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영 (전 교육부총리,연세대 교수)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2006/4/20

I. 일반적인 질문들

다음은 귀하가 장관에 임명된 직후 장관직을 수행하기 시작하면서 부딪혔을 것으로 예상되는 몇 가지 상황을 중심으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1.먼저 어떤 과정을 통하여 장관으로 발탁되셨으며 어떤 미션(mission)을 가지고 부처에 취임을 하셨습니까?

제가 처음 교육부장관에 임명된 것은 1995년 말, 문민정부 때였고, 두 번째는 2003년 말 현 참여정부 때였습니다. 두 경우를 따로 설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제가 장관에 발탁된 것은 나나 다른 사람들 모두에게 한마디로 전혀 의외의 일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한번도 장관을 꿈꿔 본 적이 없었고, 정치권 근처에서 맴 돌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YS 대통령과도 일면식이 없었습니다. 혹 정치와 연관이 있다면, 내가 광의의 정치학자이고 당시 10 여 년간 꽤 자주 신문 등에 정치평론을 써 왔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과거 권위주의 정권 이래 역대 정권과 현실 정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해 12 20일 개각발표 예정시간인 11시에 한 시간 여 앞서서 청와대로부터 전화를 받았고, 김영삼 대통령이 직접 장관직을 청하였습니다. 해라, 못 하겠다 한동안 승강이를 거쳐 제가 장관직 수락을 한 것은 10시가 넘어서였습니다. 당시 TV화면에는 11시 가까이까지 교육부장관 예정자로 이명현 교수 이름이 뜨다가, 발표 직전에 제 이름이 올랐습니다.

훗날 들으니,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신임 이수성총리가 교육부장관 경질문제와 연관해서 이견이 있었던 듯 합니다. 이수성 총리는 강력하게 경질을 요구했고, 김 대통령은 유임을 주장하다가 마지막에 김 대통령이 총리의 뜻을 수용했다는 것입니다. 경질로 결판이 나자 김 대통령이 제가 어떻겠느냐고 물었고 이 총리가 좋다고 대답했다는 후일담입니다. 그런데 흥미 있는 일은 대통령이 어떤 경로로 나를 발탁했는지 그것은 불분명합니다. 어떤 이도 내가 당신을 대통령에게 추천했노라 나선 사람도 없었습니다. 한 가지 그럴 사한 설명은, 전임 박영식 장관이 각료 중 유일한 연세대 출신인데, 그 분이 떠나면 연대 출신이 한 사람도 없게 되어, 연세대 출신 중에서 후임 장관을 찾지 않았겠냐는 얘기입니다. 그러다가 제가 그 쪽 캠프와는 무관하지만, 그런대로 개혁적인 인사라고 판단해서 불러 들였을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여하튼 저의 장관 임용은 미리 예정되었던 일이 아니라 상황이 빚어 낸 <사건>, <사고>애 가까웠지 않나 싶습니다.

그 때문에 당시 저는 전혀 준비된 장관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제가 수행할 미션에 대한 뚜렷한 인식이나 의지도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렴풋이 같은 해 5 31일 교육개혁위원회가 발표한 < 1차 교육개혁방안>을 착실하게 프로그램화 하는 일이 내 일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취임 기자회견 때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임명 되자마자, 저는 마치 입시 준비하는 학생처럼 열심히 공부 했습니다. 그러면서 세계화, 민주화의 시대정신을 담은 교육개혁방안이 기존의 교육제도와 관행과 비교할 때 <패러다임적 변화>를 추구하는 일대 혁신안이라는 사실을 알고 제가 엄청난 개혁 전도가가 되어야 하겠다는 결의를 다졌습니다. 1차 교육개혁안에 이어, 제 임기 중, 2, 3 및 제4차 교육개혁안이 발표되었고, 그 과정에서 교육부는 더욱 바뻐졌습니다. 이들 교육개혁방안은 당시 풍미했던 세계화와 민주화라는 두 사조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저는 청와대가 주도하는 자유주의적 교육개혁의 흐름과 별도로, 제도권교육의 그늘진 곳을 치유하기 위해 교육복지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그것이 1996 12 <교육복지 종합대책> 으로 문서화 되었는데, 그 내용인즉, 1) 특수교육발전방안, 2) 학교중도탈락자 예방 종합대책, 3) 학습부진아 대책, 4) 귀국자녀 교육대책, 5) 유아교육 발전방안의 5가지 정책방안이었습니다. 그 중, 학교중도탈락자 대책은 곧 대안학교 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련된 교육복지 종합대책은 당시 교육부에서 <장관 프로젝트>라고 불려졌고, 이후 <교육복지>라는 개념이 점차 보편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해, 저는 청와대 주연, 교육부 조연의 1-4차 교육개혁사업을 정책화하는 일과 이른바 장관 프로젝트인 교육복지 사업을 실천하는 일을 핵심 미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교육개혁과제는 무려120개나 되고, 이를 정책화 하는 데는 엄청난 시간, 인력, 예산을 소요하기 때문에 여기에는 우선순위 매김과 선택과 집중 문제가 있었습니다. 수많은 정책을 입법화했고, 프로그램화 했습니다만, 그 중 가장 역점을 두었던 사업은 교육정보화사업, 초등영어교육 도입, 학교운영위원회 제도화였습니다. 다음 교육복지사업 중에는 대안학교 및 특수교육 지원사업에 가장 힘을 쏟았습니다.

그에 비하면 2003년 제가 다시 정부로 들어갈 때는 상황이 많이 다릅니다. 그때는 이미 교육부장관을 한번 역임했기에 정권 초기부터 교육부총리 하마평에 조금씩 오르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저는 중도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인터넷 신문 <업코리아>(지금은 성격이 많이 바뀌었습니다)의 대표로 그 일에 몰입이 되어 있었기에 다시 정부로 들어갈 가능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11월 하순 노무현 대통령이 저를 청와대 오찬에 저를 초청했습니다. 직접 대면해서 말씀을 나눈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오찬 내내 그 분은 나에게 교육에 관해서 많은 것을 물었고, 나는 나대로 내 생각을 전했습니다. 약 한달 후 그해 12월 이른바 <NEIS>문제로 교육부가 온통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되자, 개각과정에서 제가 다시 교육부 수장으로 발탁이 되었습니다. 아마 11월 오찬 모임과 그 날의 대화가 저를 발탁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다시 정부에 들어간 것은 1997 8월 처음 장관을 그만 둔 후 6 4개월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그 동안 9명의 장관이 바뀌었습니다. 비록 저는 그동안 밖에 있는 몸이었으나, 한국교육의 흐름과 정책의 변화를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수행해야 할 미션을 처음처럼 생소하게 느끼지 않았습니다. 제가 취임하자마자, 이미 준비 중이던 <사교육비 경감대책>을 정밀하게 다듬고, 그 핵심과제의 하나인 <EBS 수능강의 및 인터넷 서비스>의 출범을 준비했던 것도 그런 연고로 가능했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지난 8년간 진행된 교육개혁사업을 전반적으로 면밀히 검토하여 중장기적 관점에서 재조정하고, 재 조직화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강조해야 할 것은, 지난 10년여 동안 정권이 문민정부에서 국민의 정부, 그리고 현 참여정부로 바뀌었으나, 이 나라 교육정책의 기본골격은 아직도 문민정부의 <5.31 교육개혁안>에 준거하고 있었으며, 정권 고위층들도 그 점을 스스럼없이 인정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동안 너무 자주 장관이 바뀌는 과정에서 교육개혁사업은 전체적 틀 속에서 유기적으로 전개되기 보다도, 그 때 그 때 필요에 따라 단기적, 대증적으로 추진되었고, 그러다보니 전체적 구성도 흐트러졌고, 중장기적 조망도 잃고 표류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새 시대에 맞춰 교육개혁사업의 틀과 방향을 새롭게 조정할 필요가 절박했습니다. 저는 이 일을 하는 것이 제 미션이라고 인식했습니다. 아마 노 대통령이 저를 발탁한 것도 1996-7년 간 1 8개월 동안 <5.31 교육개혁안>의 초기 제도화 과정에 주역이었던 제가 이 일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 기간 중장기적 조망의 교육개혁체계를 다시 세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만, 그 중 가장 핵심적인 미션으로 생각했던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그 하나는 e-러닝이었고, 다른 하나는 교원개혁이었습니다. 한국은 이미 교육정보화에 관한 세계 최첨단의 선진 국가이기 때문에 EBS 인터넷 서비스의 성공을 계기로, e-러닝의 열풍을 유아교육부터 평생교육까지 확산시켜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교원평가를 주축으로, 교원승진, 교원연수 등을 아우르는 대규모 교원개혁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교육개혁이 한 차원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교육의 주체인 교원이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집중적 연구와 토론을 통해 안은 마련되었으나, 실천단계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2.
장관으로 취임하시면서 핵심 미션을 어떤 방식으로 구체화하고 실천해 나갔습니까?

첫 번째 장관 임기 중에는, 저는 이미 말씀드린바와 같이, 120개의 교육개혁사업과 이른바 장관 프로젝트 등 상상하기 어려운 과부하(過負荷)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기획 차원에서는 두루 관여를 하였으나, 시간, 인력, 예산 등을 고려할 때, 부처 내적으로 우선순위를 정하고 얼마간 집중과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장관은 특히 공론화와 입법화가 필요한 정책안에 대해 집중적으로 관여했고, 이들 막중한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부처의 직제 개편, 인력의 정예화, 예산확보에 큰 정성을 쏟았습니다.

교육부내에 교육개혁추진단을 창설하고 여기를 중심으로 주요 교육개혁사업의 우선순위를 정해 프로그램화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였습니다. 입법화가 필요한 의제는 장관 주도하에 일을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개혁을 위한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대규모의 직제개편과 인사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뒤에 자세히 설명).


3.
장관으로 취임할 때와 퇴임할 당시 겪었던 인수인계 절차과정에서 대해서 말씀하여 주십시오.

처음 장관으로 취임할 때는 장관간의 공식적 인수인계 절차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전임 장관님들과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취임식 날은 박영식 전임 장관과, 그 다음날은 김숙희 그 전 장관과 점심을 같이하며, 주요한 정책의 진행상황과 교육부의 내적 관리에 필요한 정보를 소상히 들었습니다. 말하자면, 비공식적으로 인수인계를 한 셈입니다. 퇴임할 때는 당일 오후 2 40분 경, 고건총리를 통해 통고를 받고 퇴임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3시 뉴스에 이미 개각내용이 발표되었고, 오후 5시 퇴임식을 하고 청사를 나왔습니다. 퇴임 후, 다음 장관인 이명현 장관과 역시 점심을 같이 하며 내용상의 인수인계를 하였습니다.

지난번은 상황이 달랐습니다. 대통령과 전임 장관과 자리를 같이 했고, 국무총리실에서 정식으로 인수인계 절차도 거쳤습니다. 장관간의 인수인계가 제도화되었습니다. 이번에도 퇴임 시는 사전에 통고를 받지 못했고, 당일 아침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을 통해 정식으로 통고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물러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이미 마음의 준비를 끝냈을 때였습니다. 후임 이기준 부총리의 경우, 임용직후부터 소용돌이에 휘말렸기 때문에 예정된 인수인계 절차를 진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4. 귀하가 장관직을 수행하면서 가장 큰 장애요인으로 어떤 것을 들 수 있습니까?

교육정책의 형성 및 관리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의 큰 원천은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하고 있는 이념적 갈등입니다. 얼핏 보기에 교육문제는 탈() 이념적 영역인 듯하나, 실은 거기에 이념적 갈등이 첨예하게 도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념의 여울에 빠지게 되면, 만사를 정()과 사()의 문제로 인식하게 됩니다. 따라서 문제해결에 나서면 나설수록 사회적 갈등의 수렁에 깊이 빠져들기가 일수입니다. 대부분의 교육정책의 경우, 여론이 반반으로 갈라지는 경우가 많고, 그 때문에 사회적 합의를 일궈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고교평준화, 3()정책이나 고교등급제,교육개방, 사립학교법이 모두 그런 예입니다.

정책에 대한 가치정향의 차이는 같은 정부안에도 존재합니다. 경제부처는 정권과 별 관계없이 시장주의적 관점을 고수하고, 교육문제도 가능한 한 시장과 경쟁에 맡길 것을 권합니다. 그 때문에 인적자원의 고른 개발과 사회통합 문제를 고려해야 할 교육인적자원부와 잦은 갈등이 있습니다. 제가 이번에 장관이 된 후, 경제부총리에게 청하여 재경부 전 직원에게 1시간 교육문제에 대해 특강을 하고, 실국장들과 오찬을 함께 하면서 주요 쟁점에 관해 생각을 나눈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5. 귀하가 장관직을 수행하면서 가장 도움(어려울 때 원군이 되었던)이 되었던 요소는 무엇입니까?

내 경우에는 교육인적자원부 직원들이 언제나 가장 큰 원군이었습니다. 두 번 임기 중 제가 주요 정책문제에 관한 한 내적 이견이나 갈등 때문에 고민한 적이 거의 없고, 주요 쟁점에 관한 한 부처 내부는 항상 잘 결속했습니다. 힘들 때 한마음으로 더 열심히 단합했다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밖에 있다가도 부처로 돌아오면, 마치 고향에 온 것처럼 느꼈습니다.


II. 귀하가 장관으로 재직하시면서 경험하셨던 정책입안과 추진에 관한 질문입니다.

 구체적인 정책사례를 중심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구체적인 정책사례로 2004 4 1일부터 실시된 <EBS 수능방송. 인터넷강의>를 들겠습니다. 이 사례는 방송과 통신을 결합한 세계초유의 e-러닝 모델이자, 적극적 의미의 ‘교육기회의 평등’을 실현하고자 한 최초의 국가적 시도였습니다.
이 사업은 당초에 교육인적자원부의 <2.17 사교육비 경감대책>의 핵심사업으로 실시된 것으로, 그 연원을 따지면, 실제로 1977년부터 실시된 EBS‘위성교육 방송’을 모태로 하여 8 년 만에 재탄생 한 것으로, 두 차례 전부 제 임기 중에 시도된 것입니다. EBS의 플러스 1 채널 하나가 수능강의 전문 채널로 특화하여 24시간 전문 방송을 하는 한편, EBS 인터넷을 통해 중..고 급의 다양한 수준별 콘텐츠가 모든 영역의 과목으로 서비스됩니다. 무엇 보다, VOD(Video on Demand) 동영상 정보를 10 만명이 동시에 접속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역사적 시도는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지역간. 소득간 격차, 디지털 디바이드를 해소할 대표적 교육복지 프로그램으로 각광을 받았습니다. 더 나아가 이 개혁사업은 쌍방향성 자기 주도적 학습을 통한 e-러닝 시대를 개막, 한국의 교육 패러다임을 바꾸는 역사적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2004 8월 국무총리 국무 조정실은 참여정부의 정책사례를 분석한 결과, <EBS 수능 강의. 인터넷 방송> 2004 전반기 참여정부의 대표적 정책 성공사례로
뽑았습니다. 이 개혁사업은 카노이와 레빈의 분류에 따르면, 전체 교육 체제의 변화를 겨냥하면서 동시에 기술적 성격을 강하게 띤다는 점에서 <거시적.기술적 교육개혁> 사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거시적. 정치적 교육개혁>사례를 선택하려 했으나, 실제로 교육에 관한 우리사회의 이념적 갈등 때문에 적절한 사례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1. 본 정책에 대한 문제정의와 해결방안에 대한 접근방식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EBS 수능강의. 인터넷 서비스>의 핵심은 인터넷이라는 뉴미디어를 통해 국가가 앞장서서 과외를 실시함으로써 대입 준비과정에서 사교육비를 경감하고, 특히 소외지역이나 계층에게 더 낳은 교육기회를 제공하자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2004년 이를 실시하게 된 배후에는, 그동안 한국이 이른바 IT강국으로 크게 발 돋음 했다는 사실, 특히 우리나라의 교육정보화 수준이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의 수준에서 세계 굴지라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또 구체적으로는 EBS가 오랜 동안 위성을 통한 수능방송을 통해 이 방면에 엄청난 경험과 실행능력을 쌓았다는데 있습니다.

주지되듯이, <EBS 수능강의. 인터넷 서비스>의 연원은 ‘과열 과외 완화 대책’으로 1997년 전격적으로 실시된 ‘위성교육방송’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교육부장관으로서 이미 1996년 여름부터 박흥수 EBS 사장과 더불어 EBS 위성방송을 면밀하게 준비해 왔습니다. 그러나 1997년 여름 오랜 산고 끝에 EBS 위성방송이 막 그 고고의 성을 올렸을 때 저는 장관직을 사직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위성을 통한 EBS 수능방송은 지속되었으나, 이에 대한 정부의 관심을 크게 퇴조했고, 점차 그 교육적 성과에 대해서도 회의적 시각이 늘어갔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EBS를 잘 활용해서 수능시험 등에서 엄청난 효과를 본 많은 고등학교 들이 적지 않았으니, 대구 영신고, 광주 진흥고 등 이른바 EBS 수능명문들이 그런 학교들이었습니다. EBS는 적잖은 역경 속에서도 시간과 더불어 많은 콘텐츠를 개발했고 높은 수준의 방송기술도 터득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2003년 말, 교육부총리에 취임하자마자 서둘러서 비교적 방대한 <사교육비 경감대책>을 집대성했고, 그 핵심 사업으로 e-러닝을 내 세웠는데 그 중 초점은 역시 <EBS 인터넷 서비스>였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초, , 고급의 수준별 교육을 할 수 있다는 데 크게 흥분했습니다. 그러나 이 큰 사업을 위한 준비는 크게 미흡했습니다. EBS와 의논하여 개통일자를 4 1일로 잡았는데 따지고 보면 매우 무리한 일정이었습니다. 저는 취임직후 담당국장과 과장을 경질해서, 이 방면에 경험이 많은 박경재 국장과 배성근 과장을 담당 국. 과장으로 보임했습니다. 흥미있는 일은 1997년 위성방송 출범 당시 그 주역들이 고건(총리)-안병영(장관)-서삼용(국장)-박경재(과장)이고, EBS 측은 박흥수(EBS 사장)-배종대(담당책임자) 였는데, 이번에도 고건-안병영이 총리와 장관으로 관여했고, 서삼용(전산원장), 박경제(주무 국장)-배종대(EBS 뉴미디어 국장)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더 하여 적극성과 열정, 그리고 전문성을 두루 갖춘 고석만(EBS 사장)이 참여했습니다. 거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느껴졌습니다.

무엇보다 출범이 눈앞에 닥쳤는데 우선 힘들었던 게 단기간 안에 대규모 사용자를 위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사업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초기 동시접속량이라는 미지수와 싸우는 일이 난사(難事)였습니다. 그런데 초기 접속 폭주 상황도 문제려니와, 동시에 안정화 단계에 들어선 이후에 합리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적정선을 찾는 것도 어렵기 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업 자체가 사상 초유의 실험이기 때문에 시뮤레이션이 불가능했고, 전문가 마다 예상 접속량이 달랐습니다. 결국 논란 끝에 EBS에 최대 10만명을 동시에 동영상으로 서비스할 수 있는 서버(Server)의 구축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서버를 시간 내에 구입, 장착하기에 시간이 너무 절박했습니다. 실제로 장비가 우여곡절 끝에 인천공항을 통과한 것이 3 30일 새벽이었습니다.

그밖에도 ‘인터넷 대란’의 악몽은 곳곳에 있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KT나 하나로 통신을 비롯한 주요 초고속 인터넷 사업자들이 수능강의 실시 발표후 인터넷 백본망 증설, 기간망 증설, 부하분산, 가입자망 점검 등의 작업을 서둘러 진행해 인터넷 대란에 대비했으나, 특정시간대에 수능강의의 접속이 폭주했을 때 해당 서버와 회선에 무리가 갈 위험은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인터넷 서비스의 교육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서둘러서 모든 고등학교에 위성방송 수신기 및 안테나를 설치하고, 각 학교의 인터넷 통신속도 및 학내망 속도를 증속하는 일, 저성능 PC를 교체 또는 업그레이드 하는 작업 등 끝이 없었습니다. 아울러 산간. 오지 및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EBS 서비스를 고르게 제공하기 위해, 이들 소외지역 학생들에게 위성방송 수신기를 지원하고, 케이블 TV 시청료 인하를 추진하며, PC 및 인터넷통신비 지원을 추진하는 등에도 소홀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웠던 일의 하나는, 그해 4 15일에 국회의원선거가 예정되어있어, 4 1 EBS 개통의 성패는 총선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 불문가지(不問可知) 였습니다.

여기서 교육인적자원부는 EBS와 더불어 유관기관간의 협력체제를 구축하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EBS, 정보통신부, 전산원, KT, 두루넷 등 11개 유관기관 전문가로 구성된 <대책반>을 구축(3 11일부터)하여, EBS에 구축되는 인터넷 시스템의 설계 및 구축을 점검, 지원하고, 국가망, 상용망 등 통신 네트워크 차원에서 예상되는 제반 문제점을 점검하고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아울러 동시접속자 폭증을 막기 위해 각 학교에게 가능한 한 위성방속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인터넷 강의는 미리 ‘다운로드’ 받은 후 학내망을 통해 활용하며, 개별 접속을 자제해 줄 것을 권고했습니다.

마지막 15일을 남기고는 교육인적자원부에는 장관실을 비롯한 모든 방에 <D-15>이라는 상황판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하루하루 날짜가 줄어들면서 일은 폭주하고 긴장은 고조되었습니다. 장관을 비롯해 거의 전 직원이 밤을 밝히며 ‘올인’에 돌입했습니다. 전국 2,100여개 고등학교별 추진상황 모니터링 시스템이 구축되었으며, 홍보를 위해 언론사별 전담요원이 가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홍보를 위해 교직단체, 학부모 단체, 각급 학교 정보 부장회의, 교육방송연구회, 교사동호회 등을 활용하였습니다. EBS도 마찬가지로 마지막 점검에 나섰습니다. 언론은 개통초기 동시 접속자 폭증으로 인한 서버다운, 끊김 현상, 접속지연 등 다양한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는 지적과 함께 ‘인터넷 대란’이 마치 필지의 사실인양 보도하기 까지 했습니다.

저는 개통 사흘 전에 기자회견을 자청했습니다. 아직 서버의 구축이 완결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프로그램과 콘텐츠와 네트워크의 품질, 그리고 유관기관의 대응 등을 총 점검한 결과 얼마간 자신이 섰습니다. 그래서 기자들에게 ‘인터넷 대란은 없다’라는 메시지를 자신 있게 발표했습니다. 기자들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습니다.

3 31, 저는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과 함께 <e-러닝 시대 개막에 즈음하여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제하의 대국민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늘에 맡기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4 1일 새벽 2시 개통에 앞서 저는 EBS 상황실에서 진대제 장관과 고석만 EBS 사장과 더불어 야전사령관처럼 e-러닝의 연착륙을 진두지휘했습니다. 그날 아침 모든 언론은 EBS 수능-인터넷 강의가 성공했음을 일제히 보도했습니다.

그로부터 100일 후, 7 9일 오후 4시에 EBSi는 드디어 회원가입 100만 시대에 돌입했습니다.

2. 대통령, 청와대 비서진, 국회 및 정당, 이익집단, 시민단체, 언론, 그리고 유관부처간 이해갈등이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EBS 인터넷 강의에 대한 대통령과 청와대, 그리고 총리실의 관심은 지대한 편이었는데, 대체적인 분위기는 매우 ‘우려스럽다’는 입장이었습니다. 3 2일 교육부 종합대책을 통해 정식으로 보고를 받은 노무현 대통령은 깊은 우려를 표명하면서 ‘인터넷 대란 대비책을 철저하게 강구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대통령은 실제로 그 전날(3 1) 이미 민정비서실로부터 “시스템 구축에 소요되는 기간(통상 2개월)을 감안할 때, 4 1일 인터넷 동영상 서비스는 불가‘ 할 것이라는 보고를 받은 바 있었기에 회의가 더 컷을 것입니다. 청와대뿐만 아니라, 정작 전문부처인 정보통신부조차도 4 1일 개통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총리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건 총리는 비상합동상황실의 가동과 3개월간의 시험기간 설정을 권고했습니다. 교육인적자원부가 당초에 예상되는 동영상 최대 동시접속자수를 5만명으로 산정했다가 10만명으로 늘린 것도 바로 이러한 주위의 분위기와 권고에 따른 것입니다.

위에서 밝혔듯이, 이 사업은 <거시적, 기술적> 교육개혁 사업이므로 교육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지대하지만 주된 관심이 그 기술적 성패에 집중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업을 둘러 싼 여야나, 교직단체들 간에 첨예한 정치적, 가치론적 갈등은 별로 없었습니다. 야당도 명분상으로는 이 국가적 사업의 성공을 빌어야 하는 입장이었으므로, 모든 관심은 이른바 ‘인터넷 대란’여부에 모였습니다.

정작 EBS 인터넷 서비스가 개통되던 시점에는 대통령은 탄핵으로 직무정지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성공직후 그의 대응은 접할 수 없었습니다. 총선을 두 주 앞서고 있었기 때문에 국회도 사실상 쉬고 있을 때였습니다. 고건 총리는 다음 주, 국무회의에서 치하의 말씀을 했습니다. 성공이후, 언론도 비교적 호의적인 반향을 보였습니다.

위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EBS 인터넷 강의는 우리나라 e-러닝의 출발점이 아닌가 합니다. 다행인 것은 정작 언론을 비롯한 외부의 회의적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교육인적자원부와 EBS 양측은 성공에 대한 확신 속에 굳게 결속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3.
정책성공에 필요한 중요 요인들(대통령의 신임, 청와대 스탭진의 지원, 정책타이밍, 언론 및 여론의 반응, 국회나 정당의 지원 등)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이들의 충족 정도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정책형성과정에서 대통령의 신임과 정책적 지원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대통령의 인격적 연장인 청와대 스텝진의 지원도 무척 중요한 게 사실입니다. 기본적으로 대통령은 사교육비 경감대책의 일환으로 진행된 <EBS 수능. 인터넷 서비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나, 지나치게 단기간에 급속히 진행되는 데 대해 매우 우려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청와대 스텝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언론과 여론도 회의적인 면이 없지 않았고요. 역시 많은 우려를 했습니다만, 총리실이 전 과정에 동참하며 우군으로 많이 도왔습니다.

그러나 이 사안 자체가 <기술적>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정치적 갈등이 별로 없었고, 어느 누구도 일을 방해하는 쪽으로 부정적 개입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주위의 회의적 눈초리가 일하는 사람들을 외롭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EBS와의 굳은 결속을 바탕으로, 이 사업에 정통부, 한국전산원, ISP(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체) 관계자, 시스템 구축 책임을 맡은 LG CNS등을 깊이 끌어들여, 네트워크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였고, 실패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4.
성공적인 정책수행을 위해 귀하가 사용한 정치관리 (political management)분야에 관한 질문입니다. 예를 들면, 귀하는 대통령, 대통령비서실장, 청와대 수석비서관들, 다른 행정부처 및 자치단체장, 국회, 언론 그리고 이익집단들로부터 지지를 얻기 위하여 어떤 종류의 정치적 기술이나 전략들을 사용하셨는지 말씀하여 주십시오.

저는 명색이 정치학자이고 세상 돌아가는데 그리 둔감하지 않아 정치적 감수성은 별로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 때, 그때 역동적으로 변하는 정책환경이나, 정책과정에 대한 인지능력이나, 대통령, 청와대, 국회, 언론 등 다양한 정치적 actor들에게 어떻게 접근하여 어떤 방식으로 이들을 설득하는 것이 효율적인지에 대한 전략적 사고도 제법 할 줄 안다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저는 정책성공을 위해 전통적 스타일의 정치관리 기술을 구사하는 데는 그리 능숙한 편이 못됩니다. 특히 지연, 학연과 같은 다양한 연고나 인연을 한껏 동원한다든가, 잦은 골프모임이나 술자리 등을 통해 친숙한 관계를 형성하는 전통적인 정치기술은 낙제점에 속합니다. 터놓고 말해서, 저는 기본적으로 일은 일의 관계로 해결해야지 끈끈한 사람관계로 해결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그 때문에 <인적, 정서적 접근>은 삼가는 편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나라의 큰일을 위해서는 본인이 얼마간 망가지드라도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는데, 저는 재임 중, 제 본업이 학자이고, 또 깨끗한 모습으로 연구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살아 왔기 때문에, 아예 처음부터 전통적 정치관리기술을 구사하는 일은 금기시 하였습니다. 청와대든, 국회든, 언론 쪽이든 마찬가지였고, 특히 권력이 큰 동네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습니다. 그 때문에 일하면서 외로울 때가 많았습니다.

1) 정치적 협상전술이나 설득력 있는 전략(정치적 감각이나 노하우)

정책결정과정에는 실로 많은 참여자들이 관여하며, 장관들은 그들 간의 상충하는 다양한 이해관계를 균형 있게 조정해야 합니다. 여기에 정치적 감수성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신뢰구축이 필요합니다. 장관은 정책쟁점에 따라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접촉하게 되는데, 가능하면 이들과의 기술적 차원의 이해관계 조정이나 교환관계를 넘어, 깊은 교감을 통한 규범적 공감대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쉬운 일이 아니나 한번 신뢰관계가 형성되면 그 관계는 오래갑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관은 단순한 이해관계의 조정자가 아닌, 개혁의 주도역 내지 실천자로서 얼마간 자신의 규범적 입지를 분명히 하고 결의 있게 대처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해관계의 조정을 위해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유연한 자세를 견지할 필요가 있고, 교조적, 독선적 접근은 금물입니다. 장기적 관점에서 주요 개혁과제를 중심으로 장관주도하에 조직적으로 느슨하나, 규범적으로 상호 공감하고 연대하는 다양한 주체를 네트워크로 묶을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편의상 이를 <규범적 개혁공동체>라고 불렀고, 이들과 꾸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2) 유관 정치집단들과의 개별적 친분관계(학연, 지연 등 네트워크)의 활용

개별적 친분관계가 있으면 설득과 이해가 용이하기 때문에 이를 전혀 활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여기에 매달리지는 않았습니다.

3) 여론이나 언론의 효과적인 활용전략

저는 소극적으로 보도자료 제공차원의 수동적인 부처 홍보에는 식상했습니다. 단발 이슈에 대응하는 일회성 홍보나 대증요법, 상투적 접근은 실효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중. 장기적 관점에서 교육정책 전반을 기획, 조정하는 전략적인 홍보개념을 도입했고, 정책입안 단계부터 홍보전략수립을 의무화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EBS수능. 인터넷 서비스>의 경우도, 초기부터 언론기관 대상 정책사안 설명, 이메일 통한 홍보자료 수시 제공, 교육부 출입기자단과 수시 간담회를 계속했고, 장관 TV 출연, Q & A 자료 제공, 광고 등을 통한 대 국민 홍보도 지속적으로 시행했습니다.

참고로 교육인적자원부는 2004 1년간 정책고객과 핵심고객 들에게 이메일을 통해 교육정책에 관한 정보를 상시 제공하는 틀을 만들었습니다. 제가 직접 관여한 것은 이른바 <부총리 서한>인데, 3월부터 년말 까지 매번 약 20 만명에게 31차례 보냈습니다. 그 중 <K형에게>,<대안학교 이야기>, <우리교육에는 희망이 있습니다>는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습니다.


5.
본 정책을 추진함에 있어서 가장 아쉬웠던 점들에 대하여 말씀해주십시오.

그리 아쉬웠던 점이 없었습니다. 교육인적자원부는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에 크게 고무되었습니다. 주위의 우려와 회의는 얼마간 우리를 외롭게 만들었지만,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더 철저하게 준비하도록 압박했기에 결과적으로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교육복지에 관심이 큰 저로서는 EBS 수능방송. 인터넷 서비스가 사교육의 혜택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소외지역의 학생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는 사실과 이의 성공을 통하여 우리나라의 e-러닝이 그 첫 단추를 꼈다는 데 크게 만족합니다.


III.
관리 및 리더십 분야 (management and leadership skills)에 관한 질문입니다.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사례를 들어 말씀을 해 주십시오.

부처관리 사례

김영삼 정부시절 장관 부임 후 반년이 조금 지난 1996 7 8, 오랜 산고 끝에 교육부 는 대규모의 직제개편을 하고, 이를 계기로 교육부 역사상 유례없는 최대 규모의 인사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교육개혁을 성공적으로 실천하기 위 해서는 무엇보다 일과 사람의 질서를 바로 세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 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관리개혁을 통해 교육부는 혁신 역량을 크게 높여 교육개혁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위의 사례를 직제개편과 인사개혁으로 나누어 좀더 설명하려고 합니다.

1) 직제개편

<작은 정부>구현이라는 국가시책에 따라 기구와 정원을 늘리지 않는 범위내에서 개편을 단행했습니다. 몇 가지 두드러진 변화를 살펴보면, 단순관리 기능을 최소화하고 정책기획 및 개발기능을 대폭 강화하여, <교육정책기획국>을 신설하고, 21세기 정보화사회에 발맞추어 <교육정보관리국>, 그리고 평생학습사회에 대비하여 <평생교육국>을 신설하였습니다. 또 그동안 교육부의 정책기능이 고등교육분야에 편중되어있었으나, <.중등교육실>을 신설하여 국민기초교육, 인성교육 강화의지를 천명하는 한편, 그간 소홀히 취급되어 온 유아교육과 특수교육을 각각 과로 승격하여 독자적 체계를 세웠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직제는 해방 후 50년 동안 지속되어 온 기존의 교육부의 전통적인 조직을 앞으로 50년을 바라보며, 새롭게 미래지향적으로 개편한 것으로 지식, 정보사회를 선도하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의미하는 획기적 조직개편이었습니다.

2) 인사개혁

대규모의 직제개편에 따라 교육부는 총 535(일반직 379, 전문직 156)에 대한 역사상 유례없는 인사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전문성과 개혁성을 가진 외부 전문가를 대폭 영입(고등교육실장, 교육정보관리국장, 교육행정전산담당관, 교육정보자료담당관, 국제교육협력담당관)하는 한편, 젊고 유능한 인재를 과감히 발탁하여 관료조직의 활성화를 도모하고 행정의 전문성 향상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그 결과 직급별 평균연령이 현저히 낮아지고, 임용구분별로도 행정고시출신 공무원이 기존의 39.8%에서 53%로 크게 높아졌습니다. 그간 다수의 유능한 행정고시출신 공무원들이 장기간 지방으로 전전하며 본부진출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들을 과감히 발탁하여 <새 피>를 주입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원출신의 교육전문직 인사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큰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기존의 교육전문직제도가 안고 있는 고질적 병폐의 근원은, 이들 주 많은 이들이 일을 위해 교육부에 들어오기보다, 일신상 필요에 의해 교육부로 왔다가 또 필요에 따라 나간다는 사실입니다. 즉 일선에서 20년 이상 교사로 재직하던 장기 경력자들이 나이가 많이 들어 연구사나 장학사로 교육부에 들어왔다가 몇 년 지나 상위자격을 취득하여 교감, 교장으로 다시 나가거나, 그냥 있으면 정년(당시 65) 이전에 교장중임임기(8)이 끝나게 될 사람들이 본부로 들어와 일정기간 머물다가 교장으로 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므로, 교육전문직 제도의 취지가 퇴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교육행정업무에 필요한 행. 재정지식이나 정책기획 경험이 전혀 없어 교육부에 들어 온 후 이들에게 기대했던 역할을 수행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교육행정 전문가를 제도적으로 구분해서 양성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에 따라 교육공무원인사관리규정을 개정하여 획기적인 개선방안을 확정했습니다.

오랜 궁리 끝에 종전까지 시행되던 시. 도 교육청과의 1:1 교류에 의한 인사를 중단하고, 전국교사를 대상으로 공개전형을 실시하여 동기가 투철한 우수인력을 전문직으로 임용하기로 하였습니다. 응시자격은 교육경력 6년 이상, 36세 이하인 국. . 사립학교 교원을 대상으로 하였습니다. 이들 합격자들은 앞으로 집중적인 교육과 연수를 통해 명실공한 교육전문직으로 의무 복무케 한 후 이들 중 업무추진능력이 검증된 이사를 상위직위에 승진. 임용토록 조처하였습니다. 이후 이들은 교육인적자원부의 전문엘리트로 급성장하여, 현재 본부실국에 근무 중인 교육전문직 84명 중, 2/3 56명이 바로 이들 공채출신 교육전문직인 것이다.

1) 귀하는 부처에서 발생하는 주요 현안문제들을 어떻게 인지하셨습니까? 누가 여기에 필요한 정보와 관련된 지식을 주로 제공해 주었습니까?

부처에서 발생하는 주요 현안문제들은 여러 소스로부터 인지합니다. 우선 실국장회의와 같은 공식적 보고경로를 통하는 경우가 있는 가하면, 차관, 장관비서실, 정책보좌관실 및 실국장, 혹은 과장들과의 비공식적 접촉을 통해 인지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기타 부처내 정책토론회, 관계자회의를 통해, 혹은 간혹 열리는 하위직급 직원들과의 간담회 등을 통합니다. 그런가 하면, 적지 않은 직원들은 내 이메일주소로 갖가지 정보와 대안들을 보내오고, 간혹 편지를 보내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부처내의 개방적 의사소통구조의 존부(存否)가 부처 내 지식과 정보의 양을 결정한다는 사실입니다. 장관은 언제나 귀를 열어 놓아야 합니다.

간혹 기자들이 귀띔하는 경우도 있고, 드물게는 부처 밖으로부터 듣는 는 경우도 없지 않았습니다.

2) 부처의 인사관리(인사 이동 및 배치)에 관한 노하우를 말씀해주십시오.

저는 재임 중 줄곧 <인물연구>를 계속했습니다. 자주 인사파일을 들춰 보았고, 사람 정보를 꾸준히 모았습니다. 보고 및 결재 과정에서 40여명의 과장급 중견간부들과 가능한 한 길게 사안에 대해 얘기를 나누면서 밀도 있는 접촉을 해 왔습니다. 그래서 처음 부임 후 세 달쯤 지난 후에는 부처 내 중견이상 간부는 비교적 익숙하게 되었습니다. 과장 자리 하나도 그 업무영역에 관한 한 전국을 관리하는 중요한 자리이므로 새로 임명하거나 자리를 옮길 때는 꽤 고심하며 깊이 생각했습니다. 차관과 자주 생각을 나누었고, 어떤 때는 두루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물론 다면평가 결과도 중시했습니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은 지언(至言)입니다. 인사만 바르게 하면 직원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연고주의에서 벗어나 능력과 적재적소에 맞춰 사람을 써야 합니다. 그러나 인사과정에서 그 부처의 구조적 속성을 전혀 감안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단 탈() 연고주의적 관점에서 구체적 인사안()을 만든 후, 지역적 구성 등을 고려해 최소한의 조정을 했습니다.

장관이 되자마자 대규모의 인사를 하는 것은 신중히 생각해 볼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실제에 있어서는 차관이나 총무과장에게 인사를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처음 장관이 된 후, 초기에 소규모의 파격적 인사를 단행하여 새로운 인사의 방향을 알린 후, 반년이 지나 사람연구가 끝난 후 대규모의 인사를 단행 했습니다. 두 번째 장관이 되었을 때에는 이미 중견이상 간부들에 관해서는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정이 달랐습니다.

대규모 인사에는 전()인사를 꽤 뚫는 원칙을 선보여야 합니다. 그냥 자리바꿈이어서는 부처 안에 새로운 기풍을 진작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1996 7월 대규모 인사에서 <능력위주> 원칙을 앞세웠고, 그 결과 부처내에 지각변동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수차 인사 청탁을 받으면, 당사자에게 불이익을 준다고 엄포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두 번 재임 중, 저는 거의 인사청탁을 받지 않았습니다. 다른 장관들은 정. 관계로부터의 인사 청탁 때문에 골치를 썩였는데 제 경우에는 그 때문에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몇 번의 차관 임명과정에서도 청와대는 제 의견을 존중했기 때문에 불편한 일이 없었습니다.

3) 부처 간부회의를 얼마나 자주 개최하였습니까? 간부회의에서 부처의 주요현안에 대한 의견수렴과 장관의 의사전달이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공식적으로 매 주 한번씩 실· 국장회의를 하고, . 차관, 차관보 및 2실장의 5인 회의도 매주 한 차례씩 했습니다. 그리고 수시로 사안이 있을 경우, 유관 간부들을 모아 숙의를 하였습니다. 간부회의를 가능한 한 의례적이 아닌 열린 토론과정으로 진행하려고 노력했습니다만, 위계적 관료사회의 풍토와 시간의 압박 때문에 공식적 보고· 지시의 연쇄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비공식적 접촉을 자주 가졌고, 주요 사안에 관해서는 소규모 비공식회의, 정책토론 등을 통해 의사소통과 의견수렴을 많이 했습니다. 시간절약을 위해 이메일을 통한 의사소통을 많이 했습니다.

제가 <새벽 형>이고, 항상 시간에 쫓기기 때문에, 새벽 6시 반경 국장들에게 전화를 걸어 지시를 하거나 의견을 묻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6시 반을 조심해라>는 말이 회자되기도 했습니다.

4) 부처의 주요 현안과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예산을 어떤 방식으로 확보하고자 하였습니까?

모든 과제는 이미 확보된 예산의 한계 내에서 시행되었습니다. 예견되는 다음 해 주요 사업을 위해서는 예산편성과정에서 집중적인 관심을 표명했습니다.

5) 귀하가 의사결정을 할 때 주로 어떤 사람의 의견을 주의 깊게 고려하였습니까? 중요도에 따라 순서대로 말씀을 몇 가지만 말씀해주십시오.

우선 장관은 차관, 비서실장, 정책보좌관, 그리고 총무과장과 가장 많은 접촉을 합니다. 이들과는 <한 배를 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얼마간 가족과 같은 느낌을 주고받습니다. 그러나 사안에 따라 중요도가 달라집니다. 그 사안에 대해 잘 알고, 또 나와 같이 고민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토론과정을 통해 의견을 모았습니다.

6) 부처관리에 있어서 가장 아쉬웠던 점들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행정학자이기 때문에 부처의 내부관리에 대해서는 남보다 더 전문가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직원들을 효율적으로 결속시키고 동기화(動機化)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경주하고 싶었습니다. 가능한 한 직원들이 행복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직원들이 일에 밀려 힘겨워하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되어 항상 미안했었습니다. 그런데 워낙 시간에 쫓기고, 밖에 일이 많아 더 정밀하게 내부관리를 하지 못했고, 또 지나치게 일 관리에 매달리다 보니 부처를 보다 <인간화>하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IV.
장관의 자질과 덕목, 건강 및 일정관리, 퇴임관리 등에 관한 질문입니다.

1) 한국에서 효과적인 장관의 업무수행을 위하여 가장 필요한 자질과 덕목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래에 예시한 자질과 덕목은 모두 필요한 항목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순위를 매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마 정책사안에 따라 우선순위가 달라질듯 싶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볼 때, 가장 필요한 것은 <건전한 상식과 판단능력>일 듯 합니다.

(: 전문성, 공정성, 건전한 상식과 판단능력, 도덕성, 정치적 감각, 부처 미션에 대한 비전과 명확한 전략 등)

2) 장관 재직시 사용했던 효과적인 일정관리방법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일정관리는 일단 비서실에서 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한 주 앞서 일정을 면밀히 살펴보고 조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가능한 한 의례적인 행사참여는 줄이고, 일 중심으로 일정을 짰습니다. 사적인 만남은 가능한 한 피하고, 일을 위해 필요한 차례로 우선순위를 정했습니다.

3) 장관재직시 사용했던 건강관리방법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제 유일한 취미가 산행이라, 주말에 시간이 되면 산에 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한달에 두 번가기가 어려웠습니다. 건강을 위해 토요일 오후 짬이 나면, 가까운 경복궁이나 창경궁에 가서 급히 한 시간쯤 걷기도 하였습니다. 가장 즐겼던 긴장완화 방법은, 일요일 늦은 오후 혼자 집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켜 놓고, 비몽사몽으로, 보다 말다, 자다 깨다하는 것이었습니다. 항상 잠이 모자라, 차로 이동할 때는 잠시라고 눈을 부치곤 했습니다.

4) 마지막으로 후임장관이나 공직사회에 꼭 하시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공직에 있으면서, 항상 公心, 均心, 誠心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장시간 설문에 응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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