라하의 봄>을 체험하면서 절감했던 일이기도 했다,

사회주의는 이념적으로 평등을 가장 앞세운다. 인간에게 평등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기적인 본성이 더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음을 숨길 수 없다. 때문에 평등질서를 국가차원에서 제도화하자면 불가피하게 강압적 수단을 크게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국가사회주의체제는 예외 없이 전체주의적 성향을 띠게 되며, 그 벌거벗은 권력의 그늘 아래서 자유는 억압되고 인간의 창의성은 메마르게 된다. 그 결과 어김없이 경제적 낙후가 찾아오고 관료화, 비인간화가 심화되어, 체제는 퇴영한다. 결국 이 나라들은 인류가 추구했던 자유, 복지, 인간화, 민주화 등 주요한 사회적 가치를 모두 잃어버리고, 끝내는 평등이라는 이상마저 허구화된다. 소련, 중국, 동구가 모두 이러한 역사적 전철을 밟았고, 이후 이 나라들은 대변혁을 겪으면서 나름대로 새 길을 찾고 있다. 이제 북한이 홀로 남아 역사의 큰 흐름에 저항하고 있지만, 조만간 체제변혁은 필지의 사실이 되고 말 것이다.

국가차원의 사회주의 실험 가운데, 많은 이론가들의 지적 관심을 지속적으로 자극했던 사례가 유고슬라비아의 이른바 <자치관리 사회주의> (self-governing socialism)였다. 티토가 주도했던 이 사회주의 모형은 소련식의 집권적 관료독재체제에 저항하여, 생산자의 자치적 결정과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주의 모형을 추구했던 역사적 체제실험이었다. 이 시도는 특히 그 사상적 단초를 이른바 <젊은 마르크스>의 소외극복과 인간화에서 찾았다는데서 큰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새로운 사회주의로의 꿈은 유고슬라비아의 권위주의적 정치. 행정적 환경과 기술 관료주의의 망령 때문에 끝내 꽃을 피우지 못하고 파행을 거듭하다가, 동구 붕괴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종언을 고했다.

키부츠는 국가차원의 사회주의 실험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사회주의 공동체 운동이 ‘사막을 꽃피게 하자’는 이스라엘의 이상 실현과 밀접히 연맥 되어 있고, 또 이 나라의 건국과 국민형성 및 사회발전에 크게 관여했다는 의미에서, 준(準) 국가적 체제실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키부츠는 세계 곳곳에 산재해 있는  민간차원의 소규모 자발적 공동체 운동과는 차이가 있다.

키부츠는 1970년대 까지 매우 융성했고, 이스라엘의 발전을 견인하는 주요 동력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 숱한 위기를 겪고, 1990년대 이후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최근 키부츠가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는 주장이 있으나, 아직 그 미래를 예단하기는 어렵다.

  III.

키부츠는 사회주의와 시오니즘이 결합된 이상주의 집단공동체이다. 초기 형성과정에 이념적 요소가 크게 작용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황량한 토지, 적대적 주변 환경, 육체노동의 경험조차 없는 초기 이민자들 등 제반 악조건 때문에 독립적 농업활동이 실질적으로 힘든 극한상황에서 태어난 공동생활의 양태이기도 했다. 키브츠는 연대감과 상호부조을 바탕으로 공동소유, 공동생산, 공동소비, 공동양육, 공동식사하며 모든 문제를 직접민주주의 방식에 의하여 자치적으로 결정하는 생활공동체이다. 한 마디로 그것은 대면적, 공동체적 생활세계 속에서 <전인격성>(full personality)의 발현을 추구하는 하나의 소우주였다.

거기에는 가입과 탈퇴의 자유가 보장되며, 사람들을 강제하는 공식적 제재가 없다. 또 거기에는 개인의 노력을 극대화시키는데 필요한 어떠한 물질적 유인도 없다. 농장이나 공장의 작업조는 자율적으로 움직이며, 그들이 지향하는 사회관계는 부버(M. Buber)가 말하는 <I-Thou>의 관계다. 사람들이 비제도화된 공동체적인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바깥세상을 풍미하는 인간 소외와 분절화, 그리고 억압과 착취를 멀리 쫓아낼 것으로 믿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은 땅에 대한 애착과 노동의 즐거움과 더불어, 지적이고 예술적 가치를 존중했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이른바 <땅의 인텔리켄챠>(landed intelligentsia)의 이미지를 추구했다. 그래서  낮에 땀 흘려 일하고, 저녁에 말쑥하게 차려입고 음악회에 참여했다. 이처럼 평균적 키부츠인은 문화적, 예술적 참여와 경험을 즐겼다.

공동체 이익에 헌신하는 키부츠인 1세대들의 열정과 개척정신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재건신화’의 주축이 되었고, 농업과 가공농업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는가 하면, 국방의 전초지로서의 구실도 톡톡히 했다. 그런가 하면 창조적 문화 활동을 통해 히브리 문화부흥의 주요 원천이 되었고, 효율적 사회화를 통하여 이스라엘 사회의 주요한 엘리트 그룹을 배출했다. 1970년대 말까지 키부츠는 번창했다. 전성기 키부츠 인구는 이스라엘 인구의 4%미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들 공동체에 의해 가용농지의 1/3기 경작되었고, 농업생산의 1/3, 그리고 공업생산의 12%를 산출했다. 키부츠 구성원들은 농민이고 노동자였으나, 충만한 성취감 속에 중산층의 생활양식을 누렸다.

그러나 키부츠라는 사회주의적 협동공동체는 문화적으로 자본주의적 다원주의 사회에 대한 반(反)문화를 대표한다. 따라서 양자 간의 괴리와 상충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했다. 그것이 폭발적으로 나타난 것이 1980년대 이후였다. 사회주의의 퇴조라는 큰 흐름 속에 세계화의 파고가 높아지면서 이스라엘 사회는 날이 갈수록 자본주의 문화와 관행에 깊숙이 물들어 갔고, 그 격류는 물밀처럼 키부츠로 밀려들어왔다. 한 때 이스라엘이라는 초(超)체계에 강한 생명력을 불어 넣으며, 힘차게 그를 견인했던 키부츠가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지배문화의 막강한 영향력 앞에서 점차 그 생존마저 위협받기에 이른 것이다.

주류사회와의 괴리가 커지면서  그 주요 사회가치에 대한 키브츠의 일체감이 흔들렸고 그것이 생활양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생산력이 떨어지고 부채도 증가했다. 내적 계층화와 불평등도 증가했다. 무엇보다 젊은이들이 집단문화에 염증을 느끼고 키부츠를 떠나기 시작했다. 키부츠 1세대가 지향했던 금욕생활과 단순한 삶, 생활양식으로서의 농업과 노동은 이제 더 이상 젊은 세대를 붙잡아 둘 수가 없었다. 젊은이들은 풍성한 고용기회 속에 일에 대한 사회적 보상이 따르고, 사치와 즐거움이 넘치는 도시의 ‘근사한 삶’(the good life)의 유혹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회변화에 맞서는 키부츠의 대응전략도 만만치 않았다. 키부츠 고유의 생명력과 적응력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키부츠는 기존 가치와 생활양식에 대한 교조적인 집착을 하기보다 과감하게 실용주의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평등주의, 공동체적 삶, 육체노동 등 기존가치에 대한 창조적 수정까지 서슴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들은 각자의 개인 가치와 취향, 그리고 개인적 삶의 공간에 대해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프라이버시, 자아주체성, 자아실현 욕구에 대한 배려가 그것이다. 공동샤워장, 공동화장실을 함께 쓰는 공동생활 형태가 이제 개인욕실을 갖춘 개인아파트로 바뀌고 있다. 공동육아 방식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육체노동 이외에 지적 능력의 중요성을 폭넓게 인정하고 전문성 추구의 기회도 크게 넓혔다. 그런 가운데 대부분의 키브츠는 사회변화에 발맞춰 제조업 및 서비스 분야로 크게 진출했다. 처음에는 모든 키브츠가 자급자족적 농업공동체로 출발했으나, 이제 농수산 부문의 비중은 불과 15% 수준이다. 그러면서 사회적 보상의 방식에 따라 다양한 키부츠의 유형이 형성되었다.

키브츠의 이러한 자체 노력에도 불구하고, 급격한 변화의 물결은 키부츠의 주요한 가치인 평등의 원칙을 크게 침식하기에 이른다. 우선 외부 노동력의 유입의 비율이 이미 70%에 이른 오늘, 이에 따는 임노동의 문제는 매우 심각한 지경에 다 달았다. 어디 그 뿐인가. 1990년 이후 가속화된 민영화 바람은 대부분의 키부츠에 영향을 주어, 현재 전체 키부츠의 약 70%에서는 식당과 세탁 분야 등이 민영화되었다. 1909년에 창설된, 전설적인 최초의 키부츠 <데카디아>도 그 흐름에 동참했다. 차등임금, 성과급, 개인계좌 개설, 서비스 요금 지불도 이제 폭넓게 확산됐다. 주민투표로 선출된 사람들이 맡았던 키부츠 운영은 점차 전문 경영인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격류 속에서, 개인소득을 인정하는 등 사회주의 색채를 크게 덜어 낸 이른바 ‘개신 키부츠’(renewing Kibbutz) 모형이 약 70%에 이르렀다.

키부츠 거주민 비율은 건국 당시 이스라엘 전체 인구의 6%에 가까웠다. 이후 오랫동안 3-4% 수준을 유지하였으나 2005년 이후 2%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은, 사회주의 색채가 약화되면서 최근 키부츠의 인구가 크게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전에 키부츠를 떠났던 주민들도 되돌아오고, 도시생활을 접고 새로 귀향하는 인구들도 적지 않다, 평등지향의 공동체적 규율이 느슨해지고, 개인적 가치의 수용의 폭이 넓어지면서 키부츠는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이처럼 사회주의 공동체인 키부츠가 자신의 핵심가치인 평등주의를 덜어내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는 사실은 실로 아이러니하다. 이것은 키부츠가 과감한 변화를 통해 살아남았다는 얘기이면서, 다른 한편 이념적 맥락에서 볼 때, 이미 한 시대의 종말에 이르렀다는 얘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IV.

그렇다면 키부츠가 그간의 숱한 역경과 위기에도 불구하고 1세기 이상 지속되면서 전 세계로부터 지속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는 놀라운 생존력과 매력의 원천은 무엇인가. 도대체 키부츠가 역사적 실패로 낙인찍힌 국가사회주의와 다른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인가.

첫째, 키부츠는 모든 것이 자발성에 기초하고 있다. 누구나 자유의사에 따라 키부츠라는 공동체적 삶의 양식을 선택, 가입하며, 또 자유롭게 거기서 탈퇴할 수 있다. 거기에는 전통적 형태의 아무런 법적 강제도 없으며, 일탈행위에 대한 사회적 통제도 공동체의 여론과 자기규율에 의해 수행될 뿐이다, 따라서 키부츠는 평등을 지향하되 그것이 자유의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또한 입. 퇴가 자유롭기 때문에 키부츠는 고인 물이 아니라 흐르는 물이며, 그 때문에 정체(停滯)하지 않고 유동한다. 따라서 바깥세상과 동태적 균형을 이루며 자기 쇄신을 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한다.

두 번째, 키부츠는 이념적으로 초창기 이래 교조적 성격보다는 실용주의적 색체가 강했다. 따라서 항상 변화에 창조적으로 적응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키부츠는 이스라엘이라는 초체계의 변화, 특히 그 산업발전과 사회문화적 변화에 비교적 슬기롭게 대응했고, 기본적으로 공동체적 삶을 추구하면서도 개인적 삶의 공간을 마련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이 지향했던 인간상이 평등주의적 전사(戰士)가 아니라 공동체적 삶 속에 노동과 지성을 겸비한 <종합적 인격>(synthetic personality)이었다는 사실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때문에 그들은 국가사회주의체제와 달리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추구했다.

역사적으로 돌아 볼 때, 키부츠는 이스라엘이 절박한 상황일 때, 특히 국난의 위기에 처할 때, 더 빛을 발했다. 아직도 키부츠는 이스라엘 국내외의 유태인들에게 ‘마음의 고향’으로 남아있다. 분명한 것은 전에 비해 크게 퇴조한 오늘까지도 키부츠는 전체 인구 중에서 그 주민이 차지하는 비중에 비해 이스라엘 사회에 더 큰 기여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세계를 풍미하는 신자유주의의 물결과 매스컴의 폭주 등 바깥세상의 급격한 변화에 따라, 키브츠와 이스라엘 간의 사회적 교환관계에서 큰 사회에 대한 키부츠의 기여가 점차 줄어드는 반면,  스스로는 큰 사회의 압도적 영향력 아래 들어가기에 이른 것이다. 여기서 양자 간의 동태적 균형이 깨어졌다.

    V.

키부츠를 되돌아 보며, 사회주의 공동체를 자본주의적 현실세계에서 실천한다는 일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점을 다시 절감한다. 그것이 지닌 <유토피아의 이상>이 인간의 본성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속에 고른 사회에 대한 지향과 공동체적 유대에 대한 향수가 남아있는 한, 앞으로도 작고 큰 사회주의적 실험은 계속되리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세계 곳곳에는 넓은 자본주의의 바다위에  점점이 솟아있는 외로운 섬처럼 작은 사회주의 공동체가 무수히 산재하고 있다. 그들은 앞으로도 명멸(明滅)을 계속하며 인간사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키부츠가 오랜 풍파 속에서도 놀라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평등을 추구하되, 개인적 자유를 바탕으로 하여 왔고, 또 그 역사적 실험을 교조적이 아닌, 실용주의적 방식으로 접근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키브츠는 반문화의 요람으로서 이스라엘의 자본주의적 주류문화에 활력을 불어 넣고, 또 그를 정화(淨化)하는데 큰 몫을 해온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키부츠의 존재는 이스라엘에게 하나의 축복이었다. 분명 키부츠의 존재와 그 역사는 앞으로 시도될 다양한 사회주의적 실험에 값진 교훈을 물려 줄 것이다.

인간은 내심 깊은 곳으로부터 자유와 평등을 함께 갈구하고 있다. 따라서 그 어떤 역사의 실험도 자유와 평등 중 그 어떤 하나의 가치만을 앞세우고 다른 가치를 방기하면서 성공하는 예는 없다. 따라서 자유와 평등의 변증법적 조화,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체제 모형이며, 이 점은 우리가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압도적 물결 속에서도 잊지말아야 할 명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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