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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이육사(李陸史)의 꿈

2012. 5. 24. by 현강

                         I.

     지난 달 경북 안동 여행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그 여운이 아직도 내게 깊게 남아있다. 실은 안동에는 그 동안 몇 차례 갔었다. 갈 때마다 도산서원, 하회마을을 비롯해서 근방의 유명 서원, 종택 등을 두루 돌아보면서 옛 선비의 숨결과 유교문화의 진수를 느껴왔다. 그러나 이곳이 한국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항일 독립운동의 성지(聖地)라는 사실을 제대로 안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조선말기 이후 학문에만 전념하던 선비들이 항일 의병 및 독립운동에 대거 투신해서 그 중 많은 이가 순절,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를 내었다는 사실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이었고, 큰 가르침이 되었다. 퇴계의 고향, 안동의 선비들과 명문가의 자손들이 국난에 처하여 책상을 박차고 일어나 민족 저항운동에 앞장에 섰다는 것은, 무엇보다 그들이 ‘행동하는 지성’이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진한 감동의 여울을 느끼게 한다. 민족시인 이육사(李陸史, 1904-1944)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II,

     한국인이면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이육사의 시를 무척 좋아하고, 그가 독립운동에 관여했던 저항시인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바로 안동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그가 이퇴계의 13대손으로 독립운동으로 17차례나 투옥되었고, 친가, 외가 가릴 것 없이 그의 온 집안이 조국광복을 위해 치열한 투쟁을 벌였고 큰 희생을 치렀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과문한 탓에 이육사의 삶이 최근에 드라마로 뮤지컬로 재연되었다는 얘기도 이곳에서 처음 들었다. 내가 이육사를 이해하는데, <이육사 문학관>과 <안동 독립기념관>의 방문은 큰 도움이 되었다.

 

    이육사의 일대기, 가족사를 알고 난 후,  그의 시 한편 한편이 내게 새롭게 다가왔다. 따지고 보면 그의 모든 시가 조국광복을 추구하는 상징시이자 참여시였다. 고향을 떠올리는 아름다운 서정시로만 느껴왔던 <청포도>도 예외가 아니었다. 거기 나오는 “청포(靑布)를 입고 찾아 온다”는 “내가 바라는 손님”.이 그냥 예사 손님이 아니라 그가 꿈에도 그리던 큰 손님, 즉 조국 광복이었을 게 분명하다. 역시 그의 대표시이 하나인  <광야>(曠野)의 ’광‘ 자(字)도 우리가 흔히 쓰는 ‘넓은’ ‘광’(廣)자가 아니라, 태초(太初)와 천지개벽(天地開闢)을 연상시키는 ‘텅 비고 아득하게 너르다’는 뜻의 ‘광’(曠) 자(字)이며, 그런 의미에서 이육사의 ‘광야’(曠野)는 태초 이래 감히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영원불멸의 조국의 성스러운 터전을 뜻했음이 틀림없다. 그의 시 한편 한편에서 치솟는 웅혼한 기상과 영탄(詠嘆), 극한에 이르는 절박감, 예언자적 약속과 초인(超人)에의 기대 등이 하나같이 그가 꿈꿨던 조국의 광복을 향한 결연한 저항 의지와 필연처럼 도래할 그날에 대한 확신이었던 것이다. 나는 한국 근대시 중에 이육사의 시 만큼 스케일이 크고, 원초적이며, 진정성을 가지고 절절하게 가슴을 파고들어 영혼을 울리는 시는 없다고 본다. 그의 시의 몇 구절을 다시 엮어 음미해 본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광야)

“하늘이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우에 서다” (절정)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여”(꽃)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광야)

 

 

                             III.

       이육사는 그의 필명이다. 그의 필명과 연관해서 숱한 얘기가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얘기는 이육사라는 이름은 그가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수인번호 ‘264’의 음을 딴 것이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나도 전에 들은 듯싶다. 그런데 이번 안동행에서 새로 들은 얘기는 더욱 놀라웠다. 그가 당초에 필명을 일제의 패망을 겨냥하여 ’역사를 찢어 죽인다‘는 의미를 담아 ’육사‘(戮史)로 하려 했는데, 한학에 조예가 밝은 그의 사촌 형님이, 그건 너무 위험스럽다며, 중국자전에는 ’陸‘자(字)가 ’戮‘자와 같은 의미로 쓰이니 ’李陸史‘로 하도록 권해, 그렇게 된 것이라는 얘기였다. 이처럼 조국광복을 향한 이육사의 꿈은 치열, 처절했고, 그것이 온통 그의 삶 전체를 불사르고 있었던 것 같다. 아니 필명에 ’戮‘자를 쓸 생각을 하다니. 실로 전율할 얘기가 아닌가.

 

                    IV.

       이육사 문학관을 방문했던 그 날, 나는 숙소를 안동시내에 있는 치암고택(恥巖古宅 )에 잡았다. 치암고택은 고종때 언양현감, 홍문관 교리를 지냈던 충절로 유명한 치암 이만현(1830-1911) 선생의 옛집인데, 1976년 안동댐 수몰로 이곳으로 옮겨왔다. 그날 저녁 나는 고풍스럽고 그윽한 종택에서 한옥의 정취를 한껏 만끽했다. 그런데 고택의 주인이자 유학자이신 이동수씨가 내게 의외의 반가운 제안을 했다. 말씀인 즉, 시인 이육사의 일점혈육인 따님이 자신의 집안 누님인데, 오늘 밤 이곳에서 유숙하시니 내일 아침에 차라고 한잔 같이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육사 시인의 따님을 뵈었다. 단정하고 영민한 인상이었다. 현재 <이육사 문화관>의 상임이사로 일하신다고 하셨다. 나와 동갑(1941년생)으로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 만 세 살이었는데, 포승으로 손목이 묶기고 용수를 쓰셨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어렴풋이 기억한다고 말씀하셨다. 가슴이 저려 왔따.  ‘이옥비’라는 흔치 않은 이름이라, 내가 어떻게 쓰느냐고 물었더니, ‘기름질 옥(肥)‘과 ‘아닐 비(非)’자 인데, 아버님께서 “너무 풍요롭게 살지 말고, 남과 나누며 살아가라”고 직접 지어 주신 이름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과연 육사다운 일이라고 생각하며, 그의 꿈이 담겨진 이름임을 직감했다. 그러면서 결국 그 녀의 이름이 뒤에 남겨진 어린 딸에 대한 이육사의 유언이 되었구나 하는 상념을 했다.

 

        자리를 같이 했던 안동대학교의 M 교수님이 이옥비 여사에게, “육사의 삶에서 시인으로서의 육사와 독립투사로서의 육사 중 어디에 더 역점이 주어졌다고 생각하느냐”고 질문을 했다. 그러자 이 여사의 대답은 명료했다.

 

       “아버지는 독립운동에 온 생을 거신 분이셨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독립투사로서의 육사가 앞선다고 보아야 마땅하지요. 그 분에게 시(詩)는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열정과 헌신의 문학적 표현이자 결실 이었습니다”.

 

                       V.

      안동이 학문의 고장이자 아울러 충절의 고장이라는 점이 무척 교훈적이다. 옛 양반, 선비들이 공리공담이나 일삼고 특권적 지위를 이용하여 양민이나 착취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안동의 <진짜> 선비들은 국난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져,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앞장 서 실천했다는 사실은 놀랍고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 이 땅의 지식인에게 큰 가르침이 되지 않는가.

 

                    *  *   *

   우리가 이육사와 더불어 만해(卍海) 한용운, 이상화, 윤동주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들에게 열광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시(詩)에 깃들인 조국 광복의 꿈과 희망, 그리고 순수의 극한에 이르는 그들의 투철한 애국정신 때문이리라. 만약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 역사의 가장 그늘진 골짜기였던 일제 강점기가 얼마나 더 허전하고 부끄러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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