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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한 이발사와의 추억

2010. 9. 5. by 현강

  나는 1980년대 초, 중반에 몇 년간 서울 여의도에 살았다. 당시에도 머리는 동네 목욕탕에서 깎았다. 그러다 보니 언제나 같은 이가 머리를 만졌는데, 내 나이 또래의 이발사는 매우 유식하고 세상물정에 밝은 이였다. 또 대단한 이야기꾼이어서 조발을 하면서 끊임없이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재미있게 엮어갔다. 특히 정치얘기를 많이 했는데, 언제나 정보가 풍성했고 관점도 날카로웠다. 나는 그의 열정적인 얘기에 자주 빨려 들어가곤 했다.


  시간과 더불어 그는 점차 얘기하는 쪽이 되었고 나는 대체로 열심히 경청하는 쪽이 되었다. 그는 얘기 도중 가끔 “아시겠어요” 라고 되물어서,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면 나는 황급히 “아, 그럼요” 라고 맞장구를 쳤던 기억이다. 내 쪽에서 말수가 적었던 것은 그의 능숙한 언술에 압도된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의 논변에 빈틈이 없어 내가 이의를 제기하거나 별로 덧붙일 게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여하튼 나는 당시 그의 정치평론을 내심 높게 평가했고 그와의 대화를 진심으로 즐겼다. 그도 더없이 착실한 수강생인 나를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 내가 목욕탕에 나타나면, 손을 번쩍 들며 크게 반기곤 했다. 하지만, 한 번도 그가 내가 뭐하는 사람이냐고 묻지 않았고, 나도 구태여 내 신분을 밝힐 필요가 없었다.

 

  내가 그의 단골이 된지 두어해 지난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발을 끝내고 막 목욕탕으로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어떤 이가 “아니 교수님, 여기서 뵙다니요.”라고 큰 소리로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돌아다보니 전에 가르쳤던 옛 제자였다. 서로 벗은 채로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다시 탕으로 들어가다가 뒤를 돌아보니, 그 예의 이발사가 심상치않은 낯빛으로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고, 내 제자는 머리를 깎으려는 듯 그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내가 목욕을 끝내고 나오자 이발사는 무척이나 화가 난 모습이었다. 얼마간 격앙된 목소리로 “교수님, 그러시는 데가 어디 있습니까. 그동안 저를 데리고 노신 것 아닙니까?”라며 거칠게 항의했다. 그는 내 제자를 통해, 내가 대학교수이고 일간 신문에 자주 정치평론을 쓰는 컬럼니스트라는 얘기를 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런 나에게 그동안 으스대 왔으니 한편 부끄럽고, 다른 한편 내게 크게 당한 느낌이라는 것이었다. “속으로 같잖다고 오죽 우스셨겠어요”라고도 말했다.


  실제로 당황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에게 그간 그가 펼쳐 온 정치식견은 정말 뛰어 났고 내가 항상 깊은 공감 속에 진지하게 경청했으며 내 글에도 크게 반영되었다는 점 을 누누이 강조했다. 아울러 기회가 없었을 뿐 내 신분을 감출 뜻이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좀처럼 화를 풀지 않았다. 그는 내가 때 없이 낮 시간에 이발하러 오고 항상 편한 차림이어서 “그냥 동네상가 사장님이시거니 했지요”라고 덧붙였다.


  그 후로도 나는 그를 계속 찾았다. 그러나 그는 말수가 크게 줄었고 훨씬 조심스러워졌다. 오히려 내게 묻는 경우가 많아졌고, 그 때마다 “교수님, 교수님”하며 한껏 예의를 갖췄다. 그에겐 내가 이미 예전에 내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이발 중 즐겨 듣던 그의 명강의는 이미 옛사랑의 그림자가 되었고 그와의 대화가 예전처럼 즐겁지가 않았다.


  알량한 내 신분이 노출되면서 그와의 순수하고 자연스러웠던 소통이 한순간에 허물어지고, 두 사람 간의 관계도 결정적으로 금이 갔다. 안타까운 일이 지만 어찌 손쓸 길이 없었다. 내 마음 속에 깊숙이 자리 잡은 진정성 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직업, 신분, 차림새 등 우리가 껴입고 사는 허울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회적 장벽이 세상에서 더 위세를 발휘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우리가 산과 숲, 나무와 꽃 앞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언제나 마음을 여는 것은 자연을 접할 때 그들이 그렇듯이 우리는 아무 겉치레 없이 벌거벗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우수가 지났다지만 아직도 긴 겨울밤에, 몸에 허울을 덮어쓰기 전에 만났던 어릴 때 옛 친구들 생각이 더 나는 것은 그들이 나에게 언제나 풋풋한 자연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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