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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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계한 친구들의 전화번호
I 나이가 80대 중반에 이르니, 가까운 친구들 다수가 세상을 떠났다. 얼마전 내가 나온 고등학교 홈 페이지에 들어가니 동기생들의 “생존률 52.5%”라고 공지되어 있었다. 한국 남성의 평균수명이 81세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 나이에 고교 동기가 아직 반 이상 살아있다니 매우 준수한 성적이다. 그러나 앞으로 친구들의 부음을 더 자주 듣게 될 터이고 그때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과의 옛 추억의 편린들을 되살리며 인생무상을 체감할 것이다. II. 내 핸드폰 연락처>란에 친구들을 비롯해 가까운 지인들의 전화번호가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내가 오래전 이곳 강원도 고성으로 내려온 후 서울과의 교류가 뜸해져 실제로 거기 담긴 이름들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연락처를 살펴보면 거기에 이미 ..
2024.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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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이면 생각나는 사람
I. 2004년 4월 1일, 새벽 2시, 나는 노무현 정부의 교육부총리로 를 개통했다. 지금부터 꼭 20년 전 일이다. 그런데 그 것은 내가 이미 1997년 7월 김영삼 정부의 교육부 장관으로 천심만고 끝에 을 출범시킨 지 7년 가까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만사가 지나고 보면 다 때가 돼서 자연스레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일을 주도하는 입장에서 보면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일대 결전일 때가 많다. 위의 두 번의 프로젝트가 다 그랬다. 특히 e-러닝 시대의 총아인 인터넷 서비스의 개통은 최대 10만 명이 동시에 접속할 수 있는 사상 초유의 대형 실험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고 그 과정이 무척이나 힘겨웠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동영상 서비스 사이트 중 가장 큰 것이 접속 2만 명 미만이었다). 그 ..
2024.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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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님 인터뷰
내가 2003년 8월 27일, 중도를 표방하며 새로 출범한 인터넷 신문 창간호(아래 인터뷰/기사/카툰 참조)를 위해 김수환 추기경님께 조심스레 인터뷰를 청했더니, 어른께서 흔쾌히 수락하셨다. 당시 추기경님께서는 오래동안 바깥 세상과 멀리 하시며 장기간 신문 인터뷰를 전혀 않하셨던 시기라, "그럼 해야지요"라는 말씀에 순간 마음이 뜨겁게 북받쳤다. 인터뷰는 물흐르듯 이어졌다. 담담한 어조셨지만, 강조하실 대목에서는 힘주어 말씀하셨다. 인터뷰를 마치고, 신앙에 관해 한참 말씀을 나눴다. 돌이켜 보면 더없이 귀하고 소중한 추억이다. 이 인터뷰에는 노무현 정부 초기에 김수환 추기경님의 시국관이 고스라니 담겨있다. 아래 창간호에 내가 쓴 인터뷰 기사를 그대로 옮긴다. 김수환 추기경 창간 인터뷰 김수환 추기경은 우..
2024.02.18
자전적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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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학계 데뷔 첫날 풍경
I. 나는 1970년에 오스트리아 빈(Wien) 대학에서 공부를 끝내고, 이듬해 초에 귀국했다. 돌아와서 한 달이 채 못 되었을 때쯤, 한국정치학회 총무이셨던 동국대학교의 이정식 교수님께서 전화로 내게 곧 열릴 학회에서 연구발표를 할 것을 청하셨다. 나는 얼떨결에 수락했다. 1971년 2월 초, 연구발표회는 성균관대학교의 계단강의실에서 열렸다. 발표자는 두 사람, 이영호(李永鎬) 교수님과 나였다. 이 박사님은 연세대 정외과 내 6년 선배로,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학위를 마치고 조지아 대학교 정치학과에서 조교수로 강의를 하시다 그 전해에 귀국, 이미 이화여대 정외과에 채용이 결정되신 기존 학자셨다. 원래 이분 단독으로 발표하실 예정이었는데, 내 귀국 사실이 알려져 학회에서 급히 내게 연락을 주셨던 것이었다..
2024.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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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춘추와의 인연(III)
I. 나는 가끔 /Annals 주간 시절이, 참으로 힘겹고 어려운 시간이었는데, 왜 강렬하고 아름다운 색깔로 내 뇌리에 자주 떠오를까 의아할 때가 많다. 또 그 때의 고생스러웠던 큰 기억들은 시간과 더불어 점차 퇴색하고, 당시에 소소하고 단편적이었던 한 컷, 한 컷의 즐거웠던 작은 순간들이 덧칠되고 미화되어 밀도 있게, 또 낭만적으로 추억되는지 신기할 때가 많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고통 속에서 겪는 작은 행복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존재인 것 같다. '연세춘추와의 인연(I)'올 올린 후, 당시 기자였던 안인자 교수가 내게 문자를 보내, “춘추와 함께 한 1년 반은 참으로 제 생의 황금기였어요”라는 술회했다. 나는 “와! 이 친구들도 그 시절을 아름답게 추억 하는구나”라는 생각에 조금 놀라고 크게 기뻤다..
2021.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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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춘추와의 인연(II)
I. 연세대 백양로를 따라 걷다 보면, 본관 가까이 왼편에 나지막한 언덕이 나온다. ‘시인의 언덕’이라 불리는 이 언덕 위에 윤동주 시비(1968년 건립)가 있고 그 뒤편에는 2층 규모의 고색창연한 작은 석조건물이 하나 있다. 당시 가 이 건물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건물은 일년 사계절을 늘 아름답게 품에 안았고, 돌집이라 특히 여름에는 시원했다. ‘핀슨홀(현 윤동주 기념관)’로 불리는 이 건물은 1922년 연희전문학교의 기숙사로 지어졌는데, 윤동주 시인이 1940년 후배 정병욱(훗날 서울대 국문과 교수)과 함께 하숙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까지 2년여를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연세대 캠퍼스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인 이 건물은 밖에서 보면 2층이지만, 내부로 들어가며 다락층도 있어 실제로는 3층인 ..
2021.0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