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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탈(脫) 서울기(記) <성숙의 불씨> / 2008.4

2010. 7. 14. by 현강

 정년퇴직을 하기 훨씬 전부터 마음으로 정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년을 하면’, 이러 저러하게 살겠다는 상상을 많이 했다. 그런데 그럴 때면 언제나 ‘서울을 떠나자’라는 생각이 마치 강박관념처럼 내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었다. 정년을 하면, 세상 번잡을 피해 보다 단순하게 살고 싶고, 내키는 일만 하고 싶고, 자연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데 그 모든 것이 서울을 떠나야 이룰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탈()서울’을 지상과제처럼 생각했다. 다행히 아내도 동의했다.  

 

 그렇다면 어디로 갈까. 그래도 서울에서 멀리 달아나야지. 실은 아무도 잡는 사람이 없는데 멀리 도망갈 생각부터 했다. 서귀포가 어떨까. 남해도 좋던데, 이런 저런 궁리 끝에 강원도 속초로 정했다. 전혀 연고가 없지만 눈여겨보아 둔 곳이다. 그래서 작년 2월 대학을 정년하자마자 이곳으로 내려 왔고, 벌써 여기 온지 1년을 훌쩍 넘겼다.  

 

 이곳에서 스스로 가장 대견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직 온전치는 않으나 내가 점차 내 생활에 주인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돌이켜 보면, 서울에서 나는 언제나 사회적 약속의 연쇄 속에서 허덕이며 살았고, 항상 스케줄에 쫓기고, 데드라인에 목매였다. 체면 때문에, 남과 척지지 않으려고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했다. 따지고 보면, 내가 내 삶의 주인인 적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요즈음 나는 여기서 비교적 내가 하고 싶은 일, 마음에 내키는 일을 내 의지대로 즐겨서 하고 산다. 알량한 체면이나, 하찮은 명예는 상관할 필요가 없고, 뿌리치기 어려운 연고의 늪에서도 꽤 해방된 느낌이다. 내 시간은 내가 직접 요리한다. 게다가 여기서 내 유일한 취미인 산행이 언제라도 가능하니 그런 것이 좋다. 서울에 산다면 이 모든 것이 가능했을까.  

 

 지인(知人)들이 내게 흔히 던지는 질문은 외롭지 않느냐는 것이다. 밤낮 그 산, 그 바다를 보면 지루하지 않느냐고 묻기도 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나는 거의 외로움을 느끼지 않고 잘 지낸다. 현대인들은 명동 한가운데서도 외롭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그런 실존적인 얘기가 아니다. 우선 이곳의 일상이 그런대로 바쁘다. 그간 하고 싶은데 못했던 일이 그리 많을 줄 몰랐다. 주변에 가고 싶은 산행 코스만 해도 끝이 없고, 알량한 전공 공부에 쫓겨 못 읽고 밀어 두었던 역사책, 철학책, 소설과 시들도 그리 많을 줄 몰랐다. 어쭙잖은 사색하기, 음악듣기, 자신과 대화하기도 바쁘다. 올해부터는 조금씩 텃밭을 가꾸려 한다. 더 바빠질 것이다. 그래서 이곳 생활이 외로움을 반추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 또 가끔 밀려오는 약간의 외로움은 아련한 향수를 자아내기 때문에 얼마간 감미롭기도 하다. 그런데 바빠도 전혀 쫓기는 기분이 없다. 그리고 산과 바다는 전혀 지루하지 않다. 특히 산은 계절 따라, 아니 시시각각으로, 또 보는 곳과 각도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바뀐다. 천의 모습을 연출하는 자연의 신비 속에 빨려 들어가면 쉽게 자신을 잃고 거기에 동화된다.  

 

 어쩔 수 없이 서울을 가끔 간다. 그런데 서울을 가도 가능하면 일만 보고 그냥 돌아오려고 애쓴다. 마치 자칫하면, 다시 옛날로 돌아갈 것 같아서 괜히 불안하다. 서울의 분답(紛沓) 속에서 다시 나 자신을 잃으면, 그 때는 다시 이 작은 나만의 행복한 시간으로 영영 되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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