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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기사/카툰

조선일보 2002년 10월 27일 인터뷰 <why> '농부가 된 부총리'

2012. 11. 11. by 현강

서울 토박이' 안병영 前 교육부장관, 산골생활 4년을 말하다

 

농부가 된 부(副)총리가 땅에서 작물을 살펴보고 있다. 농부의 뒤로 아스라이 설악산 울산바위가 근육질 몸매를 드러내고 있다. 농부는 “농부답게 밀짚모자라도 써달라”는 요청에“작위적인 모습을 보이는 게 싫다”고 했다. 평소에는 청바지 차림으로 지낸다고도 했다. /문갑식 기자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에서 길을 잃었다. 기계도 맥 못 추니 사람은 당연하다 싶었건만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스승의 전화기 속 음성은 안타까움에 젖어있었다. "그래서야 어찌 기자 생활을…." 스승에게 제자는 항상 위태로운 어린애 같은 모양이다.

 

만산홍엽(滿山紅葉)이란 말은 이맘때의 설악산에 딱 맞는다. 상강(霜降) 추위가 덮쳐 더 선명해진 풍경과 알싸해진 공기에 둘러싸인 '현강재(玄岡齋)'는 볕 좋은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있었다.

40평 남짓한 공간은 천장이 높아 시원했고 창틈으로 햇빛이 쏟아졌다. 비 내리는 날에는 자연의 풍금 소리가, 눈 쏟아지는 밤에는 묵화(墨畵)처럼 추억이, 맑은 날에는 별의 합창이 들릴 것이다. 둥그런 공간 사이 자리 잡은 창틀은 산수화 한 폭을 담은 액자였다. 가깝게는 달마봉, 멀리는 울산바위가 계절에 따라 변색하는 것이다.

 

거기서 안병영(安秉永·71) 전 교육부장관은 네 번째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농부(農夫)가 된 부(副)총리는 새벽 4시 일어나고 한철에는 8시간쯤 땅을 가꾼다. 400평 중 250평엔 과실수, 100평엔 농사를 짓는다. 설악과 동해와 제 힘으로 가꾼 결실을 함께 맛보는 삶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러 가던 중 인제 근처에서 가슴 철렁한 연락을 받았다. "겨우 세상의 눈을 피해 안정을 찾았는데 다시 언론에 등장하기 싫다"는 것이었다. 겸양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심각했다. "아내가 더 난리야. 몇 년 만에 부부 싸움을 했어…. 돌아가."

 

물러설 수 없기는 기자도 마찬가지였다. 권력을 향해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인간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진정한 은둔(隱遁)의 미학을 듣는 것은 이처럼 어려웠다. 얼굴을 마주한 농부는 한참을 망설이다 마침내 시골살이만 말하겠다는 조건을 걸고 입을 열었다.

 

◇운명을 바꾼 나들이

6년 전 그는 연세대(행정학과)에서 정년을 맞았다. 그 10년 전부터 안 전 부총리는 퇴임하면 시골에 가겠다는 생각을 해왔다고 한다. 처음에는 서울에서 되도록 멀리 갈 궁리를 했다. 서귀포, 남해, 통영, 속초 등이 후보지였는데 그가 작정한 곳은 속초였다.

 

―고향이 강원도입니까.

"서울 토박이죠. 마침 가까운 친구가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어요. '강추'하더군요. 제가 원래 산을 좋아했습니다. 설악산이 바로 지척이잖아요. 동해도 금방인 데다 친구까지 있어 별 고민 안 하고 결심했습니다."

―지인들이 말리지 않던가요.

"아마 2년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하는 사람이 꽤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도 저를 '그곳 사람'이 다 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처음 정착한 곳은 여기가 아니고 속초의 아파트였지요.

"산과 바다 외에 적당한 크기의 속초가 마음에 들었어요. 서울 연희동 집은 아들이 살고 있고 33평짜리 아파트를 구했습니다. 아내와 단둘이 살기에 딱 알맞은 크기였어요."

 

―시골행(行)을 택하는 데 제일 큰 걸림돌이 처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내는 순순히 동의했어요. '늘그막에 영감 없이는 살아도 친구 없이는 못 산다'든가 손자의 재롱, 쇼핑 재미, 고급 문화에 대한 미련이 다 아내로부터 비롯되는 겁니다. 저도 그랬다면 시골 가기를 처음부터 포기했을 겁니다. "

―나이 들면 건강이나 의료에 대한 걱정도 있을 텐데요.

"지병(持病)이 있거나 잔병치레가 끊이지 않는다면 의료 시설이 좋은 대도시를 떠날 수 없다고 모두들 생각하는데 이런 면도 있어요. 의학적으로 검증된 장수(長壽)의 세 가지 요건이 운동, 음식, 조기 검진이지요. 그런데 따지고 보면 시골은 운동과 섭생에는 최적의 조건이잖아요. 조기 검진은 마음의 문제이지 거리의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보안 문제도 있습니다.

"시골 외진 곳에 살면 강력 범죄에 무방비일 것 같지만 실제로 살아보면 좀도둑은 있어도 강력범은 거의 없습니다. 정 불안하면 보안 업체 도움을 받으면 되는데 전 여기 사는 동안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사실 그렇잖아요, 뭘 그리 훔쳐갈 게 있다고 여기까지 오겠어요."

 

―그런데 왜 속초의 아파트 생활을 2년 만에 접었습니까.

"어느 순간부터 아내 입에서 '자그마한 텃밭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라는 말이 자주 나왔습니다. 처음엔 귓전으로 흘려들었죠. 어느 날 속초 교외로 나들이를 갔습니다. 아름답게 줄지어 선 명품 소나무 사이로 예쁜 하얀 집이 보였습니다. 집 구경도 할 겸 해서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운명을 바꾼 발걸음이었겠습니다.

"마침 그 집 부부가 밖에 나와 있었어요. 차 한잔 하자며 손을 이끌더군요. 알고 보니 그분들도 서울에서 왔는데 속초의 아파트에 산다고 하니 깜짝 놀라면서 대뜸 이러시는 겁니다. '아니 서울 분이 이곳까지 내려와 아파트에 산다니 말이 됩니까?' 그 말을 듣고 불현듯 뭔가가 뇌리를 스쳤습니다."

―뭡니까, 그게.

"'속초는 기착지(寄着地)일 뿐 종착역은 아니지' 하는 생각이었어요. 아파트에서도 멀리 울산바위가 보이고 동해를 안고 있지만 그곳은 역시 인공(人工)의 도시일 뿐 제가 그리던 자연의 품은 아니라는 것을 그때 깨달은 겁니다. 그 부부의 주선으로 지금의 땅을 마련해 집을 지은 겁니다."

―거실은 천장이 온통 유리로 덮인 천창(天窓)이고 내부가 갤러리를 연상시키는 구조입니다.

강원도 고성까지 찾아온 제자를 위해 손수 차(茶)를 준비하고 있는 안병영 전 교육부장관. 그가 살고있는 공간은 부인이 직접 설계한 것이라 고 한다. /문갑식 기자

“아내가 그런 재주가 있어요. 설계, 인테리어, 시공에 아내가 다 관여했어요. 농사짓는 땅은 그 2년 뒤 샀지요.”

 

◇농사꾼의 삶

‘여기 와 살면서 자연이 두려움의 대상이라는 것을 처음 배웠다. 서울에서는 태풍, 폭설, 천둥, 벼락을 가까이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남의 일이었고 내게는 생활에 불편을 주는 정도였다. 이곳에선 그런 자연의 손길을 일상에서 만난다’(블로그 중에서).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몇 년 안 돼 전원생활을 포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여기가 추울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아요.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합니다. 1년에 몇 번 1m 이상 폭설이 내려 꼼짝 못할 때도 있지만 그게 나름대로 엄청난 정취(情趣)를 주기도 합니다. ‘외경(畏敬)스럽다’는 말, 그 뜻을 저는 여기서 깨달았어요.”

―이런 질문 실례인데 궁금해하는 분이 많을 것 같아서…, 돈은 얼마나 들었습니까.

“허허. 집터 사고 집 짓는데 그리 큰돈이 들지 않았어요. 우리가 농담으로 서울 강남 아파트 몇 평 값이면 된다고 말합니다.”

 

―시골살이 자랑 좀 해주시지요.

“뭐랄까, 나 스스로가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할까, 남과 척지지 않으려고 하기 싫은 일도 할 필요가 없고 실속 없이 스케줄에 쫓길 길도 없지요. 알량한 체면이나 하찮은 명예에 상관할 필요가 없습니다. 뿌리치기 힘든 연고(緣故)의 늪에서도 해방될 수 있습니다. 늘그막에 세속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 그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대도시 젊은이들은 잘 모를 겁니다.”

―독사(毒蛇)나 야생동물로부터 받는 위험도 있을 텐데요.

“저기 뒤편 창문으로 보이는 오솔길, 저기 올라가 끝까지 다녀오는 데 한 시간쯤 걸려요. 워낙 개발이 안 된 곳이라 야생동물이 많아요. 저번에는 잼버리 야영장 근처를 차를 타고 지나다가 200㎏ 남짓한 멧돼지가 돌진하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어요. 전 무섭기보다 카메라를 휴대하지 않은 걸 후회했어요.”

―카메라요?

“제가 기계치(痴)라 20년 전 컴퓨터를 처음 배울 때는 불가역적(不可逆的) 변화에 굴복한 셈이지요. 지금은 솔선해서 똑딱이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촬영한 사진을 블로그에 올립니다. 그게 뭐겠어요, 솔선해 나선 미학(美學) 여행 아니겠어요?”

―경제적으로도 실제로 도움이 됩니까.

“되지요. 우선 주거비가 서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고 심야 전기를 쓰니 냉·난방비도 적게 듭니다. 손수 작물을 재배해 먹으니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재래시장이나 농협 마트에 다녀오면 족하지요.”

―농사 지을 때는 무리를 하면 안 되지요.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제가 100평 정도를 가꾸는데 그것도 한여름에는 7~8시간이 걸려요. 잡초와 한바탕 씨름하고 나면 또 벌레들이 괴롭힙니다. 밤이면 온몸이 결리고 여기저기 긁기 바쁘지만 흠뻑 땀을 흘린 뒤의 상쾌함은 말할 수가 없지요. 교육부장관 할 때보다 체중이 7㎏이나 줄었습니다. 그간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고요.”

―주로 무엇을 심습니까.

“고추, 상추, 깻잎, 배추, 고구마, 토마토, 옥수수, 땅콩…. 다 먹기가 벅찰 정도지요. 나무들은 심은 지 3년쯤 지나면 작은 수확이 시작됩니다. 저기 저 배나무도 가냘파 보이지만 벌써 배(梨)가 달렸잖아요.”

 

―때론 서울이 그립지 않습니까. 평생을 사신 곳인데.

“처음 3년간은 의도적으로 서울에 기웃거리는 일을 극력 피했습니다. 공식 모임에도 전혀 참석하지 않고 내 편에서 친지들에게 전화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 가야 할 일이 있으면 몰아서 해결하고 왔고요. 뭐랄까, 정(情) 떼는 작업을 한 건데 이유가 있어요. ‘서울에서 잊힌 존재’가 돼야 여기 발붙이기가 훨씬 수월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도 생각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외로움이나 소외감이 아예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요. 다만 가슴이 저며올 정도로 심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시골에서 생활하려면 부지런해야 해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농작물과 나무 가꾸려면 고독할 틈이 없지요. 지금은 가을걷이가 끝나 앞마당에 떨어진 낙엽 쓰는 일이 고작이지만 ‘노동하는 사람(Homo Laborius)’이 되었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대견스럽습니다.”

 

◇인생 3모작

안 전 부총리는 인생을 3모작해야 한다고 말해 왔다. 회사에서 정년을 맞는 55세까지 30년가량 일하고 그 뒤 10여년은 적성과 보람을 찾을 수 있는 일을 하며 칠십 넘어서는 자연 속에서 마음을 비우며 살자는 것이다. 그게 고령화 사회를 살 해법이라는 것이다.

―사회적인 관계를 그렇게 단절하는 게 모질어 보입니다.

“하하, 그렇다고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에요. 상담(相談)을 꾸준히 하고 있으니까요.”

―상담?

“옛 제자들이나 친지, 저와 예전에 함께 일했던 교육부 공무원들한테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이메일로 상담 요청이 꽤 자주 들어옵니다. 살면서 어려운 일, 업무를 보다 곤란한 일들이 생기면 해오는 상담 요청이 하루에 1~2건씩은 꼭 들어와요. 그럴 때마다 적지 않은 기쁨을 느껴요. 내가 아직도 할 일이 있다는 느낌 같은 거지요.”

―‘인생 3모작론(論)’에 대한 반향(反響)이 있던가요?

“인생 2모작에 대해선 주변에서 이미 확산되고 있는 걸 확인하고 있습니다. 50대 중반인 제자 한 명은 대기업의 서비스 업종에 종사하고 있으면서 제2의 삶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 사회복지사 자격증까지 땄다더군요. 올해 육십 된 교수 한 분은 전문 심리 상담사가 되는 게 퇴직 후의 꿈이랍니다. 그것을 위해 2년째 대학원에 다니고 있고요.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하나 있긴 했어요.”

 

―재미있는 일?

“제가 인생 3모작에 대한 글을 쓴 지 2년 가까운 얼마 전에 연세대 정무권 교수가 전화를 걸어왔더군요. ‘스웨덴의 라인펠트 총리가 선생님 얘기와 거의 같은 말을 했다’면서요.”

―어떤 얘기였습니까.

“라인펠트 총리는 자유보수온건당 당수(黨首)로 중도 우파 연립정부의 젊은 총리입니다. 그가 올 2월 7일 스웨덴 일간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웨덴인들은 첫 직장에서 30년간 열심히 일하고 다음엔 좀 더 느슨한 일자리로 바꿔 20년간, 즉 75세까지 일터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 겁니다.”

―‘자연으로 회귀’하는 건 없지 않습니까.

“제가 말한 제3기는 인생의 ‘부록(附錄)’ 같은 것이니 그리 개의할 필요는 없어요. 단 그가 75세까지 일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엔 꽤 의미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평생 노동자화?

“우리나라도 연금 고갈 문제가 있지만 스웨덴도 지속 가능한 복지 수준, 특히 현행 연금 수준을 유지하려면 더 일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뜻이지요. 유럽의 많은 나라도 한때는 조기 퇴직을 권장했지만 그게 노후 연금과 의료 보장 체계에 엄청난 부담을 줄 줄은 몰랐던 겁니다.”

―그 문제는 우리도 똑같지 않습니까.

“사회 전체의 생산력을 확보하려면 오래 일해야 하는데 실제로 많은 유럽 국가는 2000년대 초 이후 퇴직 연령을 대체로 65세 수준으로 잡고 있습니다. 적지 않은 나라에서는 퇴직 후 연금을 제대로 받으려면 고용 기간을 45년 채우도록 규정하고 있고요.”

―우리는 정반대 아닙니까. 정년이 무척 이른데요.

“생애 주기를 교육·고용·퇴직 후로 나눠 보면 우리는 형편이 어렵다는 게 드러납니다. 맨 먼저 학업 기간이 유례없이 길지요. 어마어마한 과잉 투자도 일어나고 있고요. 반면에 고용 기간은 너무 짧고 그나마 불안정합니다. 노동생산성도 높은 편이 아니고요. 그런가 하면 노후 보장은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기대 수명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는데 상황이 이러니 퇴직 후 30년을 ‘고단한 여생(餘生)’이라고 하는 겁니다.”

―해법이 뭘까요.

“일을 한 뒤에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이나 ‘놀이’처럼 재미있는 일을 하려면 ‘평생 교육’을 주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진국 중에 ‘학습 복지(Learnfare)’라는 개념에 주목하는 나라도 늘고 있고요.”

 

◇교육 정책은 정권이 바뀌어도 버려지지 않아야

안 전 부총리는 교육부장관을 두 번 지냈다. 김영삼 정부 때인 1995년 12월부터 97년 8월까지, 노무현 정부 때인 2003년 12월부터 2005년 1월까지다. 그가 만든 정책은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EBS 수능 강의, 학교운영위원회, 초등 영어 실시 같은 것들이다.

 

―교육부장관 재직 시 e-러닝을 강조한 것도 그런 맥락입니까.

“당시로선 혁명적인 정책이었다고 자부합니다. 수많은 반대와 의심이 있었지만 제 소신은 확고했어요. 교육만큼은 이념을 배제하고 앞으로 살아가야 할 우리 후손과 현재 학생들이 어떻게 미래를 꿈꾸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리(黨利)와 당략에 좌지우지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김영삼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이념 성향이 정반대지요.

“앞서 말했듯 교육정책이 이념에 따라 변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e-러닝 정책을 처음 장관 할 때 시작했는데 두 번째 장관 하면서 세계 최고의 반열이 됐습니다. 그때 정말 기뻤어요.”

 

―그렇지만 아이들 공부하는 모습을 보면 여전히 마음 아픕니다.

“제일 큰 원인이 뭐랄까, 아이들에게 ‘자기 시간’이 없다는 거지요. 어린 나이에 창의성을 기르고 지덕체(智德體)를 함양해야 하는데 우리 아이들은 학교와 학원을 오가길 반복할 뿐입니다. 전 우리나라의 지나친 주입식 교육이 창의력의 싹을 자른다고 봅니다. 정치 얘긴 안 하기로 했지만… 정권의 이념이나 통치자의 소신에 따라 과도하게 엘리트 교육이나 형평성, 어느 한쪽으로 크게 치중하는 교육정책은 지양해야 하지요.”

―전에는 그리 부각되지 않았던 학교 폭력과 공교육에 대한 부적응자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저도 그런 현실이 너무 안타까워요. 원인은 사실 ‘교육적 배려’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학교 폭력은 가정에서부터 학교에 이르기까지 청소년들이 마음 편히 의지할 곳이 없어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즉흥적으로야 강력한 대책이 좋을 것 같지만 근본적인 대책은 역시 가정·학교·사회가 서로 책임을 미루기보다는 함께 이들을 감싸 안는 것뿐입니다.”

 

―댁에 의외로 책이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서울(연희동) 집에 다 놔두고 왔어요. 필요할 때만 가져다 보지요.”

―평생 학자로 살아오셨는데….

“내년 1월쯤 출간을 목표로 책의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통합 모형이랄까, 좌우 협력과 노사 협력 모델 같은 거지요. 제가 주목하는 나라는 오스트리아입니다. 한때 오스트리아는 국민마저 독일에 통합되는 날만을 기다리는 무기력한 국가였지만 지금은 유럽의 대표적인 강소국(强小國)이 됐습니다. 그 비결을 찾아보는 작업입니다.”

―그럼 정치학 책이겠네요.

“물론 정치경제적 접근이 주조를 이루지만 지성사, 문화사적 접근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저처럼 선생 노릇을 오래 한 사람은 전공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지요.”

―우리나라는 미국 일변도인데 유럽에 관심을 두는 이유가 있습니까.

“사실 한국 문제를 푸는 데 미국은 유일한 준거의 틀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성숙(成熟)국가의 반열에 오른 우리에게 미국의 효용도는 한계에 다다랐다고 생각합니다. 유럽 현대사 속에는 한국의 미래 문제를 풀 수 있는 해법들이 보물처럼 여기저기 숨겨져 있지요. 그걸 캐내는 것이 제가 주력하는 지적 작업입니다.”

 

―그런데 사모님이 언론을 싫어합니까.

“조용히 있고 싶은데, 지금 시절도 소란스럽고…, 아내는 제가 두 번째 교육부장관 할 때도 반대했습니다. 학자의 길을 걷기만을 바랐던 거 같아요.”

미시령을 향해 달리는 백미러 속에 우두커니 서서 기자를 지켜보고 있는 농부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인생 3막을 열고 있는 그를 소란스럽게 만든 것 같아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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