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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에세이

체험적 교육부장관론

2010. 8. 16. by 현강


전상인 외,『배움과 한국인의 삶』나남 (2008) 145-167면에 수록  

I.
  필자는 문민정부 시절 약 20개월(1995/12-1997/8) 동안,  그리고 참여정부 시절 1년 남짓 (2003/12-2005/1) 두 차례에 걸쳐 도합 약 32개월 동안 교육부장관(두 번째는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을 역임했다. 같은 부처의 장관을 두 번 지낸 것도 이례적이거니와, 민주화 이후 이기는 하나 이념적 지향에 있어 얼마간 차이가 있는 두 정권에서 장관으로 일했다는 점이 독특하다면 독특한 점이다.
  필자가 처음 장관에 임용되던 1995년은 바로 문민정부의 대표적 개혁과제였던 <5.31 교육개혁안>이 마련되어, 역사상 처음으로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교육개혁이  추진되던 시기였다. 필자는 교육패러다임의 변화를 추구하던 바로 이 역동적인 시기에 교육개혁사업의 바탕을 세우고, 그 주요 내용을 정책으로 옮기는데 온 정성을 기울였다.
  이후 2003년 말 두 번째 장관직을 맡았을 때는, 처음 장관에 임용된 후 약 8년의 세월이 지난 후였다. 그동안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로 이어지면서 두 차례 정권이 바뀌었을 분 아니라 장관도 9명이나 교체되었다. 정권도 상대적으로 진보성향이 짙었다. 그러나 이 나라 교육정책의 골격은 아직도 문민정부의 <5.31 교육개혁안>에 준거하고 있었으며, 이 점은 노대통령도 스스럼없이 인정하고 있었다. 필자는 한국교육이 <5.31>를 넘어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그 실마리를 <e-러닝>과 <교원개혁>에서 찾았다. 이념지향의 교육정책 대신에 교육인프라의 확충을 겨냥한 것이었다.
  필자가 두 번째 장관직을 그만 둔 이후에도 벌써 4명의 장관이 바뀌었다. 필자는 여기서 두 번의 장관 경험을 바탕으로 체험적 교육부장관론을 서술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편의상 교육인적자원부를 교육부로 칭한다.

II.
  교육부장관직은 정부 각료 중에도 가장 힘든 자리로 정평이 나 있다. 각료들 끼리 농담 삼아 정부 내에서 이른바 <3D 장관>이 누구누구냐를 가지고 설왕설래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에도 <3D> 중 최악의 자리는 교육부장관이라는 데는 아무런 이의가 없다.
  대통령이나 총리, 동료 장관들도 교육부장관에 대해서는 얼마간의 연민의 정을 갖고 대하는 게 보통이다. 정부중앙청사 뒤편에서는 연일 작고 큰 데모가 벌어지는데, 그 반 이상이 교육부와 연루된 것들이다. 주지하듯이 주요 교육쟁점에 관해서는 거의 전 국민이 치열한 관심을 갖고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할 뿐 아니라, 그들 스스로 교육에 관한 한 전문가로 자처한다. 그 때문에 장관이 정책을 관리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장관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뜨거운 쟁점으로 부각되기가 일 수 이며, 장관직을 물러난 후에도 교육부장관은 그가 주도했던 정책과 함께 많은 이들의 뇌리 속에 살아남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도 옛날 장관이름을 앞 세워 <누구 세대>라고 불리어지지 않는가. 
  필자가 처음 장관이 되고 얼마 후에, 비서관에게 <역대 장관 중, 누가 가장 성공적인 장관이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의 대답인 즉, “죄송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크게 망신당하지 않고 그만 두실 수 있으면 그런대로 성공적이라고 볼 수 있는 자리가 교육부장관 자리입니다”였다. 신임장관이 좌절을 느끼기에 족한 대답이었다. 교육부장관은 자주 부정적 여론의 표적이 되기 때문에 역대 대통령은 무언가 일만 터졌다하면 서둘러서 장관을 바꿔치는 경우가 많았다. 교육은 백년대계이므로 교육부장관은 대통령과 임기를 같이 할 것이라고 미리 큰 소리를 쳤던 몇몇 대통령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장관은 마치 홀로 백척간두에 서 있는 것처럼 외롭고 힘든 경우가 많다. 필자도 1997년 3월 <초등학교 영어>를 도입할 때, 2004년 4월 1일 <EBS 수능 및 인터넷>을 출범할 때, 같은 해 봄, <교원평가> 계획을 처음 발표할 때, 그 해 10월 말 <2008년도 입시개혁안>을 발표할 때 등, 중대한 발표나 시행을 앞두고 그 전날 밤은 예외 없이 하얗게 세웠다. 역사의 하중에 눌려 한 숨도 못자고 밤새 앓았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그렇다면 왜 교육부장관직은 왜 이렇게 어렵고 힘든 직책일까. 몇 가지 그 중요한 이유를 짚어보자.
  널리 알려있듯이 우리 국민의 교육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전지구적으로 유례가 없다. 바로 이 전설적인 한국인의 교육열은 우리나라 교육발전에 원동력인 동시에 자칫 감당하기 어려운 큰 짐이 되는 경우가 많다. 1200만 명에 육박하는 각급 학생들, 50만 명에 가까운 교원들, 그 합한 수를 훨씬 뛰어넘는 학부모들과 가족들, 기타 교총, 전교조를 비롯한 다양한 교직단체, 시민운동단체들, 증가일로의 교육산업 종사자들, 이들 다양한 교육수요자와 고객들의 교육에 대한 관심을 가히 폭발적이다. 또한 그것이 많은 경우, 자신의 이기적 관점과 눈앞에 이해관계에 따라 다양하게, 여과 없이 분출된다.
  여기서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은, 많은 한국인들이 배움과 연관해서 가슴에 적잖은 <한(恨>이 맺혀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못 배운 한>을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했고, 해방이후 급격한 사회변동 속에서 교육이 계층과 신분상승의 선도변수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전 국민이 <일류대학 병>에 감염되었고, 심각한 <학벌주의>의 노예가 되었다. 따라서 교육과 연관된 작은 실패도 천추의 한으로 받아들이고, 미세한 불이익도 그냥 넘기지 못한다. 이는 다시 교육제도와 정책, 그리고 교육당국에 대한 강한 불만과 불신, 그리고 참을 수 없는 분노로 투사된다. 그래서 교육부장관는 많은 이의 <공적(公敵)>이자, 가장 만만한 <동네북>이다.
  이에 못지않게 교육부 수장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하고 있는 이념적 갈등이다. 얼핏 보기에 교육문제는 탈(脫)이데올로기의 영역인 듯 하나 실은 거기에 이념적 갈등이 첨예하게 도사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념의 여울에 빠지면, 만사를 정(正)과 사(邪)의 문제로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자칫 문제해결에 나서면 나설수록 사회적 갈등의 수렁에 빠져 들기가 십상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교육쟁점의 경우, 여론이 반반이 갈라지는 경우가 잦고, 그 때문에 사회적 합의를 일궈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이른바 <3불(不)>정책이나, 사립학교법, 고교평준화 등 첨예한 쟁점 사안들이 다 그런 예이다.
  필자가 두 번 째 장관직을 수행했던 기간 (2003/12-2005/1) 국회교육위에서는 특히 여.야간의 이념적 갈등이 치열했고, 이들은 사사건건 격돌했다. 그 결과 교육위에 주요 법안이 계속 계류되고, 법안 재.개정이 파행, 교착, 좌초된다. 
 

III.
  안호상 초대 문교부장관으로부터 현 김신일 교육부총리에 이르기까지 역대 교육부수장은 50명에 달한다. 평균 재임기간은 1년을 남짓에 불과한데, 특히 문민정부 이후 장관의 교체가 무척 잦았다. 다른 부처와 달리 교육부의 경우, 장관 중 대부분이 대학교수출신이었고, 약간명의 정치인 출신이 있었을 뿐이다. 다른 부처의 경우, 그 부처 출신의 관료들 중에 장관직까지 오르는 예가 적지 않으나, 유독 교육부의 경우 자체 내에서 장관에 이른 예가 한번도 없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체로 장관으로 충원되는 유력한 경력집단은 관료, 정치인, 그리고 교수를 비롯한 전문가 집단이었다. 이들은 각각 관리자형, 정치가형, 그리고 전문가형으로 분류되며, 개개 유형에 따른 장점과 단점을 갖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역대 교육부장관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전문가형은 어떤 특성을 지니는가.
  전문가 유형은 대체로 소관 영역에 대해 전문성이 뛰어나며, 그 때문에 업무수행에서 얼마간 전문적 권위를 구사한다. 그러나 이들은 정책결정 및 관리에 있어 독선적 경향이 강하며, 그들이 속한 전문가 공동체의 규범체계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전문가 유형의 장관은 정치력이나 개혁열정에 있어서는 정치가형에게, 그리고 부처관리능력에 있어서는 관리자형에 뒤지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그들은 뛰어난 전문적 식견과 치밀한 논리 등을 바탕으로 중장기 정책개발이나 합리적 개혁추진에는 효과적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 공사를 막론하고, 거대. 복합조직에서 관리자적 경험을 축적한 전문가출신의 경우 <전문성+관리능력>을 바탕으로 관료조직에 빠르게 적응하며, 부처관리에 성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전문가 유형 중에도 대학교수 출신의 경우, 비교적 평온한 조직환경 속에서 독자적 학문 활동을 해 왔기 때문에, 역동적인 정치사회 와 거대 관료조직에서 신속한 정책결단이나 정책수단의 동원에는 한발 뒤질 수밖에 없다. 대체로 볼 때, 교수출신의 장관은 큰 조직에 적응하는데 시간을 요한다. 말하자면 시간과 더불어 숙성되는 <만성(晩成)형>이다. 그런데 실제로 교육부장관은 너무 자주 교체되기 때문에 교수출신 장관들이 대부분 제 빛을 발휘하지 못하고 <장관 학습 중> 밀려 나오는 게 상례이다.    

IV.
  교육부장관은 복잡하고 다양하기 그지없는 정책환경 속에서 활동한다. 그 안에서 장관은 수많은 상대역들과 상호작용하며 영향력을 주고받는다. 대통령을 비롯한 청와대, 국회, 여야의 정당, 총리와 유관부처, 언론 및 다수의 교직단체 및 교육시민단체, 그리고 각급 교육기관과 교육청 등이 그것이다. 장관은 이들을 상대로 소관영역의 정책결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상충하는 이해관계의 조정과 중재에 나선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 부처의 내부관리자로서 조직, 인사, 예산 등을 총괄하며, 정책의 집행과정을 관리하는 등, 민간영역의 ‘최고관리자’(CEO)와 유사한 행정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렇듯, 장관은 이중 역할, 즉 정치적 역할과 행정가의 역할을 함께 수행한다.
  과거 권위주의 지절에는 중요 정책이 대통령/청와대, 장관, 그리고 고위관료들 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러나 민주화가 진척됨에 따라 정책과정은 종전에 비해 장기화, 동태화, 복잡화되었고, 사회전체적으로 민의수렴과정이 크게 확장되었다. 그러다 보니 장관의 일은 크게 늘었고, 더 힘들어 졌다. 장관은 실제로 이들 다수의 정책참여자들의 정책성향을 면밀히 분석하여, 가능한 한 많은 수의 ‘우군(友軍)을 모아 견고한 정책 네트워크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아직도 한국의 정책과정에서 대통령/비서실, 장관, 그리고 고위관료 등 핵심집행부(core executive)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하며, 정책과정에서의 장관의 영향력도 핵심집행부 내의 다른 주요 상대역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부각된다.
  우선 장관과 대통령의 관계가 중요하다. 대통령은 행정부 내의 최고 의사결정자이다. 따라서 그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제왕적’ 대통령이 자주 회자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국가의 백년대계를 좌우할 중차대한 교육정책에 경우 대통령의 관여는 당연하다. 그러나 대통령이 부처수준의 정책결정에 자주, 그리고 깊이 관여하는 경우, 장관의 정책자율성은 크게 제한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통령과 장관 간에 이념적, 정책적 공감대가 강하고, 대통령과의 신임관계가 두터운 경우, 정책과정에서 장관의 입지는 크게 높아진다.
  그러나 장관은 실제로 대통령에 대한 접근이 제한되어 있다. 국무외희, 크고 작은 청와대행사나 관계장관회의 등을 통해 장관이 대통령과 대면하는 기회는 잦은 편이나, 실제로 ‘독대’(獨對) 등을 통하여 대통령과 자유로운 쌍방식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쉽지 않다. 그러므로 장관은 많은 경우, 청와대의 관계 수석(首席)의 매개를 통해 대통령의 뜻을 전해 듣고, 또 그를 통해 자신의 정책의지를 전달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 때문에 장관과 수석비서관 간의 정책적, 인간적 친화성, 그리고 일에 대한 교감이 무척 중요하다. 그러므로 가장 바람직하기는 장관과 수석이 규범적 동지가 되는 것이다. 반면, 장관과 수석간에 긴장과 갈등이 빚어지는 경우, 정책결정자로서 장관의 입장은 대단히 곤혹스러워진다.   
  교육부장관은 매우 비중 있는 장관이다. 특히 교육인적자원부가 부총리부처가 된 이후 더욱 그러하다. 그러기에 역대 대통령 중 여러 분이 <교육대통령>을 자처하지 않았던가. 만약 그러한 교육부장관이 대통령의 강력한 정치적, 정책적 지원을 받는다면, 그가 일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청와대는 물론 행정부 내의 다른 부처와의 관계에서, 그리고 여당의 전폭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부처내부에서도 강력한 권위를 행사할 수 있다. 국민의 정부시절,  이해찬 장관이 교원정년인하를 감행할 수 있었던 것도 대통령의 지원 없이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와 반대로 대통령이 교육부장관이 추진하는 일정 정책에 대해 반대하거나 유보적인 경우, 장관이 이를 무릅쓰고 초지를 관철한다는 일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간혹  정치적 혹은 이념적 목적에서 무리하게 장관의 전문적, 자율적 영역을 과도하게 침해하는 경우 양자간에는 심각한 갈등이 빚어질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대통령의 통치스타일이다. 대통령이 비서실 중심의 국정운영 방식을 취하는 경우, 상대적으로 정책과정에서 내각과 장관의 영향력은 약화되는데 반해, 내각중심의 체제를 구축하는 경우, 장관은 국정의 중심에 서게 된다. 역대 대통령은 때에 따라 친정체제로, 혹은 내각중심체제로, 또 어떤 때는 ‘이중 축(軸)’ 체제로 다양한 시스템을 구축하였으나, 대략 집권초기에는 힘이 내각에 실렸다가, 시간이 갈수록 청와대 비서실로 옮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대통령이 청와대비서실에 크게 의존하게 되면, 비서실은 ‘소(小) 내각화’ 내지 ‘권부화(權府化)’ 추세를 보이게 된다. 이미 조선조 때에도 자주 회자되던 , ‘판서가 승지만 못하다’는 얘기도 이런 데서 나온 말일 것이다.
  대체로 볼 때, 정책과정에서 장관의 정책자율성이 극대화되는 최적 조건은 i) 대통령의 통치스타일이 장관중심으로, 또 장관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방식으로 전개될 때, ii) 장관에 대한 대통령의 신임의 돈독할 때, iii) 장관의 정책비전 및 능력이 뛰어나고, 뚜렷한 정책 아젠다와 보좌시스템을 갖추고 있을 때, iii) 특히 고위관료들과의 정서적 공감대가 높을 때, 그리고 v) 장관이 비교적 장기 재임하여, 경륜과 일관성을 가지고 정책을 추진할 때이다.
  돌이켜 볼 때, 김영삼 대통령은 대부분의 경우 국무회의 주재를 국무총리에게 맡기고 큰 국사만 챙기는 편이었다. 대선전 <교육예산 GNP 5%>를 공약했고, 대통령 자문기구인 교육개혁위원회를 통하여 역사상 유례없는 야심찬 교육개혁을 추진하였지만, 실제로 장관이 하는 일에 별로 관여하지 않았다. 장관의 상대적 정책자율성은 매우 높은 편이었다. 당시 청와대 사회문화수석으로 교육개혁사업에 깊이 관여했던 박세일 수석은 필자와 과거 학계, 시민사회 등에서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기에 서로 호홉이 잘 맞았다. 그 때문에 청와대로부터 불필요한 외압이나 규제, 간섭을 받지 않았다.
  이에 비해 참여정부의 노무현 대통령은 주요 정책문제에 보다 많은 관심을 표명하는 편이었다. 특히 이념적 편향성이 강한 청와대 <386>비서진들과 대통령 자문기구인 교육혁신위원회는 평등주의적 관점에서 교육문제에 접근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얼마간의 갈등과 불협화음이 있었다. <교원평가>에 대해서도 청와대 측의 반향은 유보적이었고, 특히 <2008년 입시개혁안>의 경우, 수능 1등급을 <4%>로 정하려는 교육부 측과 <7%>를 고집하는 청와대 측과의 갈등은 매우 첨예한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청와대 측의 양보로 문제는 봉합되었으나 그 파장은 컸다. 그런 가운데 당시 청와대의 유관수석인 이원덕 수석은 주요 교육정책 및 인적자원정책 등에 관해 언제나 외롭게 필자와 교육부의 입장을 지지하고 후원했다.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막강한 청와대의 <386>의 숲에서 그의 목소리는 항상 작은 메아리로 남았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주요 정책문제들은 단일 행정기관의 관할영역에 배타적으로 속하기보다 여러 행정기관들의 관할영역에 중첩적으로 연계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장관의 역할수행에서 수평적, 수직적으로 연관된 유관기관들과의 협력과 조정이 매우 긴요하다. 예컨대 교육부의 주요 과제로 등장한 인적자원관리문제는 노동부를 비롯하여 상당수의 다른 부처와 연계된다. 따라서 정책관리 차원에서 이들 유관부처와의 정책조정은 필수적이다. 그런데 정책을 둘러싼 부처간의 정책조정은 대체로 단순한 기술적, 관리적 차원이 아닌 정치적 차원의 문제인 경우가 많다. 유관기관들이 기능적으로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협조보다는 경쟁, 갈등하는 양상을 보이는 경우가 보통이기 때문이다. 도한 여기서 빚어지는 갈등은 타협에 의해 해소되기보다는 상호간의 역학관계에 의해 종식될 가능성이 크다. 정책을 둘러싼 이들 관련부처간의 상호작용과 권력역학관계는 흔히 관료정치로 표현된다. 정부안에는 통상 행정부처간의 갈등을 조정하기 위한 공식적 기구들이 존재하지만, 이들에 의한 조정내용 역시 부처간의 기존의 권력적 역학관계를 투영하는 경우가 많다. 교육부는 공식적인 부처서열은 높으나, 예산이나 인사 등 실제로 다른 부처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을 별로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관료정치 과정에서 다른 부처들과 힘겹게 겨루는 경우가 많다.
  국회는 장관의 주요한 활동무대이다. 성공적인 장관은 법률의 제. 개정이나 정책질의 등 의회과정에서 그 빛을 발한다. 국회에서 장관의 상대역은 해당상임위원회인 교육위원회 및 이곳의 소속 의원들이다. 대체로 교육위원회 위원들은 학력이나 지적 세련미, 정책이해도가 다른 위원회 보다 높은 경우가 많고, 상대적으로 학계, 교육계 출신이 많다. 그러나 그들은 국회라는 무대에 서면 일차적으로 정치인이 되고, 그렇게 행세한다. 따라서 학자출신의 교육부장관이 상임위원회 정책토론과정에서 지적 논변과 논리적 설득을 꾀하게 되면, “여기가 세미나 장(場)이냐”고 질타하는 경우가 많다. 국회의 다른 상임위원회에 비해 교육위원회에서는 정파간의 이념적인 충돌이 빚어지는 경우가 무척 잦다. 참여정부하의 필자의 두 번째 장관시절, 특히 그러했다. 그 때문에 필자는 다른 글에서 “약 반수의 386 전사들과 또 다른 반수의 신자유주의 기수들 사이에서 절대고독을 반추할 때가 많았다”라고 기술한 바 있다.
  정책과정에서 언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정책을 입안하고 또 이를 성공적으로 실천하드라도, 언론이 아무런 관심을 표명하지 않거나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면 그 정책은 <죽은> 정책이 된다. 대체로 한국 언론에 내 비친 한국 교육의 모습은 매우 부정적이다. 한결같이 <교육실패>에 대한 질타가 주조(主調)이다. 언필칭 <교육위기>, <공교육 황폐화>, <교실붕괴>이고, 아예 스스럼없이 <교육망국>을 논하는 게 보통이다. 흔히 ‘장관과 언론과는 <불가근(不可近) 불가원(不可遠)>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게 정설이다. 그러나 언론의 이러한 부정적 교육관을 감안할 때, 교육부장관은 오히려 언론에 대해 적극적, 더 나아가 얼마간 공세적 접근을 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요즈음처럼 언론이 이념적으로 양분(兩分)되 있는 상황에서, 장관이 대(對) 언론 관계에서 미리 포기하고 손을 놓아버리면 교육정책은 표류할 수밖에 없다. 가능한 한 기자들에게 유관정보와 자료를 앞서서, 충분히 배표하고, 그들과 언제나 열린 대화를 하며, 수시로 정책토론을 벌려 설득해야 한다. 무엇보다 신뢰관계를 쌓는 것이 중요하다. 필자는 두 번째 임기 중 거의 매주 언론계, 학계, 시민사회의 10여만 정책고객들에게 교육현안의 내용과 일에 임하는 내 심경을 담은 이메일을 보냈다.
  교육부의 경우, 교직사회, 교육이익집단, 교육시민사회가 무수하고 또 막강하다. 각급 학교와 교장단, 시. 도 교육청, 사학법인, 양대 교직단체인 교총과 전교조, 그리고 각종의 다양한 교육시민단체들이 그것이다. 이들은 구체적 이해관계나 이념적 성격에 따라 주요 교육정책문제에 대해 사안별로 다양한 입장을 취한다. 교육부장관은 정책을 주도할 때, 이들 정책수요자들의 대응을 미리 예측해야 하며, 가능한 한 지지세력을 확대하고 이들과 폭넓은 연대를 해야 하며, 반대세력은 수렴과 설득을 통해 중립화하거나 반대의 첨예도를 약화시켜야 한다. 이들과의 일상적인 교감과 규범적 연대, 네트워크 형성 등이 교육부장관의 주요한 역할이다.
  장관의 정책결정 및 집행과정에서 실제로 가장 중요한 변수의 하나는 부처내부의 관료들의 지지와 협력이다. 장관은 정치와 행정의 연결고리로서, 행정 각 부처의 정책 활동을 지휘. 통제하게 된다. 그런데 성공적인 장관이 되기 위해서는 부처의 내부관리에 능숙해야 하며, 특히 직원들, 특히 고위 직업관료들의 지지와 협력을 얻어야 한다. 우리의 경우 장관의 자질의 하나로 <조직장악력>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한데, 이는 다분히 계층적 통제나 명령에 입각한 관료주의적 개념으로 그리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 보다는 장관은 자신의 정치적 시각과 계층적 권위를 고위관료들의 전문지식과 현실판단능력과 조화를 이루는데 힘쓰며, 관료들에게 더 많은 자율성과 참여기회를 부여하여 보다 건설적인 상호관계를 형성하는데 힘써야 될 것이다.
  교육부에 대한 세간의 평은 현실과 차이가 크다. 많은 이가 아직도 교육부 직원들의 학력이나 자질과 능력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필자도 입각 전에는 ‘교육부 대학지원국에는 대학출신이 거의 없다’는 식의 부정적 세평을 자주 들었다. 그러나 이는 실제와 크게 다르다. 현재 교육부 본부 직원 485명(기능직 제외) 중 52명이 박사이며, 석사학위 이상이 전체의 반을 훨씬 넘는다. 정부 부처 중 학력수준이 가장 높은 부처이다. 따라서 장관은 이들에 대해 위계적 접근보다 전문적 토론과 지적 대화와 설득을 꾀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다. 그런가 하면, 교육부 직원 구성을 보면, 일반직이 396명으로 약 8할에 가깝고, 교육전문직이 89명으로 전체의 18.4%에 달한다. 양 집단간에는 얼마간의 구조적 긴장과 갈등요소가 있다. 그런가 하면, 다른 부처와 달리 교육부의 고위 관료 중 압도적 다수가 서울대 사범대 출신으로 동질성이 높다. 따라서 부처 내에는 대학별 갈등은 두드러지지 않는 편이나, 얼마간의 지역적 갈등요인이 잠재해 있다. 장관의 부처관리에서 이러한 구조적 특성을 바르게 이해하고 이들 요소를 감안하지 않으면 안 된다.

V.
  장관은 소관영역에 관해 긴 호홉을 가지고 이루고자 하는 중장기적 비전을 가져야 한다. 다시 말해 정책목표, 정책의 우선순위 및 정책구도가 담긴 청사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장관의 철학과 미래상과 밀접히 연관된다. 거시적 정책관리자로서 장관은 단기적 조망아래서 일상적 정책관리에 임하는 고위관료와는 다른 점이 있어야 하며, 바로 그것이 비전이다.
   장관의 정책비전의 바탕이 되는 그의 철학은 무엇인가. 교육부장관의 교육철학은 무엇인가. 대체로 여러 나라의 교육개혁의 역사를 살펴보면 아래의 세 가지 이념적 관점을 근거로 하고 있다. 지.덕.체의 조화 내지 인성강화라는 교육의 본연의 목적을 강조하는 근본주의, 시장원리와 경쟁력을 강조하는 경제주의, 그리고 사회적 형평과 통합을 강조하는 평등주의가 그것이다. 따라서 이들 3자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가 장관의 교육철학의 관건이 된다. 필자의 기본 입장은 이들 세 가지 가치 중 어느 것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따라서 3자간의 관계설정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조합과 조화의 문제라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유아 및 초등교육의 경우, 근본주의적 접근을 우선으로 해야 되며, 중등교육, 즉 중.고교 교육에서는 평등주의와 경제주의를 조화롭게 배합하는데 역점을 두고, 대학교육에서는 경제주의에 우선적 가치를 부여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떠한가. 많은 이들은 적어도 수사(修辭)적 차원에서는 근본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실제로 실천적 차원에서 근본주의철학을 내면화하고, 이를 정책적으로 추진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교육당국이나 학교현장, 시민단체 모두가 그러하다. 오히려 쟁론의 초점은 경제주의와 평등주의간의 이념투쟁으로 집약된다. 경제주의자들은 격변하는 시대, 즉 세계화, 정보화, 지식사회화의 격류 속에서 국가생존과 발전을 기하기 위해서는 수월성(秀越性)교육에 치중해야 된다는 입장이고, 반면 평등주의자들은 교육이 부와 신분세습의 사회적 재생산기제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더 큰 교육기회의 평등과 대중교육의 내실화가 관건이라고 역설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념적 갈등이 워낙 치열해서 날이 갈수록 교조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양상이다.
  예컨대 이미 수십년간 쟁점화되어 있는 <고교평준화>문제만 해도 그렇다. ‘어떤 경우에도 평준화는 고수되어야 한다’라던가 ‘평준화는 절대로 해제되어야 한다’라는 극단적 대결양상이다. 그러나 실제로 평준화의 기본틀을 유지하면서, 그 안에서 수준별 교육, 선지원 후추첨, 학교별 특성화 프로그램의 강화, 특목고 운영개선, 영재교육 프로그램의 활성화 등을 통하여 다양화, 특성화, 자율화를 지속적으로 추구함으로써 내적 역동성과 경쟁력을 확보하는 노력에는 소홀한 게 현실이다. 필자의 소견에는 대중교육의 견실한 보편구조위에 수월성구조를 접목하는 접근, 다시 말해, 가능한 한 사회통합을 해치지 않으면서 경쟁력을 키우자는 것이다.  필자는 가능한 한 중도개혁적 입장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무엇보다 이념적으로 편향되지 않으면서, 장기적, 균형적 관점에서, 그리고 가능한 한 교육 인프라를 강화하는 맥락에서 교육개혁을 추진하려고 애썼다. 1997년 3월 초등영어를 도입할 때도, 동시에 교육부에국어교육자들을 주축으로 <국어교육발전위원회>를 출범시켜 영어교육의 격류 속에서 우리말과 글이 훼손되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필자의 이러한 교육철학은 두 차례에 걸친 장관직 수행에서 교육정책비전과 정책사례 속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주지하듯이 첫 장관시절, 문민정부의 교육개혁 패러다임과 개혁과제들은 당시 세계를 풍미하던 세계화와 민주화의 사조를 크게 반영하고 있었다. 따라서 크게 보아 경쟁력 강화에 치중한 신자유주의적 개혁사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필자는 교육개혁위원회가 제시하는 개혁과제를 선별적으로 수용하는 한편, 이와 별도로 제도권 교육의 그늘진 곳을 치유하고 사회적 형평을 제고하기 위해 교육복지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1996년 12월의 <교육복지 종합대책>이었다. 당시 필자가 세계화 추세에 부응하기 위해 역점을 두었던 대표적 프로젝트가 교육정보화 사업과 초등학교 영어도입이었고, 민주화 프로젝트가 학교운영위원회 도입이었다면, 교육복지 프로젝트 중 두드러진 것이 대안학교 지원사업과 특수교육강화 등이었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 장관재직시 가장 역점을 두었던 사업은 이러닝(e-learning)과 교원개혁이었다. 필자는 이들 두 사업은 한국 교육의 백년대계를 위해 필수적인 교육 인프라 구축 사업이라는 데 큰 의미를 부여했다. 따지고 보면, <EBS 수능방송>은 이미 첫 번째 장관시절 역점을 두었던 정책사업 인데, 이를 새 시대에 맞춰 인터넷 서비스로 까지 확대한 것이었다. 이른바 <인터넷 대란>에 대한 심각한 우려 속에 2004년 4월 1일, 10만 이상의 동시접속이 가능한 동영상 인터넷 서비스에 성공했다.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 필자는 2004년을 <e-러닝의 해>라고 선포하고, 아울러 사이버 가정학습에 박차를 가했다. e-러닝은 <사교육비 경감대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으나, 필자는 내심 이 사업이 교육기회의 평등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데 더 큰 의미를 부여했다.
  필자는 2004년 봄 그동안 금기시되었던 교원평가 문제를 들고 나왔다. 전교조 등 적잖은 저항의 목소리가 있었으나, 한국교육의 질을 획기적으로 제고하기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다는 게 내 오랜 지론이었다. 필자는  총체적 교원개혁을 위해서는 교원평가와 더불어 교원양성체제 및 교원연수체제 개혁이 유기적으로 연계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2004년 내내 이들 세 가지에 대한 집중적인 정책연구를 했다. 필자의 개획으로는 2005년 1월 <교원개혁>을 선포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2005년 정초에 교육 부총리직을 물러나게 되었다. 필자는 지금도 이념적 편향성이 적으면서, 현 단계 한국교육의 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e-러닝>과 <교원개혁>은 앞으로도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경우, 장관임기의 단기(短期)성 때문에 장관의 철학이나 비전이 정책적으로 실현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역대 교육부장관들은 눈앞에 산적한 현안문제들의 하중과 때 없이 불거지는 절박한 교육쟁점 들 때문에 설혹 중장기 비전을 갖고 있더라도 실제로 이를 정책적으로 실현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 때문에 단기성의 현안과 쟁점의 늪에 빠져 허덕이다가 그 임기를 다하는 것이 오히려 상례이다.

VI.
   장관의 일상은 무척 바쁘다. 더욱이 <3D> 중 최악의 경우라는 교육부장관의 경우 제대로 장관직에 헌신하자면 실제로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인간적 한계에 도전하는 느낌일 때가 많다. 필자의 경우, 매일 새벽 5시 이전에 기상해서 밤 12시 경에나 잠자리에 들었다. 온전히 5시간 취침하기가 쉽지 않았다. 참고로 1995년 말 처음 입각해서 첫 한 달간 내가 소화한 공식적 일정을 살펴보면 실로 가공할 만 하다. 그 한 달 동안 성탄절과 연말연시가 끼어있어 며칠 쉬었는데도 아래와 같이 엄청나게 바쁜 일정이었다. 대학총장 면담 16번,  교육관련단체장과의 면담, 오찬 및 만찬 11번, 교육계 주요 인사 및 산하단체장 면담 13번, 언론기관 공식 인터뷰 13번, 특강 3번, 당정회의 2번, 각종행사 및 간담회 9번, 기타 주요 언론기관, 유관 정부 주요 부서, 청와대 방문 10차례 등 이었다. 이는 주로 면담 및 공식행사 만을 추린 것이다. 직접 일과 연관하여 1주 한차례 국무회의를 비롯하여 하루가 멀다고 열리는 관계장관회의, 정책조정회의, 매주 두 차례의 실. 국장 회의와 수시로 열리는 부내 정책토론 등 숨쉴 틈 없는 일정이 이어진다. 그 뿐인가. 국회 회기 중에는 만사를 제치고 국회출석을 해야 되는데, 그러다 보면 장관일정은 더욱 쫓기게 된다. 대체로 장관은 매일 평균 두 시간 가량, 보고를 받고 정보를 나누고 결재를 하게 되는 데, 항상 장관 비서실에는 장관결재를 기다리는 국. 과장들이 줄을 선다. 그들은 장관의 시간 몇 분을 차지하기 위하여 치열한 다툼을 한다.
  장관의 일상이 이렇다 보니 사생활은 생각하기 어렵다. 필자는 전임 교육부장관 한 분으로부터 장관 일년을 하다보니 친구, 친지가 다 떨어져나갔다고 푸념을 하는 소리를 들었다. 시간에 쫓기다 보면, 외국서 모처럼 온 친구도 만나 보기는커녕 답전 한번 못하는 게 예사이다. 그런데, 교육부의 경우 장관만 이렇게 바쁜 게 아니다. 교육부는 정부 중앙청사에서 제일 늦은 시간까지 불이 켜져 있는 부처로 유명하다. 직원들도 일에 치여 산다.  
  장관의 이처럼 바쁜 일상에 접하는 이들은, 으레 “그렇게 바쁘면 도대체 정책을 구상할 시간이 있겠느냐?”고 묻는다. 실제로 장관이 정책연구를 위해, 따로 심사숙고할 시간적 여유를 갖기는 어렵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장관의 일상, 그 삶의 과정 자체가 모두 정책과 연관하며, 그 전 과정이 장관이 정책을 형성하는데 나름대로 기여한다. 장관은 그의 일상 속에서 다양한 정책환경과 접촉하고, 정보를 수집하며, 토론하고, 설득하며, 설득 당한다. 그러면서 각종 정책에 대한 장관의 생각이 여물고, 해답이 저 멀리 보인다. 국회 상임위에 출석하여 의원들 질의에 궁색한 답변을 하다가, 학교현장 방문에서 학부모의 분노에 찬 목소리를 접할 때, 기자들의 비아냥 속에서, 옛 제자가 어렵게 한 새벽 전화 내용에서 장관은 새로운 정책의 실마리를 얻고, 이미 조금씩 정책을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의 경험으로 볼 때, 정책은 장관의 일상 의 연속선상에서 움직이면서 점진적으로 숙성되는 것이지, 집중적이고 밀도 있는 심사숙고의 결과로, 혹은 섬광 같은 충격이나 직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장관은 그 직위 때문에 최고위 정책과정에 수시로 참여하게 되므로 차관이나 실. 국장에 비할 수 없는 고급정보를 많이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관은 자칫 다양한 연원으로부터 다수의 이질적 정보를 받기 보다는, 한정된 정보원(情報源)으로부터 동질적, 우호적 정보만을 접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 특히 장관은 임기가 일년을 넘게 되면, 소관 정책영역에 대해 스스로 꿰뚫고 있다고 자만하게 되고, 이렇게 되면 자칫 스스로 폐쇄회로에 갇히게 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장관은 가능한 한 다양한 정보를 다수의 이질적 정보 소스로부터 제공받아야 하며, 가능하면 그들과 지속적 의사소통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필자는 정보 및 의사소통을 위한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이메일을 효율적으로 이용했다. 교육부 전 직원을 포함하여 교육계, 언론계, 시민사회, 그리고 친지 등 수 많은 인사들에게 이메일을 통한 의사소통을 간곡하게 청했다. 이들은 수시로 신선한 정보를 제공했고, 정책 모니터링과 새로운 정책 제언을 수시로 해 주었다. 간혹 신랄한 정책비판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필자는 새벽 5시 이전에 기상하면, 곧바로 이메일을 켜고 내게 보내 준, 매일 30 내지 40통 정도의 살아있는 사연들을 접했다. 그리고는 그 중 약 반수에게는 빠른 속도로 극히 짤막한 답변을 보냈다. 고맙다는 인사가 많았으나, 오해가 있는 경우 해명을 시도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치열한 논박을 벌리기도 했다. 위기에 처해 있는 필자에게 용기를 불어 넣은 글도 많았다. 그러다보면, 잠간 사이에 약 40분의 시간이 흘러가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이 고마운 분들과의 새벽의 밀도 있는 <의사소통>이 필자를 열린 마음으로 항상 깨어있도록 만드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장관들, 특히 교육부장관은 임용과정부터 다른 장관보다 까다로운 절차를 거치는 게 상례이다. 특히 그의 과거 경력과 삶의 역정 속에서 도덕적으로 추호라도 하자가 있으면 임용되기 어렵다. 따라서 범법은 물론 재산형성, 사생활 등에 대한 <현장 조사>(field investigation)는 매우 엄격하다. 또한 재직기간 중에도 교육계의 수장으로서의 도덕적 권위에 조금이라도 흠집이 생기면, 가차 없이 교체되는 것이 상례이다. 학생들과 교육계에 미치는 파장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장관직을 그만 둔 후에도 훗날이 그리 편치 않다. 대부분의 교육정책의 정책효과는 매우 심대하고, 또 장기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퇴직 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가 관여했던 정책의 시행과정에서 부정적 문제가 생기면, 으레 그의 이름이 들먹여 져서 자칫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하는 경우도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한국의 교육부장관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그에게는 <우군>(友軍)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그를 배출한 대학사회 마저도 교육부를 이른바 <비호감>의 전형적 예로 간주한다. 그들에게 있어 교육부는 대학의 자율성을 훼손하는 관료주의의 화신이다. 초. 중. 고교의 각급학교나 교직사회도 자신들 일에 일일이 간섭하는 교육부를 달갑게 생각할리 없다. 학생, 학부모는 물론 언론, 시민사회, 그리고 여. 야를 막론하고 정치계에게도 교육부는 <공공의 적(敵)>이다. 교육부를 질타하면 전 국민이 대리만족을 느끼는 형국이다. 그러다 보니 성공적 교육부장관이 탄생하기란 애시 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VII.
  얼마 전 크게 논란이 되었던 <2008 입시개혁안>은 2004년 필자가 장관으로 있을 때 마련이 된 것이다. 그 기본취지는 고교교육의 중심축을 사교육시장에서 학교 안으로 옮겨 보자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수능 비중을 상대적으로 줄이고 내신비중을 높여 보려는 게 그 주안점이었다. 적지 않은 논란이 있었으나 당시 언론과 교육계는 대체로 그 취지를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
  필자는 입시안을 발표하면서 이것이 성공하기 위한 전제로서 두 가지 제도의 도입을 제시했다. 그 하나는 ‘교육발전협의회’이고, 다른 하나는 ‘입학사정관제’였다. 전자는 고교와 대학을 주축으로, 학부모, 시민사회, 언론, 그리고 교육부가 참여하는 협의체로서 구체적 입시개혁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추구하는 것이 그 설립목적이었다. 실제로 그간 우리나라에서는 대입시험이나 고교교육과정과 연관하여 양 당사자인 대학과 고교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협의하는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러다보니 대학은 우수학생선발에만 눈을 돌리고, 고교는 그보다 고교교육의 정상화에만 집착하는 형국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칫 공익을 외면하고 자신의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고교, 대학, 학부모, 교육부 등이 다 함께 모여 입시개혁안의 근본정신을 바탕으로 내신, 수능, 논술 등의 적정 비중이나, 내신의 신뢰도 강화방안, 논술의 출제수위, 고교 교육과정의 개혁 등을 함께 고민하고 심도 있게 협의해서 2008 입시를 위한 합리적인 가이드 라인을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이처럼 당사자간의 사회적 협의에 의해 공익에 걸 맞는 합의안을 마련하면, 훗날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서 교육부는 성의있는 조정자, 사회적 합의의 도출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를 위해 필자는 퇴임 며칠 전 서둘러서 20명으로 구성된 협의회를 출범시키고, 구체적인 운영방안도 제시했다. 내 생각으로는 이 협의체가 발족이후 2-3년 꾸준히 활동을 하게 되면, 당사자들 간의 사회적 신뢰도 형성되고, 2008년 입시안도 세련되게 다듬어 질뿐만 아니라, 고교 교육과정도 점진적으로 개선되리라 믿었다. 그러나 필자가 퇴임한 후 교육발전협의회는 곧바로 ‘식물화’ 과정을 거친다. 존재하되 가동하지 않은 것이다.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이후 논술파동, 내신 비중 파동이 연이어 터질 때, 필자는 실로 만감이 교차했다.
  입학사정관제도 불발이었다. 오늘날 이 나라의 대학들은 자기 대학에 필요한 양질의 학생들을 뽑기 위해 스스로 자료를 분석하고 연구하는 아무런 상시적인 노력을 경주하고 있지 않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오랫동안 쌓아 온 합리적인 발굴 노하우를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다만 나라와 고교가 학생들을 한 줄로 세워주면, 손쉽게 관료적 절차에 따라 이들을 걷어 갈 생각만 해 왔다. 그래서 적어도 우리나라의 유수한 대학들은 입학과정의 내실화와 고교교육과정의 정상화를 위해 학생충원문제를 전업으로 연구하는 전문 직제를 갖춰야 된다는 게 입학사정관제 도입의 취지였다. 그러나 이것 역시 교육부와 대학의 무관심 속에 성사되지 못했다.
  필자는 일이 이렇게 된 데는, 두 가지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고 본다. 하나는 교육부장관의 잦은 교체로 정책의 일관성이 유지되지 못하는 데 있다. 장관이 교체되면, 얼마 안가 실, 국장, 과장까지 바뀌는 게 상례이다. 그러다 보면 모든 게 흐트러진다. 물론 여기에는 정책의 일관성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 절차적 장치가 부족한 것도 문제가 된다. 이 문제도 함께 풀어야 한다. 그러나 우선 다급한 것은 장관의 잦은 교체를 삼가는 일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교육부와 교육부장관의 일하는 자세이다. 교육부는 이제 자신의 역할을 주재자, 규제자, 지시자로부터 조정자, 조력자, 유도자로 재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해 당사자들과의, 또 그들 간의 끊임없는 대화와 설득, 그리고 사회적 합의를 추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부장관은 대학총장에게 위계적 압력이나 제재를 통해 강제하고 명령하던 시절은 이미 지난 지 오래다는 사실을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잊을 만 하면 <교육부 페지론>이 대두된다. 필자는 극히 무책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을 원천적으로 막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교육부와 교육부장관이 스스로의 역할을 재인식하고 일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이제 문제를 스스로 풀기 보다는, 일이 되도록 유도하는 데 전념해야 한다. 다시 말해 <해결사>에서 <조정자>로 탈바꿈하는 일이다.
  이렇게 말하면, 필자에게 “그렇다면, 당신은?”이라고 물을 것이다. 필자도 재임시에는 <조정자>보다는 <해결사>로 나서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서도,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항상 뇌리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밖으로 나와 얼마간 거리를 두고 보면서 더 깊은 자기 성찰이 가능했다. 


VIII.
  처음부터 <준비된 장관>은 그리 흔치 않다. 어느 나라 장관이나 장관역할을 일하면서 배우게 된다. 헤크로(Heclo) 같은 학자의 분석으로는 장관이 업무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추고 정치. 행정적 감각을 제대로 터득 하는데는 대략 2년 가까운 기간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그의 말대로 라면, 우리나라 장관들은 일을 제대로 배우기도 전에 장관직을 물러나게 되는 셈이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취임 후 한 반년 지나면 얼마간 업무를 파악했다는 감이 들고, 일년이 지나면 주요 정책들의 본질적 이해가 가능하고 아울러 정부와 국회 등에서 한 해 동안 일어나는 일의 흐름의 두루 경험하게 되므로 제법 자신이 생겼다. 그러나 막상 장관이 뜻을 가지고 구상, 추진한 정책이 입법화되고, 그 정책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집행되어 얼마간의 수확을 거두려면 임기 2년으로도 모자란다. 그런 의미에서 로즈(R. Rose)는 장관이 정책을 구상해서 실천하자면 임기가 최소한 3년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시간적으로 장관직에 적당한 임기는 얼마인가를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얼마간 성공적으로 장관직을 수행하려면 적어도 2년 이상, 약 3년의 시간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게 통설이다. 또 실제로 서구의 대부분의 경우 장관의 평균 임기는 4년 이상이다.
  장관이 자주 바뀌면, 정책의 혼선, 부처의 내적 불안정 등 어려운 문제가 한두가지가 아니다. 어차피 장관 재임기간이 길지 않을 것을 예상하게 되면, 장관은 철학과 비전을 가지고 거시적, 장기적 정책을 구상, 기획하기 보다는 단기간에 가시적 성과를 창출할 수 있는 단기적이고, 충격적 정책과제를 선호하게 되고, 또 자칫 무리한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게 될 개연성이 크다. 뿐만 아니라, 장관의 잦은 교체는 내각을 ‘이방인(異邦人)들의 정부’( a government of strangers)로 만들어, 내각의 연대성과 팀워크를 해치며, 부처 할거주의를 심화시킨다. 이에 반해, 장관의 재임기간이 길게 되면, 자신의 소관분야에 대해 정책전문성을 심화시킬 수 있으며, 국내외의 다양한 정치 및 정책환경과의 익숙한 교섭을 통해 문제해결능력을 제고하고, 관료제에 대한 관리능력도 제고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장관을 너무 빈번하게 바꾼다. 민심수습책으로, 국면전환용으로, 혹은 정치적 보상을 위해 장관을 자주 바꾸는데, 거기에는 은연중에 <장관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자리> 내지 <누가해도 별 차이가 없는 자리>라는 임명권자의 철학부재도 작용한다.
  특히 교육부장관의 잦은 교체는 어떻게 보아도 정당화되기 어렵다. 그러나 다른 한편 교육부장관은 엄청난 격무이다. 워낙 조직이 방대하고, 일이 복잡하고 많기 때문에 장관의 건강이 아무리 좋아도 오랜 기간 그 자리에서 버티기는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 남짓의 장관임기로는 의미 있는 개혁사업을 제대로 출범시키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적어도 2년 이상, 가능하면 3년가량의 임기를 보장하여야 한다. 그래서 장관이 교육개혁의 큰 그림을 그리고, 일정기간 개혁의지를 불태운 후 그 성과가 드러나는 것을 살펴 본 후, <이것이 내 작품입네>하며 그 자리를 차기 장관에게 물려주고 나오도록 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교육부장관은 정치적 충성심 보다는 전문성과 공익성을 중시하는 자리이다. 따라서 가능한 한 대통령은 비정치적인 인사를 임명하고, 아울러 그에게 적절한 권한위임과 자율성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이 할 일은 교육에 일일이 관여하기 보다는 깊은 관심과 정치적 지지로 장관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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