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논쟁에 부쳐 (재록)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환단고기>를 언급한 이후, 고대사 논쟁이 뜨겁게 달아 올랐다. 아랫 글은 필자가 15년 전에 <한국사 시민강좌>(47호, 2010)에 실었던 글( '한국 사학에 바란다')이다. 한국 고대사에 아마추어인 내가 외람되게 쓴 글이나,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생각이어서 여기 다시 올린다.
고대사에 대한 오랜 관심
한국 고대사에 대한 나의 관심은 따져보면 지금부터 약 40여 년 전 유럽 유학시절부터 시작된다. 1965년 가을부터 5년 가까이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 유학해서 정치학을 전공했는데, 유학초기에 겪었던 언어적 어려움을 얼마간 극복하고 나면서부터 자연스레 유럽 친구들과 서로 역사와 문화에 대한 토론을 많이 했다. 그런데 그곳 친구들이 처음에는 서양사에 대한 나의 지식에 많이 놀라는 눈치였다. 특히 주요연대를 줄줄 외는 것을 무척 신기하게 여기며,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묻곤 했다. 그러나 실제로 내가 서양사에 대해 아는 것은 고교시절 시험 준비하며 암기했던 겉핥기 지식이 전부였고 제대로 생각하며 탐구했던 내용이 아니어서, 깊이가 없었고 실제로 밑천도 크게 달렸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한국 역사와 문화에 대한 나의 지식의 공허함이었다. 당시 국가유학시험에 국사가 필수였기 때문에 그런대로 열심히 공부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비교문명/문화적 차원에서 서양 친구들과 지적 토론을 할 때면, 내게는 뚜렷한 역사적 관점은 고사하고 무엇 하나 제대로 정리된 견고한 지식이 없는 것이 확연히 드러났다. 특히 곤혹스러웠던 것은 우리 민족의 기원이나 고대국가 형성과정 및 그 문화에 대해 아는 게 전무했다는 것이다. 적지 않은 서양인들은 한국이 서양에 앞서는 유구한 역사와 문명을 지녔으리라고 믿고 있었으며 그에 대한 관심이 컸다. 그런데 정작 내가 아는 한국사의 출발은 기원 전후 시기, 이른바 삼국 시대 시작부터이고, 한국 상고사, 특히 고조선에 대해서는 고작 단군신화 이외에는 아는 게 없었다. 우리가 자주 내세우는 4천여 년 한국사에서 처음 이천 수백 년의 역사는 내 머릿속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또 그게 내 책임인지 한국 역사학이나 역사교육의 문제인지도 분명치 않았다. 자신의 뿌리도 모르면서 서양사 연대만 줄줄 외는 내 자신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 없었다.
유럽의 주요 도서관을 뒤져 보았으나 별 소득이 없었다. 그래서 가까운 친구에게 이 방면의 내 지적 공백을 메워 줄 자료를 찾아 내게 부쳐 줄 것을 간곡하게 청했다. 그랬더니 의외의 소득이 있었다. 그것이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에서 발간한 『민족문화사대계』 제1권(1964년 간행)과 제2권(1965년 간행)이었다. 제1권은 민족·국가사였고, 제2권은 정치·경제사였다. 나는 내 전공에 속하는 제2권은 거들떠 보지 않고 제1권에 매달렸다. 거기에는 김원룡의 <한국문화의 고고학적 연구>, 김정학의 <한국민족형성사>, 김철준의 <한국 고대국가 발달사> 및 나세진의 <한국민족의 체질인류학적 연구> 등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이역만리에서 이 방면의 지식에 크게 갈증을 느끼고 있던 나에게는 복음처럼 느껴졌다. 수차례 읽고 메모하고 머릿속에 정리했다. 개중에는 무리한 주장이나 논거가 부족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적지 않았으나 그런대로 가뭄 끝에 단비처럼 급한 목마름을 해소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얼마간 이론적 무장을 갖춘 이후 나는 서양 친구들과의 비교문화 토론에서 한결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귀국 후 한국 고대사에 대한 관심은 다시 퇴조했고 이를 일깨우기 위해 남다른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월간 『신동아』에 연재되었던 토론을 모아 발간한 천관우 편 『한국상고사의 쟁점-신동아 심포지엄』(일조각, 1975)이 그때까지의 논의를 비교역사적 관점에서 폭넓게 논의해 나의 한국 고대사 인식에 큰 도움이 되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한 가운데 한국 고대사에 관한 쟁점이 국내외적으로 부각되거나, 그와 연관된 새로운 관점이나 지적 논박이 언론에 보도가 될 때에는 불현듯 고대사에 대한 옛 관심이 향수처럼 다시 피어오르곤 했다. 그러다 보니 일본의 한국 고대사 왜곡,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 남달리 예민하게 반응했고, 재야학계의 논점을 포함해서 크고 작은 한국 상고사 쟁점과 주제들이 그때그때 나에게 관심사로 다가왔다. 고고학의 학문적 성과나 북한 이지린의 『고조선 연구』로부터 김지하의 『율려』, 김용운의 『한일 문화의 원형』, 정수일의 『고대문명교류사』, 김운희의 『대쥬신』, 그리고 신용하의 『부여족과 불가리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한국 고대사의 쟁점과 주제들이 그때그때 나에게 지적 관심사로 다가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국 고대사, 특히 그중 고조선은 언제나 아마추어로서의 관심과 탐구의 대상이었지 전문 연구가로서의 연구 대상은 아니었다. 따라서 정리된 입장이나 논점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아는 것도 별로 없었다.
그런데 내가 교육부 장관을 두 번 역임하는 동안 한국 역사연구와 연관하여 크게 두 번 관여한 일이 있었다. 그 첫 번째가 1997년 2월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부설기관으로 ‘한국현대사연구소’를 세운 일이고, 두 번째가 2004년 3월 ‘고구려연구재단’의 창설을 주도한 일이다. 큰맘 먹고 힘들게 세웠던 현대사연구소는 새 정권이 들어선 후 이렇다 할 이유 없이 폐쇄되었고,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 부랴부랴 설립한 고구려연구재단은 이후 독도 영유권문제가 불거지자 새로 출범한 동북아역사재단에 흡수·통합되었다. 여기서 길게 논의할 수는 없으나 한국현대사연구소의 조기 폐쇄에 대해서는 아직도 유감과 아쉬움이 크다. 고구려연구재단의 출범은 고구려사의 전사로서 고조선 연구와 맞물려 있기 때문에 한국 고대사 연구의 새로운 계기라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었다. 장관이기에 앞서 학자이자 역사애호가인 나는 두 연구소를 창설하는 일에 기획 단계부터 매우 열정적으로 관여했고 그 과정에서 보람을 느꼈다.
2005년 나는 교육부 성삼제(당시 지방교육재정담당관) 씨로부터 그가 쓴 『고조선, 사라진 역사』(동아일보사 간행)라는 책을 받고 신선한 충격에 사로잡혔다. 한때 일본역사교과서왜곡대책반 실무반장으로 일했던 성삼제 씨는 실무반장으로는 1년밖에 활동하지 않았지만, 놀라운 집념과 열정으로 계속 ‘사라진 역사’ 찾기에 나서 4년여 만에 고조선 역사논쟁을 주제로 책을 낸 것이다. 그의 책은 출간 즉시 낙양의 지가를 올려, 현재 11쇄를 거듭하고 있다. 나는 그와의 대화에서 한국 역사연구의 첫 단추인 고조선 연구가 지닌 의미를 되새김할 수 있었다.
지난 5월 15일 나는 교육과학기술부 성삼제 국장과 고조선 연구가인 복기대 교수와 함께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작년이 우리나라에서 박물관이 세워진 지 100주년이 되던 해여서 국립중앙박물관은 100주년 기념으로 다양한 사업을 펼쳤는데 그중의 하나가 ‘고조선실’의 개관이었다. 고조선실의 신설과 더불어 원삼국실이 부여·삼한실로 바뀌었다. 고조선 관련 유물들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일제강점기 때 수집한 북한 지역 출토한 유물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고조선에서 사용한 화폐로 추정되는 명도전의 출토 모습을 재현해 놓아 눈길을 끌고 있었다. 박물관 ‘100주년’이 되어서야 ‘고조선실’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우리 고대사를 둘러싼 논쟁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일이다.
그날, 나는 오랜 시간 성 국장과 복 교수와 함께 고조선 연구와 연관된 쟁점토론을 했다. 흥미롭고 자못 진지했던 그날의 토론이 없었다면, 이 주제에 대한 내 생각이 이만치도 정리되지 못했을 것이다. 두 분께 진심으로 감사한다. 그런가 하면 오랜 친구인 고려대 사학과의 민현구 명예교수는 따듯한 조언과 자문으로 한국 상고사에 대한 나의 인식지평을 넓혀 주고 편벽된 생각을 바로잡아 주었다. 고마움을 전한다.
아래의 글은 고조선과 연관한 쟁점들 중 주요한 몇 가지를 정리하고, 고대사 연구의 발전을 위한 내 나름의 제언을 한 것이다. 이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전문적인 연구 없이 국외자가 저지르는 주제넘은 일이기에 독자들의 많은 양해를 바란다.
신화와 역사
고조선을 비롯한 상고사에 대한 우리 학계의 연구 성과는 오히려 러시아나 중국 학자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가 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중요한 이유는 고조선을 비롯한 초기 고대사가 은연중에 역사의 영역이 아니라 신화의 영역으로 다루어져 왔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 결과 한국의 고대사 연구는 정체했고, 그러는 사이에 한국 상고사가 서서히 사라져 갔다. 그러면서 한국 역사의 원형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어느 민족의 경우나 고대의 역사는 신화나 전설로 시작된다. 그러나 신화이기 때문에 그 역사성이 부정되거나 낮게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신화와 전설 속에 그 민족의 역사적 체험과 사상, 문화가 상징적으로 혹은 은유적으로 함축되기 때문이다. 신화의 내용이 설혹 구체적 역사적 사실과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 내면에 흐르는 함의는 한국 상고사 연구와 해석에 값진 실마리를 제공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고대사 연구가는 고조선의 건국과 단군신화를 신화라는 이유로 소홀이 다룰 게 아니라, 신화 속에 담긴 한민족의 문화적 원형과 역사적 체험을 찾아내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민족주의 역사학은 상고사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고, 민족의식을 드높이며 민족적 정체성을 세우는 데 큰 몫을 했다. 그러나 그에 지나치게 몰입하면 역사를 왜곡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실증주의 방법론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역사를 탐구한다는 면에서 장점이 있으나, 엄밀한 고증만을 앞세우다가 자칫 살아 있는 역사를 외면하는 우를 범하기 쉽다.
수천 년 전의 역사를 복원한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문헌사료가 빈약하고, 그 나마 후대에 쓰인 것들이기에 신빙성의 문제가 자주 제기된다. 고고학 자료는 문헌사료의 빈틈을 메우고, 그 사료적 신빙성을 검증하는 데 큰 몫을 한다. 특히 그것이 현대과학과 접목될 때 성과가 증폭된다. 앞으로 인류학, 고고학, 그리고 현대과학의 발전은 우리나라 고대사를 바르게 다시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본다.
이 방면에 대한 중국학자나 일본학자들, 그리고 북한학자들의 연구는 그들 특유의 역사인식체계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고 정치적 이해관계와 자주 맞물린다. 따라서 그 학문적 성과를 분별력 있게 살피고 바르게 평가해야 한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더욱 열심히, 또 주체적으로 한국의 고대사 연구에 천착해야 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나는 우리나라 고대사를 얼마간은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입장에 설 필요가 있다고 본다. 미리 가리고 조심하며 낱낱에 대한 엄밀한 고증과 과학성에만 집착하다 보면, 거둘 것이 없어진다. 좀 더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사료에 접근하고 관련 학문의 도움을 받아 큰 물줄기를 찾아야 한다. 해석에 있어서도 적절한 인문학적 통찰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총체적으로 따져보고 거기에 왜곡이나 거품이 있으면 그것을 바로잡으면 된다는 얘기다.
<조선왕조실록> 데이터베이스에서 ‘단군’이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면 560건이나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에 서술된 기록들을 살펴보면 사관들이 단군을 포함한 고조선을 역사적 실체가 희미한 가상의 존재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실체가 뚜렷한 인격체와 국가로 인식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단군과 고조선에 대해 좀 더 ‘적극적’ 입장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국가형성과 청동기 문화
그동안 주류 사학계가 고조선을 역사적 실체로 인정하지 않은 주요한 논거 가운데 하나는
“고대 국가는 청동기 시대에 형성된다.‘라는 것이었다. 청동기란 청동으로 만든 기구를 말한다. 신석기 시대 말기에 구리에 주석이나 아연 등을 합금한 청동기가 발명되면서 인류역사에 큰 변화가 찾아오는데, 이는 청동기가 석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강력한 무기와 도구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청동기 시대를 국가단계에 진입으로 보는 입장이 세계 학계의 정설이다. 그런데 한국의 청동기 시대는 아무리 올려 잡아야 기원전 10세기경이기 때문에 기원전 2333년 단군의 고조선 건국은 허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오랜 동안 주류학계의 관점이었다. 그러나 최근 연구결과들은 이 논리를 뒤흔들고 있다. 대표적 청동기 유적지인 강원도 춘천시 서면 신래리 유적 거주지의 경우 연대측정 결과 기원전 1510년경의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가 하면 한반도의 청동기 문화 유적인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 고인돌과 전라남도 영암군의 장천리 집 자리는 기원전 2500~2400년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더욱이 고조선 지역의 발상지가 한반도가 아니라 요동·요서 지역이라는 주장이 옳다면 얘기는 크게 달라진다. 특히 요즈음 요하와 하가점 하층문화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유물들은 기원전 24세기 이전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고조선의 건국연대에 관한 『삼국사기』와 『제왕운기』의 기록이 허구라는 논리도 재고될 수 있는 게 아닐까?
고조선의 역사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관점에 따르면, 고조선은 기원전 23~24세기에 건국되어 서기전(→기원전) 1세기경에 붕괴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므로 한반도와 만주에서 발견된 이 기간의 청동기와 초기 철기의 유적과 유물은 모두 고조선의 것으로 추정되며, 따라서 이들은 모두 고조선을 복원하는 데 귀중한 사료가 된다고 본다. 그러나 문화유형이 유사하다고 동일한 정치체제에 속했으리라고 추정하는 것은 무리라는 이론이 자연스레 제기된다. 따라서 이 점에 대해서는 더 깊은 연구와 후속 논의가 필요하리라고 생각한다.
고조선이 청동기 문화의 산물임을 인정하는 경우에도 고조선의 국가형태와 연관하여 관점이 나뉜다. 윤내현은 고조선은 이미 다수의 거수국들을 거느린 고대국가의 단계에 진입했다고 보는 데 반해, 이기백은 초기 고조선은 ‘성읍국가’ 유형에 불과했으나 후기에 들면서 다른 성읍국가들과의 연맹형태를 지닌 ‘연맹왕국’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서영수는 고조선도 다른 고대국가와 마찬가지로 성읍국가--연맹왕국--집권적 영역국가의 순서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고조선이 비교적 장구한 역사를 지닌 국가였음을 전제로 할 때, 그 국가형태나 사회경제 제도에 있어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초기의 고조선과 후대 중국의 통일왕조와 대결했던 고조선은 국가형태와 권력구조에 있어 큰 차이가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무엇보다 청동기 문화를 기반으로 한 시대와 철기 문화를 기반으로 한 시대 간에 차이는 매우 컸으리라고 추정된다. 따라서 고조선에 대한 학문적 성과의 축적과 더불어 고조선에 대한 시기별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고조선의 강역
고조선의 중심 강역이 어디인가는 뜨거운 쟁점 중의 하나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평양성에 처음 도읍을 정하고 이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다가 1500년 후에 장당경(藏唐京)으로 다시 도읍을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 기간 중 한국 고대사 연구자들은 평양성이 오늘의 평양성이며, 아사달이나 장당경도 오늘날의 평안도 지역일 것이라고 위치를 설정했다. 말하자면 도 지역의 영역을 갖고 있던 일개 지방 국가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을 기초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조선 영역을 평안도 지역으로 국한하는 것은 다른 역사 기록에 비추어 부합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고려 시대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에는 고조선이 요동에 있었다고 적고 있다. 그런가 하면 러시아 학자 유 엠 부찐이 쓴 『고조선』에는 고대 맥족의 분포지역을 오늘날의 요서 지역으로 보고 있고, 고조선의 중심 강역도 요동 지방으로 비정하고 있다. 윤내현은 고조선은 서쪽은 란허 강, 북쪽은 얼구나허, 동북쪽은 헤이룽 강, 남쪽은 한반도 남부 해안선을 국경으로 하여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을 영토로 하고 있었다고 본다. 그런가 하면 서영수는 고조선이 요동 지역에서 대동강 유역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이처럼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에 관한 학설은 대동강 중심설, 요동 중심설, 이동설 등 다양하다. 고조선은 장기간 존속한 일종의 연방국가일 개연성이 크며, 또 당시 주변국과의 세력판도에 따라 축소된 적도 있고 팽창된 적도 있기 때문에 하나로 그어 그것을 단군조선의 강역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더욱이 북한이나 만주 지역의 새로운 고고학적 발굴성과에 따라 이 논의는 더욱 복잡하게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대체로 큰 흐름은 기존의 대동강 중심설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판단이다.
고조선의 강역 문제는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 문제와도 연결된다. 고조선 역사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입장들은 단군조선은 토착세력에 의해서 건국된 나라인 데 반해,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은 중국의 망명세력에 의해서 건립된 정권으로 보며, 단군조선의 서쪽 변경에 위치했다고 추정한다. 한편 중국 학계는 기자조선은 은과 상의 후예가 조선반도에 세운 지방정부로, 이것이 바로 중국동북사의 개시라고 주장하여 대조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한사군 설치 지역과 연관해서도 논란이 많다. 사마천의 『사기』 ‘조선열전’을 보면, 한나라는 위만조선과의 전쟁이 끝난 뒤 고조선의 옛 영토에 4개의 군, 즉 한사군을 설치한다. 그런데 고조선 역사를 소극적으로 해석하는 입장은 한사군을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북부 지역으로 보는 데 반해,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입장은 대체로 요동과 한반도 북부 지방에 걸치는 지역이라는 주장이며, 아예 설치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이와 연관하여 『사기』에 나오는 패수의 위치도 논란의 초점이 된다. 소극적인 입장은 오늘날의 대동강(청천강이나 압록강이라는 주장도 있다)으로 보는 데 반해, 적극적 입장은 북경 근처의 난하로 추정하고 있다. 고조선 후기 내지 말기의 경우, 그 이전 시기에 비해 비교적 신빙성 있는 문헌자료도 존재하고, 앞으로 고고학 등 연관 학문의 연구성과가 계속 축적될 것이므로, 후속 논의과정에서 보다 많은 이가 합의할 수 있는 논증과 해답이 나올 것이라고 본다.
고인돌
고인돌은 고대에 제례를 치룬 재단과 무덤양식이다. 고대 국가는 청동기 시대에 세워졌다는 이론과 더불어 고조선이 역사적인 실체를 지닌 국가인가라는 논쟁에 가늠자가 되고 있는 유물 중 하나가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무게가 수십 톤, 큰 것은 수백 톤에 달하기 때문에, 이를 옮기려면 많은 인원을 조직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정치권력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고인돌은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에 걸쳐 전 세계적으로 6만 또는 7만 개에 이른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만 3만 개 이상이 된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한 경기도 양평군 양수리 고인돌 유적에서 채취한 숯을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법으로 연대를 측정한 결과 기원전 2325년경의 것으로 산정되었다.
유럽의 고인돌과 한반도의 고인돌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연구해 온 변광현 교수는 고인돌의 기원을 한반도로 보고 있다.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 발견되는 원초적 고인돌 양식이 유럽대륙의 서쪽 끝인 영국과 아일랜드 지방에서 발견되는 데 반해, 영국에서 흔한 고인돌 양식은 한반도에서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변 교수는 이를 근거로 고인돌이 한반도를 비롯한 극동 지역에서 기원했다고 보고 있다.
고인돌은 유럽과 아시아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에도 분포되어 있어 고고학자들이나 이 분야의 각국 연구자들이 역사자료로 연구하기에 좋은 유적이다. 공동연구가 활성화되어 고인돌에 대한 연구결과가 축적되어 간다면 우리 고대사의 실체규명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명도전
화폐의 존재는 당시 사회를 해석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조선에 화폐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연구결과는 없었다. 그런데 최근 국립중앙박물관 고조선실에 전시되어 있는 ‘명도전’이‘ 고조선 논쟁의 한 축으로 자리하며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다. 명도전은 중국 춘추전국 시대 연나라에서 제조된 칼 모양의 화폐라고 우리 학계에 알려져 있다. 그런데 중국학자인 장보촨 교수는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 무렵까지 만주 지역에는 첨수도, 원절식도폐, 방절식도폐 등 3가지 종의 칼 모양 화폐가 있다고 조사했다. 그중 첨수도와 원절식도폐가 고조선과 관련된 화폐라는 주장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명도전은 만주 지역에서 매우 많이 발견되는데, 이는 거꾸로 만주 지역이 고대에는 중국영토가 아니었다는 역설적인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기존의 주장처럼 연나라의 화폐였다면 연나라 지역에서 많이 출토되어야 하는 것이다. 명도전이 고조선의 화폐라고 주장한 우리나라의 학자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위서 논쟁
『규원사화』와 『환단고기』는 고조선 역사가 담긴 일종의 재야 사서들인데, 이른바 위서 논쟁의 중심에 있는 대표적 저서들이다. 『규원사화』는 근대에 쓰인 책으로 알려져 있고, 4종의 옛 역사서를 묶은 『환단고기』도 실제로 편찬·출간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주류 역사학계는 이 책들을 위서로 보고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 책들을 보면, 고조선의 1대 단군왕검으로부터 47대 단군 고열기까지 역대 왕들의 이름과 그들의 구체적 치적이 등장하고 있어 신기하고도 쉽게 믿기 어려운 내용이 많이 담겨 있다. 또 그 내용을 보면 우리 민족의 영광을 드높이려는 민족주의적 동기가 크게 배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대체로 주류 사학계는, 이 책들에서 근거로 내세우는 인용서목들이 현재에는 전해지지 않는 비기·기서들이며, 다른 문헌들과 기록이 일치하지 않고, 훗날 가필한 흔적이 분명하며, 종교적 색체가 너무 강하고, 집필시기·과정 등에 의심이 간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이 책들을 신빙성 있는 사료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입장이다. 주류 학계는 이 서적들을 대체로 잘못된 민족주의의 발로로 보고 있다.
학계의 논쟁과는 별도로 이 책들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과 반응은 뜨거웠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빨간색의 티셔츠를 입고 응원을 했던 붉은 악마들이 상징적으로 내세운 인물이 『환단고기』에 나오는 치우천왕이었다는 사실은 흥미 있는 일이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치우천왕은 환인이 다스리던 환국의 뒤를 이어 환웅천왕이 건국한 배달국의 14대 천왕이다. 그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우리 역사책에는 언급이 없으나 중국의 40여 역사책에 언급이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1993년 박창범 전 서울대학교 천문학과 교수가 『환단고기』의 비밀을 천문현상으로 검증해 보는 독창적 시도를 통해 역사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단기고사』나 『환단고기』에 실린 <단군고기>에 수록된 천문 관련 기록 중 13대 단군 50년(기원전 1733년)에 기록된 5성(금, 수, 목, 화, 토)의 별이 한곳에 결집했다는 이른바 오성취루현상을 증명하기 위해 8개월 동안 초고속 컴퓨터를 사용하여 기원전 1733년을 전후하여 550년간의 오행성의 위치를 조사했다. 그 결과 기원전 1953년 2월 25일 새벽에, 그리고 기원전 1734년 7월 13일 초저녁에 실제 현상이 일어났다. 단군조선의 기록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으나 당시의 시간 계산법과 3천 년이 지난 지금의 계산법을 고려하면 무시해도 좋을 수치이고, 만약 후대에 누군가가 조작으로 기술해 넣었을 경우 서로 맞아 떨어질 확률은 0.007%로 거의 불가능하다고 한다. 『환단고기』에 기록된 천문현상을 검증한 연구 결과가 발표되자, 『환단고기』 논쟁은 예견치 않은 차원으로 확대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 책들이 정밀한 역사서가 아닌 게 분명하다. 오랜 세월동안 그것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전승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풍화작용이 있었을 것이고, 후대에 적지 않게 윤색되거나 가필되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렇다고 후대 어느 작가의 총체적 상상력의 결과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정밀한 역사서는 아니나 인문학적 텍스트로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따라서 한마디로 이를 위서라고 단정하기보다는 그 함의를 되새겨보고, 필요한 경우 전문적․과학적 검증을 통해 그 진위의 정도를 더욱 엄밀히 가려야 하지 않을까 한다.
몇 가지 제언
고조선을 비롯한 우리나라 고대사에 관한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재야 학자를 포함한 학자 간의 논쟁을 넘어 일반 시민들까지 이 논쟁에 참여하는 양상이다. 그런데 우리 고대사의 논쟁을 적어도 학문적으로 회피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쟁점 자체가 ‘민족주의적’ 정서와 깊게 연관이 되고 있고, 개중에는 극단적인 관점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일부 재야 사학자들도 없지 않아 얼마간 우려되는 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고대사에 관한 증대된 관심과 다양한 논쟁은 이 분야의 학문적 깊이와 성과를 풍성하게 해 주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크게 보아 우리나라의 고대사 연구는 아직 그 연구기반이 극히 취약하고 연구역량도 기대에 많이 모자란다. 주류 사학계의 관심과 참여도 약할 뿐더러, 집중적으로 이 방면 연구에 전념하고 있는 연구자도 적고 연구할 터도 변변치 못하다. 역사연구와 연관된 주요 국책연구소에 고대사 연구비중이 매우 낮을 뿐더러, 유수한 대학교에 고대사 연구소가 한 곳도 없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기초연구와 심화연구 모두 강화되어야 하며 무엇보다 전문가 양성, 특히 차세대 연구자 양성 문제에 대해서 더 깊은 관심을 쏟아야 한다. 고대사를 전공해도 실제로 마땅한 일자리를 찾기 어려운 현재 상황에서 우수한 차세대 학자들을 고대사 연구 분야로 모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한국 고대사의 복원 내지 바로 세우기를 위해서는 고대사 연구 및 고대사 주요논점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지원이 절실히 필요하며, 이와 맞물려 있는 차세대 연구인력 양성에도 더욱 큰 노력을 쏟아야 할 것이다. 국내 연구자의 국외 연구활동 지원도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연구지원은 국가차원의 정책적 의지와 밀접히 연관되는 게 사실이다. 공공지원뿐만 아니라 민간 및 대학 차원의 연구지원도 중요하다. 그런 관점에서 2007년부터 시작된 미국 하버드 대학교 한국학 연구소의 한국 고대사 연구지원은 매우 고무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앞으로 국가 및 정책 차원의 고대사 연구지원은 더욱 조직적․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장기적 비전을 갖고 전략적․체계적으로 고대사 연구를 지원해야 한다. 과거의 예를 보면 일정 역사적 쟁점이 국제적 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때에만 관련 역사연구에 대한 정치적․정책적 차원의 관심이 고조되었던 경우가 많았고, 대체로 그 지원방식도 대증적․비조직적․산발적이었다. 그러나 앞으로 우리의 고대사 연구는 정치적․정권적 이해의 차원을 넘어 본질적․장기적 차원에서 조직적․체계적으로 진행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해서 한국 고대사에 대한 심층적 연구가 축적되면, 인접 국가와의 역사논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을 뿐더러, 국내 학계에서의 불필요한 소모적 논쟁도 많이 정리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다음으로 고대사 연구와 연관하여 역사학자, 고고학자, 인류학자, 언어학자, 민속학자 등은 물론 생명공학과 천문학, 금속학 분야의 학자들과의 학제적 연구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학제적 연구는 고대사 탐구의 연구 시각을 넓히고 고대사를 바르게 복원하는 데 획기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상고사 및 고대사 연구는 문헌사학자들의 노력만으로 큰 성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것이 너무나 명백해졌다. 특히 고고학의 중요성은 날이 갈수록 더해가는 추세이다. 고고학적인 유물·유적의 조사, 발굴 및 그 자료연구의 지원 없이 한국 고대사를 복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그러나 실제로 고대사 연구는 연구의 초점, 연구방법 및 시대명칭 사용의 차이, 연구대상지 설정의 장애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고고학적 연구 성과를 충분히 수렴하고 이를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문헌사학과 고고학 간의 잦은 학문적 소통과 협업 및 공동연구는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가 하면 앞으로 『과학으로 찾은 고조선』(이종호, 글로연, 2008)과 같이 과학(자)에 의한 역사연구방법의 비중도 날이 갈수록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한국 고대사의 성공적․입체적 복원은 이들 여러 학문 간의 학문적 공동노력에 의해 이루어질 것으로 본다.
우리 고대사와 연관된 무수한 논쟁을 해결하고 고대사를 바르게 복원하기 위해서는 일본이나 중국의 고대사 연구가 필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따지고 보면 고조선과 관련된 논쟁들은 우리 고대 역사책이 아닌 중국의 역사책에 기록된 것을 근거로 시작된 것이 대부분이다. 또한 고조선의 기원, 그 강역과 국가성격, 그리고 열국시대 등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중국 고대사 연구는 필수적이다. 따라서 그들의 시각이 아닌 우리 고대사의 관점에서 중국과 일본 고대사를 더욱 깊이 연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울러 중국과 일본 학계, 그리고 북한 학계와의 지적 소통과 공동연구도 한국 고대사의 논쟁을 학문적으로 해결하는 데 큰 몫을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이 소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의 고대사 연구 역량이 높은 수준에 있어야 하는데, 이 문제는 여전히 숙제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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