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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학자의 서가에 오래 남는 책들

2010. 9. 5. by 현강

교수직에 오래 있다 보면 느느니 책이다. 대학 연구실에 서가는 이미 책과 각종 자료 등속으로 빽빽이 들어차고 아예 연구실 바닥까지 책들이 수북이 쌓인다. 대체로 집안 형편은 더 심각하다. 서재에 책이 넘쳐, 마치 거친 물결 같은 기세로 안방, 거실, 심지어는 다용도실 까지 들어찬다.

그러다 보니 가족들 불평도 만만치 않다. 서재가 필수적이니 적어도 방하나는 더 있어야 하고, 집 전체가 고서방 처럼 변모하니 집안 꼴이 말이 아니다. 더욱이 이사 갈 때 그 많은 책 꾸러미 때문에 온 가족이 겪는 어려움은 필설로 다하기 어렵다.

단독 주택에 살았던 내 경우는 그래도 형편이 훨씬 낳았다. 그러나 내 처도 “보지도 않는 책들을 왜 그리 쌓아 두느냐”고 볼멘소리를 자주 했다. 실제로 대부분의 책은 일 년 가야 한번 들여다보지 않는 게 사실이다. 그럴 때면 나는 으레 “당장 보지 않아도 그 책들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못 한다”고 항변했다. 그러면서 정년 할 때는 다 정리할 터이니 기다리라고 달래곤 했다.

실제로 정년을 몇 년 앞두고부터 나는 책을 과감히 줄이기 시작했다. 우선 내 관심에서 이미 멀어진 분야의 책들, 그리고 불요불급한 책들을 골라 해 마다 지방에 있는 몇 대학과 도서관에 나누어 보냈다. 그런데 실제로 보낼 책들을 고르는 일이 그리 수월치 않았다. 책 마다 그 나름의 애틋한 사연이 있기에 한 권, 한 권 내 손에서 떼어 놓을 때 마다 가슴이 저리고 망설여졌다. 마치 그 간의 내 삶의 역정이 조금씩 사그라져 가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2007년 2월 정년 무렵에는 어렵사리 책을 반 이하로 크게 줄였다. 연구실을 비우자니 불가피한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올 봄에 큰맘 먹고 다시 대폭 줄였다. 이번에는 골라서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는 방식을 택했다.

그런데 며칠 전 나는 서가에 아직 남아 있는 책들을 둘러보다 크게 놀랐다. 이들 책들의 대부분이 역사와 철학 연관 서적들이 아닌가. 그리고 이들 책들의 주조(主潮)도 고전적인 것들이었다. 그렇다면 그 많던 행정학, 정치학 책들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가.

나는 대학에서 행정학을 주로 가르쳤다. 그러면서 기능적, 미시적, 관리적 접근 보다는 이론적, 거시적, 정책적 접근에 역점을 두어 교수했다. 또 나는 연구 차원에서 정치학을 비롯한 다양한 인접 학문의 경계를 자주 넘나들었다. 그래서 내가 소장한 책들은 꽤나 광범위하게 사회과학 여러 영역에 펼쳐 있었다. 그런가 하면 원래 관심이 컸던 역사와 철학 서적들도 심심찮게 모았다. 그런데 근년에 내가 소장한 서적들을 넘겨주는 과정에서 부지불식간에 하나의 선별방식을 마음에 세웠던 듯하다. 아마도 그 것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 최신의 것, 기능적인 것들을 앞서서 내어 주고, 대신 세월을 넘어 서는 것, 고전적인 것, 본질적인 것을 계속 곁에 두자는 게 아니었나 싶다. 그러다 보니 일생 전공했던 행정학, 정치학 책들은 크게 줄었고, 이들 분야 중에서도 역사와 철학과 연관된 고전적인 내용의 것들, 그리고 아예 본격적인 역사와 철학 서적들만이 서가에 남게 된 것이다.

실로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였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격변하는 세상에서 본질과 고전에 대한 향수가 짙게 일은 걸까. 아니면 내 공부 성향이 워낙 그런데 이제야 제 길을 찾은 걸까. 혹 내가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채 이런 방식으로 앞으로 내가 관심을 갖고 탐구할 분야를 결정해 버린 게 아닌가.

그리고 보니 내가 최근 한국 고대사에 관한 평소의 관심을 되살려 준 학술지인 <한국사 시민강좌> 47호에 <고대사 논쟁에 부쳐>라는 글을 썼던 일도 예사롭지 않게 기억되었다. 아니 그렇다면 내가 이미 그 길에 들어 선 게 아닌가.

일이 어떻든 간에 전공에 매달릴 때 보다 전공의 언덕을 넘어 보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고전과 본질 추구의 세계로 발을 내디딘 요즈음이 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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