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구노트

이념과 정책: 중도개혁의 정치를 위하여

2010. 7. 14. by 현강

1. 머릿말

한국 사회의 오늘은 이념과잉, 이념갈등으로 충만하다. 정치권도, 시민사회도, 언론계도, 그리고 지식인의 담론구조도 모두 첨예한 이념대립으로 점철된다. 주요한 정책쟁점에 대해, 생각이 양극으로 쏠리고 양자는 날을 세우고 치열하게 부딪힌다. 우리 사회의 경우 이념갈등은 얼마간 세대간의 갈등과 맞물리면서 더욱 심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다보니 사회적 합의가 어렵고, 다툼은 있되, 해결되는 문제는 없다. 주지되듯이, 이념적 양극화가 심화되면, 정치는 교조화, 관념화되며, 정치주역들은 이념의 웅덩이에 빠져 격돌만을 일삼게 되며, 끝내 정치는 교착상태에 빠진다. 이렇게 되면 실사구시를 추구하는 정책생산에는 소홀하게 되고, 민생정치와 거리가 먼 불임(不姙)정치를 낳는다.
 

그런 가운데 날이 갈수록, <중도>가 설 자리는 좁아진다. <중도적 공론의 장>이 실종된 가운데 합의적 개혁정치도 표류한다. 이렇듯 교착정치가 장기화될 때 한국의 선진국의 문턱에서 좌절하게 된다. 더욱이 내년 대선을 겨냥해서 정치권의 이념대결은 더 거세질 전망이다.

이러한 현상은 정당간의 이념적 색채가 선명했던 유럽에서 최근 좌파와 우파간의 서로 경계가 희미해지고 양자가 중도에서 서로 만나 협력정치를 추구하는 양상과는 크게 차이가 난다. 그렇다면, 우리 정치의 이념적 양극화, 교조화, 그리고 여기서 배태되는 정치의 교착화와 불임정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 해답으로 여기서는 중도개혁 정치를 제의한다. 중도적 정치적 리더십을 바탕으로 사회적 합의에 바탕을 둔 체제개혁과 효율적 정책생산을 추구할 때, 한국정치는 <교착과 불임>정치의 악순환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논의를 위하여 이 글에서는 우선 <, 중도정치인가>를 논하고, 20세기 세계역사 속에서 중도통합적 리더십을 통하여 체제개혁에 성공한 몇 개의 사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어 두 차례에 걸친 교육부장관 체험을 바탕으로 필자가 시도한 교육영역에서의 중도 차원의 정책개혁을 소개하고자 한다. 다음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한국적 상황에서 중도개혁의 정치학이 성공하기 위한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이 논의과정에서 한국정치의 개혁을 염두에 두고 있으나, 필자의 경험을 제외한 모든 논의는 가능한 한 구체적인 현실정치과는 무관하게 진행하고자 한다.


2.
보수와 진보, 그리고 중도


흔히 이데올로기를 말할 때는 보수-진보 내지 좌-우라는 이분법적인 형태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대체로 보수는 자유, 시장, 경쟁, 개인주의, 자본, 경제성장과 효율성 등의 가치를 중시하는데 반해, 진보는 보다 평등, 국가, 사회적 통합, 집합주의, 노동, 분배와 연대성 등을 강조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전자는 자본주의적 가치지향인데 반해, 후자는 사회주의적 가치지향성이 강하다. 따라서 이러한 구분은 경제적/물질적 가치배분의 차원이며, 계급정치적 성격을 강하게 표출한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또 다른 차원의 보수와 진보의 이념적 갈등이 존재한다. 이는 보수와 진보의 이념갈등은 남북분단이라는 역사적 유산과 깊이 연관되며, 따라서 이념적 관점에 따라 대북(내지 대미)관계 및 통일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현격한 차이가 난다. 이른바 <남남 갈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세대에 따라 사회경제적으로는 보수적이지만 남북문제에서는 민족주의가 앞서는 집단도 존재한다. 그런가 하면, 보수는 대체로 전통과 기성의 질서를 중시하며 역사의 연속성을 중시한다. 반면 진보는 변화의 맥락에서 미래를 조망하며, 그런 의미에서 얼마간 역사의 단절도 불사한다. 따라서 보수와 진보의 구분은 변화의 완급에 따라 나누어 질 수도 있다. 물론 이데올로기를 분류할 때, 다른 여러 가지 차원을 사용하여 다차원적으로 나누는 경우가 적지 않으나, 여기서는 일단 위의 분류방식에 치중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이념적 갈등이 심화되면, 보수와 진보는 양극으로 치닫게 되며, 이렇게 되면 양측은 대화와 타협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추구하기 보다는 힘겨루기와 맞대결을 통해 <완승>을 겨냥한다. 한마디로 <선악게임>의 양상을 띠게 된다. 이들은 한결같이 <진리독점>을 꾀하며, 상대방을 <적과 동지>의 관계로 파악하고 극복의 대상으로 삼는다. 우리의 경우 보수-진보간의 갈등은 최근에 첨예하게 대립되는 북핵, 군사작통권 이양 등 남북문제뿐만 아니라, 우리의 주요한 생활영역 곳곳에서 표출된다. 한미 FTA 협상 등 ‘세계화’ 논쟁, 양극화, 성장-복지갈등, 노사문제, 부동산정책, 과거사 논박에서 고교평준화에 이르기까지 그 그림자가 미치지 않는 영역이 없다. 또 한번 불이 붙으면, 곧바로 양극화와 국론분열로 치닫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한국사회의 과도한 이념성은 정치과정에 참여하는 많은 이들의 뇌리 속에 교조와 환상, 거짓 신화와 허위의식, 그리고 정서의 과잉과 비()합리와 반()이성이 판을 치게 만든다. 이는 사회적 합의를 중시하는 민주주의 도정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여기서는 보수와 진보의 이념적 내용에 대해 깊게 논의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보수와 진보의 차이를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적 측면에서 본 다면, 대체로 보수는 자유에, 그리고 진보는 보다 평등에 기울어진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어차피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자유와 평등, 양자 중 그 어느 것도 가볍게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 어느 한 쪽의 절대가치를 주장하기는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역동적 정치과정 속에서 보수와 진보의 만남은 불가피하고, 거기서 그들은 자유와 평등의 변증법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보수와 진보를 변화의 완급이라는 맥락에서 살펴보는 경우에도, 어차피 인류역사가 연속과 변화의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보수와 진보 그 어느 쪽도 절대 우위를 주장할 수는 없다. 따라서 양자는 어디에선가 서로 만나야 한다. 다만 그 나라 그 사회가 처한 상황에 따라 시계의 추가 양자 중 어느 한 쪽으로 더 기울어질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좌-우 어느 쪽으로의 급진적이며, 파괴적인 혁명이나 독재를 원하지 않는 이상, 보수와 진보는 이념적 스펙트럼의 가운데에서 서로 만나야 한다. 그런데 이 중간 영역을 비교적 폭넓게 형성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면, 그 오른 쪽, 즉 중도 우파는 자유와 평등을 다 중시하되, 자유에 더 역점을 두는 세력이며, 변화의 속도는 보다 느린 편이다. 그 왼쪽, 즉 중도좌파는 양자를 다 중시하되, 평등가치에 더 비중을 두는 세력이며, 변화의 속도는 상대적으로 더 빠른 것을 추구한다. 이 비교적 폭넓은 중간 영역 안에서 보수와 진보가 바르게 만날 때, 적정한 정도의 이념적, 정책적 지향의 차이는 정치과정의 역동성과 생산성을 보장할 수 있다. 이러한 정치세계의 경우, 이념과 정책의 대결과 갈등은 있으나, 그 진폭이나 심도가 얼마간 절제된 가운데 전개된다. 이들 나라의 경우 실제로 중도우파와 중도좌파간의 이념적 거리는 아스라이 먼 것이 아니기 때문에, 때에 따라 양자 간의 대화와 타협, 제휴와 연립도 가능하며, 거기에는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체제개혁 차원의 중도통합적 문제해결도 가능하다. 따라서 서구의 선진 정치사회의 경우, 대부분의 정치적 상호작용은 중도우파와 중도좌파간의 연속성 안에서 이루어지며, 이를 통해 안정적 민주주의를 구가한다.


3.
중도 다시 살피기

<중도>라는 개념은 매우 모호한 개념(elusive concept)이다. 따라서 학문적으로 사용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중도라는 개념 자체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본질적 내용을 지닌 것도 아닐뿐더러, 역사적으로 볼 때 그것이 언제나 정당화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이 개념을 사용하는 데는 항상 어려움이 따른다. 예컨대 엄혹한 권위주의시대에는 정치가 거의 필연적으로 <민주 대 반민주>의 치열한 대결구조로 전개될 수 없으므로, 그 시대, 그 정치마당에서 이른바 <중도통합론>은 으레 권위주의 지배세력이 투입한 <트로이의 목마>였던 게 사실이다. 그 밖에도 전쟁이나 경제공황과 같은 <역사적 결단의 시간>에는 중도라는 정치공간이나 중도적 해결방식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가 하면, 시간에 따라 중도의 이념적 입지는 가변적이다. 예컨대 지난 복지국가 시대에는 이른바 스웨덴으로 표상되던, ‘제3의 길(The Third Way)’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양극에 대한 ‘제3의 대안’이라는 의미가 강했으나, 요즈음 블레어나 기든스가 말하는 ‘제3의 길’은 신자유주의와 구()사민주의를 초월하는 의미가 짙다. 그런가 하면, 중도는 그것이 가지는 균형, 중용, 온건의 함축성 때문에 본질적으로 좌나 우로 크게 치우친 정치세력이나 개인이 국민의 눈을 현혹하고, 스스로를 위장하기 위해 사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 밖에도 공공연하게 중도를 표방하면서, 실제로 이렇다 할 정책대안이 없거나 그 내용이 빈약하면, 중도가 수사(修辭)에 그치고 허구화(虛構化)될 가능성도 크다. 적지 않은 경우, 중도는 자칫, 양 극단으로부터 양비론(兩非論) 내지 양시론(兩是論)으로 비판받기가 일쑤이며, 그에 따라 불신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선진 여러 나라의 민주주의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민주화가 공고화, 제도화 될수록, 좌와 우의 극단적 입장은 급속히 퇴조하고, 이들은 점차 정치과정에서 배제되거나, 주변화 된다. 또 만약 극단적 이념세력이 중도를 위장할 때, 그것은 비판적 공론화과정에서 어렵지 않게 그 마각이 드러나게 된다.

중도는 대체로 극단적 보수와 극단적 진보의 정 가운데에 있는 기하학적 중간점이라기보다는, 양극이 추구하는 이념적 가치지향을 두루 포용하면서, 양자를 변증법적으로 지양한 ‘제 3의 길’이다. 따라서 중도는 좌와 우 양 방향을 향해 마음을 열고,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존중하고 그들이 제시하는 정책대안에 관심을 기울인다. 따라서 <교조>에 집착하며, <진리독점> <완승>을 꾀하는 극단적 이데올로기에 비해 <대안모색>의 폭이 크고, <정책수단>이 다양하며, <대화, 타협> <제휴, 연립>을 통해 사회적 합의의 도출이 용이하다는 강점이 있다. 그리고 비록 <점진적>이나마 변화와 개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사회통합적 문제해결>을 추구하기가 용이하다는 점에서 엄청난 강점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진정한 <개혁적 중도>는 시대의 징표를 앞서서 읽고, 사회통합적 차원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개인, 집단 및 정치, 사회세력들을 포함한다. 그들은 이념적으로 자유와 평등의 변증법을 추구하되, 그 실천적 정책 내용은 그 나라와 그 시기의 국가적, 사회경제적 맥락에 따라 적실성 있게 구성해야 한다. 그들은 체제차원의 중도통합적 개혁을 추진할 수도 있고, 일정 정책영역에서 중도개혁을 추구할 수도 있다.


4. 20
세기 역사 속의 네 사람의 중도개혁가


여기서는 20세기 역사 속에서 체제개혁차원의 새로운 국가모형을 설계했던 네 사람의 중도개혁자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들은 한결 같이 국가위기 상황에서 중도통합적 리더십을 통하여 국가차원의 체제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영국형 복지국가의 청사진을 마련하여 20세기 복지국가시대를 연 베버리지(William H. Beveridge, 1979-1963), 분단전야의 오스트리아를 통일국가로 이끈 레너(Karl Renner, 1870-1950), 이른바 스웨덴 모형의 이론적, 실천적 대부 빅폴스(Ernst Wigforss, 1881-1977), 그리고 이른바 “네덜란드 기적”의 설계자 콕 (Wim Kok, 1938-)이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중도통합의 이념적 입지에 서서 시대의 징표를 바르게 읽고 장기적 조망에서 국가재편을 결행하는데 앞장을 섰던 체제설계자들이었다.


1)
베버리지

베버리지는 옥스퍼드 출신의 사회개혁가, 고위관료, 경제학자, 총장, 그리고 정치인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영국 최초의 settlement house Toynbee Hall의 사회복지사를 거쳐, 이미 1900년 초에는 the Morning Post의 대표적 사회문제 논평가로, 그리고 실업, 고용 및 사회보험의 최고 권위자로 부상하여, 로이드 조지 자유당 내각(1906-1914)을 도와 특히 노령연금과 국민보험법(National Insurance Act)의 입법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1차대전 이후 기사작위를 받았다. 식품성 차관 등 공직을 거쳐 1919년부터 1937년간 런던 경제대학 Lodon School of Economics의 총장으로 재직하면서, 이 대학을 세계적인 명문 사회과학대학으로 만들어 ‘제2의 창업자’의 명칭을 듣는다. 이후 그는 옥스퍼드 대학, 유니버시티 칼리지 학장, 왕립 경제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영국이 제 2차 대전의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전후 영국형 복지국가의 청사진을 마련한 베버리지 보고서였다. 1941 6, 포탄이 쉬지 않고 웨스터민스터 홀 근처에 떨어져 전황이 최악에 지경에 이르렀을 때, 영국은 전체 사회복지 프로그램의 혁명적 개혁을 준비하고 있었다. 국가존망의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희망의 불씨를 지피는 작업이었다. 거국내각의 노동당 출신 재건성 (Minister of Reconstruction) Arthur Greenwood은 하원의 만장일치의 결의를 거쳐 베버리지 경을 위원장으로 하는 Interdepartmental Committee on Social Insurance and Allied Services를 구성하고, 기존의 영국의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전반적으로 점검하고 개선책을 제안할 것을 청했다. 이 위원회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노조, 상공인, 소비자 조합, 시민단체로부터 훼이비안 소사이어티(Fabian Society)에 이르는 다양한 부류의 조직대표 및 인사들과 수 백회에 걸친 토론과 공청회를 거쳐 1942년 이른바 베버리지 보고서(원명은 Social Insurance and Allied Services)를 출간한다. 이 책은 절망의 심연에서 희망의 불빛을 갈구하던 영국국민에게 놀라운 호응을 얻어 베스트 셀러가 된다. 한때 그의 조교로 일을 도왔고 훗날 영국의 수상으로 노동당 내각을 이끈 Harold Wilson은 베버리지 보고서를 ‘혁명적 문건’이라고 집약, 표현하고 있다.

베버리지는 이 보고서에서 국민적 최소한(national minimum)의 개념을 표방하였는데, 이는 적어도 영국시민이면 언제나 일정수준의 기본적 삶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는 영국시민을 ‘5대 악’, 즉 궁핍, 질병, 무지, 불결 및 나태로부터 해방시키키 위해 공공부조 및 고전적 사회보험 프로그램을 넘어, 완전고용, 전국민적 무료 보건 및 재활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 가족수당 등의 제반 생활보장 장치를 마련하였다. 그 때문에 베버리지의 사회보장체제는 이른바 “요람에서 무덤까지”(from the 'cradle to the grave)라는 평을 받았다. 베버리지의 거대한 프로젝트는 단순히 노동계급이 아닌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고, 포괄적 사회보장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자유, 창조적 기업활동, 그리고 가족을 위한 개인의 책임을 보장하는데 세심한 관심을 기울였다. 따라서 그것은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전역에 놀라운 영향을 미쳤고, 전후 복지국가 시대를 여는 신호탄의 구실을 한다.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 직후 총선에서 승리한 애틀리(Clement Attlee)의 노동당 내각은 전후 함께 건설할 복지국가의 청사진인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종합적 사회보장체계의 개혁에 나선다. 베러리지 보고서는 가족수당법(1945), 국민보험법(1946), 재해보험법(1946), 국민부조법(1947), 아동법(1948) 1945-1948년에 이르는 총체적 사회개혁의 준거틀이 되었다.

베버리지 보고서를 근간으로 한 영국형 복지국가의 탄생은 역사상 미증유의 세계대전을 함께 치룬 동포들 간에 형성된 ‘한 배를 탔다’는 공동체 의식이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이러한 시대의 징표를 바로 읽은 베버리지의 경륜과 통찰력, 그리고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정책화할 수 있었던 그의 전문가적 지식과 분석능력,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사회적 합의를 추구하는 중도통합적 개혁의지와 정치적 설득력이 크게 기여했다. 그는 복지국가 팽창을 우려하는 보수진영을 향해, 그가 제시한 복지제도는 보건의료비, 연금 등의 노동비용을 회사대장에서 공공회계로 넘기고 보다 건강하고, 부유하며, 동기부여되고 생산적인 노동자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영국산업의 경쟁력을 증대시킬 수 있다고 설득했고, 그것이 주효했다.

그는 말년에 자유당에 가입, 1944년 자유당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어 얼마간 자유당 원내 지도자로 정치활동을 하였다. 이후 그는 남작 작위로 상원의원이 되었다. George & Wilding은 그를 가리켜 <소극적 집합주의자>(reluctant collectivist)로 명명하고, 그의 이념적 지향은 자본주의의 원활한 기능과 시장체계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복지국가의 필요성은 인정하나, 국가의 책임은 국민 최저수준의 보장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는 비교적 폭넓은 이념적 스펙트럼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그는 청년기에 훼이비안 사회주의자인 Webb부부로부터 사사를 받았고, 훼이비안 전통을 근간으로 하는 LSE의 총장으로 다년간 재직했다. 따라서 훼이비안 협회는 아직도 그를 자신들의 동지로 생각한다.더욱이 그의 보고서는 노동당에 의해 제도화의 길을 밟았다. 그런가 하면, 영국 자유민주당내에는 아직도 원내 써클로 <The Beveridge Group>이 존재하며, 그들은 끝까지 자유주의 전통을 지켰던 베버리지를 자유주의자로 기억하고 있다. -우 양측으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는 인물인 것이다.


2)
레너

오스트리아의 중립화 통일은 냉전시대에 기록된 가장 반() 냉전적 정치협상의 산물이다. 이 과정에서 분할 점령된 동서 냉전의 핵지대를 통일된 정치 공동체로 전환시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레너이다.

레너는 오스트리아의 학자, 정치인이다. 그는 구 제정 오스트리아의 가난한 농부의 열여덟번째 자식으로 태어나, 비엔나 대학 재학중 사회민주당에 입당한다. 법사회학자로서도 명성, 오스트로-마르크시즘의 대표적 우파 논객으로, 1907년 하원의원으로 시작, 1919~20년 오스트리아 제 1공화국(1918~1934) 초대총리가 되고, 1931~1933년 의회의장을 역임하였으나, 1934년 나치 침공이후 투옥되는 고초를 겪는다.

이 나라의 역사를 잠시 돌아보면, 1차 대전의 종언과 더불어 새로 탄생한 오스트리아 제 1 공화국은 출범 이후 줄곧 정체성 위기에 시달리면서, 극심한 정치적 내쟁(內爭)에 휘말린다. 특히 이념적 갈등이 심화되어 천주교 보수세력을 대표하는 ‘검은 진영’과 오스트로 마르크시즘을 표방하는 ‘붉은 진영’은 전국민을 둘로 가르고 극한적인 투쟁을 벌리다가 끝내 시민전쟁까지 일으키는 비극적 상황을 연출했다. 이후 1938년 이 나라는 나치 독일에 의해 합병되었고, 얼마 안가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 들어갔다.

전세가 연합국 측으로 기울기 시작하자 1943 11 1, ..영의 세 나라 외상들이 회동하여 모스크바 선언을 채택하였다. 이 선언에서 오스트리아는 히틀러의 야욕에 의해 희생된 피해자임을 명백히 하였으나, 아울러 전쟁참가의 책임을 얼마간 패전국과 함께 나눠야 한다는 유보적 문구가 첨가되었다. 이로써 모스크바 선언은 전후 오스트리아가 처하게 된 특수한 입장을 집약적으로 표현하였다. 이후 1945년 얄타 회담은 위의 모스크바 선언을 재확인하고, 이를 부연하여 ‘국민 중 모든 민주적 요소가 광범하게 대표되는 임시 정부의 수립’과 ‘자유선거의 조속한 실시’를 명문화하였다.

마침내 2차대전이 마지막 단계에 접어든 1945 4월 중순, 소련군이 연합군 중 가장 먼저 오스트리아 동부 지역에 진입, 수도 비엔나에 이르렀다. 그러자 수도권 지역을 중심으로 전전(戰前)의 제 1 공화국의 대표적 정치세력이었던 천주교 보수계와 사회주의계가 기존 조직의 재정비에 나섰고, 군소정치세력의 하나였던 공산당도 유리하게 전개되는 정치상황에 맞춰 독자적 세력구축에 나섰다. 이후 4 27일 레너와 온건 사회주의자들의 주도하에 위의 정치세력이 함께 참여하는 임시정부가 구성되고,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위의 3(국민당/OeVP, 사회당/SPOe 및 공산당/KPOe)간의 연립정부는 처음에는 소련에 의해서만 승인되었고, 그 정치적 영향력도 소련군 진주 지역에 한정되었다. 서방 연합군이 진입한 서부 및 남부 지역의 정치지도자들은 당초 레너 정부에 대하여 얼마간 회의적이었다. 같은 해 7월 연합국 4개국은 모스크바 선언에 준거하여 이른바 제 1차 통제 협약을 체결하고, 이에 의해 4개국 분할지역을 확정했다. 아울러 분할 통제의 정상기관으로 연합국 평의회가 구성되었다.

연합국의 분할 점령에도 불구하고 레너의 임시정부는 단일의 행정권 아래 오스트리아 전역을 통합시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소련 측의 본래 속셈은 사회주의자인 그를 내세워 오스트리아를 공산화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제1공화국 초기 수상직을 역임한 경륜을 바탕으로 여러 정치세력으로부터 폭넓은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던 레너는 소련의 속셈을 쉽게 간파하고 오스트리아를 공산화의 마수로부터 지키는데 온 힘을 쏟았다. 그는 한 때 적대세력이었던 천주교 보수계의 국민당과 더불어 공산당을 적절히 견제하면서, 임시정부 관할권 밖의 제주(諸州)의 정치지도자들과 감정이입을 높이는데 주력했다. 끝내 레너 정부의 관할권은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같은 해 10월 연합국 평의회는 이를 각서의 형식을 빌려 최종 승인했다. 레너의 주도로 연합국의 분할점령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 전역을 관할하는 단일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사실은, 이후 이 나라가 분단의 단애(斷崖)를 넘어 진정한 독립과 통일로 향하는 주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1945 11 25일 전후 최초의 자유 총선이 실시되었다. 여기서 보수계의 국민당은 85석을 자치했고, 사회당은 76석을 차지한 반면, 공산당은 예상을 훨씬 밑도는 4석을 얻는데 그쳤다. 위의 3당으로 구성된 연립내각에 수상에는 국민당의 휘글(L. Figl), 부수상에는 사회당의 쉐르프(A. Schaerf)가 선출되었다. 각료 구성을 보면, 국민당 8, 사회당 6, 무소속 2, 공산당 1명이었다. 소련의 간접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은 이후 쇠퇴 일로를 걸어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1947년 공산당은 내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공산당의 탈퇴를 계기로, 국민. 사회 양대당을 축으로 하는 좌우 합작의 대연정(大聯政) 시대가 바야흐로 막을 열었다. 레너는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50년 그가 서거할 때 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전후 국민당과 사회당의 정치지도자들이 보여 준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들이 종래의 교조주의적 이데올로기의 멍에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고, 중도를 향하여 다가왔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레너는 살아있는 전범(典範)이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제1공화국 시대의 치욕적인 시민전쟁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히틀러의 폭정아래서 양 진영의 지도자들이 수용소에서 함께 체험한 고난으로부터 새로운 공감대와 교훈을 얻었다. 이들은 이제 극단적인 이념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벗어나 오스트리아의 완전 독립을 위해 서로 협력할 것은 다짐한 것이다.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어내는 슬기를 터득한 것이다.

당시 양당 지도자들은 종전 후 동구를 석권하면서 동진(東進)을 획책하는 공산주의의 위험한 그림자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이에 강력 대응하기 위해서는 자유민주주의를 일종의 상위 이데올로기로 승화시켜야 하겠다는 다짐을 분명히 하였다. 이에 따라, 사회당은 종래의 오스트로마르크시즘에서 크게 후퇴하여 온건한 민주사회주의를 표방하기 시작했고, 국민당 역시 종교와 밀착된 교조주의적 입장에서 벗어나 사회적 다원주의를 표방하는 국민정당으로 환골탈태하였다.

1946 2월 오스트리아의 완전독립을 위한 조약체결을 둘러싼 연합국간의 접촉이 시작되었으나, 처음부터 난항이었다. 바로 이즈음 노정객 레너는 오스트리아의 통일과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스위스식 중립화안이 바람직하다는 뜻을 피력하였다. 같은 해 10, 오스트리아 사회당은 새로운 정강을 발표하면서 중립화 방식을 지지하였다. 국민당도 조심스럽게 중립화안에 대한 선호를 내비쳤다. 그러나 국내 정당들의 의지가 연합국간의 협상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반영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1948 2월 이후 오스트리아를 둘러싼 국제환경은 크게 술렁이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사건은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화였고, 베를린 봉쇄 역시 연합국 협상 테이블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게 했다. 스탈린과 티토의 관계에도 금이갔다. 이러한 숨가쁜 상황 속에서 오스트리아는 주위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했다. 소련의 숱한 견제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는 결국 ‘마셜플랜’에 참여하고 서유럽의 경제통합을 추구하는 구주 경제협력 회의(OEEC)에 가입했다. 국토의 일부가 소련의 점령하에 있는 나라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정치적 결단이었다. 바야흐로 냉전질서가 정착되기 시작하는 국제적 상황 속에서 오스트리아는 이러한 일련의 조치를 통하여 이 나라가 이념적으로나, 경제정책적 차원에서 볼 때, 분명 서방문화권에 속하고 있음을 대외적으로 분명히 하였다. 이처럼 오스트리아는 그들이 추구하는 이념적 가치정향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소련의 지나친 욕심을 사전에 견제, 공산화 포기로 유도하고자 했다.

레너는 1950 12월 오스트리아의 완전독립과 통일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중립화라는 우회로를 거쳐 천신만고 끝에 1955 5 15, 비엔나의 유서 깊은 벨베데르 궁전에서 오스트리아의 외상 휘글과 연합국 4개국 외상들이 오스트리아 국가조약에 서명함으로써 10년의 각고 끝에 이 나라 국민의 숙원인 완전 독립을 성취하였다. 1955 6 7일 오스트리아 의회는 만장일치로 영세중립을 선포한다.

실로 이 나라는 국난의 위기를 맞아 가장 절박한 시기에 가장 적합한 지도자를 갖고 있었다. 위에서 밝혔듯이 당초의 소련의 점령군은 사회주의자 레너를 앞세워 임시 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이른바 ‘인민전선’으로 전환시켜 오스트리아 공산화의 전위대로 활용하려 했다. 그러나 레너는 이 기회를 오스트리아 전역에 걸치는 통일적 행정체제 구축과 정치 세력 간의 합의도를 높이는데 역이용했고, 그의 속내를 보수계와 서방연합군이 바르게 간파하고 그를 도왔던 것이다. 공산당은 중도적 정치공간에서 연립정부의 형태로 구축된 좌우합작 세력에 밀려 끝내 군소 정당으로 전락했고, 소련은 오스트리아 국내에 전초기지를 세우는데 실패하고 만 것이다.


3)
빅폴스

빅폴스(Wigforss)는 스웨덴의 언어학자, 경제학자이며, 1919~1952년간 하원의원, 1925~6, 1932~49년간 재무장관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운동 전개과정에서 주된 이론가이자 실천적 정치개혁가로서, 1932년 총선에서 복지국가 구상을 내세워 승리를 견인하고, 스웨덴이 1930년대 대공황으로부터의 회복하는데, 그리고 세계 제 2차대전의 난관을 극복하는데 크게 기여했는가 하면, 전후 스웨덴 복지국가의 초석을 놓는데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스웨덴 모형의 설계자로서 국제적으로는 Alba and Gunnar Myrdal 과 같은 명성을 얻지 못했으나, 국내적 영향력에 있어서는 오히려 그들을 능가했다.

1932년 총선에서 스웨덴 사회민주당은 43%의 득표율로 득승하여 한손(P. A. Hansson) 내각을 출범시켰다. 이로써 1976년까지 이르는 사민당의 장기집권 시대가 열린다. <인민의 집>(Folkhemmet)으로 비유되는 스웨덴 복지국가는 전국민을 대상으로 포괄적이며, 보편주의적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제도화하는데 앞장섰다. 그런가 하면 사민당은 Wigforss의 주도로 케인즈의 <일반이론> 보다 4년 앞서 이른바 ‘케인즈 없는 케인즈 주의’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며, 반경기적(counter-cyclical) 프로그램을 제도화했다. 그런 의미에서 미르달(G. Myrdal)은 그를 비록 그가 정규 경제학자가 아니었으나, 스톡호름 경제학파의 일원으로 간주하였다.

사민당은 농민당을 연정(聯政) 파트너로 끌어들여 이른바 <적녹동맹>(赤綠同盟)을 구축한다. 그런가 하면 1938년 스톡홀름 교외의 ‘살트쉬바덴’(Saltsjbaden)에서 노사간의 역사적 화해에 기초한 사회협약을 체결하여 노동시장위원회를 설치하고, 노사교섭의 절차, 해고와 임시해고 절차 등을 명문화하였다. 이로써 노사합의의 코포라티즘이 정책과정에 깊숙이 제도화 되었다. 이후 노총(LO)의 조직률이 급상승(1940년대 67%, 50년대 80%)하고, 노동쟁의 건수는 극소화된다.

Wigforss 1926년에 발표한 논문, ‘사회주의-도그마인가 작업가설인가’에서 사회주의는 도그마가 아니라 끊임없이 경험적으로 검증해야 할 ‘작업가설’로 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에 의하면, 사회주의로의 길은 작업가설에 기초하여 실험과 부분적 축적에 의하여 사회를 최적화(最適化)하면서 전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운동은 단순히 경험주의에 매몰되어서는 안 되며, 경험주의로부터 자유로운 구상력을 펼쳐 보이기 위해서는 유토피아적 성격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유토피아를 ‘잠정적 유토피아’ (provisional utopia)라고 일컬었다.

일찍이 Marquis Childs는 “스웨덴인의 슬기는 무엇보다 현실에 대처하기 위해 타협할 의지가 있는 것이다. 그들은 ‘체제’에 의해 구속되지 않고, 교조에 집착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궁극적 실용주의자(ultimate pragmatists)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 평가는 Wigforss에게도 대체로 타당하지만, 아주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비록 그것이 미래 경험에 맞춰 수정될 수 있는 것이기는 하나, 바람직한 미래사회에 대한 잠정적 스케치인 ‘잠정적 유토피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틸톤(Tim Tilton) Wigforss를 가리켜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의 이념적 기초를 마련한 장본인으로 평가하며, 사민주의의 목표로 ‘평등, 자유, 민주주의, 생활보장, 경제적 효율성과 연대성’을 들고 있다. 그는 평등과 자유를 함께 중시했고, 그런 맥락에서 부르조아 경제와 교조적 사회주의를 함께 극복하고자 노력했다. 그가 마르크스의 경제결정론과 혁명적 사회주의를 부정하면서 점진적 사회주의를 표방하였다는 점에서 그는 독일 사민주의 수정주의자 베른쉬타인(Eduard Bernsein)을 연상시킨다.

Wigforss는 생산의 효율성 증대라는 공동목표의 성취를 위하여 기업과의 협력을 강조했다. 그는 자본형성의 증대와 신 테크놀로지의 개발, 수출증대 및 경기침체의 극복 등을 위해 기업과의 토론을 중시하였으며, 복지 못지않게 경제성장에 깊은 관심을 피력하였다.

그는 1950년대에 들어 공직을 떠난 후에도 주요 정치적 쟁점에 관해 발언을 늦추지 않았다. 1950년대의 반핵운동을 앞장 서 지지하였고, 1962년 스웨덴의 핵무장 프로그램을 중단시키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이렇게 볼 때, 스웨덴 사민주의가 그토록 장기간에 걸쳐 그 나라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Wigforss의 유연하면서, 일관성 있는 중도통합적 개혁노선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이른바 스웨덴 모형의 설계자이자 실천가였다.


4)
빔 콕

콕은 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1973-1986), 하원의원 및 노동당대표(1986-1989)), 부수상 겸 재무장관(1989-1994), 수상(1994-2002) 등을 거치면서 <네덜란드의 기적>(Dutch Miracle)을 창출하는데 앞장선 인물이다.

네덜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견실한 경제성장을 이룩하여 왔으나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반 두 차례에 걸친 석유위기, 국제적인 경제침체, 사회보장비의 급증으로 인한 낮은 성장률, 재정적자의 누적, 실업률의 급증 등으로 이른바 ‘네덜란드 병(Dutch Disease)'을 앓아 유럽의 환자로 전락하였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1982 11 24, 노동조합총연맹과 경영자단체연합을 각각 대표하는 콕과 반 베인(Chris Van Vaen)이 사회적 대화와 타협을 통해 이른바 ‘바세나르 협약’(Wassenar Agreement)을 체결함으로써 조합주의 전통을 되살아나게 했고, 그 과정에서 임금안정과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경제회생과 고용창출에 합의한 것이다. 무엇보다 여기서 치솟는 실업률에 자극을 받은 네덜란드 노조가 산업의 수익성을 높이는 일이 노동시장 회복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확신을 갖고 임금인상 억제를 선택했다는 것은 괄목한 일이었다. 기업은 이에 대한 보상으로 노동시간을 40시간으로 단축하는 협상에 나서게 된 것이다. 정부는 복지제도의 효율화와 재교육을 통해 복지생활자의 취업을 돕고, 최저임금의 인하, 감세로 임금비용의 안정을 도모했다. ‘모든 협약의 어머니’로 불리우는 이 바세나르 협약의 성공은 그간의 지리한 정책교착상태를 일시에 깨는 위력을 발휘했다. 특히 노조 지도자들이 고용창출을 위해 임금인상을 억제하는 전략을 추진하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그런데 이 협약과정을 성사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장본인이 바로 빔 콕 위원장이었다.

바세나르 협약의 효과는 대단했다. 1985년까지 임금의 물가연동제가 거의 폐기되었고, 실질임금도 1982-85년에 9% 하락하면서 수출가격 경쟁력이 회복되었다. 1983-84년 대부분의 업종별 교섭에서 주당 근로시간을 38시간으로 단축했고, 일자리 나누기가 수용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 네덜란드 경제는 고율의 임금인상, 사회보장비, 특히 장애급여의 남용으로 다시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세계적인 불경기로 어려움은 가중되었다. 정부의 개입을 우려한 노사 양 당사자는 다시 1993 12월 ‘신 노선’(A New Course)라는 제목의 협약을 체결하였다. 노사가 자발적으로 임금안정과 노동시간 단축을 교환, 임금억제에 합의함으로써, 이전의 중앙 중심적 가이드라인으로부터 벗어나 교섭의 분권화와 노사 자율적 교섭기반을 확보("controlled decentralization')하였다. 신 노선은 임금억제-재정보상(세금감축)-일자리 재분배의 효과를 추구하였고, 이러한 노력은 네덜란드 경제를 다시 제 궤도에 올려놓았다.

3기 루버스(Ruud Lubbers) 내각(1989-94)은 기독교민주당과 노동당의 연립내각으로, 거기에는 빔 콕이 부수상 겸 재무부장관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1991년 여름 루버스 내각은 장애보험과 질병휴직에 따른 수당의 지급수준을 축소하고 수혜기준을 강화하는 일련의 복지개혁 정책을 발표하였다. 복지국가 감축을 겨냥한 이 개혁의 필요성은 널리 인정되고 있었으나, 개혁정책의 실행에는 엄청난 정치적 위험이 예견되었다. 그 해 9 17일 헤이그에서 발생한 총파업에는 거의 100만명에 달하는 근로자들이 가두시위에 참여, 네덜란드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파업사태를 기록하였다. 특히 노동당은 전통적으로 정치적 동맹관계에 있던 노동조합총연맹(FNV)와 견해차이로 심각한 분열을 야기시켰고, 노총의 노동당 지지도 역사상 가장 낮은 수준으로 하락했다. 당원의 1/3이 당을 떠났다. 빔 콕 당수도 거의 사퇴할 위기에 처했다.

1995 5월 총선에서 103석의 의석을 보유하고 있던 집권 내각인 기민당과 노동당 연립은 32개의 달하는 의석을 상실하여 총 150석 중 71석을 잃었다. 노동당은 1/4에 달하는 지지자를 잃어 12개의 의석을 상실하였고, 기민당은 1/3에 달하는 지지자를 상실, 20개의 의석을 잃었다. 기민당은 너무 많은 의석을 잃었기 때문에 노동당이 원내 제 1당이 되었고, 이렇게 해서 빔 콕의 제 1기 내각이 출범한다.

당시의 상황을 되돌아 볼 때 루버스-콕 연립정부는 복지축소라는 과감한 개혁의 추진을 위해 정권의 상실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피어슨(P. Pierson)의 말을 빌리면, 복지축소는 ‘불특정 다수로부터 불확실한 이득을 얻기 위해 특정 유권자계층에게 유형의 손실을 부여하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정책이다’라고 한다. 그런데 루버스-콕스 연립정부는 체제개혁을 위해 복지축소라는 정치적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1994년 총선 결과에 따라 네덜란드 정치역사상 일대 전환이 이루어졌다. 콕 수상이 이끄는 새 내각은 노동당(적색)과 자유당(청색), 그리고 중도파인 민주당이 참여하는 이른바 ‘보라색’ 연립(Purple" coalition)으로 구성되었다. 네덜란드 정치사상 언제나 적대관계에 있었던 노동당과 자유당이 민주당과 함께 한 배를 탔고, 수십년만에 처음으로 기민당이 배제된 내각이 구성된 것이다. 새로 출범한 콕 수상의 ‘보라색’ 연립은 정치적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 여지까지의 개혁작업을 조금도 늦추지 않고 계속 매진했다. 첫째는 효율성을 강화하고 도덕적 해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재정적 유인제도와 제한적인 경쟁체제를 복지부문에 도입한 것이다. 둘째는 복지체제의 집행과 관리에 참여하는 다양한 집단들의 권한과 책임에 대해 정부에 의한 재조정 작업이 과감히 추진되었다.

콕 내각은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면서 경제를 활성화시켜 일자리를 더 많이 창출하는데 주력하다. 고용증가의 핵심은 파트타임 노동과 파견근로제로서, 네덜란드는 총고용 대비 파트타임 노동의 비중이 세계 최고이다. 그는 아울러 정부의 주 역할은 파트타임 노동자의 불이익을 제거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했다. 1995년의 유연안정성 협약 및 1999년 유연안정성(flexicurity) 관련법이 제정된다. 이로써 기간제 고용 규제가 완화되고, 비정규노동에 대한 최저선 임금보장, 파견 노동자의 법적 지위가 강화되었다. 빔 콕는 1998년 총선에서도 득승, 역시 자유당, 민주당과 더불어 연립정부를 구성하여 2002년까지 제2기 콕 내각을 이끈다.

돌이켜 볼 때, 1990년대 루버스 내각과 콕 내각에 의해 수행된 대규모 사회정책 개혁은 더 이상 수혜자의 수나 수혜기준 및 자격요건에만 국한된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 개혁은 시장의 공급이라는 새로운 철학을 도입하고, 강제 사회보험 영역에도 경쟁을 도입한 것이다. 게다가 네덜란드 사회보장 역사상 신성불가침으로 인식되어온 유관단체에 의한 자율적 집행 및 관리 원칙에도 재조정의 칼날을 들이댄 것이다. 그런데 이 개혁의 전 과정에서 빔 콕은 항상 같이 했다. 복지확대를 금과옥조로 생각하는 노동당으로서 복지축소의 체제개혁은 실로 상상하기 어려운 정치적 모험이었으나, 콕는 정파의 이익을 뛰어 넘어 공공성의 차원에서 체제개혁의 기수가 된 것이다. 또 이 과정에서 노사정의 사회협약을 주도하고, 기민당, 자유당, 민주당 등 다양한 이념적 색체의 정치세력과 연립하여 중도통합적 체제개혁을 줄기차게시도하였다.

빔 콕이 수상으로 재임하는 동안, 네덜란드 경제는 상승가도를 달렸고, 그는 이른바 ‘폴더 모형’(Polder Model")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성공의 비결을 사회적 파트너들과의 협의에서 찾는다. 그는 ”사회적 파트너들과의 협의 없이도, 의회에서 다수표만 확보된다면 이러한 조치들은 충분히 단행할 수 있다“는 식의 정부의 태도가 일을 그르친다고 말한다.

콕은 정계은퇴 후 2003 4월 명예장관직(Minister of State: 종신 국가고문격, 현재 네덜란드에 단 7)을 수여받았다. 특히 그는 2004 4월에서 11월까지 리스본 전략( 2000년 유럽연합 15개국 정상들이 합의, 서약한 유럽연합의 장기 발전전략)의 아제다 검토 위원회의 책임을 맡아 전 유럽차원의 제언을 하는 등, 글로벌한 차원의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여기서 빔 콕과 더불어 함께 떠오르는 네덜란드 중도정치의 파트너가 바로 루버스(Luud Lubbers)이다. 루버스 (1939 년생) 전 수상은 콕와 거의 동년배로 바세나르 협약 당시 기민당 내각의 수상으로 이 역사적 협약의 성공을 도왔다. 1982년부터 1994년까지 3기에 걸쳐 장장 12년간 네덜란드 역사상 최장기간 동안 수상직을 맡아 네덜란드의 경제부흥에 크게 기여했고, 그의 제 3기 내각(1989-94) 당시 부수상인 콕와 더불어 복지축소의 대개혁을 함께 수행했다. 그는 특히 바세나르 협약 이후 공무원 임금과 복지예산을 삭감하는 등 긴축 정책을 펼쳐 재임기간 중 재정적자를 국내총생산(GDP) 10.1%에서 3.8%로 끌어내려, 경제의 군살을 뺐다. 은발에 후리후리한 외무까지 닮은꼴인 루버스는 선명한 수사(修辭)보다 실리를 추구하는 ‘협상의 대가“라는 점에서 콕와 유사한 점이 많다. 그러나 콕과 루버스의 인생행로는 대조적이다. 중도우익인 루버스는 부유한 사업가 집안출신으로 34세에 경제장관을 지냈는데 반해, 중도좌익인 콕는 노동운동에 정열적으로 투신하던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35세에 네덜란드 최대 노동단체인 ’네덜란드 노동조합총연맹‘(FNV)의 위원장이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중도통합적 체제개혁과정에서 네덜란드 모형을 설계하는 데 함께 힘을 모았다.

위의 네 사람의 중도통합적 체제개혁가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이들은 교조나 역사철학을 배격하고 한결같이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가졌다. 그러나 그들은 미래에 대한 뚜렷한 비전과 전략을 가졌고, 그것을 다른 정파나 국민이 신뢰했다. 그들은 관념적이기 보다, 문제해결적이었고, 실사구시의 차원에서 문제에 접근했다. 그들은 역사적인 시기에 놀라운 결단과 용기를 선 보였고, 공공선을 위해 사리와 당략을 초월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역사에 대한 책임을 통감했고 고뇌하는 지식인들이었다.


5.
중도개혁 지향의 교육정책


필자는 1995 12월부터 1997 8월까지, 그리고 1993 12월부터 1995 1월까지 두 번에 걸쳐 약 2 8개월에 걸쳐 교육부장관로 재직하였다. 그렇다면 중도개혁론자라고 스스로 자처하는 필자가 추구했던 정책지향은 어떤 것이었던가. 또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추구되었는가. 그 중 몇 가지를 여기서 소개하고자 한다.


1) 5.31
교육개혁 방안과 교육복지 프로그램 균형 잡기

문민정부의 <5.31 교육개혁방안>은 대체로 보아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개혁 패러다임이 내 세웠던 자율화, 수요자 중심, 다양화, 특성화, 경쟁, 선택 등의 개념이 신자유주의가 선호하는 상징어들이다. 문민정부가 추진했던 교육개혁 패러다임 형성에 영향을 주었던 또 하나의 흐름은 민주화였다. 신자유주의의 자유와 자율화의 사조는 참여와 자치를 강조하는 민주화와의 흐름과 비교적 큰 무리 없이 수용되었다. 필자는 이러한 세계화와 민주화지향의 프로그램 중에서 세 가지를 중시했다. 그것은 교육정보화와 초등학교 영어 교육, 그리고 학교운영위원회 제도였다. 세계화, 정보화의 큰 흐름 속에서 우리 교육의 내일을 조망할 때, 교육정보화의 추진과 초등영어의 도입은 빠를수록 좋겠다고 생각했고 학교의 민주화를 위해 학교운영위원회의 도입도 필요한 조치라고 생각했다.

문민정부의 대통령 자문기구인 교육개혁위원회가 내 놓은 120개의 교육개혁과제들은 대체로 매우 유용한 프로그램들인 게 사실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경쟁력 강화에 너무 치중된 느낌이 강했다. 실제로 협력, 공존능력 내지는 인간화를 위한 프로그램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래서 균형을 위해 필자는 재임시 이른바 <교육복지 종합대책>을 개발했다. 중도탈락자, 특수교육, 유아교육, 학습부진아, 귀국자녀대책 들이 그것들이었는데, 이는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자, 그리고 특별한 배려가 필요한 자>를 위한 프로그램이었다. 이 중 중도탈락자 대책은 이후 대안학교운동으로 발전하여 10년이 지난 오늘 비교적 큰 결실을 수확하고 있다.

중도적 관점은 21세기를 <경쟁과 협력>의 세기로 보고, 경쟁에 치우친 교육개혁방안을 교육복지 프로그램을 통해 보정하고, 균형을 잡아보려 노력했던 것이다.


2)
교육개혁을 위한 세 가지 접근: 시기별 조합

교육개혁을 위한 접근은 대체로 세 가지가 두드러진다. 본질주의적 접근, 경제주의적 접근, 그리고 평등주의적 접근이 그것이다. 본질주의적 접근은 교육의 본령(本領), 즉 그 본연의 목적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이 관점은 교육은 마땅히 사람다운 사람을 키우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지적 능력이나 학력의 신장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는 인성의 함양, 인격적 성숙이 더 강조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런가 하면 경제주의적 접근은 시장주의와 경쟁력강화를 강조하고, 엘리트 교육에 역점을 두는 입장이다. 따라서 이들은 교육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할 것을 요구하며, 경쟁을 통하여 우수한 인재를 보기에 선발하여 이들을 집중적으로 키워야 세계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한편 평등주의적 입장은 보다 대중적 관점에서 교육기회의 평등과 뒤진 자에 대한 정책적 배려, 그리고 교육을 통한 사회통합을 강조하는 관점이다.

많은 이들은 심정적으로는 본질주의적 접근의 필요성과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수사(修辭)적 차원에 그치는 경우가 많고, 정작 논란이 빚어지면 이념적으로 치우쳐 경제주의와 평등주의로 갈라지는 경우가 많다. 얼핏 보기에 교육은 가치중립적인 영역처럼 보이나, 이 영역만큼 첨예한 이데올로기 갈등이 도사리고 있는 부문도 없다. 따라서 고교평준화, 이른바 3()정책, 교육개방, 사립학교법 등 대부분의 교육쟁점을 둘러싸고 경제주의와 평등주의는 정면으로 격돌한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 필자는 교육에 대한 위의 세가지 관점, 즉 본질주의, 경제주의 및 평등주의는 모두 중요한 사회적 가치이며, 그 어느 것도 폄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 어느 것 하나를 온전히 취하고 다른 것을 통 채로 버릴 수는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교육개혁이 균형과 조화를 바탕으로 한다면, 해답은 이들 세 가지 가치 중 그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 간의 적절한 조화와 조합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교육단계 마다 이들 세 가치의 우선순위를 다르게 배열하여, 전체적으로 최상의 교육적 성과를 기대하는 것이 슬기로운 접근이라고 생각하다.

여기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유아 및 초등학교의 경우, 본질주의적 접근을 우선으로 해야 하며, 중등학교, 즉 중학교 및 고등학교 교육에서는 평등주의와 경제주의를 조화롭게 배화하는데 역점을 두고, 대학교육에 와서는 경제주의에 우선적 가치를 부여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떠한 접근이 가능할까. 중등학교 과정을 예로 할 때, 아직도 자주 쟁점화 되고 있는 고전적 주제가 이른바 <고교평준화>문제다. 이념적 지향성이 강한 평등주의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평준화는 (순수형태로) 고수되어야 한다>는 입장인데 반하여, 역시 이념편향적 경제주의자들은 <평준화는 절대로 해제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강력하게 표명한다. 그러나 이 모두가 교조적 망집(妄執)이지,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하는 정책적 접근이 아니다. 이에 대한 적절한 대답은 <평준화는 보완, 개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평준화의 틀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민의 다수가 아직도 이를 지지하고 있으며, 우리 사회 안에는 이 틀을 고수하려는 전투적 성향의 사회세력이 만만치 않다. 따라서 이념성이 강한 우파정권이 들어선다 해도, 또 사회전체가 상당한 희생을 치른다 해도, 그 틀을 일거에 바꾼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얘기가 아니다. 더욱이 경제주의자들이 언필칭 주장하듯이, 평준화 이후 우리 중등교육이 <하향 평준화>되었다는 실증적 논거가 그리 뚜렷하지 않다. 그렇다면, <평준화 해제>라는 혁명적인 꿈은 일단 접어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평준화의 틀과 그 내용을 그대로 갖고 갈 것인가.

아니다. 그렇지는 않다. 평준화의 기본 틀은 유지하되, 그 안에서 다양화, 특성화, 자율화를 지속적으로 추구함으로써 내적 역동성과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수준별 이동수업, 선지원 후추첨, 학교별 교육프로그램의 다양화, 특목고 등의 운영개선, 실업계 특성화, 영재교육 프로그램의 활성화 등이 그 주요한 보완책이다. 말하자면, 대중교육의 견실한 보편구조 위에 수월성 구조를 효과적으로 접목하자는 입장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가능한 한 사회통합을 해치지 않으면서 경쟁력을 키우자는 것이다.

2004 4월 출범한 EBS 수능방송, 인터넷 서비스도 실제로 경쟁력과 평등성을 함께 추구하는 프로그램이다. 그것은 나라가 앞장서서 수준별로, 최고급의 <수능과외>를 실시함으로써 고교생들의 전반적 학력신장과 사교육비 경감에 기여하려는 목적과 함께, 교육소외지역의 학생들에게 서울 강남에 못지않은 교육기회를 제공하려는 교육격차 해소의 뜻이 함께 담겨 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중등교육과정을 경제주의나 평등주의 어느 한 가지 접근법으로 다가간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따라서 양자의 장점을 보완할 수 있는 실용주의적 방도를 강도하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이다. 또 이렇게 접근하는 경우, 대부분의 교육쟁점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재론해 보자. 경제주의자는 엘리트 중심 교육을 주창하고, 평등주의자들은 뒤진 계급의 교육기회 제고에 온 정성을 쏟는다. 그러면서 상대방의 입장은 절대 반대한다. 그런데 여기 대답은 한 가지다. 어렵지만, 두 가지 다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재도 세계적인 재목으로 키우고, 조금 능력이 뒤지는 친구는 그 수준에서 자신의 잠재력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정성껏 키워야 한다. 그렇게 되면, 경쟁력도 키우고 사회통합도 달성한다. 멀리, 크게 보면, 사회통합은 국가 경쟁력의 가장 큰 원천이다.

다시 말해 <저출산·고령화시대>에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모든 학습자의 발전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키울 때> 가능하다는 얘기다. 세계에서 이것을 제일 잘 하는 나라가 <핀란드>이다. 이 나라는 영재교육도 열심히 하고, 학습부진아 대책도 세계에서 가장 철저하다. 추호의 인력 유실을 허용하지 않는다. 500만 조금 넘는 인구를 가진 이 나라의 교육관은, 나라 안에 모든 인력이 사회에서 제 몫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 나라의 교육성과는 실로 괄목하다. OECD의 국제교육 비교연구(PISA) 결과에 따르면, 고교 1년생의 학업성취수준이 세계에서 1위이다. 이 나라의 대표적 글로벌 기업인 <노키아>가 세계에서 가장 큰 디지털 휴대전화 제조회사로 성장한 이유도 바로 이 나라 교육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이제 교육과 연관해서 이념적 갈등을 불식하자. 그리고 한국의 미래를 향해 자유주의자와 평등주의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영재교육과 대안교육을 함께 궁리하자. 그 길만이 살길이고, <성숙한 사회>로 가는 지름길이다.


3)
-러닝과 교원개혁: 인프라의 구축

필자는 2003년 말, 교육부총리로 취임하자마자 서둘러서 <사교육비경감대책>을 마련했는데, 그 핵심 사업은 ‘EBS 수능강의 및 인터넷 서비스’ 였다. 필자는 2004년 초 “올해는 e-러닝의 해”라고 선포했다. 2004 4 1. 세계적 수준의 정보통신 인프라와 e-러닝 준비도를 갖춘 우리나라는 10만명 이상이 동영상에 동시접속할 수 있는 세계적으로 유래없는 대규모 교육정보화 사업인 ‘EBS 수능강의 및 인터넷 서비스에 성공하였다. 이로써 e-러닝 대중화가 촉발되었다. 이후 e-러닝 대중화는 교육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측면에서 다양한 파급효과를 불러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e-러닝 활성화는 관련 산업군의 확장과 더불어 복합적이고 연쇄적인 산업, 경제 확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국의 e-러닝이 이 수준에 오른 것은 10년에 걸친 교육부문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대한 지속적 투자, EBS가 위성을 통한 수능방송을 통해 이 방면에 엄청난 경험과 실행능력을 갖춘 점, 에듀넷을 통한 교수 및 학습자료 개발 등에 힘입은 바가 컸다. 2004년 교육인적자원부는 ‘사이버 가정학습’의 활성화에 온갖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여기서 함께 강조해야 할 것은, e-러닝이 교육적으로 보다 큰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인터넷 윤리 교육이 함께 병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역시 2004년 초에 그간 금기시되어 왔던 ‘교원평가’ 문제를 들고 나왔다. 적잖은 저항의 목소리가 있었으나, 한국교원의 질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그 길 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나는 교원평가와 더불어 교원양성체제와 교원연수체제를 한 몫에 함께 개혁할 채비를 하였다. 위의 3자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계되며, 따라서 가능한 한 함께 풀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필자의 계획으로는 2005 1월 어느 때 쯤, 그 해를 ‘교원개혁의 해’라고 선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그에 앞서 부총리직을 물러나게 되었다.

e-러닝 발전과 교원평가는 우리 교육의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절호의 인푸라 구축 사업이다, 특히 위의 두 사업은 이념적으로 편향되지 않은 중도개혁적 노력으로, 한국교육의 백년대계를 위하여 더 할 나위 없이 필요한 조치라고 생각한다.


4) 2007
학년도의 입시개혁: 사회적 파트너십과 사회협약

2007학년도 입시개혁은 공교육강화를 위해 내신성적을 강화하고, 상대적으로 수능의 비중을 줄였다. 그러다 보니 몇몇 이른바 일류대학교들이 변별력을 이유로 방향타를 논술강화 쪽으로 돌리고 있어 많은 이들이 사교육의 폭발적 증가를 우려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점은 이미 2004년 말, 2007학년도 입시개혁을 발표할 당시 예견되었던 바였다. 그래서 입시안 발표시 이 문제의 적절한 조율을 위해 고등학교와 대학교간의 사회적 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고교와 대학 이외에 학부모, 시민사회, 교육부가 함께 참여하는 ‘교육발전협의회’를 창설했다. 고교와 대학 간에 대화의 통로가 없으면, 우수학생의 선발에 일차적 관심이 큰 대학과 그 보다는 고교교육의 정상화에 집착하는 고교들 간에는 이해관계가 어긋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협의체를 구성하여 당사자들 간에 깊은 대화와 타협을 통해 자율적으로 일종의 ‘사회협약’식의 문제해결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지난 2년간 교육인적자원부는 이 협의체를 가동하지 않았고, 그 결과 최근의 논술파동이 야기되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최근 대교협 등이 나서서 고교와 대학 간의 격의 없는 대화와 공동의 문제해결을 추진하고 있어 그 귀추가 주목된다. 사회적 파트너십의 형성과 사회협약의 체결은 실제로 중도개혁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중도통합 전략의 하나다.


6.
한국적 상황에서의 제언

그렇다면, 최근 한국정치사회에서 양극화현상이 크게 두드러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또 그것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 것인가. 거기에는 해방전후사를 비롯하여 분단이후 오늘까지의 한국 정치사에 점철된 온갖 갈등과 승패, 좌절과 아픔이 깊숙이 배어있으리라 본다. 지면상 그 역사를 되돌아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된 데는, 우선 i) 우리 사회 내에 기본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부족하고, ii) 사회적 합의형성을 위한 제도나 관행이 정착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iii) 주요 정치적 행위자들 간에 합의형성을 위한 의지와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따라서 이들 조건들을 하나하나 개선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간략히 논의하면 다음과 같다.


1)
기본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

역사를 되돌아보자. 1989년 바로 소련 및 동구에서 현실사회주의(real socialism)가 종언을 고하던 바로 그 시점에, 한국에서는 많은 젊은이들과 재야 세력들은 급진적 좌파 변혁사상과 주체사상에 열광했고, 이들 중 다수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극복을 겨냥했다. 역사의 폭발적 시점에서 <세계의 시계> <한국의 시계>가 극명하게 반대방향으로 달렸던 것이다. 그 사회의 기본적 가치에 대한 내면적 합의가 없으면, 정치적 다툼은 <체제-반체제>의 험악한 투쟁으로 변하고, 생산적 정책논쟁은 실종된다. 따라서 어떤 사회에서나 그 사회의 <체제적 가치>에 대한 내면화가 요구된다. 우리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체제가치는 ‘다원적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외에도 이념논쟁을 촉발시키는 몇 가지 정치적 상징성이 높은 사회가치들, 예컨대 통일이나 세계화와 한국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를 높이는 일이 중요하다.


(1)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제도

여기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제도는 대한민국의 기본적 헌법질서이다. 따라서 좌파든, 우파든, 보수든 진보든 우리 사회의 기본적 체제가치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명제에 대해서는 흔들림 없는 신뢰가 전제되어야 한다. 여기서 자유민주의는 정치적 자유, 선거경쟁, 대의제도, 복수정당체제 등을 근간으로 하는 다원적 민주주의 제도를 뜻한다. 따라서 실제로 그 틀 안에서 자유주의 정부가 등장할 것인가, 아니면 사민주의 정부가 출현할 것인가는 정치과정 내에서 국민적 선택에 의해 결정하게 된다. 자유시장경제의 개념은 여기서 폭넓게 이해될 필요가 있다. 그 안에는 미국과 영국과 같은 ‘비조정된’ 혹은 ‘협의의’ 자유시장경제( uncoordinated or liberal market economies/LMEs)일 수도 있고, 유럽의 많은 나라가 그렇듯이 이른바 ‘조정된 시장경제’(coordinated market economies/CMEs)일 수도 있다. 이렇듯 체제내적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폭넓게 이해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기본 틀에 대한 정치적 합의와 신뢰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도 우리사회 일각에서 현실사회주의나 북한 주체사상에 대한 망집이 남아있는 정치세력이 있다면 그 세력은 마땅히 반체제 세력으로 배격되어야할 것이다.


(2)
통일

아직도 이 땅에는 <어떤 통일>인가를 묻지 않는 통일지상주의자가 적지 않다. 이들은 대체로 통일, 민족, 자주 등의 상징을 앞세우며 통일이 모든 가치에 초월하는 선차적(先次的) 가치임을 강조한다. 이들은 자주 <통일세력> <반통일세력>으로 편을 가르고, <친북, 반미>가 진보성의 징표로 간주한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할 것은 통일과 민족화해, 협력이 아무리 중요하다해도, 우리의 체제가치가 보장될 수 없는, 혹은 그것이 심각하게 위협받는 통일이나 통일방안에는 합의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평화의 이름으로 한국의 정신적, 물질적으로 최소한의 안보기반을 무장해제하려는 시도나, 민족의 이름으로 북한체제를 과도하게 미화, 정당화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도 분명히 선을 그어야 할 것이다.


(3)
세계화와 한국

세계화에 대한 입장은 체제가치 차원은 아니다. 그러나 세계화에 대한 전폭적 지지나 무조건적 반대는 그리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세계화는 빛과 그림자를 함께 하고 있다. 따라서 자아준거적(自我準據的) 입장에서 세계화에 슬기롭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계화를 우리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중요한 기회로 활용하되, 세계표준(global standards)과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조화시키고, 세계화의 과실이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고르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은 한국이 세계화의 흐름에 보다 주체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국가능력을 제고해야 한다는 점이다.


2)
민주적 제도와 관행의 정착

우리의 경우, 사회적 합의를 창출하기 위한 제도나 관행이 아직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형편이다. 그동안 많이 진척되었다고는 하나, 정치개혁이 아직도 중요한 현안이며, 정부형태 및 선거제도 등 기본적 정치제도에 대해서도 아직도 저마다 이견이 분분한 형편이다. 무엇보다 대화와 타협의 문화가 크게 부족하다. 서구의 몇몇 작은 나라들, 예를 들면 스위스나 벨지움, 네덜란드 등은 종교적, 계급적으로, 혹은 인종적으로 이질적이고 단편적인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비례대표제, 연립정부, 상호비토권 및 하위체제의 자율성 등의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통해 이른바 ‘협의민주주의’(consociational democracy)를 발전시켰다. 이들 나라들은 승자(勝者)가 모든 것을 독식하기보다는 다수의 소수자가 함께 참여하여 권력을 공유하고, 대화와 타협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는 정치양식을 제도화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의 경우, 지역별, 계층별 혹은 세대별 갈등이 있다고는 하나 이들 나라들에 비해 훨씬 동질적인 정치문화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보다 적실성 있는 정치제도의 탐색과 관행의 정착이 이루어지는 경우, 그리 불가능한 일만을 아닐 것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의 주요 생활영역 내에서 이익갈등을 해결하고, 사회적 합의를 촉진할 수 있는 제도 및 중재장치를 마련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주지하듯이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은 노.사간, 호은 노..정 간의 사회협약을 통해 임금조정, 사회복지 개혁, 노동시장의 유연화 등 사회경제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코포라티즘’(corporatism)을 발전시켰다. 일종의 계급타협이라고 할 수 있는 코포라티즘은 지난 세기 서구 산업사회의 위기관리와 복지국가 발전의 불가결의 요소로 간주되었다. 우리의 경우도 김대중 정부가 창설한 ‘노사정위원회’가 바로 그 예인데, ..정 모두 공공성 추구 노력의 부족으로 <부동성>(immobilism)의 위기에 허덕이고 있어 안타깝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더라도, 사회적 합의형성의 제도와 관행을 계속 만들고, 이를 정성스레 가꾸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서구 여러 나라의 경우,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노.사가, 혹은 보수와 진보가 함께 만나 큰 합의를 일궈낸다. 이미 위에서 언급한 1938년 스웨덴의 <살트쉐바덴>협약이나 1982년 네덜란드의 <바세나르>협약이 그런 예이다. 이들 여러나라들은 국가위기에 처하면, 이른바 <역사적 화해>를 통해 국난을 극복하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것이다.

중도개혁은 타협과 문제해결을 지향한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관심을 모으고 있는 모델로서 ‘유연보장’(柔軟保障, flexicurity)과 ‘사회투자국가’(the social investment state)가 있다. 이미 언급한 유연보장의 개념은 파트타임 등 불완전 고용을 허용함으로써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확보하는 일방, 이들에게 실업수당 등 사회급여를 보장하는 형식이다. 그런가 하면 사회투자국가는 신자유주의와 구()사민주의와 구별되는 이른바 ‘제 3의 길’로서, 교육, 직업훈련 등 인적자원에 대한 투자를 통하여 사회정책의 생산적 기능을 강화함으로써 경제성장과 사회정책간의 선순환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국가모형 개념이다. 이러한 시도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3)
중요 정치행위자의 의지와 노력

건강한 중도의 목소리를 키우며 사회적 합의문화를 정착시키는데 제도나 관행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주요 정치행위자들의 결의와 노력이다. 필자는 여기서 한 가지 가설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것은 실제로 우리 사회내의 다수의 시민은 가치지향으로 볼 때 좌-우로 펼쳐지는 이념적 스펙트럼의 중간지대에 많이 밀집해 있으리라는 추정이다. 그러나 이들은 양극화의 기세에 눌려, 또 그들을 정치수면위로 부상시켜 줄 조직화된 세력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목소리를 드러내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주요 정치행위자들이 중간지대로 다가와서, 이들 중간집단, 침묵하는 건강한 다수를 정치의 수면위로 끌어 올리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1)
대통령

한국의 정치과정에서 대통령의 위치는 실로 막강하다.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 논의가 끊이지 않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오늘날 과거의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은 많이 약화되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 합의형성과 중도개혁을 위해서는 대통령은 중심을 바르게 잡고, -우 어느 쪽으로도 편향되지 않는 균형된 마음의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따라서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균심>(均心) <공심>(公心) 이다.


(2)
정치권

보수, 진보 모두 중도적 공론의 장으로 다가와야 한다. 그리고 자유와 평등의 변증법을 바르게 학습해야 한다. 진보진영의 경우, 이제 대한민국의 체제가치에 대한 신념을 보다 분명히 하고, 아직도 그 안에 잔존하고 있는 몰() 체제적 통일관이나, 지나친 대북 편향성 등을 떨쳐 버려야 한다. 보수진영의 경우, 기득권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무한신뢰에서 벗어나야 한다.


(3)
언론

오늘 한국의 경우, 언론매체들의 지나친 이념적 편향성은 합의문화 형성과 중도적 공론형성에 큰 장애가 되고 있다. 언론은 사실과 분석을 바탕으로 정론(正論)을 펼쳐야한다. 미디어의 정론회복 없이 중도개혁정치의 내일은 어둡기 그지없다. 편향적 언론은 담론구조의 양극화를 부추기고, 국론을 분열시킨다.


(4)
시민사회

민주화가 진척될수록 시민사회의 영향력은 강화된다. 바람직한 시민단체의 대() 정부관계는 사안에 따라 공공성의 차원에서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비판하는 <창조적 긴장관계>이다. 그러나 시민단체가 정치권력에 의해 동원되거나, 그와 야합할 때, 혹은 시민사회 내부에 첨예한 이념갈등이 빚어지는 경우, 공론형성의 기반은 오히려 약화된다. 무엇보다 시민운동의 <포퓨리즘>과의 접목은 자칫 <위임민주주의>(delegative democracy)의 위험을 가중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단체는 어떤 계층이나 집단 혹은 정파와의 이해관계를 넘어 민생문제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루는데 기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5)
지성계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롭고, 역사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는 <비판적 지성>의 존재는 중도통합적 개혁정치의 요람이다. 그런데 지성계도 양극화를 거듭하고 있다. 이념갈등 속에 장기적 역사조망과 공공선을 바탕으로 사회적 합의를 추구하는 지성계가 사라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암울했던 1950, 60년대에 한 줄기 빛이었던 <사상계>가 그립다.


(6)
국민

국민의 힘은 위대하다. 한국 민주주의정치 발전의 금자탑인 4.19혁명이나 1987 6월 항쟁의 성공도 국민의 힘이 그 뒷받침이 되었다. 스웨덴의 경우를 보면, 이 나라 사회민주당은 주기적으로 이념적 지향을 좌측으로 되돌리곤 했다. 1920, 1928년 총선에서 일부 산업의 국유화를, 1946, 1948년 총선에서는 계획경제를, 그리고 1976년 총선에서는 임노동자기금안을 제안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지지율의 급격한 하락을 가져 왔고, 1976년에는 아예 정권에서 밀어내기도 했다. 스웨덴 사민주의가 장기간 중도통합적 개혁정치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국민의 정치적 예지와 균형감각에 힘입은 바 크다. 이처럼 국민은 정치변화의 마지막 조정역을 맡고 있다.


7.
결론


이제 한국사회에서 보수와 진보는 마음의 창을 열고, <완승>을 기하기보다 <윈 윈 게임>을 겨냥하며 상생(相生)의 정치를 추구해야 한다. 그러자면 그들은 스스로 관념의 웅덩이에서 벗어나서 사회적 합의를 추구하며, 중간지대로 다가서야 한다. 이들이 움직이면 침묵하던 다수도 스스로 부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들은 과도한 거품을 거두고, 민생의 바다로 힘차게 나가야 한다.

필자는 세계 현대사 연구에서, 그리고 필자 자신의 정책운영과정에서 <중도에 서면 해답이 보인다>는 명제를 터득했다. 그것은 대단한 발견이 아니라 너무나 상식적인 결론이다. 그러나 이 상식적 명제는 이념정치를 민생정치로 옮겨 놓는 묘약이다. 정치가 이념싸움을 거두고 교착정치에서 벗어나면, 체제개혁도 정책개혁도 가능하게 된다. 정치가 이념의 웅덩이에 빠져 있는 한, 체제개혁은 고사하고 이렇다 할 정책논의 조차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

가장 바람직하기는 정치세력들이 스스로 중간지역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언론과 시민사회가 그것을 부추기며 함께 동행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 대선이 가까울수록 이념논쟁은 더욱 격화될 공산이 크고 불임정치는 더욱 심각한 지경에 이를 것이다. 그것이 안타깝다.

그렇다고 침묵했던 중도가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국민또한 대선에서 마지막 조정역을 맡을 수 있을지언정, 정치와 정책과정을 현장에서 주재하기는 어렵다.

결국 정치인들이 이제 제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이를 위해서 지식인과 언론이 더 이상 이념적 갈등을 악화시켜서는 안되며, 중도적 가치 속에서 중심을 잡고 정치인들을 중도의 길로 안내해야 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