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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기사/카툰

업코리아 출범 당시 인터뷰(2003)

2010. 10. 3. by 현강
중도개혁의 기치를 앞 세우고 인터넷 신문 창간에 참여했다. 벌써 7년전 일이다. 내가 초창기에 대표로 일했다.
그러나 이 매체는 이후 우여곡절을 거쳐 당초의 꿈을 접고 보수화의 길을 걷는다. 출범 당시 주간한국과 가진 인터뷰(2003/9/19)를 게재한다.

[석학에게 듣는다] 안병영 연세대 교수 업코리아대표

"이념의 이분법적 잣대 사라져야"

없이도 잘 지내오던 안병영(62ㆍ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선생이 드디어 부인 윤정자(62)씨의 휴대폰을 뺏어 온 것은 8월 중순께. 차는 못 몰아도 이제 그것만은 꼭 필요하게 됐다. 대표라는 직함이 요구하는 일의 분량도 분량이려니와, 하나의 언론 매체를 탄생시킨다는 것은 총력을 투여해도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달라진 세상의 최신 매체가 아닌가.

자칭 ‘백면서생’이라지만, 선생의 경우는 그 말이 시대를 호흡하는 지식인의 책무를 저버릴 수 없다는 의기의 또 다른 표현으로 다가온다. 서울 충정로 ‘업코리아’ 편집국에는 허욱 편집국장 아래 5명의 젊은 기자가 쏟는 열정의 총체가 홈 페이지(www.upkorea.net)에 나날이 업 데이트 되고 있다.

9월 4일 현재. ‘김두관 행자부장관 해임 건의안 가결에 따른 대치 정국’이라는 머릿기사 아래 사회ㆍ생활ㆍ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기사가 배치돼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재추대 기사 바로 밑에는 이홍규 한국정보통신대 교수가 기고한 ‘노무현 정부의 3대 모순’이 게재돼 있다.

IT 세상의 문화적 현상, 연극 리뷰 등이 읽는 맛을 돋우는 기획 기사다. 자살의 늪에 빠진 한국을 정신 심리학적으로 분석한 칼럼은 독자의 지적 욕구에 답한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인터넷 언론

발간일인 8월 27일을 전후해 주요 언론은 선생과의 인터뷰 등으로 이 신문의 출범을 축하했다. 추기경의 동참은 과연 화룡점정이었다. 8월 5일 혜화동 추기경 집무실에서 1시간 20분간 펼쳐졌던 인터뷰 도중, 선생이 추기경에게 했던 제안이 받아들여졌던 것.

이 소식이 알려지자 109명이었던 발의자 수는 650명으로 급증, 이 인터넷 신문이 도약하는 데 결정적 힘이 됐다. 5~60대가 주축이었던 발의자가 40대 교수진으로 확충된 것은 기존 네티즌의 정서와는 다른, 새로운 가능성을 내비친 부분이었다.

연세대 교수, 교육부 장관 등 공식적 부문에서의 활동으로 진작부터 언론의 화려한 조명을 받던 선생은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초심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 같은 행동의 기저에는 현시점을 “정서 과잉과 이념 과잉이 역기능으로 부쩍 불거지고 있는 젊은 세대, 이념적 양극화, 집단 갈등 상황”으로 보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합리성, 이성, 상식의 바다로 그들을 데려가기 위한 효율적 공간으로서 인터넷에 주목하게 된 거죠.” 대학교수로 재직중이던 1990년대 초부터 생활속에서 절감해 온 인터넷의 유용성을 이 시대에 올바르게 뿌리내리게 하자는 결심이었다. 무분별한 포퓰리즘과 사이버 테러의 텃밭으로 변질될 수도 있지만, 이 시대 젊은이들과의 공감 면적을 넓혀야 겠다는 결심에는 못 미쳤다.

오마이뉴스ㆍ프레시안ㆍ서프라이즈 등 진보 진영, 독립신문ㆍ뉴스 & 뉴스 등 보수 진영으로 나뉘어진 국내 인터넷 신문들을 일일이 클릭해 가며 속내를 탐색했던 것은 그래서다. 그 같은 수작업을 마다 않은 사람들이 그를 포함, 모두 7명. 강원일 변호사, 전 청와대 정책 기획수석 비서관 박세일 서울대 교수, 박은정 이화여대 교수, 서경석 경실련 상임집행위원장, 이삼열 숭실대 교수, 임현진 서울대 교수 등은 6월 19일 그를 정점으로 ‘발의자 대회’를 열어 언론과 면을 텄다.

‘지성, 전문성, 중도 균형성’을 내건 늦동이 인터넷 신문이 탄생한 것이다. “우리시대가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은 사회 통합과 민생 개혁이라는 믿음이죠.”


지성, 전문성, 중도균형성 지향

승산 있는가? 성마른 질문에 선생은 “발기인으로 참여한 교수님들의 지원만 계속 따른다면 ‘격조 높은 대안 매체’로 우뚝 솟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익히 보던 탄탄대로가 아니었다.

“필자들에게 ‘정말 부끄럽고 죄송한데, 고료가 없다’는 말을 할 때는 힘들었죠.” 그러나 5명의 기자들에게 얄팍한 봉투를 월급이라며 줄 때보다는 힘이 덜 들었다고 한다. 당시 그들을 부르는 대학신문의 광고는 이러했다. ‘20대 보수와 50대 진보가 만나는 공간, 업코리아에서 용기가 있으면서도 균형 잡힌 젊은이를 찾습니다.’ 이 같은 광고에 젊은 인재들은 150명이나 몰려 들어 그를 난감케 했다.

‘50대 진보주의자’인 선생은 나이를 잊고 산다. 환갑이 지났지만 같은 목표 아래 20대와 머리를 맞댈 수 있는 것은 단순과 소박 덕택이다. 바로 그 덕택에 선생은 많은 사람들과의 공유 면적이 넓다는 얘기다. 흔한 골프도 안 치는 선생의 낙이라면 등산이 전부. 북한산은 1주일에 한 번, 연희동 집 근처의 산에는 수시로 간다. 그리고 학교와 인터넷 신문이다. 그러나 선생을 기억할 때, 적잖은 사람들이 정치 현장과 언론의 칼럼을 먼저 떠 올리게 되는 것도 탓할 바는 못 된다.

선생이 명쾌하고 균형 잡힌 칼럼으로서 세인의 입에 올랐던 것은 1980년대. 혼돈의 민주화 과정에서 도하 신문들은 선생의 생각이 필요했다. 일방적 주장이 난무하던 때, ‘건강한 민주화’를 지향하는 선생의 글은 더욱 돋보였다.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를 주로 소개한 80년대는 나를 가리켜 중도 도는 중좌라고들 했는데, 최근 들어서는 위장된 보수라고까지 하는 사람이 더러 있더군요.”

선생은 우리 사회가 진보니 보수니 하면서 상대의 존재를 왜곡하는 일에 너무 익숙하다며 그 같은 구분법에 강한 거부감을 표했다. “이념을 앞세우는 자의 속내는 헤게모니와 권력 장악에 놓여 있을 가능성이 높죠.” 한국은 선명성을 앞세워 쟁점이 급격히 양극화되는 사회라 중도적 수렴이 난망하다는 것. 이 대목에서 선생은 “여론 조사의 결과로는 많은 사람들이 중도적 입장인데, 언론은 거꾸로 간다”며 이 같은 추세를 부추기는 한국 언론의 흑백논리에 강한 거부감을 표했다.

좌우의 대립이 순치돼 온 서구 사회의 경험에서 우리는 배우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유럽사는 중도 우파가 극우를, 중도 좌파가 극좌를 투쟁의 장에서 배제해 왔다”며 “상호 작용속에서 생산적 결과를 이끌어 내려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선생은 문제를 하나 냈다.

“누군가가 남북 관계에는 신중한데 우리 사회의 약자에 대해서 많은 배려를 한다면 이건 진봅니까, 보숩니까?” 자의적이고 일방적인 규정이 몸에 굳어 버린 한국 사회는 저 질문에 어떤 답을 들려줄 것인가? 아니면 침묵할 것인가? 바로 저 같이 침묵하는 다수의 목소리를 업코리아는 생생히 담아 내고자 한다. 선생이 보여 준 폭넓은 행보가 그 과정에서 큰 지분을 담당할 것이다.


관료사회, 성장지상주의서 벗어나야

YS 정권의 이수성ㆍ고건 총리 시절, 교육부 장관을 역임해 온 경험이 그것이다. “나와서 다시 학문하는 데 꽤 도움이 됐죠. 역동적 갈등관계 등 관료주의의 실체에 다가섰으니까요.” 그래서 선생이 관료사회나 정책에 대해 제시하는 조언은 ‘실체적 진실’을 담보하고 있다.

선생은 “우리나라의 관료 사회는 아직도 지난 시절의 성장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다”며 “그러나 발전국가의 여정으로 보자면 국가의 저력으로 기능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선생은 다분히 양면적인 관료적 권위주의는 현재 극복 과정을 겪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21세기는 그것을 넘어서, 세계화와 민주화라는 두 개의 거대한 패러다임으로 작동되는 시대다. 거기서 최대의 지분은 영미식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이라고 선생은 규정했다. 유럽형 복지국가라는 모델도 세계화 바람앞에는 수정이 불가피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과제는 민주화, 그리고 조정된 시장 경제(co-ordinated market economy)를 어떻게 조화시켜 나가야 할 것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세계화에 주체적으로 참여, 그 열매를 고르게 나눌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를 실현한 뒤에 세계화를 맞은 서양과 달리, 민주화의 한 가운데서 세계화의 도전을 받고 있는 한국은 모든 것이 헝클어져 힘들다는 지적이다.

“수출로 먹고 사는 우리는 세계화를 거부할 수 없어요. 우리는 지식ㆍ정보 사회에 대한 적응력이 강하므로 유리한 면이 있어요.” 그러므로 인적 자원에 대한 투자와 함께 사회적 안전망을 견고하게 하는 데 지혜를 모아야 한다는 것. 이 대목에서 선생은 세계화 과정에서의 탈락자와 낙오자를 위한 복지에도 주력해 줄 것을 정부에 당부했다.

‘우리의 운명을 좋은 쪽으로 돌리자는/그런 간절한 마음들이 만드는/매체의탄생은/축하할 만한 일이 아닌가!’ 친구로서 예전부터 그를 쭉 지켜봐 온 정현종 시인이 헌정한 창간사가 옳다면, 21세기의 한국은 ‘맹목적인 증오와 광신적 믿음속에서 바르게 생각하고 말하고 우리의 운명을 좋은 쪽으로 돌리자는 간절한 마음들이 만드는 매체’ 하나를 갖게 된 셈이다.


침묵하던 중도의 제목소리 내기

그러나 지금은 걸음마를 가르치는 부모의 심정이다. 이전에 걸었던 큰길과는 분명 다른, 곁길이 될 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애착이 간다. 선생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어렵게 본 이 늦둥이가 빨리 제몫을 하기를 기대하는 심정이리라. “형편이 조금 나아지면 고료를 지급할 생각이다. 뒤늦게 보상할 생각도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업코리아의 원고 청탁을 받은 지식인 중 ‘고료 없음’이라는 말에 언짢아 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얼마전까지 당대의 칼럼니스트였던 선생은 업코리아 일에 쫓겨, 요즘도 심심찮게 들어 오는 원고 청탁은 일절 고사하고 있다.

방학이지만 매일 업코리아로 출근해 젊은 기자들과 부대끼는 선생은 잠시 나가더니 주스를 손수 컵에 담아 왔다. “우리는 모두 셀프예요.” 골프는 못 치지만 젊은이들과의 생활을 택한 선생은 이렇게 말을 맺는다. “단순, 소박하니 내 나이는 잊고 살죠.” 가지런한 치열 사이로 미소가 번져 나왔다.

침묵하던 중도가 함께 웃는다. 
  
장병욱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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