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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개고기 유감(有感)

2010. 12. 13. by 현강

  I.
나는 식성이 까다롭지 않아 어떤 음식이든 잘 먹는다. 제때, 얼마간 양만 채우면 되니 미식가와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외국에 가도 음식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유독 개고기만은 먹지 않는다. 못 먹는 다기 보다 안 먹는다.

그렇다고 ‘개고기 논쟁’에서 ‘먹지 말자’라는 쪽에 서서 내 입장을 피력해 본 적은 없다. 오히려 우리 민족이 옛 부터 즐겨 먹던 기호 식품이니 먹는 게 뭐 그리 문제 될 게 있느냐는 입장이고, 그래서 외국 사람들이 개고기 먹는 문제를 갖고 시비를 걸 때면 불쾌한 심경이 앞선다. 그러나 나 스스로는 개고기를 전혀 입에 대지 않는다.

 나는 천주교 신자인데, 특히 한국 천주교인들은 개고기를 즐겨 먹는 편이다. 이는 옛날 천주교 박해 때  깊은 산골로 피신했던 믿음의 선조들이 먹을 게 별로 없어 개를 잡아 단백질을 보충했다는 아픈 기억과 맥이 닿는다. 그 외에도 배고팠던 시절 신학생들이 최고의 특식으로 개고기를 들었다는 얘기, 한국 천주교회의 최초의 한국인 주교이셨던 노대주교님이 특히 보신탕을 좋아하셨던 일화 등, 천주교회 주변에는 개고기 선호 성향을 부추기는 전설이 무수히 많다. 그래서인지 과거 천주교회의 모임 후에는 으레 보신탕 집으로 향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때마다 나는 무척 곤혹스러웠다. 핑계를 대고 빠지거나, 그게 여의치 못하였을 때는 눈총을 받으며 나 혼자 개고기 아닌 다른 것을 청해 먹곤 했다. 그럴 때면 아예 대 놓고 “아니 천주교 신자가 개고기를 마다하다니”하며 면박을 주는 분도 없지 않았다.

 옛날 내가 유럽 유학시절, 한국에서 20년 가까이 사제로 봉사하셨던 오스트리아 신부 한 분을 찾아뵌 적이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 신부님이 심한 독감에 걸려 몸져누워계셨다. 보기가 딱해 내가 무엇 드시고 싶으신 게 있느냐고 여쭸다. 그랬더니 신부님은 진지하다 못 해, 애절한 얼굴로, “보신탕 한 그릇이면 그냥 뚝 떨어질 것 같은데.” 하시는 게 아닌가.

 나와 가까운 친구 중에도 보신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 여름 한 철에는 아예 만나는 장소를 구기동 유명 보신탕집으로 잡는 때도 있다. 그들도 내게 왜 먹성 좋은 사람이 그 좋은 개고기를 멀리하느냐고 따져 묻곤 한다. 나는 그럴 때마다, “아니, 그냥......” 하고 얼버무리곤 했다.

 

II.
내가 열 살 무렵 하루는 어머니께서 내게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다.

 “네 태몽 얘기를 해 주마. 꿈에 누가 온 듯해서 대문을 여니 예쁜 동자승이 문 앞에 합장하고 서 있었다. 어린 탁발승인데 행색이 너무 깨끗하고 단정해서 눈이 부실 정도였다. 내가 급히 마주 합장을 하고 듬뿍 시주했다. 그리고 곧 너를 가졌다. 그래서 이 애가 불가와 인연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너를 낳고 보니 목 밑으로 마치 염주 자국 같은 줄이 둥글게 새겨 있어 무척 놀랐다. 아직도 네 목에 선명하게 염주 자국이 있지 않니.”

 “우리야 천주교인이지만, 내 직감에 네가 불교와 인연이 있는 것 같다. 그러니 가능하면 불교의 규율에도 관심을 뒀으면 한다. 그러니 고기를 너무 즐기지 말고, 특히 불가에서 금하는 개고기는 먹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머님 말씀에 나는 그냥 웃으면서 경청했던 기억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언의 약속으로 여겨졌다.

 목 밑에 염주자국은 커가면서 점차 희미해지더니 고등학교 1학년 무렵 완전히 사라졌다. 또 태몽 말씀 이후 어머님은 한 번도 내게 ‘개고기 먹느냐?’라고 따져 묻지 않으셨다. 그러나 나는 개고기 먹는 일로 갈등을 느낄 때마다, 그것을 삼가라는 어머님 말씀이 항상 귓전에 맴돌았다.

 어머님 말씀이 따로 없으셨더라도 내가 개고기를 즐겨 먹었을 것 같지는 않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집에서 개를 키웠고, 개를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편안 마음으로 그 고기를 즐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참고로 우리 식구 중 개고기를 먹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런데 누구도 어떤 뚜렷한 신조 때문에 그런 것 같지는 않다.



 III.
특별히 불가와 인연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나는 젊어서부터 절에 가기를 즐겼다. 워낙 산을 좋아하기 때문에 산을 찾는 것인지 절을 찾는 것인지 분명치 않으나, 대학 때도 방학이면 공부 핑계로 산사에 가서 한참을 머물 곤 했다. 그 버릇이 그대로 이어져 유럽에 유학 가서도 1968년 여름 방학 때 두 달 깊은 산 속 천주교 수도원에서 지낸 적이 있다. 그러면서 한국의 절에서 나를 감쌌던 적요(寂寥)와 무심無心)을 그곳에서도 똑같이 체험할 수 있어 놀랐다. 지금도 수도원 교회 미사 시간에 들었던 청아한 성가 소리를 잊을 수 없다. 나는 작년 늦가을 구례 화엄사 구층암에 며칠을 머물렀다. 그때 새벽 예불에 느꼈던 감동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나는 불교가 육식을 피하고 채식을 강조하는 것을 높게 평가한다. 거기에 심오한 고뇌와 철학이 담겨 있다고 본다. 그 생각의 저변을  되짚어보자. 사람이 아무리 고등동물이라고 해도 동물이 아닌가. 그런데 생존을 위해 불가피하다 해도 아무 거리낌 없이 같은 동물인 소나 돼지를 식용으로 한다는 게 도시 너무 심한 일이 아닌지.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아픔을 느끼고 생존욕구가 있는데, 저 살자고 남을 잡아먹으며, 그것을 식도락(食道樂)으로 삼는다니 어디 될 법한 일인가.

 <간디 자서전>(함석헌 역, 1983)을 보면, 간디도 영국 유학길을 떠나며 고기를 먹지 않기로 한 어머니와의 약속 때문에 육식을 삼갔다. 그러다가 그가 평생 추구했던 ‘진리를 향한 실험’ 과정에서. 채식주의가 올바른 길이라고 굳게 믿게 되면서 신념으로서의 채식주의자가 된다. 그 확신에 이르기 까지, 또 그 이후 채식주의를 지키는 과정에서 그는 깊은 갈등을 겪는다. 나는 그가 채식주의자라는 사실보다, 이 문제로 크게 고뇌하는 간디의 모습이 그의 고결한 품성을  반영한다고 생각되어 더 아름답고, 그 답게 느껴진다. 이름 그대로 그는 ‘위대한 영혼’ (‘마하트마’)이었다.

서양 사람 중에도 채식울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육식을 삼가는 등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절제하려는 노력은 불교와 간디의 철학처럼 다분히 ‘동양적’ 사고와 맞닿는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내가 그 길을 따르지는 못해도, 더 가까이, 더  좋게 느껴진다.

이러 저러한 생각을 할 때, 내가 개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잘한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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