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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인촌상 수상에 즈음하여

2014. 9. 18. by 현강

                           I.

  지난달 20일, 인촌기념사업회로부터 내가 제 28회 교육부문 인촌상 수상자로 결정되었다는 통고를 받았다. 두 번 장관을 하면서 한국 교육의 ‘균형’을 잡는데 기여했다는 것이 수상의 주된 이유이며, ‘신청’ 케이스가 아니라, ‘발굴’ 케이스라고 전했다. 전혀 예상도, 아니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라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면서 과분하고, 송구스럽다는 생각, 그리고 부끄럽다는 느낌이 치솟았다. 아울러 “참 세상이 고맙구나”라는 감동이 밀려왔다.

 

  그 며칠 후 수상자가 정식으로 공표되자, 가까운 친구가 내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아니, 세상이 아직 자네를 기억하네. 그것도 아주 제대로 말일세. 신기하지. 두 번 장관하면서 그렇게 고생하더니 그래도 보람이 있었네”라고 말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10년 너머 그 시절, 참으로 힘겹고 외로웠던 두 차례 장관시절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쳤다.

 

                            

                            II.

  교육정책의 기본철학은 대체로 두 가지 줄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 하나가 수월성이고 다른 하나가 형평성이다. 수월성은 교육에 있어서 능력신장과 경쟁력 강화에 역점을 두기 때문에 엘리트주의적 속성이 강하다. 반면에 형평성은 보다 교육기회의 평등과 뒤진 자에 대한 배려에 관심을 쏟으므로 민중주의적 지향이 두드러진다. 그러므로 보수적 정권은 보다 수월성 위주의 교육정책을, 그리고 진보적 정권은 보다 형평성에 역점을 두는 교육정책을 시행하는 경향이 짙으며, 특히 이념적 성향이 강한 정권일수록 그 편향의 정도가 심하다.

 

  그런데 이 쟁점에 대한 내 기본적 입장은 처음부터 뚜렷했다. 수월성과 형평성은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소중한 교육적 가치이며,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양자택일이 아니라, 양자 간의 균형과 조화라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교육정책의 기조는 그 때 그 때 정권의 이념, 정책지향에 지나치게 좌우되어서는 안 되며, 모름지기 그것은 정권의 수명을 넘어 장기적 관점에서 조망, 설계, 실천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어떤 정권도 지나치게 이념적으로 편향된 이른바 ‘대못박기식’ 교육정책은 피해야 하며, 언제나 수월성과 형평성 간의 적절한 조화와 균형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자칫 그 때 그 때 정권의 이념이나 정책적 지향과 부딪힐 수 있고, 특히 정권핵심의 교조주의적 강경론자들과 갈등을 빚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나는 이념적으로 이질적인 두 정권, 즉 보다 보수적인 문민정부와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참여정부에서 교육부장관직을 수행했다. 그러다 보니 문민정부 시절에는 교육정책이 지나치게 수월성 쪽으로 편향되지 않도록, 그리고 참여정부 시기에는 그것이 과도하게 형평성 위주로 나가지 않도록 조율하는 데 많은 관심을 쏟았다. 그런데 그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III.

  내가 YS 정부에서 첫 번째 장관직을 수행한 때(1995/12-1997/8)는 이른바 ‘5.31 교육개혁’시기였다. 5.31 교육개혁은 한국 교육의 ‘패러다임 변화’를 겨냥한 획기적 개혁조치였다. 당시 내가 해야 할 첫 번째 임무는 ‘95-’97년에 걸쳐 대통령 자문기구인 교육개혁위원회가 발표한 총 120개의 교육개혁 과제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프로그램화하여 실천에 옮기는 일이었다. 5.31 교육개혁안은 당시의 세계화, 정보화라는 거대한 시대적 물결에 조응하여 마련한 혁신적 작품으로, 그 큰 흐름은 수월성에 역점을 두고 있었다. 5.31 교육개혁안 중 내가 정책적 관심을 많이 쏟았던 것은 ‘학교운영위원회’ 설치, ‘초등영어’ 도입, 교육 정보화’, ‘대입제도 개혁’ 등 이었다.

 

  나는 5.31 교육개혁 프로그램들이 교육 경쟁력 강화를 위해 매우 요긴한 조치들임에도 불구하고, 교육의 형평성 및 인간의 공존능력을 제고하는 데는 얼마간 미흡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러한 판단아래 나는 한국 교육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이들 개혁안의 우선순위와 경중을 조정하는 한편, 청와대가 주도하는 교육개혁의 흐름과는 별도로 한국 교육의 형평성을 높이기 위해 ‘교육복지’라는 ‘불루오션’을 찾아 나섰다.

 

  나는 고심 끝에 교육부의 젊은 정책관료들을 독려하여 1996년 12월 ‘소외된 자와 특별한 배려가 필요한 자’를 대상으로 교육복지종합대책(1997-2001)을 수립했다. 교육부에서 이른바 ‘장관 프로젝트’라고 불렀던 이 종합대책에는 학교 중도탈락자, 학습부진아, 특수교육 및 유아교육 대상자, 그리고 귀국자녀 등에 대한 다양한 정책들이 포괄되었다, 이로써 ‘교육복지’라는 개념이 한국 교육정책 역사에 처음 이름을 올렸다. 위의 교육복지대책 중 중도탈락자 대책은 이후 ‘대안학교 설립 및 운영지원대책(1997/3)’으로 발전하면서, 산골, 벽지에 칩거하던 대안학교를 정부가 앞장서서 제도권 교육 안으로 끌어들이는 역사적 계기가 마련된다. 나는 기회 있을 때 마다 ‘교육복지’를 외쳤고, 대안학교, 특수학교 현장을 바쁘게 찾았다. 당시 많은 이들이 이들에게 생소한 개념인 교육복지가 뭐냐고 물으면, 나는 ‘소극적으로는 교육소외의 극복이고, 적극적으로는 교육본질의 회복’이라고 답했다. 신자유주의가 물결치던 그 시대에 교육부 내에서는 교육복지에 대한 공감대가 크게 확산되면서, 교육부의 젊은 중견 정책관료들이 그 대열에 열정적으로 동참하기 시작했다.

 

  또 하나 교육복지 차원에서 내가 기획했던 회심의 작품이 바로 ‘EBS 수능방송’이었다. 1997년 EBS 위성교육방송이 출범할 때, 그 기본계획안의 공식 이름이 ‘과열과외 완화 및 과외비 경감대책’이었다. 그러나 첫 번째 목표인 사교육비 경감 못지않게 내 마음을 크게 움직였던 것은 그 두 번째 목표, 즉 교육격차의 해소 및 교육기회의 평등이었다. 날이 갈수록 사회적 양극화와 학력의 세습화가 심화되는 가운데, 실제로 농어촌, 산간오지와 같은 교육소외지역이나 도시 빈곤층의 자제들이 과외의 도움 없이 이른바 일류대학에 진학하기는 하늘의 별따기가 되었다. 무언가 건곤일척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EBS 위성방송을 통해 ‘국가가 무상으로 최고의 과외를 해 보자’는 새로운 발상에 매달렸다. ‘국가과외’에 대한 사회적 반대도 만만치 않았고, 이에 따른 재정적, 기술적 문제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1997년 8월 EBS 위성교육방송이 고고의 성을 울렸다 그 때 나는 이 사업이 사교육비 경감, 교육복지의 차원을 넘어 사회통합과 국민형성의 관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확신했다.

 

 

                                 IV.

  나의 두 번째 장관시기(2003/12-2005/1)는 노무현 정부 때였다. 주지하듯이 참여정부는 그 이전 정권들과 비교할 때, 평등주의 지향의 이념적 색조가 짙었고, 특히 대통령 자문기구인 교육혁신위원회의 경우 더욱 그러했다. 따라서 나는 교육부총리로 임용되면서 앞으로 수월성과 형평성의 조정과정에서 정부와 얼마간의 갈등이 빚어질 수 있음을 예감했다.

 

  사교육비 경감대책이나 교육복지정책의 수행과정에서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교육인적자원부는 2004년 2월 17일 공교육내실화를 위한 고감도 종합처방으로 ‘사교육비경감대책’을 발표했다. 이에 대한 사회적 반향은 매우 호의적이었다. 교육인적자원부는 이 대책의 핵심사업으로 ‘EBS 인터넷 서비스’를 내 세우며, 앞으로 e-러닝 시대의 총아인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초. 중. 고급의 수준별 인터넷 강의를 할 것을 천명혔다. 그런데 막상 일을 시작하고 보니, 단기간 내에 대규모 사용자를 위한 인터넷 시스템을 빈틈없이 구축하는 일은 실로 모험에 가까운 대역사인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큰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가 고작 동시접속 2만명 정도였는데, 우리는 최대 10만 명에게 동시에 서비스할 수 있는 서버(Server)를 구축했으니, 그 과정에서 엄청난 고생을 했다. 그 뿐인가. 이른바 '인터넷 대란‘을 막기 위한 통신 네트워크 차원에서 예상되는 제반 문제점을 점검하고 그 대책을 마련하는데 말못할 홍역을 치뤘다. 그런가 하면, 인터넷 서비스의 교육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서둘러서 모든 고등학교에 위성방송 수신기 및 안테나를 설치하고, 각 학교에 인터넷 통신속도 및 학내망 속도를 증속하는 일, 저성능 PC의 교체 및 업그레이드 하는 작업 등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에 더하여 산간. 오지 및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위성방송 수신기를 지원하고, 케이블 TV 시청료 인하, 그리고 인터넷 통신비 지원을 하는 등 교육복지 차원의 제반조치를 강구했다. 이 모든 일이 한 달 여라는 짧은 기간 중에 이루어졌으니, 되돌아보면 실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당시 교육부 방마다 디데이 15일 전부터 D-15, D-14...가 벽에 붙어있었다. 그래도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그간  교육부가 앞장서서 10년 가까이 다져온 교육정보화 인프라의 저력 때문이었다. 교육부와 EBS가 주도했으나, 정통부, 전산원 및 KT 등 유관사업체의 협력과 도움이 컸다. 그해 4월 1일 EBS 인터넷 강의가 많은 이의 우려를 불식하고, 성공적으로 출범했다. 이로써 한국에 e-러닝 학습시대가 활짝 열었다. 나는 지금도  교육부 수장으로 때맞춰 두 번 씩, 즉 1997년 EBS 위성교육방송 출범과 2004년 EBS 인터넷 강의의 개통을 총지휘하는 막중한 일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하늘의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교육인적자원부는 보다 체계적인 교육복지정책의 추진을 위해 ‘참여정부 교육복지 종합계획(2004/4)'을 수립, 장애아, 유아, 저소득층 등 소외계층의 교육기회 확대에 힘쓰는 한편, 교육복지우선지역 확대와 농어촌 교육여건 개선에 주력했다. 그리고 ’각종학교‘라는 우회로를 통해 미인가 대안교육시설에게 보다 손쉽게 정규 학교로서의 법적지위와 학력인정을 얻을 수 있는 길을 텄다. 무엇보다 내가 보람 있게 생각하는 것은 당시 오갈데 없는 북한이탈 청소년들을 위해 ’한겨레학교‘의 설립을 주도한 일이다.

 

  이처럼 교육복지 차원의 다양한 노력을 경주하면서, 나는 참여정부의 교육정책의 큰 흐름이 지나치게 평등성 기조로 치우치는 것을 우려하여 수월성 제고를 위한 정책적 보완을 서둘렀다. 그 대표적인 것이 ‘교원평가’와 ‘수월성 교육 종합대책’이었다. 나는 평소부터 우리나라의 학교교육의 질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사의 전문성 신장이 급선무이며, 이는 교원평가 없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왔다. 2004년 2월, 나는 청와대 및 당정은 물론, 교육부 간부들과 아무런 협의 없이 그동안 금기시되었던 ‘교원평가’ 방침을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단기로 '돌파'하자는 생각이었다. 그 후폭풍은 대단했다. 전교조 등의 저항은 치열했고, 청와대도 강한 우려를 나타냈다. 그러나 나는 한국교육의 내일을 위해 더 이상 늦출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그를 위한 국민적 공감대 형성과 그 실천전략(‘04 교원평가제도개선 정책연구)을 만드는데 주력했다.

 

  교육부는 1년에 걸친 집중적 연구를 바탕으로, 2004년 12월 22일, ‘창의적 인재양성을 위한 수월성 교육 종합대책’을 수립.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초. 중. 고교생 1%(8만명)에게 영재교육을, 다음 4%(32만명)에게는 차별화된 수월성 교육을 실시하고, 수준별 이동수업, 조기진급 및 조기졸업제도 개선, 심화학습이수인정제(AP)등을 강화하게 된다. 이는 고교평준화에 의한 획일적 교육의 단점을 보완하고 특성화된 수준별 교육을 통해 우수인재를 집중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평등화를 앞세우는 진보정권의 품안에서 수월성 교육의 청사진이 나오자, 많은 이가 놀랐다.

 

  ‘2008 대입제도 개선안’을 둘러싼 교육부와 청와대/교육혁신위 간의 갈등은 매우 첨예했다. 대통령 자문기구인 교육혁신위는 청와대의 강력한 지원 아래 대입과정에서 수능의 비중을 최소화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했다. 교육부와 혁신위는 오랜 논란 끝에 가까스로 수능 9등급에 합의했으나, <수능 1등급을 몇 %로 하느냐>를 둘러싸고 양자 간의 갈등은 최고조에 달한다. 혁신위-청와대는 ‘7%’를 주장했고, 교육부는 최소한의 변별력을 고려하여 ‘4%’를 마지노선으로 잡았다. 보수 언론은 4%도 많다고 아우성이었다. 교육부는 대학이 수능 외에 학생부를 비중 있게 반영하고 논술과 면접을 낮은 수준에서 적절히 활용하면, 1등급 4% 수준이 가장 적절한 방안임을 누누이 밝혔다. 2004년 10월 대입개선안 최종발표가 가까워지자, 교육부-청와대 간에는 폭발직전의 풍선처럼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끝내 10월 25일 밤 내가 장관직 사표를 제출하는 해프닝을 거쳐 이튿날 아침 대통령의 양보가 이루어졌다. 10월 27일 2008 입시안 발표 전날, 나는 글자 그대로 하얗게 밤을 새웠다. 물밀듯이 감회가 밀려와서 잠을 이를 수가 없었다. 그 동안 필자와 교육부가 함께 짊어 져야 했던 짐이 너무 무거웠고 힘겨웠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나마 1등급 4%가 관철된 것은 참여정부를 위해서도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V.

  위에서 내가 참여했던 두 정권에서 교육정책의 ‘균형’과 ‘조화’를 위해 어떠한 조치를 했는지 되돌아보았다. 그런데 글을 마무리하는 바로 이 순간에도, 위에서 논의한 모든 일이 내가 두 번 장관으로 재직 시 놀라운 열정과 헌신으로 나를 도와주신 교육부 직원 여러분의 노고의 덕택임을 다시 한 번 절감한다. 내가 청와대와 생각이 달라 힘들고 외로울 때도, 그들은 한 결같이 추호의 흐트러짐없이 내 뒤에 서있었다. 그들에 대한 무거운 빚, 그리고 가슴 절절한 고마움은 평생 나와 함께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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