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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바로 1년 전 오늘

2020. 4. 4. by 현강

    I.

고성 산불이 난지 벌써 오늘로 만 1년이 되었다.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집이 전소되고 무엇보다 그간 책을 쓰려고 모았던 온갖 자료들, 특히 애지중지 간직해 온 USB 열 개까지 모두 잃은 후 너무 허망해서 한동안 넋이 나간 느낌이었다. 곧바로 새로 컴퓨터를 사고 다시 글을 쓸 채비를 했으나, 도무지 책상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컴퓨터 앞에 앉았다가도 한숨 크게 쉬고 손가락만 몇 번 만지작거리다가 그냥 일어나기가 일수였다. 몸은 멀쩡한데 마음이 따르지 않았다. 그렇게 1년을 보냈다.

 

그런데 그나마 내 마음을 잡아준 것은 농사일이었다. 산불이 났을 때, 이미 농사철에 접어들었고, 그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농터와 알뜰히 가꿨던 대부분의 과수는 다행히 큰 피해 없이 화마를 피했고, 파릇파릇 솟아오르는 나무의 새싹들이 초토화된 주위 산림과 묘한 대조를 이루며 내 마음을 움직였다. 자식들이 이 기회에 시골 생활을 거두고 서울로 올라오라고 성화를 했지만, 단 나흘 서울에 머물다가 다시 고성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열심히 농사에 전념했다. 그러면서 마음이 가라앉았다.

 

   II.

작년 오늘, 이맘때면 늘 찾아오는 양강지풍(양양과 간성사이에 부는 국지성 강풍)’이 기승을 부려, 초속 30m에 이르는 대형 태풍급 강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게다가 몇 달째 비가 오지 말라 산천초목은 바싹 메말라 있었다. 나는 그날 속초의 K형과 C형과 함께 속초에서 점심을 하고 벚꽃구경차 영랑호를 찾았다. 어제까지 한창 흐드러지게 피었던 영랑호변에 벚꽃도 강풍에 힘없이 나부끼며 흩날리고 있었다. 바람 때문에 차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그냥 스치듯 호반을 한 바퀴 돌고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내 처는 병원약속 때문에 서울에 가서 나 혼자 간단히 요기를 끝내고, 어둑해 지는 7시 반경 커튼을 닫았다. 그러면서 집안에까지 크게 들리는 세차고 요란한 바람소리에 마음이 불안했다.

 

8시를 조금 넘어설 때쯤, 전화가 왔다. 몇 년 전 퇴직 후 귀촌해서 산 너머 신평리에 사는 제자 노성호 군이었다. 그는 매우 다급한 목소리로, “저는 마침 일이 있어 창원에 내려왔는데, 방금 집사람 전화를 받고 말씀드립니다라며, “교수님! 원암리 위쪽에서 큰 불이 났어요. 빨리 피하세요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다급히 윗도리를 챙겨 입고 상황을 살필 겸 오른편 작은 현관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바람이 워낙 세서 아무리 힘을 써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바람의 영향이 적은 뒷창문을 간신히 열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순간 상황의 심각성을 직감할 수 있었다. 주위는 온통 연기로 가득했고 불길도 멀지 않은 곳 여기저기서 치솟고 일고 있었다. 무엇보다 사방으로 흩날리는 불씨가 온 세상을 뒤엎고 있어 눈 앞을 가릴 지경이었다. 나는 뒤 돌아보지 않고 그냥 정신없이 큰 길가로 뛰었다. 200m 거리를 폭풍처럼 질주했다. 막상 큰길에 나와보니 자옥한 연기 속에 우선 내가 피신할 길목조차 분간이 어려웠다. 무엇보다 불길이 바람 방향 따라, 솔나무 숲길 따라, 또 불씨가 튀는 대로 마구잡이로 번져 가기 때문에 산불 발원지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성천리 쪽도 이미 곳곳에 불길이 퍼져 있었다. 근처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절체절명의 위기감 속에 고립무원이라는 절박한 느낌이 엄습했다. 마치 재난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이 판국에 뛰어 봤자 소용없고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혹 뒤늦게 달려오는 차가 있으면 그 편에 위기를 탈출하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둠이 더 짙어지면서, 여기저기서 솟아오르는 시뻘건 화염이 더 극명하게, 더 위협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마침 울산바위 쪽에서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차가 있었다. 나는 길 한가운데로 다가가서 힘껏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그 차는 오히려 무섭게 가속을 하며 거침없이 앞으로 치닫는 게 아닌가. 나는 놀라 황급히 길가로 몸을 피했다. 절망감이 무섭게 엄습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자옥한 연기 사이로 또 하나의 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지막 차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길 한가운데로 나가 손을 한껏 흔들었다. 그런데 이 차는 가까이 오면서 속도를 크게 줄여 내 앞에 천천히 멈쳐섰다.. 그리고 젊은 운전자는 타시지요라고 내게 나직이 말했다. 나는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며 재빨리 차에 올랐다. 구사일생이자, 천우신조가 아닐 수 없었다,

차가 성천리로 향하는 동안, 불길이 때로는 가까이서 동행했다. 나는 마음이 다급해서 운전자에게 좀 더 빨리 달리시지요라고 청을 했다. 그랬더니 운전자는, “. 연기 때문에 잘 보이지가 않아서라고 짤막하게 대답을 했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해지는 부끄럽지 짝이 없는 염치없는 주문이었다.

차가 용천 바닷가에 이르니 큰 불길 하나는 우리를 앞질러 이미 속초 시내 진입을 서두르고 있었다. 나를 태워준 고마운 운전자는 나를 속초 시외버스터미널까지 데려다주었다. 그에게 이름과 전화번호를 청했더니 거듭 고사하다가 마지못해 내게 알려주었다.

 

   III.

고성 생활 12년 동안 세간살이, 옷가지, 소장품 등은 물론 책들도 쓸만한 것은 모두 서울에서 이곳 현강재(玄岡齋)로 옮겼다. 그간 집 안팎도 정성껏 아름답게 가꿨다. 그래서 바야흐로 내 집 현강재의 완성도(完成度)가 소박한 내 꿈의 경지에 가장 근접하게 이르렀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했다. 어디 그 뿐인가. 내가 늘 아끼고 자랑삼던 집 뒤에 울창한 소나무 숲도 그 청정한 기운과 함께 모두 사라져 버렸다. 나이 80을 몇 달 앞두고 이런 일을 당하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는 잔인한 현실 앞에서 나는 실로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다음 순간 스스로 숙연해 짐을 느꼈다. 그리고 고마운 마음이 샘솟았다. 만약 그 날 저녁 제자 노성호군의 원거리 전화가 없었다면, 그리고 극적인 상황에서 나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던 마음 착한 운전자 김 선생이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때문에 나는 그날 밤부터 이튿날 새벽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걸려오는 친지들의 휴대폰 안부전화를 받으며, 비교적 밝은 음성으로 걱정마시게, 아무 일도 없네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 * *

이 기회에 불초 소생은 고성 산불 이후 전화, 문자 메시지를 통해, 혹은 직접 어려운 발걸음을 통해 저를 위로하고 격려해 주신 수많은 친지, 제자 들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의 덕택으로 저는 얼마간의 설레는 가슴과 새로운 결의 속에 목하 <인생 4모작>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간 휴면 상태에 있던 <현강재>도 다시 개통합니다. 여러분의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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