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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강원도가 좋아

2012. 4. 1. by 현강

        I.

   내가 이곳 속초/고성에 내려온 후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이곳과 어떤 연고가 있느냐는 것이다. 내가 별 연고가 없다고 대답하면, 으레 그럼 왜 이곳을 노후의 삶 터로 잡았느냐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산이 좋아서요. 바다도 가깝지요. 서울서 적당히 떨어져 있고요. 가까운 친구도 있고요”라며 주섬주섬 대답한다. 여러 가지 복합된 이유라서 한마디로 대답하기 어려워서다.

  위 얘기가 다 맞는 말이다. 내가 산행을 무척 좋아 하는데 남한에 설악만 한 명산이 없다고 본다. 장엄과 수려를 다 갖췄다. 그런데 마음만 먹으면 내외 설악, 남설악 어디도 쉽게 갈 수 있으니 그게 나를 크게 끌어당긴 게 분명하다. 바다도 그렇다. 지척에 탁 트인 동해가 있으니 새해 첫날 해맞이부터 여름 바다, 겨울 바다를 다 내 앞마당처럼 드나들며 볼 수 있다. 한적한 포구에는 가끔 고래도 출몰한다. 그뿐이랴. 유명 호수, 강, 계곡, 철새 도래지가 곳곳에 있어 내키는 대로 고르게 즐길 수 있다. 한 마디로 자연의 보고다.

  이곳에 터를 잡는데 한몫을 한 것이 서울에서 이곳까지의 거리였다. 서울과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아 좋았다. 그런데 이제 서울이 너무 가까워졌다. 5년 반 전 내가 처음 이곳으로 내려올 때만 해도 속초-서울 간 버스 시간이 3시간 반 걸렸는데, 이제 2시간 10분이면 서울에 닿는다. 그러니 이제 누가 오라고 해도 서울이 멀어서 못 가겠다고 핑계 대기가 어려워졌다.

  가까운 친구가 미리 이곳에 와서 터를 잡고 이곳을 권유한 것도 크게 작용을 했다. 그리고 보니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얘기가 맞은 것 같다. 그런데 지난 1월 그 친구 내외가 10년 이곳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귀환했다. 그래서 마음 한구석이 크게 허전하다.

         II.

  그런데 생각해 보니 강원도와의 인연은 꽤 오래되었다. 어찌 보면 하늘이 미리 이곳을 점지해 준 것 같기도 하다.

  1981년 겨울 연세대 교수로 있을 때, 우연히 <서울-지방 간 교수교류계획>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서울을 훌쩍 떠나고 싶었는데 좋은 기회다 싶어 교무처에 문의했다. 그랬더니 웬걸 교무처에서는 연세대를 지망하는 지방대학 교수들은 많은데, 지방에 나가겠다는 연세대 교수는 한 명도 없어 수급조절이 되지 않아 어려움이 크니 제발 어디라도 가달라는 것이었다. 내게 차례가 올까 싶었는데, 오히려 대학에서 가달라고 간청을 하니 나는 웬 떡이냐 싶어 대뜸 1982년 새 학기부터 1년간 춘천 강원대학교에 교류교수 신청을 했다. 그렇게 춘천과 1년간 인연을 맺었다. 강원대학교 생활은 매우 즐겁고 여유로웠다. 서울에서 지친 심신을 추스르고 재충전하는데 최적의 시간이었다. 춘천이 그때만 해도 10여만 인구의 중소도시였는데, 1960년대의 서울을 느끼게 하는 정겹고 예스러운 분위기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주위의 산과 호수도 아름다웠고, 송어회와 막국수도 일품이었다. 학생들도 순박했고, 개중에는 출중한 친구들도 많았다. 1년 후 서울로 돌아갈 때 꽤 섭섭했고, 아쉬움이 너무 컸다. 나는 지금도 40대 초, 춘천에서의 아름다운 1년을 향수어린 추억으로 뇌리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얼마 전 강원일보 편집국장이 내제 전화를 해서, 그때 내게 배운 제자라며 이곳에 산다는 소식들 듣고 반가워서 연락했노라고 말했다. 잊지 않고 연락해 준 것이 무척 고마웠다.

  1980년대에 연세대학교 원주 매지 캠퍼스가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했다. 그 때 내가 서울 캠퍼스 학과장이었기 때문에 그곳 행정학과를 설립하는 일을 맡았다. 그래서 초창기부터 매지 캠퍼스와 인연이 깊었다. 일주일에 한 번 씩 강의하러 원주에 내려갔는데, 옛 고향을 찾는 기분으로 한 주 내내 그날을 기다리곤 했다. 내려가면 너른 캠퍼스를 오르내리며 긴 산책을 즐겼다. 봄날 호숫가, 단풍 철 교문 앞 은행나무 길은 내가 특히 좋아했던 곳이다. 그곳 매지리와의 인연이 이어져서 1898년, 1999년간 내가 토지문화재단 상임이사로 박경리 선생님을 도울 때, 토지문화관 건립 일로 자주 내려갔다.

  1991년 내가 한국행정학회 회장 때 일이다. 학회 하기(夏期) 대회가 있는데, 당시에는 그 대회를 의례적으로 회장의 고향 도시에서 열었다. 회장 고향이 시골이면, 그곳 도청 소재지가 개최지가 되었다. 그해 연초에 학회 총무가 내게 하기 대회 예정지를 묻기에, 내가 별생각 없이 ‘춘천’이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그가 강원도가 고향이냐고 되물었다. “나야 서울서 나서 자랐지만 그곳이 좋아서”라고 대답했던 기억이다. 춘천에서 처음 하기 대회를 개최하게 되자, 강원대학교 옛 동료 교수님들이 무척 좋아하셨다. 한 원로 교수분이 “안 선생, 아예 고향을 이곳으로 바꿔”라고 말씀하셨다.

  그 후 내가 교육부 장관을 두 번 하는 동안, 교육부 워크샾은 언제나 남설악 오색 그린 야드 호텔에서 열었다. 당시에 그 호텔이 교육부 산하기관 소속이었던 연고도 있었지만, 설악에 대한 내 사랑이 함께 작용했던 것 같다. 장관 때 정초에 하루, 여름에 이틀 정도 있었던 휴가도 으레 오색 그린 야드로 향했고, 빠지지 않고 등선대 산행을 했다. 이미 타계하신 김수환 추기경님과 김종운 전 서울대 총장님이 오색 약수터와 주전골을 무척 사랑하셨고, 오시면 늘 그린야드 호텔에 묵으셨다. 이런 저런 연고로 몇 해 전 오색에 큰 물난리가 났을 때 무척 마음이 아팠다.

  글을 쓰다 보니 강원도와의 인연은 더 오래되었다. 1959년 대학 1학년 첫여름 방학 때 가까운 친구들과 첫 무전여행을 떠났다(말만 무전여행이지 주머니에는 충분한 비상금이 있었다). 그 행선지도 강원도였다. 아침에 떠난 버스가 저녁이 다 되어 속초에 도착했던 기억이다. 설악산, 강릉 경포대, 안인 해수욕장, 묵호, 삼척을 두루 누볐다. 그뿐이 아니다. 바삐 살다 보니, 일생 가족들과 여름휴가를 몇 번 가지 못했는데, 가게 되면 늘 송지호나 설악산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 서울 밖 인연은 손오공이 부처님 손아귀를 맴돌 듯, 언제나 강원도를 맴돌았다.

       III.

  내가 이곳으로 내려온 후, 가까운 친구들이 많이 다녀갔다. 그러면 으레 자기들도 이런 데서 살고 싶다고 하고, 더러는 꼭 실행하겠다고 근처 땅값을 묻기도 한다. 그런데 돌아가서는 항상 똑같은 얘기다.

“안되겠어. 같이 내려가자니 마누라가 당장 이혼하자네. 그건 그렇고. 저네 그 외진 데서 어떻게 살아. 나는 사흘도 못 견뎌.”

그러면 나도 장난기가 발동해서 이렇게 대답을 한다.

“아프니까 청춘이라잖아. 외로우니까 사람이지. 외로운 게 얼마나 감미로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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