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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에세이

걱정마라, 분명 길이있다

2015. 4. 15. by 현강

                                              I.

  1965년 가을 나는 오스트리아 빈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해 봄에 이미 장학기관에서 시행하는 시험에 합격했고, 초 여름에 당시 외국 유학생들에게 의무적으로 과했던 문교부 유학시험을 거쳤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시험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오스트리아에 도착해서 빈(Wien)대학에 입학하려 하니, 입학 조건으로 독일어 구두시험을 합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무척 당황했다. 당시 내 독일어 실력은 책을 읽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으나, 말하기로 따지면 실제로 입도 때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더욱이 일주일 후로 구두시험 날짜까지 정해지자, 하늘이 깜깜해 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나와 함께 장학시험에 합격해서 같이 유학 온 K형은, 이미 한국에서 몇 해 동안 독일인 신부님에게 독일어 회화를 배워 유창하게 독어회화를 했다. 그런데 불가피하게 그와 함께 구두시험에 임해야 하니, 두 사람의 실력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날 것이기에 걱정이 더 컸다. 구두시험에 떨어져 한 학기 동안 입학도 못하고 방황하게 되면, 면목이 없어 장학기관을 어떻게 대 할까, 모든 게 걱정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독일어 회화가 일주일 동안 크게 향상 될 수는 없는 게 아닌가.

 

                                        II.

  밤새 궁리하다 다음 날 새벽 내 나름대로 해법을 찾았다. 그것은 면접자가 물을 만한 가능한 모든 예상 질문을 머리로 짜내서, 그에 구체적으로 대비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 상상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서 나름대로 예상문제 100개를 마련했다. 거기에는 내 신상에 관한 것, 한국에 관한 것, 공부계획에 관한 것, 유럽과 오스트리아에 관한 것, 기타 상식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질문이 낱낱이, 또 포괄적으로 망라되었다. 여기서 벗어나는 질문은 있을 수 없다고 스스로 확신할 때까지 가능한 온갖 질문을 내 상상의 창고에서 모조리 끄집어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20개의 문제를 거기 덧붙였다. 단답형으로 120개니 이들 질문을 그룹으로 엮으면 아마 30개 쯤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는 그것을 내 서툰 독일어로 열심히 번역했다. 그렇게 애벌로 마련한 독어면접 예상문답지를 프란쯔라는 마음씨 좋은 기숙사 친구와 같이 앉아 한 구절, 한 구절 그럴듯한 독일어 문장으로 다듬었다. 누구나 편히 이해할 수 있는 중급수준의 일상회화 수준으로 바꾸는데 꼬박 이틀이 걸렸다. 어렵사리 작업을 마친 후, 프란쯔가, “정말 놀랬다. 한국 사람은 모두 이렇게 무모하고, 철저하냐. 아마도 여기서 빠져나갈 질문을 없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나는 프란쯔에게 총 120개의 질문을 독일어로 녹음기에 녹음을 해 달라고 청했다. 내 변변찮은 청취능력 때문에 답변은 고사하고 질문 자체를 알아듣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프란쯔는 거듭되는 내 무리한 부탁에도 순순히 응하면서 “정말 흥미롭다. 마치 내가 ‘톰소야의 모험’의 허클베리 핀이 된 기분이다”라고 말하며 흥분했다.

 

  그 법석을 떨고 나니 면접까지 나흘이 남았다. 나는 녹음기로 독일어 질문을 하나 하나 들어가며 문답지를 열심히 익혔다. 처음에는 까마득했는데, 밤낮없이 매달렸더니 이틀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내 얘기처럼 풀어나갈 수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얼마간 자신이 생겼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걱정하지 마라, 절대 실패할 수 없는 프로젝트다”라고 거듭 주문을 외었다. 그러면서 내 예상문제집을 K형에게 보여 주고 한 부 베껴 공부할 것을 권했다. 그랬더니 K형은 한번 훑어보더니 “놀랍네, 고맙지만, 그냥 내 평소 실력으로 대처하겠다”고 옆으로 밀어 놓았다. 내가 생각해도 K형의 독일어 회화 실력이면, 입학면접이야 너끈히 통과할 게 분명하기 때문에 더 권하지 않았다.

 

                                                 III.

  당일 나와 K형은 조금 일찍 면접장을 찾았다. 10여명의 피면접자가 같은 공간에 머무르면서 차례로 구두로 시험에 응했다. 내가 네 번 째 였고 K형이 그 다음이었다. 시험관이 합격, 불합격은 시험 끝난 후 방 앞에 고시하겠다고 미리 말했다. 그런데 나는 그것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K형에게 물어 알았다. 앞선 번호의 응시자들은 대체로 한 학기 이상 독일어 코스를 이수한 친구들이라 독일어를 곧잘 했다.

내 차례가 되었다. 바짝 긴장했다. 입술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시험관이 그걸 느꼈는지 웃으면서 내게 긴장을 풀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대여섯 가지 질문을 차례로 던졌다. 다행이 모두가 예상문제 안의 것들이었다. 나는 준비한대로, 그러면서도 그게 내 실력인 양, 짐짓 조금 머뭇거려 가면서, 여유 있게 답변을 했다. 시험관의 얼굴에 만족한 웃음이 감돌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내 쪽으로 다가오는 다음 차례의 K형을 보았다. 그 답지 않게 무척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K형은 구두시험 내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허둥댔다. 초점에서 벗어나는 대답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수험장에서 나오며 그는 낙담한 모습으로, “분명 낙방이야”라고 혼자말 처럼 중얼거렸다.

얼마 후, 합격자 명단이 붙었다. 둘 다 합격이었다. 등급도 나왔는데, 나는 두 번째 등급인 ‘gut'(good)이었고, 그는 마지막 등급인 ’befriedigend'(satisfactory)였다. 나는 제 실력보다 월등이 잘한 점수를 받았고, 그는 평소실력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점수를 받은 셈이었다. 그런데 웬걸 K형이 ‘살았네, 살았어’라고 펄쩍펄쩍 뛰면서 나보다 훨씬 더 기뻐했다. 그러면서 내가 의외로 유창하게 독일어로 대답하는데 충격을 받고, 자신의 페이스를 잃었다고 실토했다.

 

                                             IV.

  1978년 독일 훔볼트 재단 초청으로 1년간 만하임(Mannheim) 대학에 가 있었다. 방학이 되어 빈에 갔다가 예의 프란쯔를 만났다. 빈 II구에서 보건의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 대뜸 “나는 너를 보고 한국인 독한 것을 알았다”며 “요새도 예상문제집을 만드냐”고 물었다.

  1965년 가을 독일어 구두시험은 내 삶의 과정에서 겪었던 작은 에피소드다. 그러나 나는 그 후 큰 어려움에 처하면, 자주 그 때를 떠올린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걱정마라. 분명 길이있다”라고 분발을 촉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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