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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어느 불자의 보시(布施) 이야기(재록)

2019. 3. 6. by 현강

                             I

언론계 출신인 내 가까운 친구 S 는 독실한 불자 (佛者 ). 천주교 신자인 나도  그를 따라 이곳저곳 전국의 사찰을 자주 찾는다 . 나는 고즈넉한 산사의 법당에서 서양 작은 마을의 오래된 옛 성당이나 공소를  찾았을 때와 흡사한 느낌을 갖을 때가 많다 . 아래 글은 오래 전에 S 로 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인상적으로 뇌리에 남아  여기 옮긴다 . 아래 II 의 화자 (話者 )S .

 

                             II  

1993 11 , 한국 불교계의 큰 별 성철스님이 입적하셨다 . TV 를 통해 성철스님의 다비식을 지켜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 그의 다섯 상좌 중 한 분이 눈에 익어 , 자세히 살펴보니 TV 화면에 등장한 W 스님은 나와 중학교 동기동창으로 재학시설 무척 가깝게 지냈던 죽마고우 K 가 아닌가 . W 스님이 면벽좌선 10 으로 유명한 선승 (禪僧 )으로 해인사 선원장을 지냈다는 것은 한참 후에 알게 되었다 . 그가 절에 들어간 이후 외부와의 접촉을 일체 끊고 오직 수행에만 전념했기에 그동안 수소문을 해도 행방이 묘연했던 것이다 . 하루라도 빨리 스님을 만나보고 싶어졌다 .

 

그해 12 월 어느 날 나는 집사람의 해인사 참배 길에 대신 안부를 전하고 가까운 시일 안에 뵐 수 있을지 물었다 . 그로부터 마침 상경할 일이 있으니 그때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 1993 12 월 중순 여의도에서 저녁을 함께하며 40 년만의  해후를 즐겼다 . 그는 가볍게 술 한잔을 나눌 만큼 소탈했고 정다움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 시간 가는 줄도 모른 채 정담을 나누었다 . 모처럼의 짧은 만남이 무척 아쉬웠다 .

 

마침 이날은 월급날이라 내 속 주머니에는 두툼한 월급봉투가 들어 있었다 . 이대로 헤어지기가 섭섭해 수표한장 (10 만원 )을 꺼내 스님의 주머니 속에 불쑥 집어 넣었다 . 스님은 무슨 돈을 내게 주느냐 , 기자가 웬 돈이냐 고 극구 사양했지만 나는 모처럼 서울에 왔으니 요즘 잘나가는 책도 사보고 남대문시장도 둘러보고 영화도 한편 관람하고 내려가라 고 권했다 .

나는 절에 다니면서 여러 스님들과 교류했다 . 나는 평소 스님이라고 산속에만 묻혀 살 것이 아니라 세상과 자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

그런 심정으로 스님에게 감히 (?) 용돈을 드린 것이다 .

 

그날 밤 그렇게 스님과 작별했다 . 밤늦은 시간 귀가해 집사람에게 W 스님과 만난 얘기를 나누고 월급봉투를 내놓았다 . 봉투를 열어본 집사람이 큰돈 한 장이 빈다는 것이었다 . 나는 월급봉투를 일일이 세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 그런데 100 만 원이 모자란다는 것이었다 . 나는 봉투 속에 100 만원 짜리 수표가 들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 내가 기억하는 것은 10 만원 짜리 수표 한 장을 스님께 건낸 것이 전부인데 ....... 나의 불찰이었다 . 10 만원이 100 만 원이 되었으니 참으로 난감했다 . 당시로서는 100 만원이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 무엇보다 집사람은 내가 월급을 타면 둘째 놈에게 그동안 미뤄왔던 컴퓨터를 사주기로 굳게 약속했던 터라 평소에 안 하던 바가지까지 긁었다 . 심지어는 스님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면 안 될까 라고 까지 말했다 .

 

다음날 아침 이른 시간에 스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 “S 기자 , 무슨 그런 큰돈을 내게 주었어 ”. 그러나 나는 그래 잘못 갔어 , 10 만원만 제 하고 나머지 90 만원을 돌려주게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 그 대신 유용하게 쓰시게 라고 짤막하게 속에도 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 쏟아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는 게 아닌가 .

 

그 날 아침 출근길 , 도로확장공사장을 지나게 되었다 . 도로 한편에서는 크레인이 대형 H 빔을 반대편 도로로 운반하고 있었다 . 그런데 크레인 기사의 조작실수로 들어올린 H 빔이 공중에서 도로 한가운데로 떨어지면서 내 승용차를 덮쳤다 .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고 나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 . 119 구조대가 도착 , 찌그러진 차문을 부수고 어렵사리 나를 끄집어내는 순간 눈을 떴다 . 승용차는 악살박살이 났는데 , 나는 외상 하나 없이 멀쩡했다 . 천운이었다 . 지켜봤던 모두가 기적이라고 했다 . 나는 나도 모르게 부처님 고맙습니다 를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 아웅산 사건 때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후 , 10 년 만에 다시 한번 죽음의 골짜기를 벗어난 것이다 . 그러면서 어제 저녁 스님에게  의도치 않게 크게  보시 (?)한 공덕이 날 살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났다 . 들리는 말에 의하면 스님은 지병을 앓고 있었는데 늘 주머니가 비어있는 학승이라 누구에게 손 내밀 수가 없어 차일피일 수술을 미루다가 마침 목돈이 생겨 입원 수술을 받게 되었고 그 이후 건강을 회복했다는 것이다 . 그 소식에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나무 관세음보살 이 나왔다 .

 

                    III

나는 위의 이야기를 역시 불자인 C 형에게 전했다 . 불교에 공부가 깊은 C 형은 곧장 이를 '부주상 (不住相 ) 보시의 위력 '인과의 엄중함과 불보살의 가피력 으로 설명했다 부주상보시란 상 ()에 얽매이지 않는 조건 없는 보시를 의미하는데 , 그 복덕이 마치 동방 허공을 젤 수 없음과 같이 한량없다고 한다 . 또 인간이 겪는 세상만사는 내가 지어 온 업 (, 인과 )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인데 , S 형의 착한 마음 , 보시하는 마음이 곧 불보살의 마음이기 때문에 그런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빚어졌다는 것이다 .

 

출처 : 현강재 (2015/08/01)

 


* 위의 스님 W 는 어제 (3 5 ) 입적한 대한불교종 해인총림 수좌 (首座 )

  원융 (圓融 )스님이다 . 삼가 스님의 명복을 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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