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으로 기억한다. 60세로 넘어가는 초겨울에 내 처가 뜬금없이 “당신 10년 젊어질 수 있다면, 그때로 되돌아가겠어?”라고 내게 물었다. 나는 곧장 “싫어, 그 모진 세월을 왜 되풀이 해”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내 처가 “되풀이가 아니고, 10년이 그냥 열려 있는데도”라며 재차 물었다. 나는 “그래도 싫어”라고 한 마디로 답했다. 그랬더니 내 처도, “실은 나도 그래”라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서로 “왜냐”고 더 묻지 않았다.

  그날 저녁 가까운 친구 몇 명과 만난 자리에서 그 얘기를 했더니, 웬걸 대부분의 친구들이 “무슨 얘기야, 10년이 젊어지는데, 당장 돌아가야지”라는 입장이었다. 어떤 친구는 “무슨 소리야. 50대가 황금기인데 다시 산다면 정말 멋지게 해낼 텐데…”라며 자신감을 피력하기도 했다.

  그날 집에 돌아오면서 내가 왜 세월을 되돌리기를 원치 않았을까 혼자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한마디로 잘라 대답하기 어려웠던 것이 아마도 복합적인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그 중 하나는 지나간 50대, 10년의 세월이 내 편에서는 무척 힘겹고 고단한 시간으로 기억되었던 게 사실이다. 그 시절, 학교의 주요 보직, 학회장도 지냈고 언론에 글도 많이 썼고 2년 가까이 장관직도 수행했으니 남 보기에는 그럴싸해보였을지 몰라도 내 마음의 거울에는 질곡으로 각인될 때가 많았다. 그런가 하면, 내 딴에는 지난 10년간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았는데 그 비슷한 세월을 왜 굳이 되풀이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도 곁들였던 것 같다. 다른 주요한 이유인 즉, 비교적 건강한 몸으로, 60대에 내가 할 일을 어린아이처럼 꿈꾸며 새로운 10년에 진입하는 내 처지가 무척 다행스럽고 고맙게 느껴져 언감생심 다른 욕심은 지나치다는 생각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밖에 아마도 인생이 허무하다는 생각, 속절없다는 생각도 얼마간 보태졌지 않았을까 싶었다.

  만 65세 정년을 맞았을 때, 다시 내 처가 세월을 몇 년 되돌리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펄쩍 뛰었다. “무슨 얘기야. 이제 아무런 사회적 책임도 없이 정말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 수 있는데. 얼마나 기다렸던 시간인데.” 그 때 내 대답은 명료했다.

  그리고 다시 몇 년이 지나 이제 나이 70으로 진입하는 겨울에 섰다. 이번에는 내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난 10년 세월을 되돌리고 싶으냐고. 이번에도 대답은 “아니오”였다. 아직 그런대로 건강한 편이고 70대에도 나를 속으로 살찌게 할 일들이 남아 있어 가슴이 뛰는데, 왜 인생을 복습할 것이냐는 생각이 앞선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에 스산한 기운이 맴도는 것은 숨기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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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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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1980년대 초, 중반에 몇 년간 서울 여의도에 살았다. 당시에도 머리는 동네 목욕탕에서 깎았다. 그러다 보니 언제나 같은 이가 머리를 만졌는데, 내 나이 또래의 이발사는 매우 유식하고 세상물정에 밝은 이였다. 또 대단한 이야기꾼이어서 조발을 하면서 끊임없이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재미있게 엮어갔다. 특히 정치얘기를 많이 했는데, 언제나 정보가 풍성했고 관점도 날카로웠다. 나는 그의 열정적인 얘기에 자주 빨려 들어가곤 했다.


  시간과 더불어 그는 점차 얘기하는 쪽이 되었고 나는 대체로 열심히 경청하는 쪽이 되었다. 그는 얘기 도중 가끔 “아시겠어요” 라고 되물어서,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면 나는 황급히 “아, 그럼요” 라고 맞장구를 쳤던 기억이다. 내 쪽에서 말수가 적었던 것은 그의 능숙한 언술에 압도된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의 논변에 빈틈이 없어 내가 이의를 제기하거나 별로 덧붙일 게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여하튼 나는 당시 그의 정치평론을 내심 높게 평가했고 그와의 대화를 진심으로 즐겼다. 그도 더없이 착실한 수강생인 나를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 내가 목욕탕에 나타나면, 손을 번쩍 들며 크게 반기곤 했다. 하지만, 한 번도 그가 내가 뭐하는 사람이냐고 묻지 않았고, 나도 구태여 내 신분을 밝힐 필요가 없었다.

 

  내가 그의 단골이 된지 두어해 지난 어느 날 예상치 못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발을 끝내고 막 목욕탕으로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어떤 이가 “아니 교수님, 여기서 뵙다니요.”라고 큰 소리로 인사를 하는 게 아닌가. 돌아다보니 전에 가르쳤던 옛 제자였다. 서로 벗은 채로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다시 탕으로 들어가다가 뒤를 돌아보니, 그 예의 이발사가 심상치않은 낯빛으로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고, 내 제자는 머리를 깎으려는 듯 그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내가 목욕을 끝내고 나오자 이발사는 무척이나 화가 난 모습이었다. 얼마간 격앙된 목소리로 “교수님, 그러시는 데가 어디 있습니까. 그동안 저를 데리고 노신 것 아닙니까?”라며 거칠게 항의했다. 그는 내 제자를 통해, 내가 대학교수이고 일간 신문에 자주 정치평론을 쓰는 컬럼니스트라는 얘기를 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런 나에게 그동안 으스대 왔으니 한편 부끄럽고, 다른 한편 내게 크게 당한 느낌이라는 것이었다. “속으로 같잖다고 오죽 우스셨겠어요”라고도 말했다.


  실제로 당황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에게 그간 그가 펼쳐 온 정치식견은 정말 뛰어 났고 내가 항상 깊은 공감 속에 진지하게 경청했으며 내 글에도 크게 반영되었다는 점 을 누누이 강조했다. 아울러 기회가 없었을 뿐 내 신분을 감출 뜻이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좀처럼 화를 풀지 않았다. 그는 내가 때 없이 낮 시간에 이발하러 오고 항상 편한 차림이어서 “그냥 동네상가 사장님이시거니 했지요”라고 덧붙였다.


  그 후로도 나는 그를 계속 찾았다. 그러나 그는 말수가 크게 줄었고 훨씬 조심스러워졌다. 오히려 내게 묻는 경우가 많아졌고, 그 때마다 “교수님, 교수님”하며 한껏 예의를 갖췄다. 그에겐 내가 이미 예전에 내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이발 중 즐겨 듣던 그의 명강의는 이미 옛사랑의 그림자가 되었고 그와의 대화가 예전처럼 즐겁지가 않았다.


  알량한 내 신분이 노출되면서 그와의 순수하고 자연스러웠던 소통이 한순간에 허물어지고, 두 사람 간의 관계도 결정적으로 금이 갔다. 안타까운 일이 지만 어찌 손쓸 길이 없었다. 내 마음 속에 깊숙이 자리 잡은 진정성 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직업, 신분, 차림새 등 우리가 껴입고 사는 허울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회적 장벽이 세상에서 더 위세를 발휘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우리가 산과 숲, 나무와 꽃 앞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언제나 마음을 여는 것은 자연을 접할 때 그들이 그렇듯이 우리는 아무 겉치레 없이 벌거벗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우수가 지났다지만 아직도 긴 겨울밤에, 몸에 허울을 덮어쓰기 전에 만났던 어릴 때 옛 친구들 생각이 더 나는 것은 그들이 나에게 언제나 풋풋한 자연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리라.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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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태현엄마 2010.08.28 06:54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저는요 교수님, 한국 사람들한테 제가 교수라고 이야기하지않으면 저한테 반말을 해요. 학생인줄 알고요. 학생이라도 서른 넘은 사람한테 처음보면서 반말하면 쓰나요? 처음본 사람한테 제가 교수라고 할수도 없고. 그냥 몇번 만날때까지 반말을 듣고는 해요.

  2. 태현엄마 2010.08.28 06:54 Address Modify/Delete Reply

    좋게 생각하면 어려보인다는 것이겠죠?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

* 이 글은 2009년 12월 5일 <사회정책연구회>에서 발표한 내용의 요약본이다. 
  학자로 산 내 생애 40년을 성찰적으로 되 돌아 보았다.


‘하고 싶은 일’, ‘잘하는 일’, 그리고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 하나로 겹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어려서부터 ‘글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워낙 다른 재주가 없어 그 나마 공부 잘하는 것이 내 딴에는 장기였다. 또 학자로 산다는 것에 항상 의미를 부여했고 자부심을 느껴 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스스로 무척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학자, 특히 사회과학자는 자신의 생활철학이 어쩔 수 없이 공부 속에 녹아 들어간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내 기본적 생각이 무엇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를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난 40년간 격동의 생활 속에서 학자로 살면서 중요하게 여겼던 가치들을 성찰적으로 되새겨 볼 때, 아래에 몇 가지로 집약된다.

 

1. 자유와 평등의 변증법

나는 스스로 이념적으로 <중도개혁자>를 자처했다. 자유나 평등에 극단적으로 몰입되기 보다는 양자가 변증법적으로 지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급진적 변혁보다는 점진적 개혁을 지지했고, 이념적 대결대신에 상생과 사회적 합의를 추구했다. 경제성장과 사회복지의 선순환을 지향하고, 그 길이 어렵지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교육영역에서도 정권의 수명을 뛰어 넘는 중. 장기적 교육비전을 마련하려고 애썼다. 영재교육과 대안교육이 다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자리나 현실적 이해 때문에 이러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내가 지향했던 우선적 가치는 <인간화>가 아니었던가 생각한다.

크게 보아 체제 안에 있었지만, 언제나 <핵심>이 아닌 <주변>에 터를 정하고 비판의 날을 세웠다. 대체로 <unattached within>의 입장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중도주의자의 <고독>을 반추하며, 시대의 도도한 흐름과는 얼마간 다른 소리를 해 왔다.

 

2. 자아준거성

사회과학은 그 사회의 토양과 문화를 반영하는 학문영역이다. 따라서 사회과학자들은 그 사회의 필요를 발굴하고 또 그에 슬기롭게 대응해야 한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한국 땅에서 <미국학문>을 하고, 자신들이 학문적으로 <첨단>에 있다고 자부한다. 교과과정도 미국사람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마련한 것을 그대로 옮겨 놓고 그것을 가르치며 스스로 <선구적>이라고 자부한다. 나는 사회과학의 <자아준거성>(自我準據性>을 필요 있을 때 마다 주장했다. 나는 그 때 그 때 한국 사회가 목마르게 필요로 하는 분야가 무엇인지를 찾아 보려고 애썼고, 그 분야에 대한 개척적 연구를 많이 했다. 나의 학문적 접근은 대체로 <역사. 비교론적> 접근이었다. 주제를 역사적으로 탐구하고, 아울러 비교론적 입장에서 다른 나라(혹은 국가군)와 비교하는, 씨줄-날줄의 교직(交織)을 통한 입체적 연구방법이 그것이다.

 

3. 학문간 벽 허물기

실제 세상(사회현상)은 모든 게 한데 얽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움직이는데, 학문이 자기 필요에 의해 전공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나누고 칸막이까지 했다. 나는 비교적 전공이나 학과의 벽을 넘어 학자생활을 해 왔다. 정치학자이며, 행정학자이고, 정치사회학이나 정치경제학도 남의 영역이라고 느껴 보지 않았다. 그 때 그 때 몰입했던 분야도 다양하고, 손댔던 분야도 꽤나 넓었다. 그러다 보니 하고, 학문적으로는 한 우물만 깊게 파는 경우 보다 에너지 손실이 컸다. 그러나 나는 그런 식의 공부가 재밌고, 행복했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교수충원에서 흔히 대두되는 <순혈주의>(학사, 석사, 박사 모두를 같은 전공으로 해야 한다는 식의)를 탐탐치 않게 생각한다.

 

4. 이론과 실천의 접목

나는 정치학과 행정학, 정책학을 함께 공부 하면서, 이론과 실천을 엮어 보는데 많은 관심을 쏟았다. 원리추구적 순수학문인 정치학과 실천위주의 행정학을 접목하는 일은 내게 역동적이며, 살아있는 학문을 하고 있다는, 그리고 우리의 생활세계를 개선하는데 스스로 한 몫을 하고 있다는 의미를 부여했고, 여기서 오는 박동감, 몰입감, 자부심이 나를 항상 깨워있게 했다. 내가 주저하면서도 정부 일을 두 번 씩 맡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고 본다.

 

5. 권력, , 연고와 거리두기

나는 권력과 돈, 그리고 연고와 거리를 두려고 나름대로 노력을 해 왔다. 두 번이나 장관을 지낸 사람이 권력과 거리를 두었다니 이해가 안 된다고 할지 모르나, 입각 전에 당시 대통령들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고, 정치권과는 어떤 인연도 없었다. 10 여년 동안 주요 일간지에 정치평론을 쓰면서 내 딴에는 언제나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위치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또 정부와 정책을 연구하는 학자이지만 정부 프로젝트는 극력 피했고, 특히 권위주의 시대에는 더욱 그랬다. 학연이나 지연, 혈연 등 연고주의적 네트워크가 우리 사회를 멍들게 하는 주범이라고 여겨 이런 사회관계의 늪에서 스스로를 멀리 하려고 노력했다. 검약을 생활의 모토로 했고, /글과 행위/삶의 양식 간에 괴리를 줄이려고 애 썼다.

 

6 處無爲之行學不言之敎

내 서제에 걸려 있는 액자에 그렇게 쓰여 있다. 靑南 吳濟峯 선생이 내게 내려 주신 글이다. 나는 그 내용을 무척 좋아 한다. 정년 후 설악산 기슭을 찾은 것도 무위자연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학자에게는 정년이 없다>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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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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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인 외,『배움과 한국인의 삶』나남 (2008) 145-167면에 수록  

I.
  필자는 문민정부 시절 약 20개월(1995/12-1997/8) 동안,  그리고 참여정부 시절 1년 남짓 (2003/12-2005/1) 두 차례에 걸쳐 도합 약 32개월 동안 교육부장관(두 번째는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을 역임했다. 같은 부처의 장관을 두 번 지낸 것도 이례적이거니와, 민주화 이후 이기는 하나 이념적 지향에 있어 얼마간 차이가 있는 두 정권에서 장관으로 일했다는 점이 독특하다면 독특한 점이다.
  필자가 처음 장관에 임용되던 1995년은 바로 문민정부의 대표적 개혁과제였던 <5.31 교육개혁안>이 마련되어, 역사상 처음으로 광범위하고 체계적인 교육개혁이  추진되던 시기였다. 필자는 교육패러다임의 변화를 추구하던 바로 이 역동적인 시기에 교육개혁사업의 바탕을 세우고, 그 주요 내용을 정책으로 옮기는데 온 정성을 기울였다.
  이후 2003년 말 두 번째 장관직을 맡았을 때는, 처음 장관에 임용된 후 약 8년의 세월이 지난 후였다. 그동안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로 이어지면서 두 차례 정권이 바뀌었을 분 아니라 장관도 9명이나 교체되었다. 정권도 상대적으로 진보성향이 짙었다. 그러나 이 나라 교육정책의 골격은 아직도 문민정부의 <5.31 교육개혁안>에 준거하고 있었으며, 이 점은 노대통령도 스스럼없이 인정하고 있었다. 필자는 한국교육이 <5.31>를 넘어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그 실마리를 <e-러닝>과 <교원개혁>에서 찾았다. 이념지향의 교육정책 대신에 교육인프라의 확충을 겨냥한 것이었다.
  필자가 두 번째 장관직을 그만 둔 이후에도 벌써 4명의 장관이 바뀌었다. 필자는 여기서 두 번의 장관 경험을 바탕으로 체험적 교육부장관론을 서술하고자 한다. 여기서는 편의상 교육인적자원부를 교육부로 칭한다.

II.
  교육부장관직은 정부 각료 중에도 가장 힘든 자리로 정평이 나 있다. 각료들 끼리 농담 삼아 정부 내에서 이른바 <3D 장관>이 누구누구냐를 가지고 설왕설래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에도 <3D> 중 최악의 자리는 교육부장관이라는 데는 아무런 이의가 없다.
  대통령이나 총리, 동료 장관들도 교육부장관에 대해서는 얼마간의 연민의 정을 갖고 대하는 게 보통이다. 정부중앙청사 뒤편에서는 연일 작고 큰 데모가 벌어지는데, 그 반 이상이 교육부와 연루된 것들이다. 주지하듯이 주요 교육쟁점에 관해서는 거의 전 국민이 치열한 관심을 갖고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할 뿐 아니라, 그들 스스로 교육에 관한 한 전문가로 자처한다. 그 때문에 장관이 정책을 관리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장관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뜨거운 쟁점으로 부각되기가 일 수 이며, 장관직을 물러난 후에도 교육부장관은 그가 주도했던 정책과 함께 많은 이들의 뇌리 속에 살아남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도 옛날 장관이름을 앞 세워 <누구 세대>라고 불리어지지 않는가. 
  필자가 처음 장관이 되고 얼마 후에, 비서관에게 <역대 장관 중, 누가 가장 성공적인 장관이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의 대답인 즉, “죄송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크게 망신당하지 않고 그만 두실 수 있으면 그런대로 성공적이라고 볼 수 있는 자리가 교육부장관 자리입니다”였다. 신임장관이 좌절을 느끼기에 족한 대답이었다. 교육부장관은 자주 부정적 여론의 표적이 되기 때문에 역대 대통령은 무언가 일만 터졌다하면 서둘러서 장관을 바꿔치는 경우가 많았다. 교육은 백년대계이므로 교육부장관은 대통령과 임기를 같이 할 것이라고 미리 큰 소리를 쳤던 몇몇 대통령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장관은 마치 홀로 백척간두에 서 있는 것처럼 외롭고 힘든 경우가 많다. 필자도 1997년 3월 <초등학교 영어>를 도입할 때, 2004년 4월 1일 <EBS 수능 및 인터넷>을 출범할 때, 같은 해 봄, <교원평가> 계획을 처음 발표할 때, 그 해 10월 말 <2008년도 입시개혁안>을 발표할 때 등, 중대한 발표나 시행을 앞두고 그 전날 밤은 예외 없이 하얗게 세웠다. 역사의 하중에 눌려 한 숨도 못자고 밤새 앓았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그렇다면 왜 교육부장관직은 왜 이렇게 어렵고 힘든 직책일까. 몇 가지 그 중요한 이유를 짚어보자.
  널리 알려있듯이 우리 국민의 교육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전지구적으로 유례가 없다. 바로 이 전설적인 한국인의 교육열은 우리나라 교육발전에 원동력인 동시에 자칫 감당하기 어려운 큰 짐이 되는 경우가 많다. 1200만 명에 육박하는 각급 학생들, 50만 명에 가까운 교원들, 그 합한 수를 훨씬 뛰어넘는 학부모들과 가족들, 기타 교총, 전교조를 비롯한 다양한 교직단체, 시민운동단체들, 증가일로의 교육산업 종사자들, 이들 다양한 교육수요자와 고객들의 교육에 대한 관심을 가히 폭발적이다. 또한 그것이 많은 경우, 자신의 이기적 관점과 눈앞에 이해관계에 따라 다양하게, 여과 없이 분출된다.
  여기서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은, 많은 한국인들이 배움과 연관해서 가슴에 적잖은 <한(恨>이 맺혀있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못 배운 한>을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했고, 해방이후 급격한 사회변동 속에서 교육이 계층과 신분상승의 선도변수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전 국민이 <일류대학 병>에 감염되었고, 심각한 <학벌주의>의 노예가 되었다. 따라서 교육과 연관된 작은 실패도 천추의 한으로 받아들이고, 미세한 불이익도 그냥 넘기지 못한다. 이는 다시 교육제도와 정책, 그리고 교육당국에 대한 강한 불만과 불신, 그리고 참을 수 없는 분노로 투사된다. 그래서 교육부장관는 많은 이의 <공적(公敵)>이자, 가장 만만한 <동네북>이다.
  이에 못지않게 교육부 수장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하고 있는 이념적 갈등이다. 얼핏 보기에 교육문제는 탈(脫)이데올로기의 영역인 듯 하나 실은 거기에 이념적 갈등이 첨예하게 도사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념의 여울에 빠지면, 만사를 정(正)과 사(邪)의 문제로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자칫 문제해결에 나서면 나설수록 사회적 갈등의 수렁에 빠져 들기가 십상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교육쟁점의 경우, 여론이 반반이 갈라지는 경우가 잦고, 그 때문에 사회적 합의를 일궈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이른바 <3불(不)>정책이나, 사립학교법, 고교평준화 등 첨예한 쟁점 사안들이 다 그런 예이다.
  필자가 두 번 째 장관직을 수행했던 기간 (2003/12-2005/1) 국회교육위에서는 특히 여.야간의 이념적 갈등이 치열했고, 이들은 사사건건 격돌했다. 그 결과 교육위에 주요 법안이 계속 계류되고, 법안 재.개정이 파행, 교착, 좌초된다. 
 

III.
  안호상 초대 문교부장관으로부터 현 김신일 교육부총리에 이르기까지 역대 교육부수장은 50명에 달한다. 평균 재임기간은 1년을 남짓에 불과한데, 특히 문민정부 이후 장관의 교체가 무척 잦았다. 다른 부처와 달리 교육부의 경우, 장관 중 대부분이 대학교수출신이었고, 약간명의 정치인 출신이 있었을 뿐이다. 다른 부처의 경우, 그 부처 출신의 관료들 중에 장관직까지 오르는 예가 적지 않으나, 유독 교육부의 경우 자체 내에서 장관에 이른 예가 한번도 없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체로 장관으로 충원되는 유력한 경력집단은 관료, 정치인, 그리고 교수를 비롯한 전문가 집단이었다. 이들은 각각 관리자형, 정치가형, 그리고 전문가형으로 분류되며, 개개 유형에 따른 장점과 단점을 갖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역대 교육부장관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전문가형은 어떤 특성을 지니는가.
  전문가 유형은 대체로 소관 영역에 대해 전문성이 뛰어나며, 그 때문에 업무수행에서 얼마간 전문적 권위를 구사한다. 그러나 이들은 정책결정 및 관리에 있어 독선적 경향이 강하며, 그들이 속한 전문가 공동체의 규범체계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전문가 유형의 장관은 정치력이나 개혁열정에 있어서는 정치가형에게, 그리고 부처관리능력에 있어서는 관리자형에 뒤지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그들은 뛰어난 전문적 식견과 치밀한 논리 등을 바탕으로 중장기 정책개발이나 합리적 개혁추진에는 효과적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 공사를 막론하고, 거대. 복합조직에서 관리자적 경험을 축적한 전문가출신의 경우 <전문성+관리능력>을 바탕으로 관료조직에 빠르게 적응하며, 부처관리에 성공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전문가 유형 중에도 대학교수 출신의 경우, 비교적 평온한 조직환경 속에서 독자적 학문 활동을 해 왔기 때문에, 역동적인 정치사회 와 거대 관료조직에서 신속한 정책결단이나 정책수단의 동원에는 한발 뒤질 수밖에 없다. 대체로 볼 때, 교수출신의 장관은 큰 조직에 적응하는데 시간을 요한다. 말하자면 시간과 더불어 숙성되는 <만성(晩成)형>이다. 그런데 실제로 교육부장관은 너무 자주 교체되기 때문에 교수출신 장관들이 대부분 제 빛을 발휘하지 못하고 <장관 학습 중> 밀려 나오는 게 상례이다.    

IV.
  교육부장관은 복잡하고 다양하기 그지없는 정책환경 속에서 활동한다. 그 안에서 장관은 수많은 상대역들과 상호작용하며 영향력을 주고받는다. 대통령을 비롯한 청와대, 국회, 여야의 정당, 총리와 유관부처, 언론 및 다수의 교직단체 및 교육시민단체, 그리고 각급 교육기관과 교육청 등이 그것이다. 장관은 이들을 상대로 소관영역의 정책결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상충하는 이해관계의 조정과 중재에 나선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 부처의 내부관리자로서 조직, 인사, 예산 등을 총괄하며, 정책의 집행과정을 관리하는 등, 민간영역의 ‘최고관리자’(CEO)와 유사한 행정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렇듯, 장관은 이중 역할, 즉 정치적 역할과 행정가의 역할을 함께 수행한다.
  과거 권위주의 지절에는 중요 정책이 대통령/청와대, 장관, 그리고 고위관료들 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러나 민주화가 진척됨에 따라 정책과정은 종전에 비해 장기화, 동태화, 복잡화되었고, 사회전체적으로 민의수렴과정이 크게 확장되었다. 그러다 보니 장관의 일은 크게 늘었고, 더 힘들어 졌다. 장관은 실제로 이들 다수의 정책참여자들의 정책성향을 면밀히 분석하여, 가능한 한 많은 수의 ‘우군(友軍)을 모아 견고한 정책 네트워크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아직도 한국의 정책과정에서 대통령/비서실, 장관, 그리고 고위관료 등 핵심집행부(core executive)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하며, 정책과정에서의 장관의 영향력도 핵심집행부 내의 다른 주요 상대역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부각된다.
  우선 장관과 대통령의 관계가 중요하다. 대통령은 행정부 내의 최고 의사결정자이다. 따라서 그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제왕적’ 대통령이 자주 회자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국가의 백년대계를 좌우할 중차대한 교육정책에 경우 대통령의 관여는 당연하다. 그러나 대통령이 부처수준의 정책결정에 자주, 그리고 깊이 관여하는 경우, 장관의 정책자율성은 크게 제한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통령과 장관 간에 이념적, 정책적 공감대가 강하고, 대통령과의 신임관계가 두터운 경우, 정책과정에서 장관의 입지는 크게 높아진다.
  그러나 장관은 실제로 대통령에 대한 접근이 제한되어 있다. 국무외희, 크고 작은 청와대행사나 관계장관회의 등을 통해 장관이 대통령과 대면하는 기회는 잦은 편이나, 실제로 ‘독대’(獨對) 등을 통하여 대통령과 자유로운 쌍방식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쉽지 않다. 그러므로 장관은 많은 경우, 청와대의 관계 수석(首席)의 매개를 통해 대통령의 뜻을 전해 듣고, 또 그를 통해 자신의 정책의지를 전달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 때문에 장관과 수석비서관 간의 정책적, 인간적 친화성, 그리고 일에 대한 교감이 무척 중요하다. 그러므로 가장 바람직하기는 장관과 수석이 규범적 동지가 되는 것이다. 반면, 장관과 수석간에 긴장과 갈등이 빚어지는 경우, 정책결정자로서 장관의 입장은 대단히 곤혹스러워진다.   
  교육부장관은 매우 비중 있는 장관이다. 특히 교육인적자원부가 부총리부처가 된 이후 더욱 그러하다. 그러기에 역대 대통령 중 여러 분이 <교육대통령>을 자처하지 않았던가. 만약 그러한 교육부장관이 대통령의 강력한 정치적, 정책적 지원을 받는다면, 그가 일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청와대는 물론 행정부 내의 다른 부처와의 관계에서, 그리고 여당의 전폭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부처내부에서도 강력한 권위를 행사할 수 있다. 국민의 정부시절,  이해찬 장관이 교원정년인하를 감행할 수 있었던 것도 대통령의 지원 없이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와 반대로 대통령이 교육부장관이 추진하는 일정 정책에 대해 반대하거나 유보적인 경우, 장관이 이를 무릅쓰고 초지를 관철한다는 일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간혹  정치적 혹은 이념적 목적에서 무리하게 장관의 전문적, 자율적 영역을 과도하게 침해하는 경우 양자간에는 심각한 갈등이 빚어질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대통령의 통치스타일이다. 대통령이 비서실 중심의 국정운영 방식을 취하는 경우, 상대적으로 정책과정에서 내각과 장관의 영향력은 약화되는데 반해, 내각중심의 체제를 구축하는 경우, 장관은 국정의 중심에 서게 된다. 역대 대통령은 때에 따라 친정체제로, 혹은 내각중심체제로, 또 어떤 때는 ‘이중 축(軸)’ 체제로 다양한 시스템을 구축하였으나, 대략 집권초기에는 힘이 내각에 실렸다가, 시간이 갈수록 청와대 비서실로 옮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대통령이 청와대비서실에 크게 의존하게 되면, 비서실은 ‘소(小) 내각화’ 내지 ‘권부화(權府化)’ 추세를 보이게 된다. 이미 조선조 때에도 자주 회자되던 , ‘판서가 승지만 못하다’는 얘기도 이런 데서 나온 말일 것이다.
  대체로 볼 때, 정책과정에서 장관의 정책자율성이 극대화되는 최적 조건은 i) 대통령의 통치스타일이 장관중심으로, 또 장관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방식으로 전개될 때, ii) 장관에 대한 대통령의 신임의 돈독할 때, iii) 장관의 정책비전 및 능력이 뛰어나고, 뚜렷한 정책 아젠다와 보좌시스템을 갖추고 있을 때, iii) 특히 고위관료들과의 정서적 공감대가 높을 때, 그리고 v) 장관이 비교적 장기 재임하여, 경륜과 일관성을 가지고 정책을 추진할 때이다.
  돌이켜 볼 때, 김영삼 대통령은 대부분의 경우 국무회의 주재를 국무총리에게 맡기고 큰 국사만 챙기는 편이었다. 대선전 <교육예산 GNP 5%>를 공약했고, 대통령 자문기구인 교육개혁위원회를 통하여 역사상 유례없는 야심찬 교육개혁을 추진하였지만, 실제로 장관이 하는 일에 별로 관여하지 않았다. 장관의 상대적 정책자율성은 매우 높은 편이었다. 당시 청와대 사회문화수석으로 교육개혁사업에 깊이 관여했던 박세일 수석은 필자와 과거 학계, 시민사회 등에서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기에 서로 호홉이 잘 맞았다. 그 때문에 청와대로부터 불필요한 외압이나 규제, 간섭을 받지 않았다.
  이에 비해 참여정부의 노무현 대통령은 주요 정책문제에 보다 많은 관심을 표명하는 편이었다. 특히 이념적 편향성이 강한 청와대 <386>비서진들과 대통령 자문기구인 교육혁신위원회는 평등주의적 관점에서 교육문제에 접근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얼마간의 갈등과 불협화음이 있었다. <교원평가>에 대해서도 청와대 측의 반향은 유보적이었고, 특히 <2008년 입시개혁안>의 경우, 수능 1등급을 <4%>로 정하려는 교육부 측과 <7%>를 고집하는 청와대 측과의 갈등은 매우 첨예한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청와대 측의 양보로 문제는 봉합되었으나 그 파장은 컸다. 그런 가운데 당시 청와대의 유관수석인 이원덕 수석은 주요 교육정책 및 인적자원정책 등에 관해 언제나 외롭게 필자와 교육부의 입장을 지지하고 후원했다.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막강한 청와대의 <386>의 숲에서 그의 목소리는 항상 작은 메아리로 남았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주요 정책문제들은 단일 행정기관의 관할영역에 배타적으로 속하기보다 여러 행정기관들의 관할영역에 중첩적으로 연계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장관의 역할수행에서 수평적, 수직적으로 연관된 유관기관들과의 협력과 조정이 매우 긴요하다. 예컨대 교육부의 주요 과제로 등장한 인적자원관리문제는 노동부를 비롯하여 상당수의 다른 부처와 연계된다. 따라서 정책관리 차원에서 이들 유관부처와의 정책조정은 필수적이다. 그런데 정책을 둘러싼 부처간의 정책조정은 대체로 단순한 기술적, 관리적 차원이 아닌 정치적 차원의 문제인 경우가 많다. 유관기관들이 기능적으로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협조보다는 경쟁, 갈등하는 양상을 보이는 경우가 보통이기 때문이다. 도한 여기서 빚어지는 갈등은 타협에 의해 해소되기보다는 상호간의 역학관계에 의해 종식될 가능성이 크다. 정책을 둘러싼 이들 관련부처간의 상호작용과 권력역학관계는 흔히 관료정치로 표현된다. 정부안에는 통상 행정부처간의 갈등을 조정하기 위한 공식적 기구들이 존재하지만, 이들에 의한 조정내용 역시 부처간의 기존의 권력적 역학관계를 투영하는 경우가 많다. 교육부는 공식적인 부처서열은 높으나, 예산이나 인사 등 실제로 다른 부처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을 별로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관료정치 과정에서 다른 부처들과 힘겹게 겨루는 경우가 많다.
  국회는 장관의 주요한 활동무대이다. 성공적인 장관은 법률의 제. 개정이나 정책질의 등 의회과정에서 그 빛을 발한다. 국회에서 장관의 상대역은 해당상임위원회인 교육위원회 및 이곳의 소속 의원들이다. 대체로 교육위원회 위원들은 학력이나 지적 세련미, 정책이해도가 다른 위원회 보다 높은 경우가 많고, 상대적으로 학계, 교육계 출신이 많다. 그러나 그들은 국회라는 무대에 서면 일차적으로 정치인이 되고, 그렇게 행세한다. 따라서 학자출신의 교육부장관이 상임위원회 정책토론과정에서 지적 논변과 논리적 설득을 꾀하게 되면, “여기가 세미나 장(場)이냐”고 질타하는 경우가 많다. 국회의 다른 상임위원회에 비해 교육위원회에서는 정파간의 이념적인 충돌이 빚어지는 경우가 무척 잦다. 참여정부하의 필자의 두 번째 장관시절, 특히 그러했다. 그 때문에 필자는 다른 글에서 “약 반수의 386 전사들과 또 다른 반수의 신자유주의 기수들 사이에서 절대고독을 반추할 때가 많았다”라고 기술한 바 있다.
  정책과정에서 언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정책을 입안하고 또 이를 성공적으로 실천하드라도, 언론이 아무런 관심을 표명하지 않거나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면 그 정책은 <죽은> 정책이 된다. 대체로 한국 언론에 내 비친 한국 교육의 모습은 매우 부정적이다. 한결같이 <교육실패>에 대한 질타가 주조(主調)이다. 언필칭 <교육위기>, <공교육 황폐화>, <교실붕괴>이고, 아예 스스럼없이 <교육망국>을 논하는 게 보통이다. 흔히 ‘장관과 언론과는 <불가근(不可近) 불가원(不可遠)>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게 정설이다. 그러나 언론의 이러한 부정적 교육관을 감안할 때, 교육부장관은 오히려 언론에 대해 적극적, 더 나아가 얼마간 공세적 접근을 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요즈음처럼 언론이 이념적으로 양분(兩分)되 있는 상황에서, 장관이 대(對) 언론 관계에서 미리 포기하고 손을 놓아버리면 교육정책은 표류할 수밖에 없다. 가능한 한 기자들에게 유관정보와 자료를 앞서서, 충분히 배표하고, 그들과 언제나 열린 대화를 하며, 수시로 정책토론을 벌려 설득해야 한다. 무엇보다 신뢰관계를 쌓는 것이 중요하다. 필자는 두 번째 임기 중 거의 매주 언론계, 학계, 시민사회의 10여만 정책고객들에게 교육현안의 내용과 일에 임하는 내 심경을 담은 이메일을 보냈다.
  교육부의 경우, 교직사회, 교육이익집단, 교육시민사회가 무수하고 또 막강하다. 각급 학교와 교장단, 시. 도 교육청, 사학법인, 양대 교직단체인 교총과 전교조, 그리고 각종의 다양한 교육시민단체들이 그것이다. 이들은 구체적 이해관계나 이념적 성격에 따라 주요 교육정책문제에 대해 사안별로 다양한 입장을 취한다. 교육부장관은 정책을 주도할 때, 이들 정책수요자들의 대응을 미리 예측해야 하며, 가능한 한 지지세력을 확대하고 이들과 폭넓은 연대를 해야 하며, 반대세력은 수렴과 설득을 통해 중립화하거나 반대의 첨예도를 약화시켜야 한다. 이들과의 일상적인 교감과 규범적 연대, 네트워크 형성 등이 교육부장관의 주요한 역할이다.
  장관의 정책결정 및 집행과정에서 실제로 가장 중요한 변수의 하나는 부처내부의 관료들의 지지와 협력이다. 장관은 정치와 행정의 연결고리로서, 행정 각 부처의 정책 활동을 지휘. 통제하게 된다. 그런데 성공적인 장관이 되기 위해서는 부처의 내부관리에 능숙해야 하며, 특히 직원들, 특히 고위 직업관료들의 지지와 협력을 얻어야 한다. 우리의 경우 장관의 자질의 하나로 <조직장악력>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한데, 이는 다분히 계층적 통제나 명령에 입각한 관료주의적 개념으로 그리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 보다는 장관은 자신의 정치적 시각과 계층적 권위를 고위관료들의 전문지식과 현실판단능력과 조화를 이루는데 힘쓰며, 관료들에게 더 많은 자율성과 참여기회를 부여하여 보다 건설적인 상호관계를 형성하는데 힘써야 될 것이다.
  교육부에 대한 세간의 평은 현실과 차이가 크다. 많은 이가 아직도 교육부 직원들의 학력이나 자질과 능력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필자도 입각 전에는 ‘교육부 대학지원국에는 대학출신이 거의 없다’는 식의 부정적 세평을 자주 들었다. 그러나 이는 실제와 크게 다르다. 현재 교육부 본부 직원 485명(기능직 제외) 중 52명이 박사이며, 석사학위 이상이 전체의 반을 훨씬 넘는다. 정부 부처 중 학력수준이 가장 높은 부처이다. 따라서 장관은 이들에 대해 위계적 접근보다 전문적 토론과 지적 대화와 설득을 꾀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다. 그런가 하면, 교육부 직원 구성을 보면, 일반직이 396명으로 약 8할에 가깝고, 교육전문직이 89명으로 전체의 18.4%에 달한다. 양 집단간에는 얼마간의 구조적 긴장과 갈등요소가 있다. 그런가 하면, 다른 부처와 달리 교육부의 고위 관료 중 압도적 다수가 서울대 사범대 출신으로 동질성이 높다. 따라서 부처 내에는 대학별 갈등은 두드러지지 않는 편이나, 얼마간의 지역적 갈등요인이 잠재해 있다. 장관의 부처관리에서 이러한 구조적 특성을 바르게 이해하고 이들 요소를 감안하지 않으면 안 된다.

V.
  장관은 소관영역에 관해 긴 호홉을 가지고 이루고자 하는 중장기적 비전을 가져야 한다. 다시 말해 정책목표, 정책의 우선순위 및 정책구도가 담긴 청사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장관의 철학과 미래상과 밀접히 연관된다. 거시적 정책관리자로서 장관은 단기적 조망아래서 일상적 정책관리에 임하는 고위관료와는 다른 점이 있어야 하며, 바로 그것이 비전이다.
   장관의 정책비전의 바탕이 되는 그의 철학은 무엇인가. 교육부장관의 교육철학은 무엇인가. 대체로 여러 나라의 교육개혁의 역사를 살펴보면 아래의 세 가지 이념적 관점을 근거로 하고 있다. 지.덕.체의 조화 내지 인성강화라는 교육의 본연의 목적을 강조하는 근본주의, 시장원리와 경쟁력을 강조하는 경제주의, 그리고 사회적 형평과 통합을 강조하는 평등주의가 그것이다. 따라서 이들 3자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가 장관의 교육철학의 관건이 된다. 필자의 기본 입장은 이들 세 가지 가치 중 어느 것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따라서 3자간의 관계설정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조합과 조화의 문제라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유아 및 초등교육의 경우, 근본주의적 접근을 우선으로 해야 되며, 중등교육, 즉 중.고교 교육에서는 평등주의와 경제주의를 조화롭게 배합하는데 역점을 두고, 대학교육에서는 경제주의에 우선적 가치를 부여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떠한가. 많은 이들은 적어도 수사(修辭)적 차원에서는 근본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실제로 실천적 차원에서 근본주의철학을 내면화하고, 이를 정책적으로 추진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교육당국이나 학교현장, 시민단체 모두가 그러하다. 오히려 쟁론의 초점은 경제주의와 평등주의간의 이념투쟁으로 집약된다. 경제주의자들은 격변하는 시대, 즉 세계화, 정보화, 지식사회화의 격류 속에서 국가생존과 발전을 기하기 위해서는 수월성(秀越性)교육에 치중해야 된다는 입장이고, 반면 평등주의자들은 교육이 부와 신분세습의 사회적 재생산기제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더 큰 교육기회의 평등과 대중교육의 내실화가 관건이라고 역설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념적 갈등이 워낙 치열해서 날이 갈수록 교조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양상이다.
  예컨대 이미 수십년간 쟁점화되어 있는 <고교평준화>문제만 해도 그렇다. ‘어떤 경우에도 평준화는 고수되어야 한다’라던가 ‘평준화는 절대로 해제되어야 한다’라는 극단적 대결양상이다. 그러나 실제로 평준화의 기본틀을 유지하면서, 그 안에서 수준별 교육, 선지원 후추첨, 학교별 특성화 프로그램의 강화, 특목고 운영개선, 영재교육 프로그램의 활성화 등을 통하여 다양화, 특성화, 자율화를 지속적으로 추구함으로써 내적 역동성과 경쟁력을 확보하는 노력에는 소홀한 게 현실이다. 필자의 소견에는 대중교육의 견실한 보편구조위에 수월성구조를 접목하는 접근, 다시 말해, 가능한 한 사회통합을 해치지 않으면서 경쟁력을 키우자는 것이다.  필자는 가능한 한 중도개혁적 입장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무엇보다 이념적으로 편향되지 않으면서, 장기적, 균형적 관점에서, 그리고 가능한 한 교육 인프라를 강화하는 맥락에서 교육개혁을 추진하려고 애썼다. 1997년 3월 초등영어를 도입할 때도, 동시에 교육부에국어교육자들을 주축으로 <국어교육발전위원회>를 출범시켜 영어교육의 격류 속에서 우리말과 글이 훼손되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필자의 이러한 교육철학은 두 차례에 걸친 장관직 수행에서 교육정책비전과 정책사례 속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주지하듯이 첫 장관시절, 문민정부의 교육개혁 패러다임과 개혁과제들은 당시 세계를 풍미하던 세계화와 민주화의 사조를 크게 반영하고 있었다. 따라서 크게 보아 경쟁력 강화에 치중한 신자유주의적 개혁사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필자는 교육개혁위원회가 제시하는 개혁과제를 선별적으로 수용하는 한편, 이와 별도로 제도권 교육의 그늘진 곳을 치유하고 사회적 형평을 제고하기 위해 교육복지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1996년 12월의 <교육복지 종합대책>이었다. 당시 필자가 세계화 추세에 부응하기 위해 역점을 두었던 대표적 프로젝트가 교육정보화 사업과 초등학교 영어도입이었고, 민주화 프로젝트가 학교운영위원회 도입이었다면, 교육복지 프로젝트 중 두드러진 것이 대안학교 지원사업과 특수교육강화 등이었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 장관재직시 가장 역점을 두었던 사업은 이러닝(e-learning)과 교원개혁이었다. 필자는 이들 두 사업은 한국 교육의 백년대계를 위해 필수적인 교육 인프라 구축 사업이라는 데 큰 의미를 부여했다. 따지고 보면, <EBS 수능방송>은 이미 첫 번째 장관시절 역점을 두었던 정책사업 인데, 이를 새 시대에 맞춰 인터넷 서비스로 까지 확대한 것이었다. 이른바 <인터넷 대란>에 대한 심각한 우려 속에 2004년 4월 1일, 10만 이상의 동시접속이 가능한 동영상 인터넷 서비스에 성공했다.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 필자는 2004년을 <e-러닝의 해>라고 선포하고, 아울러 사이버 가정학습에 박차를 가했다. e-러닝은 <사교육비 경감대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으나, 필자는 내심 이 사업이 교육기회의 평등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데 더 큰 의미를 부여했다.
  필자는 2004년 봄 그동안 금기시되었던 교원평가 문제를 들고 나왔다. 전교조 등 적잖은 저항의 목소리가 있었으나, 한국교육의 질을 획기적으로 제고하기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다는 게 내 오랜 지론이었다. 필자는  총체적 교원개혁을 위해서는 교원평가와 더불어 교원양성체제 및 교원연수체제 개혁이 유기적으로 연계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2004년 내내 이들 세 가지에 대한 집중적인 정책연구를 했다. 필자의 개획으로는 2005년 1월 <교원개혁>을 선포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2005년 정초에 교육 부총리직을 물러나게 되었다. 필자는 지금도 이념적 편향성이 적으면서, 현 단계 한국교육의 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e-러닝>과 <교원개혁>은 앞으로도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경우, 장관임기의 단기(短期)성 때문에 장관의 철학이나 비전이 정책적으로 실현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역대 교육부장관들은 눈앞에 산적한 현안문제들의 하중과 때 없이 불거지는 절박한 교육쟁점 들 때문에 설혹 중장기 비전을 갖고 있더라도 실제로 이를 정책적으로 실현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 때문에 단기성의 현안과 쟁점의 늪에 빠져 허덕이다가 그 임기를 다하는 것이 오히려 상례이다.

VI.
   장관의 일상은 무척 바쁘다. 더욱이 <3D> 중 최악의 경우라는 교육부장관의 경우 제대로 장관직에 헌신하자면 실제로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인간적 한계에 도전하는 느낌일 때가 많다. 필자의 경우, 매일 새벽 5시 이전에 기상해서 밤 12시 경에나 잠자리에 들었다. 온전히 5시간 취침하기가 쉽지 않았다. 참고로 1995년 말 처음 입각해서 첫 한 달간 내가 소화한 공식적 일정을 살펴보면 실로 가공할 만 하다. 그 한 달 동안 성탄절과 연말연시가 끼어있어 며칠 쉬었는데도 아래와 같이 엄청나게 바쁜 일정이었다. 대학총장 면담 16번,  교육관련단체장과의 면담, 오찬 및 만찬 11번, 교육계 주요 인사 및 산하단체장 면담 13번, 언론기관 공식 인터뷰 13번, 특강 3번, 당정회의 2번, 각종행사 및 간담회 9번, 기타 주요 언론기관, 유관 정부 주요 부서, 청와대 방문 10차례 등 이었다. 이는 주로 면담 및 공식행사 만을 추린 것이다. 직접 일과 연관하여 1주 한차례 국무회의를 비롯하여 하루가 멀다고 열리는 관계장관회의, 정책조정회의, 매주 두 차례의 실. 국장 회의와 수시로 열리는 부내 정책토론 등 숨쉴 틈 없는 일정이 이어진다. 그 뿐인가. 국회 회기 중에는 만사를 제치고 국회출석을 해야 되는데, 그러다 보면 장관일정은 더욱 쫓기게 된다. 대체로 장관은 매일 평균 두 시간 가량, 보고를 받고 정보를 나누고 결재를 하게 되는 데, 항상 장관 비서실에는 장관결재를 기다리는 국. 과장들이 줄을 선다. 그들은 장관의 시간 몇 분을 차지하기 위하여 치열한 다툼을 한다.
  장관의 일상이 이렇다 보니 사생활은 생각하기 어렵다. 필자는 전임 교육부장관 한 분으로부터 장관 일년을 하다보니 친구, 친지가 다 떨어져나갔다고 푸념을 하는 소리를 들었다. 시간에 쫓기다 보면, 외국서 모처럼 온 친구도 만나 보기는커녕 답전 한번 못하는 게 예사이다. 그런데, 교육부의 경우 장관만 이렇게 바쁜 게 아니다. 교육부는 정부 중앙청사에서 제일 늦은 시간까지 불이 켜져 있는 부처로 유명하다. 직원들도 일에 치여 산다.  
  장관의 이처럼 바쁜 일상에 접하는 이들은, 으레 “그렇게 바쁘면 도대체 정책을 구상할 시간이 있겠느냐?”고 묻는다. 실제로 장관이 정책연구를 위해, 따로 심사숙고할 시간적 여유를 갖기는 어렵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장관의 일상, 그 삶의 과정 자체가 모두 정책과 연관하며, 그 전 과정이 장관이 정책을 형성하는데 나름대로 기여한다. 장관은 그의 일상 속에서 다양한 정책환경과 접촉하고, 정보를 수집하며, 토론하고, 설득하며, 설득 당한다. 그러면서 각종 정책에 대한 장관의 생각이 여물고, 해답이 저 멀리 보인다. 국회 상임위에 출석하여 의원들 질의에 궁색한 답변을 하다가, 학교현장 방문에서 학부모의 분노에 찬 목소리를 접할 때, 기자들의 비아냥 속에서, 옛 제자가 어렵게 한 새벽 전화 내용에서 장관은 새로운 정책의 실마리를 얻고, 이미 조금씩 정책을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의 경험으로 볼 때, 정책은 장관의 일상 의 연속선상에서 움직이면서 점진적으로 숙성되는 것이지, 집중적이고 밀도 있는 심사숙고의 결과로, 혹은 섬광 같은 충격이나 직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장관은 그 직위 때문에 최고위 정책과정에 수시로 참여하게 되므로 차관이나 실. 국장에 비할 수 없는 고급정보를 많이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관은 자칫 다양한 연원으로부터 다수의 이질적 정보를 받기 보다는, 한정된 정보원(情報源)으로부터 동질적, 우호적 정보만을 접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 특히 장관은 임기가 일년을 넘게 되면, 소관 정책영역에 대해 스스로 꿰뚫고 있다고 자만하게 되고, 이렇게 되면 자칫 스스로 폐쇄회로에 갇히게 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장관은 가능한 한 다양한 정보를 다수의 이질적 정보 소스로부터 제공받아야 하며, 가능하면 그들과 지속적 의사소통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필자는 정보 및 의사소통을 위한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이메일을 효율적으로 이용했다. 교육부 전 직원을 포함하여 교육계, 언론계, 시민사회, 그리고 친지 등 수 많은 인사들에게 이메일을 통한 의사소통을 간곡하게 청했다. 이들은 수시로 신선한 정보를 제공했고, 정책 모니터링과 새로운 정책 제언을 수시로 해 주었다. 간혹 신랄한 정책비판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필자는 새벽 5시 이전에 기상하면, 곧바로 이메일을 켜고 내게 보내 준, 매일 30 내지 40통 정도의 살아있는 사연들을 접했다. 그리고는 그 중 약 반수에게는 빠른 속도로 극히 짤막한 답변을 보냈다. 고맙다는 인사가 많았으나, 오해가 있는 경우 해명을 시도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치열한 논박을 벌리기도 했다. 위기에 처해 있는 필자에게 용기를 불어 넣은 글도 많았다. 그러다보면, 잠간 사이에 약 40분의 시간이 흘러가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이 고마운 분들과의 새벽의 밀도 있는 <의사소통>이 필자를 열린 마음으로 항상 깨어있도록 만드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장관들, 특히 교육부장관은 임용과정부터 다른 장관보다 까다로운 절차를 거치는 게 상례이다. 특히 그의 과거 경력과 삶의 역정 속에서 도덕적으로 추호라도 하자가 있으면 임용되기 어렵다. 따라서 범법은 물론 재산형성, 사생활 등에 대한 <현장 조사>(field investigation)는 매우 엄격하다. 또한 재직기간 중에도 교육계의 수장으로서의 도덕적 권위에 조금이라도 흠집이 생기면, 가차 없이 교체되는 것이 상례이다. 학생들과 교육계에 미치는 파장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장관직을 그만 둔 후에도 훗날이 그리 편치 않다. 대부분의 교육정책의 정책효과는 매우 심대하고, 또 장기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퇴직 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가 관여했던 정책의 시행과정에서 부정적 문제가 생기면, 으레 그의 이름이 들먹여 져서 자칫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하는 경우도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한국의 교육부장관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그에게는 <우군>(友軍)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그를 배출한 대학사회 마저도 교육부를 이른바 <비호감>의 전형적 예로 간주한다. 그들에게 있어 교육부는 대학의 자율성을 훼손하는 관료주의의 화신이다. 초. 중. 고교의 각급학교나 교직사회도 자신들 일에 일일이 간섭하는 교육부를 달갑게 생각할리 없다. 학생, 학부모는 물론 언론, 시민사회, 그리고 여. 야를 막론하고 정치계에게도 교육부는 <공공의 적(敵)>이다. 교육부를 질타하면 전 국민이 대리만족을 느끼는 형국이다. 그러다 보니 성공적 교육부장관이 탄생하기란 애시 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VII.
  얼마 전 크게 논란이 되었던 <2008 입시개혁안>은 2004년 필자가 장관으로 있을 때 마련이 된 것이다. 그 기본취지는 고교교육의 중심축을 사교육시장에서 학교 안으로 옮겨 보자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수능 비중을 상대적으로 줄이고 내신비중을 높여 보려는 게 그 주안점이었다. 적지 않은 논란이 있었으나 당시 언론과 교육계는 대체로 그 취지를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
  필자는 입시안을 발표하면서 이것이 성공하기 위한 전제로서 두 가지 제도의 도입을 제시했다. 그 하나는 ‘교육발전협의회’이고, 다른 하나는 ‘입학사정관제’였다. 전자는 고교와 대학을 주축으로, 학부모, 시민사회, 언론, 그리고 교육부가 참여하는 협의체로서 구체적 입시개혁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추구하는 것이 그 설립목적이었다. 실제로 그간 우리나라에서는 대입시험이나 고교교육과정과 연관하여 양 당사자인 대학과 고교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협의하는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러다보니 대학은 우수학생선발에만 눈을 돌리고, 고교는 그보다 고교교육의 정상화에만 집착하는 형국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칫 공익을 외면하고 자신의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고교, 대학, 학부모, 교육부 등이 다 함께 모여 입시개혁안의 근본정신을 바탕으로 내신, 수능, 논술 등의 적정 비중이나, 내신의 신뢰도 강화방안, 논술의 출제수위, 고교 교육과정의 개혁 등을 함께 고민하고 심도 있게 협의해서 2008 입시를 위한 합리적인 가이드 라인을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이처럼 당사자간의 사회적 협의에 의해 공익에 걸 맞는 합의안을 마련하면, 훗날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서 교육부는 성의있는 조정자, 사회적 합의의 도출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를 위해 필자는 퇴임 며칠 전 서둘러서 20명으로 구성된 협의회를 출범시키고, 구체적인 운영방안도 제시했다. 내 생각으로는 이 협의체가 발족이후 2-3년 꾸준히 활동을 하게 되면, 당사자들 간의 사회적 신뢰도 형성되고, 2008년 입시안도 세련되게 다듬어 질뿐만 아니라, 고교 교육과정도 점진적으로 개선되리라 믿었다. 그러나 필자가 퇴임한 후 교육발전협의회는 곧바로 ‘식물화’ 과정을 거친다. 존재하되 가동하지 않은 것이다.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이후 논술파동, 내신 비중 파동이 연이어 터질 때, 필자는 실로 만감이 교차했다.
  입학사정관제도 불발이었다. 오늘날 이 나라의 대학들은 자기 대학에 필요한 양질의 학생들을 뽑기 위해 스스로 자료를 분석하고 연구하는 아무런 상시적인 노력을 경주하고 있지 않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오랫동안 쌓아 온 합리적인 발굴 노하우를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다만 나라와 고교가 학생들을 한 줄로 세워주면, 손쉽게 관료적 절차에 따라 이들을 걷어 갈 생각만 해 왔다. 그래서 적어도 우리나라의 유수한 대학들은 입학과정의 내실화와 고교교육과정의 정상화를 위해 학생충원문제를 전업으로 연구하는 전문 직제를 갖춰야 된다는 게 입학사정관제 도입의 취지였다. 그러나 이것 역시 교육부와 대학의 무관심 속에 성사되지 못했다.
  필자는 일이 이렇게 된 데는, 두 가지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고 본다. 하나는 교육부장관의 잦은 교체로 정책의 일관성이 유지되지 못하는 데 있다. 장관이 교체되면, 얼마 안가 실, 국장, 과장까지 바뀌는 게 상례이다. 그러다 보면 모든 게 흐트러진다. 물론 여기에는 정책의 일관성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 절차적 장치가 부족한 것도 문제가 된다. 이 문제도 함께 풀어야 한다. 그러나 우선 다급한 것은 장관의 잦은 교체를 삼가는 일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교육부와 교육부장관의 일하는 자세이다. 교육부는 이제 자신의 역할을 주재자, 규제자, 지시자로부터 조정자, 조력자, 유도자로 재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해 당사자들과의, 또 그들 간의 끊임없는 대화와 설득, 그리고 사회적 합의를 추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부장관은 대학총장에게 위계적 압력이나 제재를 통해 강제하고 명령하던 시절은 이미 지난 지 오래다는 사실을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잊을 만 하면 <교육부 페지론>이 대두된다. 필자는 극히 무책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을 원천적으로 막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교육부와 교육부장관이 스스로의 역할을 재인식하고 일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이제 문제를 스스로 풀기 보다는, 일이 되도록 유도하는 데 전념해야 한다. 다시 말해 <해결사>에서 <조정자>로 탈바꿈하는 일이다.
  이렇게 말하면, 필자에게 “그렇다면, 당신은?”이라고 물을 것이다. 필자도 재임시에는 <조정자>보다는 <해결사>로 나서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서도,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항상 뇌리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밖으로 나와 얼마간 거리를 두고 보면서 더 깊은 자기 성찰이 가능했다. 


VIII.
  처음부터 <준비된 장관>은 그리 흔치 않다. 어느 나라 장관이나 장관역할을 일하면서 배우게 된다. 헤크로(Heclo) 같은 학자의 분석으로는 장관이 업무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추고 정치. 행정적 감각을 제대로 터득 하는데는 대략 2년 가까운 기간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그의 말대로 라면, 우리나라 장관들은 일을 제대로 배우기도 전에 장관직을 물러나게 되는 셈이다. 필자의 경험으로는 취임 후 한 반년 지나면 얼마간 업무를 파악했다는 감이 들고, 일년이 지나면 주요 정책들의 본질적 이해가 가능하고 아울러 정부와 국회 등에서 한 해 동안 일어나는 일의 흐름의 두루 경험하게 되므로 제법 자신이 생겼다. 그러나 막상 장관이 뜻을 가지고 구상, 추진한 정책이 입법화되고, 그 정책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집행되어 얼마간의 수확을 거두려면 임기 2년으로도 모자란다. 그런 의미에서 로즈(R. Rose)는 장관이 정책을 구상해서 실천하자면 임기가 최소한 3년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시간적으로 장관직에 적당한 임기는 얼마인가를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얼마간 성공적으로 장관직을 수행하려면 적어도 2년 이상, 약 3년의 시간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게 통설이다. 또 실제로 서구의 대부분의 경우 장관의 평균 임기는 4년 이상이다.
  장관이 자주 바뀌면, 정책의 혼선, 부처의 내적 불안정 등 어려운 문제가 한두가지가 아니다. 어차피 장관 재임기간이 길지 않을 것을 예상하게 되면, 장관은 철학과 비전을 가지고 거시적, 장기적 정책을 구상, 기획하기 보다는 단기간에 가시적 성과를 창출할 수 있는 단기적이고, 충격적 정책과제를 선호하게 되고, 또 자칫 무리한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게 될 개연성이 크다. 뿐만 아니라, 장관의 잦은 교체는 내각을 ‘이방인(異邦人)들의 정부’( a government of strangers)로 만들어, 내각의 연대성과 팀워크를 해치며, 부처 할거주의를 심화시킨다. 이에 반해, 장관의 재임기간이 길게 되면, 자신의 소관분야에 대해 정책전문성을 심화시킬 수 있으며, 국내외의 다양한 정치 및 정책환경과의 익숙한 교섭을 통해 문제해결능력을 제고하고, 관료제에 대한 관리능력도 제고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장관을 너무 빈번하게 바꾼다. 민심수습책으로, 국면전환용으로, 혹은 정치적 보상을 위해 장관을 자주 바꾸는데, 거기에는 은연중에 <장관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자리> 내지 <누가해도 별 차이가 없는 자리>라는 임명권자의 철학부재도 작용한다.
  특히 교육부장관의 잦은 교체는 어떻게 보아도 정당화되기 어렵다. 그러나 다른 한편 교육부장관은 엄청난 격무이다. 워낙 조직이 방대하고, 일이 복잡하고 많기 때문에 장관의 건강이 아무리 좋아도 오랜 기간 그 자리에서 버티기는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 남짓의 장관임기로는 의미 있는 개혁사업을 제대로 출범시키기도 어렵다. 그러므로 적어도 2년 이상, 가능하면 3년가량의 임기를 보장하여야 한다. 그래서 장관이 교육개혁의 큰 그림을 그리고, 일정기간 개혁의지를 불태운 후 그 성과가 드러나는 것을 살펴 본 후, <이것이 내 작품입네>하며 그 자리를 차기 장관에게 물려주고 나오도록 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교육부장관은 정치적 충성심 보다는 전문성과 공익성을 중시하는 자리이다. 따라서 가능한 한 대통령은 비정치적인 인사를 임명하고, 아울러 그에게 적절한 권한위임과 자율성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이 할 일은 교육에 일일이 관여하기 보다는 깊은 관심과 정치적 지지로 장관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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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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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릿말

한국 사회의 오늘은 이념과잉, 이념갈등으로 충만하다. 정치권도, 시민사회도, 언론계도, 그리고 지식인의 담론구조도 모두 첨예한 이념대립으로 점철된다. 주요한 정책쟁점에 대해, 생각이 양극으로 쏠리고 양자는 날을 세우고 치열하게 부딪힌다. 우리 사회의 경우 이념갈등은 얼마간 세대간의 갈등과 맞물리면서 더욱 심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다보니 사회적 합의가 어렵고, 다툼은 있되, 해결되는 문제는 없다. 주지되듯이, 이념적 양극화가 심화되면, 정치는 교조화, 관념화되며, 정치주역들은 이념의 웅덩이에 빠져 격돌만을 일삼게 되며, 끝내 정치는 교착상태에 빠진다. 이렇게 되면 실사구시를 추구하는 정책생산에는 소홀하게 되고, 민생정치와 거리가 먼 불임(不姙)정치를 낳는다.
 

그런 가운데 날이 갈수록, <중도>가 설 자리는 좁아진다. <중도적 공론의 장>이 실종된 가운데 합의적 개혁정치도 표류한다. 이렇듯 교착정치가 장기화될 때 한국의 선진국의 문턱에서 좌절하게 된다. 더욱이 내년 대선을 겨냥해서 정치권의 이념대결은 더 거세질 전망이다.

이러한 현상은 정당간의 이념적 색채가 선명했던 유럽에서 최근 좌파와 우파간의 서로 경계가 희미해지고 양자가 중도에서 서로 만나 협력정치를 추구하는 양상과는 크게 차이가 난다. 그렇다면, 우리 정치의 이념적 양극화, 교조화, 그리고 여기서 배태되는 정치의 교착화와 불임정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 해답으로 여기서는 중도개혁 정치를 제의한다. 중도적 정치적 리더십을 바탕으로 사회적 합의에 바탕을 둔 체제개혁과 효율적 정책생산을 추구할 때, 한국정치는 <교착과 불임>정치의 악순환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논의를 위하여 이 글에서는 우선 <, 중도정치인가>를 논하고, 20세기 세계역사 속에서 중도통합적 리더십을 통하여 체제개혁에 성공한 몇 개의 사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어 두 차례에 걸친 교육부장관 체험을 바탕으로 필자가 시도한 교육영역에서의 중도 차원의 정책개혁을 소개하고자 한다. 다음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한국적 상황에서 중도개혁의 정치학이 성공하기 위한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이 논의과정에서 한국정치의 개혁을 염두에 두고 있으나, 필자의 경험을 제외한 모든 논의는 가능한 한 구체적인 현실정치과는 무관하게 진행하고자 한다.


2.
보수와 진보, 그리고 중도


흔히 이데올로기를 말할 때는 보수-진보 내지 좌-우라는 이분법적인 형태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대체로 보수는 자유, 시장, 경쟁, 개인주의, 자본, 경제성장과 효율성 등의 가치를 중시하는데 반해, 진보는 보다 평등, 국가, 사회적 통합, 집합주의, 노동, 분배와 연대성 등을 강조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전자는 자본주의적 가치지향인데 반해, 후자는 사회주의적 가치지향성이 강하다. 따라서 이러한 구분은 경제적/물질적 가치배분의 차원이며, 계급정치적 성격을 강하게 표출한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또 다른 차원의 보수와 진보의 이념적 갈등이 존재한다. 이는 보수와 진보의 이념갈등은 남북분단이라는 역사적 유산과 깊이 연관되며, 따라서 이념적 관점에 따라 대북(내지 대미)관계 및 통일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현격한 차이가 난다. 이른바 <남남 갈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세대에 따라 사회경제적으로는 보수적이지만 남북문제에서는 민족주의가 앞서는 집단도 존재한다. 그런가 하면, 보수는 대체로 전통과 기성의 질서를 중시하며 역사의 연속성을 중시한다. 반면 진보는 변화의 맥락에서 미래를 조망하며, 그런 의미에서 얼마간 역사의 단절도 불사한다. 따라서 보수와 진보의 구분은 변화의 완급에 따라 나누어 질 수도 있다. 물론 이데올로기를 분류할 때, 다른 여러 가지 차원을 사용하여 다차원적으로 나누는 경우가 적지 않으나, 여기서는 일단 위의 분류방식에 치중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이념적 갈등이 심화되면, 보수와 진보는 양극으로 치닫게 되며, 이렇게 되면 양측은 대화와 타협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추구하기 보다는 힘겨루기와 맞대결을 통해 <완승>을 겨냥한다. 한마디로 <선악게임>의 양상을 띠게 된다. 이들은 한결같이 <진리독점>을 꾀하며, 상대방을 <적과 동지>의 관계로 파악하고 극복의 대상으로 삼는다. 우리의 경우 보수-진보간의 갈등은 최근에 첨예하게 대립되는 북핵, 군사작통권 이양 등 남북문제뿐만 아니라, 우리의 주요한 생활영역 곳곳에서 표출된다. 한미 FTA 협상 등 ‘세계화’ 논쟁, 양극화, 성장-복지갈등, 노사문제, 부동산정책, 과거사 논박에서 고교평준화에 이르기까지 그 그림자가 미치지 않는 영역이 없다. 또 한번 불이 붙으면, 곧바로 양극화와 국론분열로 치닫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한국사회의 과도한 이념성은 정치과정에 참여하는 많은 이들의 뇌리 속에 교조와 환상, 거짓 신화와 허위의식, 그리고 정서의 과잉과 비()합리와 반()이성이 판을 치게 만든다. 이는 사회적 합의를 중시하는 민주주의 도정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여기서는 보수와 진보의 이념적 내용에 대해 깊게 논의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보수와 진보의 차이를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적 측면에서 본 다면, 대체로 보수는 자유에, 그리고 진보는 보다 평등에 기울어진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어차피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자유와 평등, 양자 중 그 어느 것도 가볍게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 어느 한 쪽의 절대가치를 주장하기는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역동적 정치과정 속에서 보수와 진보의 만남은 불가피하고, 거기서 그들은 자유와 평등의 변증법을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보수와 진보를 변화의 완급이라는 맥락에서 살펴보는 경우에도, 어차피 인류역사가 연속과 변화의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보수와 진보 그 어느 쪽도 절대 우위를 주장할 수는 없다. 따라서 양자는 어디에선가 서로 만나야 한다. 다만 그 나라 그 사회가 처한 상황에 따라 시계의 추가 양자 중 어느 한 쪽으로 더 기울어질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좌-우 어느 쪽으로의 급진적이며, 파괴적인 혁명이나 독재를 원하지 않는 이상, 보수와 진보는 이념적 스펙트럼의 가운데에서 서로 만나야 한다. 그런데 이 중간 영역을 비교적 폭넓게 형성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되면, 그 오른 쪽, 즉 중도 우파는 자유와 평등을 다 중시하되, 자유에 더 역점을 두는 세력이며, 변화의 속도는 보다 느린 편이다. 그 왼쪽, 즉 중도좌파는 양자를 다 중시하되, 평등가치에 더 비중을 두는 세력이며, 변화의 속도는 상대적으로 더 빠른 것을 추구한다. 이 비교적 폭넓은 중간 영역 안에서 보수와 진보가 바르게 만날 때, 적정한 정도의 이념적, 정책적 지향의 차이는 정치과정의 역동성과 생산성을 보장할 수 있다. 이러한 정치세계의 경우, 이념과 정책의 대결과 갈등은 있으나, 그 진폭이나 심도가 얼마간 절제된 가운데 전개된다. 이들 나라의 경우 실제로 중도우파와 중도좌파간의 이념적 거리는 아스라이 먼 것이 아니기 때문에, 때에 따라 양자 간의 대화와 타협, 제휴와 연립도 가능하며, 거기에는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체제개혁 차원의 중도통합적 문제해결도 가능하다. 따라서 서구의 선진 정치사회의 경우, 대부분의 정치적 상호작용은 중도우파와 중도좌파간의 연속성 안에서 이루어지며, 이를 통해 안정적 민주주의를 구가한다.


3.
중도 다시 살피기

<중도>라는 개념은 매우 모호한 개념(elusive concept)이다. 따라서 학문적으로 사용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중도라는 개념 자체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본질적 내용을 지닌 것도 아닐뿐더러, 역사적으로 볼 때 그것이 언제나 정당화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이 개념을 사용하는 데는 항상 어려움이 따른다. 예컨대 엄혹한 권위주의시대에는 정치가 거의 필연적으로 <민주 대 반민주>의 치열한 대결구조로 전개될 수 없으므로, 그 시대, 그 정치마당에서 이른바 <중도통합론>은 으레 권위주의 지배세력이 투입한 <트로이의 목마>였던 게 사실이다. 그 밖에도 전쟁이나 경제공황과 같은 <역사적 결단의 시간>에는 중도라는 정치공간이나 중도적 해결방식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가 하면, 시간에 따라 중도의 이념적 입지는 가변적이다. 예컨대 지난 복지국가 시대에는 이른바 스웨덴으로 표상되던, ‘제3의 길(The Third Way)’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양극에 대한 ‘제3의 대안’이라는 의미가 강했으나, 요즈음 블레어나 기든스가 말하는 ‘제3의 길’은 신자유주의와 구()사민주의를 초월하는 의미가 짙다. 그런가 하면, 중도는 그것이 가지는 균형, 중용, 온건의 함축성 때문에 본질적으로 좌나 우로 크게 치우친 정치세력이나 개인이 국민의 눈을 현혹하고, 스스로를 위장하기 위해 사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 밖에도 공공연하게 중도를 표방하면서, 실제로 이렇다 할 정책대안이 없거나 그 내용이 빈약하면, 중도가 수사(修辭)에 그치고 허구화(虛構化)될 가능성도 크다. 적지 않은 경우, 중도는 자칫, 양 극단으로부터 양비론(兩非論) 내지 양시론(兩是論)으로 비판받기가 일쑤이며, 그에 따라 불신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선진 여러 나라의 민주주의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면, 민주화가 공고화, 제도화 될수록, 좌와 우의 극단적 입장은 급속히 퇴조하고, 이들은 점차 정치과정에서 배제되거나, 주변화 된다. 또 만약 극단적 이념세력이 중도를 위장할 때, 그것은 비판적 공론화과정에서 어렵지 않게 그 마각이 드러나게 된다.

중도는 대체로 극단적 보수와 극단적 진보의 정 가운데에 있는 기하학적 중간점이라기보다는, 양극이 추구하는 이념적 가치지향을 두루 포용하면서, 양자를 변증법적으로 지양한 ‘제 3의 길’이다. 따라서 중도는 좌와 우 양 방향을 향해 마음을 열고,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존중하고 그들이 제시하는 정책대안에 관심을 기울인다. 따라서 <교조>에 집착하며, <진리독점> <완승>을 꾀하는 극단적 이데올로기에 비해 <대안모색>의 폭이 크고, <정책수단>이 다양하며, <대화, 타협> <제휴, 연립>을 통해 사회적 합의의 도출이 용이하다는 강점이 있다. 그리고 비록 <점진적>이나마 변화와 개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사회통합적 문제해결>을 추구하기가 용이하다는 점에서 엄청난 강점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진정한 <개혁적 중도>는 시대의 징표를 앞서서 읽고, 사회통합적 차원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개인, 집단 및 정치, 사회세력들을 포함한다. 그들은 이념적으로 자유와 평등의 변증법을 추구하되, 그 실천적 정책 내용은 그 나라와 그 시기의 국가적, 사회경제적 맥락에 따라 적실성 있게 구성해야 한다. 그들은 체제차원의 중도통합적 개혁을 추진할 수도 있고, 일정 정책영역에서 중도개혁을 추구할 수도 있다.


4. 20
세기 역사 속의 네 사람의 중도개혁가


여기서는 20세기 역사 속에서 체제개혁차원의 새로운 국가모형을 설계했던 네 사람의 중도개혁자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들은 한결 같이 국가위기 상황에서 중도통합적 리더십을 통하여 국가차원의 체제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영국형 복지국가의 청사진을 마련하여 20세기 복지국가시대를 연 베버리지(William H. Beveridge, 1979-1963), 분단전야의 오스트리아를 통일국가로 이끈 레너(Karl Renner, 1870-1950), 이른바 스웨덴 모형의 이론적, 실천적 대부 빅폴스(Ernst Wigforss, 1881-1977), 그리고 이른바 “네덜란드 기적”의 설계자 콕 (Wim Kok, 1938-)이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중도통합의 이념적 입지에 서서 시대의 징표를 바르게 읽고 장기적 조망에서 국가재편을 결행하는데 앞장을 섰던 체제설계자들이었다.


1)
베버리지

베버리지는 옥스퍼드 출신의 사회개혁가, 고위관료, 경제학자, 총장, 그리고 정치인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영국 최초의 settlement house Toynbee Hall의 사회복지사를 거쳐, 이미 1900년 초에는 the Morning Post의 대표적 사회문제 논평가로, 그리고 실업, 고용 및 사회보험의 최고 권위자로 부상하여, 로이드 조지 자유당 내각(1906-1914)을 도와 특히 노령연금과 국민보험법(National Insurance Act)의 입법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1차대전 이후 기사작위를 받았다. 식품성 차관 등 공직을 거쳐 1919년부터 1937년간 런던 경제대학 Lodon School of Economics의 총장으로 재직하면서, 이 대학을 세계적인 명문 사회과학대학으로 만들어 ‘제2의 창업자’의 명칭을 듣는다. 이후 그는 옥스퍼드 대학, 유니버시티 칼리지 학장, 왕립 경제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영국이 제 2차 대전의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전후 영국형 복지국가의 청사진을 마련한 베버리지 보고서였다. 1941 6, 포탄이 쉬지 않고 웨스터민스터 홀 근처에 떨어져 전황이 최악에 지경에 이르렀을 때, 영국은 전체 사회복지 프로그램의 혁명적 개혁을 준비하고 있었다. 국가존망의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희망의 불씨를 지피는 작업이었다. 거국내각의 노동당 출신 재건성 (Minister of Reconstruction) Arthur Greenwood은 하원의 만장일치의 결의를 거쳐 베버리지 경을 위원장으로 하는 Interdepartmental Committee on Social Insurance and Allied Services를 구성하고, 기존의 영국의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전반적으로 점검하고 개선책을 제안할 것을 청했다. 이 위원회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노조, 상공인, 소비자 조합, 시민단체로부터 훼이비안 소사이어티(Fabian Society)에 이르는 다양한 부류의 조직대표 및 인사들과 수 백회에 걸친 토론과 공청회를 거쳐 1942년 이른바 베버리지 보고서(원명은 Social Insurance and Allied Services)를 출간한다. 이 책은 절망의 심연에서 희망의 불빛을 갈구하던 영국국민에게 놀라운 호응을 얻어 베스트 셀러가 된다. 한때 그의 조교로 일을 도왔고 훗날 영국의 수상으로 노동당 내각을 이끈 Harold Wilson은 베버리지 보고서를 ‘혁명적 문건’이라고 집약, 표현하고 있다.

베버리지는 이 보고서에서 국민적 최소한(national minimum)의 개념을 표방하였는데, 이는 적어도 영국시민이면 언제나 일정수준의 기본적 삶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는 영국시민을 ‘5대 악’, 즉 궁핍, 질병, 무지, 불결 및 나태로부터 해방시키키 위해 공공부조 및 고전적 사회보험 프로그램을 넘어, 완전고용, 전국민적 무료 보건 및 재활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 가족수당 등의 제반 생활보장 장치를 마련하였다. 그 때문에 베버리지의 사회보장체제는 이른바 “요람에서 무덤까지”(from the 'cradle to the grave)라는 평을 받았다. 베버리지의 거대한 프로젝트는 단순히 노동계급이 아닌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고, 포괄적 사회보장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자유, 창조적 기업활동, 그리고 가족을 위한 개인의 책임을 보장하는데 세심한 관심을 기울였다. 따라서 그것은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전역에 놀라운 영향을 미쳤고, 전후 복지국가 시대를 여는 신호탄의 구실을 한다.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 직후 총선에서 승리한 애틀리(Clement Attlee)의 노동당 내각은 전후 함께 건설할 복지국가의 청사진인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종합적 사회보장체계의 개혁에 나선다. 베러리지 보고서는 가족수당법(1945), 국민보험법(1946), 재해보험법(1946), 국민부조법(1947), 아동법(1948) 1945-1948년에 이르는 총체적 사회개혁의 준거틀이 되었다.

베버리지 보고서를 근간으로 한 영국형 복지국가의 탄생은 역사상 미증유의 세계대전을 함께 치룬 동포들 간에 형성된 ‘한 배를 탔다’는 공동체 의식이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이러한 시대의 징표를 바로 읽은 베버리지의 경륜과 통찰력, 그리고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정책화할 수 있었던 그의 전문가적 지식과 분석능력,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사회적 합의를 추구하는 중도통합적 개혁의지와 정치적 설득력이 크게 기여했다. 그는 복지국가 팽창을 우려하는 보수진영을 향해, 그가 제시한 복지제도는 보건의료비, 연금 등의 노동비용을 회사대장에서 공공회계로 넘기고 보다 건강하고, 부유하며, 동기부여되고 생산적인 노동자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영국산업의 경쟁력을 증대시킬 수 있다고 설득했고, 그것이 주효했다.

그는 말년에 자유당에 가입, 1944년 자유당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어 얼마간 자유당 원내 지도자로 정치활동을 하였다. 이후 그는 남작 작위로 상원의원이 되었다. George & Wilding은 그를 가리켜 <소극적 집합주의자>(reluctant collectivist)로 명명하고, 그의 이념적 지향은 자본주의의 원활한 기능과 시장체계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복지국가의 필요성은 인정하나, 국가의 책임은 국민 최저수준의 보장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는 비교적 폭넓은 이념적 스펙트럼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그는 청년기에 훼이비안 사회주의자인 Webb부부로부터 사사를 받았고, 훼이비안 전통을 근간으로 하는 LSE의 총장으로 다년간 재직했다. 따라서 훼이비안 협회는 아직도 그를 자신들의 동지로 생각한다.더욱이 그의 보고서는 노동당에 의해 제도화의 길을 밟았다. 그런가 하면, 영국 자유민주당내에는 아직도 원내 써클로 <The Beveridge Group>이 존재하며, 그들은 끝까지 자유주의 전통을 지켰던 베버리지를 자유주의자로 기억하고 있다. -우 양측으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는 인물인 것이다.


2)
레너

오스트리아의 중립화 통일은 냉전시대에 기록된 가장 반() 냉전적 정치협상의 산물이다. 이 과정에서 분할 점령된 동서 냉전의 핵지대를 통일된 정치 공동체로 전환시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레너이다.

레너는 오스트리아의 학자, 정치인이다. 그는 구 제정 오스트리아의 가난한 농부의 열여덟번째 자식으로 태어나, 비엔나 대학 재학중 사회민주당에 입당한다. 법사회학자로서도 명성, 오스트로-마르크시즘의 대표적 우파 논객으로, 1907년 하원의원으로 시작, 1919~20년 오스트리아 제 1공화국(1918~1934) 초대총리가 되고, 1931~1933년 의회의장을 역임하였으나, 1934년 나치 침공이후 투옥되는 고초를 겪는다.

이 나라의 역사를 잠시 돌아보면, 1차 대전의 종언과 더불어 새로 탄생한 오스트리아 제 1 공화국은 출범 이후 줄곧 정체성 위기에 시달리면서, 극심한 정치적 내쟁(內爭)에 휘말린다. 특히 이념적 갈등이 심화되어 천주교 보수세력을 대표하는 ‘검은 진영’과 오스트로 마르크시즘을 표방하는 ‘붉은 진영’은 전국민을 둘로 가르고 극한적인 투쟁을 벌리다가 끝내 시민전쟁까지 일으키는 비극적 상황을 연출했다. 이후 1938년 이 나라는 나치 독일에 의해 합병되었고, 얼마 안가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 들어갔다.

전세가 연합국 측으로 기울기 시작하자 1943 11 1, ..영의 세 나라 외상들이 회동하여 모스크바 선언을 채택하였다. 이 선언에서 오스트리아는 히틀러의 야욕에 의해 희생된 피해자임을 명백히 하였으나, 아울러 전쟁참가의 책임을 얼마간 패전국과 함께 나눠야 한다는 유보적 문구가 첨가되었다. 이로써 모스크바 선언은 전후 오스트리아가 처하게 된 특수한 입장을 집약적으로 표현하였다. 이후 1945년 얄타 회담은 위의 모스크바 선언을 재확인하고, 이를 부연하여 ‘국민 중 모든 민주적 요소가 광범하게 대표되는 임시 정부의 수립’과 ‘자유선거의 조속한 실시’를 명문화하였다.

마침내 2차대전이 마지막 단계에 접어든 1945 4월 중순, 소련군이 연합군 중 가장 먼저 오스트리아 동부 지역에 진입, 수도 비엔나에 이르렀다. 그러자 수도권 지역을 중심으로 전전(戰前)의 제 1 공화국의 대표적 정치세력이었던 천주교 보수계와 사회주의계가 기존 조직의 재정비에 나섰고, 군소정치세력의 하나였던 공산당도 유리하게 전개되는 정치상황에 맞춰 독자적 세력구축에 나섰다. 이후 4 27일 레너와 온건 사회주의자들의 주도하에 위의 정치세력이 함께 참여하는 임시정부가 구성되고,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위의 3(국민당/OeVP, 사회당/SPOe 및 공산당/KPOe)간의 연립정부는 처음에는 소련에 의해서만 승인되었고, 그 정치적 영향력도 소련군 진주 지역에 한정되었다. 서방 연합군이 진입한 서부 및 남부 지역의 정치지도자들은 당초 레너 정부에 대하여 얼마간 회의적이었다. 같은 해 7월 연합국 4개국은 모스크바 선언에 준거하여 이른바 제 1차 통제 협약을 체결하고, 이에 의해 4개국 분할지역을 확정했다. 아울러 분할 통제의 정상기관으로 연합국 평의회가 구성되었다.

연합국의 분할 점령에도 불구하고 레너의 임시정부는 단일의 행정권 아래 오스트리아 전역을 통합시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소련 측의 본래 속셈은 사회주의자인 그를 내세워 오스트리아를 공산화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제1공화국 초기 수상직을 역임한 경륜을 바탕으로 여러 정치세력으로부터 폭넓은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던 레너는 소련의 속셈을 쉽게 간파하고 오스트리아를 공산화의 마수로부터 지키는데 온 힘을 쏟았다. 그는 한 때 적대세력이었던 천주교 보수계의 국민당과 더불어 공산당을 적절히 견제하면서, 임시정부 관할권 밖의 제주(諸州)의 정치지도자들과 감정이입을 높이는데 주력했다. 끝내 레너 정부의 관할권은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같은 해 10월 연합국 평의회는 이를 각서의 형식을 빌려 최종 승인했다. 레너의 주도로 연합국의 분할점령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 전역을 관할하는 단일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사실은, 이후 이 나라가 분단의 단애(斷崖)를 넘어 진정한 독립과 통일로 향하는 주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1945 11 25일 전후 최초의 자유 총선이 실시되었다. 여기서 보수계의 국민당은 85석을 자치했고, 사회당은 76석을 차지한 반면, 공산당은 예상을 훨씬 밑도는 4석을 얻는데 그쳤다. 위의 3당으로 구성된 연립내각에 수상에는 국민당의 휘글(L. Figl), 부수상에는 사회당의 쉐르프(A. Schaerf)가 선출되었다. 각료 구성을 보면, 국민당 8, 사회당 6, 무소속 2, 공산당 1명이었다. 소련의 간접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은 이후 쇠퇴 일로를 걸어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1947년 공산당은 내각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공산당의 탈퇴를 계기로, 국민. 사회 양대당을 축으로 하는 좌우 합작의 대연정(大聯政) 시대가 바야흐로 막을 열었다. 레너는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50년 그가 서거할 때 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전후 국민당과 사회당의 정치지도자들이 보여 준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들이 종래의 교조주의적 이데올로기의 멍에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고, 중도를 향하여 다가왔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레너는 살아있는 전범(典範)이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제1공화국 시대의 치욕적인 시민전쟁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히틀러의 폭정아래서 양 진영의 지도자들이 수용소에서 함께 체험한 고난으로부터 새로운 공감대와 교훈을 얻었다. 이들은 이제 극단적인 이념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벗어나 오스트리아의 완전 독립을 위해 서로 협력할 것은 다짐한 것이다.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어내는 슬기를 터득한 것이다.

당시 양당 지도자들은 종전 후 동구를 석권하면서 동진(東進)을 획책하는 공산주의의 위험한 그림자를 심각하게 인식하고, 이에 강력 대응하기 위해서는 자유민주주의를 일종의 상위 이데올로기로 승화시켜야 하겠다는 다짐을 분명히 하였다. 이에 따라, 사회당은 종래의 오스트로마르크시즘에서 크게 후퇴하여 온건한 민주사회주의를 표방하기 시작했고, 국민당 역시 종교와 밀착된 교조주의적 입장에서 벗어나 사회적 다원주의를 표방하는 국민정당으로 환골탈태하였다.

1946 2월 오스트리아의 완전독립을 위한 조약체결을 둘러싼 연합국간의 접촉이 시작되었으나, 처음부터 난항이었다. 바로 이즈음 노정객 레너는 오스트리아의 통일과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스위스식 중립화안이 바람직하다는 뜻을 피력하였다. 같은 해 10, 오스트리아 사회당은 새로운 정강을 발표하면서 중립화 방식을 지지하였다. 국민당도 조심스럽게 중립화안에 대한 선호를 내비쳤다. 그러나 국내 정당들의 의지가 연합국간의 협상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반영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1948 2월 이후 오스트리아를 둘러싼 국제환경은 크게 술렁이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사건은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화였고, 베를린 봉쇄 역시 연합국 협상 테이블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게 했다. 스탈린과 티토의 관계에도 금이갔다. 이러한 숨가쁜 상황 속에서 오스트리아는 주위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했다. 소련의 숱한 견제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는 결국 ‘마셜플랜’에 참여하고 서유럽의 경제통합을 추구하는 구주 경제협력 회의(OEEC)에 가입했다. 국토의 일부가 소련의 점령하에 있는 나라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정치적 결단이었다. 바야흐로 냉전질서가 정착되기 시작하는 국제적 상황 속에서 오스트리아는 이러한 일련의 조치를 통하여 이 나라가 이념적으로나, 경제정책적 차원에서 볼 때, 분명 서방문화권에 속하고 있음을 대외적으로 분명히 하였다. 이처럼 오스트리아는 그들이 추구하는 이념적 가치정향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소련의 지나친 욕심을 사전에 견제, 공산화 포기로 유도하고자 했다.

레너는 1950 12월 오스트리아의 완전독립과 통일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중립화라는 우회로를 거쳐 천신만고 끝에 1955 5 15, 비엔나의 유서 깊은 벨베데르 궁전에서 오스트리아의 외상 휘글과 연합국 4개국 외상들이 오스트리아 국가조약에 서명함으로써 10년의 각고 끝에 이 나라 국민의 숙원인 완전 독립을 성취하였다. 1955 6 7일 오스트리아 의회는 만장일치로 영세중립을 선포한다.

실로 이 나라는 국난의 위기를 맞아 가장 절박한 시기에 가장 적합한 지도자를 갖고 있었다. 위에서 밝혔듯이 당초의 소련의 점령군은 사회주의자 레너를 앞세워 임시 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이른바 ‘인민전선’으로 전환시켜 오스트리아 공산화의 전위대로 활용하려 했다. 그러나 레너는 이 기회를 오스트리아 전역에 걸치는 통일적 행정체제 구축과 정치 세력 간의 합의도를 높이는데 역이용했고, 그의 속내를 보수계와 서방연합군이 바르게 간파하고 그를 도왔던 것이다. 공산당은 중도적 정치공간에서 연립정부의 형태로 구축된 좌우합작 세력에 밀려 끝내 군소 정당으로 전락했고, 소련은 오스트리아 국내에 전초기지를 세우는데 실패하고 만 것이다.


3)
빅폴스

빅폴스(Wigforss)는 스웨덴의 언어학자, 경제학자이며, 1919~1952년간 하원의원, 1925~6, 1932~49년간 재무장관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운동 전개과정에서 주된 이론가이자 실천적 정치개혁가로서, 1932년 총선에서 복지국가 구상을 내세워 승리를 견인하고, 스웨덴이 1930년대 대공황으로부터의 회복하는데, 그리고 세계 제 2차대전의 난관을 극복하는데 크게 기여했는가 하면, 전후 스웨덴 복지국가의 초석을 놓는데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스웨덴 모형의 설계자로서 국제적으로는 Alba and Gunnar Myrdal 과 같은 명성을 얻지 못했으나, 국내적 영향력에 있어서는 오히려 그들을 능가했다.

1932년 총선에서 스웨덴 사회민주당은 43%의 득표율로 득승하여 한손(P. A. Hansson) 내각을 출범시켰다. 이로써 1976년까지 이르는 사민당의 장기집권 시대가 열린다. <인민의 집>(Folkhemmet)으로 비유되는 스웨덴 복지국가는 전국민을 대상으로 포괄적이며, 보편주의적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제도화하는데 앞장섰다. 그런가 하면 사민당은 Wigforss의 주도로 케인즈의 <일반이론> 보다 4년 앞서 이른바 ‘케인즈 없는 케인즈 주의’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며, 반경기적(counter-cyclical) 프로그램을 제도화했다. 그런 의미에서 미르달(G. Myrdal)은 그를 비록 그가 정규 경제학자가 아니었으나, 스톡호름 경제학파의 일원으로 간주하였다.

사민당은 농민당을 연정(聯政) 파트너로 끌어들여 이른바 <적녹동맹>(赤綠同盟)을 구축한다. 그런가 하면 1938년 스톡홀름 교외의 ‘살트쉬바덴’(Saltsjbaden)에서 노사간의 역사적 화해에 기초한 사회협약을 체결하여 노동시장위원회를 설치하고, 노사교섭의 절차, 해고와 임시해고 절차 등을 명문화하였다. 이로써 노사합의의 코포라티즘이 정책과정에 깊숙이 제도화 되었다. 이후 노총(LO)의 조직률이 급상승(1940년대 67%, 50년대 80%)하고, 노동쟁의 건수는 극소화된다.

Wigforss 1926년에 발표한 논문, ‘사회주의-도그마인가 작업가설인가’에서 사회주의는 도그마가 아니라 끊임없이 경험적으로 검증해야 할 ‘작업가설’로 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에 의하면, 사회주의로의 길은 작업가설에 기초하여 실험과 부분적 축적에 의하여 사회를 최적화(最適化)하면서 전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운동은 단순히 경험주의에 매몰되어서는 안 되며, 경험주의로부터 자유로운 구상력을 펼쳐 보이기 위해서는 유토피아적 성격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유토피아를 ‘잠정적 유토피아’ (provisional utopia)라고 일컬었다.

일찍이 Marquis Childs는 “스웨덴인의 슬기는 무엇보다 현실에 대처하기 위해 타협할 의지가 있는 것이다. 그들은 ‘체제’에 의해 구속되지 않고, 교조에 집착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궁극적 실용주의자(ultimate pragmatists)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 평가는 Wigforss에게도 대체로 타당하지만, 아주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비록 그것이 미래 경험에 맞춰 수정될 수 있는 것이기는 하나, 바람직한 미래사회에 대한 잠정적 스케치인 ‘잠정적 유토피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틸톤(Tim Tilton) Wigforss를 가리켜 스웨덴 사회민주주의의 이념적 기초를 마련한 장본인으로 평가하며, 사민주의의 목표로 ‘평등, 자유, 민주주의, 생활보장, 경제적 효율성과 연대성’을 들고 있다. 그는 평등과 자유를 함께 중시했고, 그런 맥락에서 부르조아 경제와 교조적 사회주의를 함께 극복하고자 노력했다. 그가 마르크스의 경제결정론과 혁명적 사회주의를 부정하면서 점진적 사회주의를 표방하였다는 점에서 그는 독일 사민주의 수정주의자 베른쉬타인(Eduard Bernsein)을 연상시킨다.

Wigforss는 생산의 효율성 증대라는 공동목표의 성취를 위하여 기업과의 협력을 강조했다. 그는 자본형성의 증대와 신 테크놀로지의 개발, 수출증대 및 경기침체의 극복 등을 위해 기업과의 토론을 중시하였으며, 복지 못지않게 경제성장에 깊은 관심을 피력하였다.

그는 1950년대에 들어 공직을 떠난 후에도 주요 정치적 쟁점에 관해 발언을 늦추지 않았다. 1950년대의 반핵운동을 앞장 서 지지하였고, 1962년 스웨덴의 핵무장 프로그램을 중단시키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이렇게 볼 때, 스웨덴 사민주의가 그토록 장기간에 걸쳐 그 나라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Wigforss의 유연하면서, 일관성 있는 중도통합적 개혁노선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이른바 스웨덴 모형의 설계자이자 실천가였다.


4)
빔 콕

콕은 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1973-1986), 하원의원 및 노동당대표(1986-1989)), 부수상 겸 재무장관(1989-1994), 수상(1994-2002) 등을 거치면서 <네덜란드의 기적>(Dutch Miracle)을 창출하는데 앞장선 인물이다.

네덜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견실한 경제성장을 이룩하여 왔으나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반 두 차례에 걸친 석유위기, 국제적인 경제침체, 사회보장비의 급증으로 인한 낮은 성장률, 재정적자의 누적, 실업률의 급증 등으로 이른바 ‘네덜란드 병(Dutch Disease)'을 앓아 유럽의 환자로 전락하였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1982 11 24, 노동조합총연맹과 경영자단체연합을 각각 대표하는 콕과 반 베인(Chris Van Vaen)이 사회적 대화와 타협을 통해 이른바 ‘바세나르 협약’(Wassenar Agreement)을 체결함으로써 조합주의 전통을 되살아나게 했고, 그 과정에서 임금안정과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경제회생과 고용창출에 합의한 것이다. 무엇보다 여기서 치솟는 실업률에 자극을 받은 네덜란드 노조가 산업의 수익성을 높이는 일이 노동시장 회복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확신을 갖고 임금인상 억제를 선택했다는 것은 괄목한 일이었다. 기업은 이에 대한 보상으로 노동시간을 40시간으로 단축하는 협상에 나서게 된 것이다. 정부는 복지제도의 효율화와 재교육을 통해 복지생활자의 취업을 돕고, 최저임금의 인하, 감세로 임금비용의 안정을 도모했다. ‘모든 협약의 어머니’로 불리우는 이 바세나르 협약의 성공은 그간의 지리한 정책교착상태를 일시에 깨는 위력을 발휘했다. 특히 노조 지도자들이 고용창출을 위해 임금인상을 억제하는 전략을 추진하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그런데 이 협약과정을 성사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장본인이 바로 빔 콕 위원장이었다.

바세나르 협약의 효과는 대단했다. 1985년까지 임금의 물가연동제가 거의 폐기되었고, 실질임금도 1982-85년에 9% 하락하면서 수출가격 경쟁력이 회복되었다. 1983-84년 대부분의 업종별 교섭에서 주당 근로시간을 38시간으로 단축했고, 일자리 나누기가 수용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 네덜란드 경제는 고율의 임금인상, 사회보장비, 특히 장애급여의 남용으로 다시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세계적인 불경기로 어려움은 가중되었다. 정부의 개입을 우려한 노사 양 당사자는 다시 1993 12월 ‘신 노선’(A New Course)라는 제목의 협약을 체결하였다. 노사가 자발적으로 임금안정과 노동시간 단축을 교환, 임금억제에 합의함으로써, 이전의 중앙 중심적 가이드라인으로부터 벗어나 교섭의 분권화와 노사 자율적 교섭기반을 확보("controlled decentralization')하였다. 신 노선은 임금억제-재정보상(세금감축)-일자리 재분배의 효과를 추구하였고, 이러한 노력은 네덜란드 경제를 다시 제 궤도에 올려놓았다.

3기 루버스(Ruud Lubbers) 내각(1989-94)은 기독교민주당과 노동당의 연립내각으로, 거기에는 빔 콕이 부수상 겸 재무부장관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1991년 여름 루버스 내각은 장애보험과 질병휴직에 따른 수당의 지급수준을 축소하고 수혜기준을 강화하는 일련의 복지개혁 정책을 발표하였다. 복지국가 감축을 겨냥한 이 개혁의 필요성은 널리 인정되고 있었으나, 개혁정책의 실행에는 엄청난 정치적 위험이 예견되었다. 그 해 9 17일 헤이그에서 발생한 총파업에는 거의 100만명에 달하는 근로자들이 가두시위에 참여, 네덜란드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파업사태를 기록하였다. 특히 노동당은 전통적으로 정치적 동맹관계에 있던 노동조합총연맹(FNV)와 견해차이로 심각한 분열을 야기시켰고, 노총의 노동당 지지도 역사상 가장 낮은 수준으로 하락했다. 당원의 1/3이 당을 떠났다. 빔 콕 당수도 거의 사퇴할 위기에 처했다.

1995 5월 총선에서 103석의 의석을 보유하고 있던 집권 내각인 기민당과 노동당 연립은 32개의 달하는 의석을 상실하여 총 150석 중 71석을 잃었다. 노동당은 1/4에 달하는 지지자를 잃어 12개의 의석을 상실하였고, 기민당은 1/3에 달하는 지지자를 상실, 20개의 의석을 잃었다. 기민당은 너무 많은 의석을 잃었기 때문에 노동당이 원내 제 1당이 되었고, 이렇게 해서 빔 콕의 제 1기 내각이 출범한다.

당시의 상황을 되돌아 볼 때 루버스-콕 연립정부는 복지축소라는 과감한 개혁의 추진을 위해 정권의 상실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피어슨(P. Pierson)의 말을 빌리면, 복지축소는 ‘불특정 다수로부터 불확실한 이득을 얻기 위해 특정 유권자계층에게 유형의 손실을 부여하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정책이다’라고 한다. 그런데 루버스-콕스 연립정부는 체제개혁을 위해 복지축소라는 정치적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1994년 총선 결과에 따라 네덜란드 정치역사상 일대 전환이 이루어졌다. 콕 수상이 이끄는 새 내각은 노동당(적색)과 자유당(청색), 그리고 중도파인 민주당이 참여하는 이른바 ‘보라색’ 연립(Purple" coalition)으로 구성되었다. 네덜란드 정치사상 언제나 적대관계에 있었던 노동당과 자유당이 민주당과 함께 한 배를 탔고, 수십년만에 처음으로 기민당이 배제된 내각이 구성된 것이다. 새로 출범한 콕 수상의 ‘보라색’ 연립은 정치적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 여지까지의 개혁작업을 조금도 늦추지 않고 계속 매진했다. 첫째는 효율성을 강화하고 도덕적 해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재정적 유인제도와 제한적인 경쟁체제를 복지부문에 도입한 것이다. 둘째는 복지체제의 집행과 관리에 참여하는 다양한 집단들의 권한과 책임에 대해 정부에 의한 재조정 작업이 과감히 추진되었다.

콕 내각은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면서 경제를 활성화시켜 일자리를 더 많이 창출하는데 주력하다. 고용증가의 핵심은 파트타임 노동과 파견근로제로서, 네덜란드는 총고용 대비 파트타임 노동의 비중이 세계 최고이다. 그는 아울러 정부의 주 역할은 파트타임 노동자의 불이익을 제거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했다. 1995년의 유연안정성 협약 및 1999년 유연안정성(flexicurity) 관련법이 제정된다. 이로써 기간제 고용 규제가 완화되고, 비정규노동에 대한 최저선 임금보장, 파견 노동자의 법적 지위가 강화되었다. 빔 콕는 1998년 총선에서도 득승, 역시 자유당, 민주당과 더불어 연립정부를 구성하여 2002년까지 제2기 콕 내각을 이끈다.

돌이켜 볼 때, 1990년대 루버스 내각과 콕 내각에 의해 수행된 대규모 사회정책 개혁은 더 이상 수혜자의 수나 수혜기준 및 자격요건에만 국한된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 개혁은 시장의 공급이라는 새로운 철학을 도입하고, 강제 사회보험 영역에도 경쟁을 도입한 것이다. 게다가 네덜란드 사회보장 역사상 신성불가침으로 인식되어온 유관단체에 의한 자율적 집행 및 관리 원칙에도 재조정의 칼날을 들이댄 것이다. 그런데 이 개혁의 전 과정에서 빔 콕은 항상 같이 했다. 복지확대를 금과옥조로 생각하는 노동당으로서 복지축소의 체제개혁은 실로 상상하기 어려운 정치적 모험이었으나, 콕는 정파의 이익을 뛰어 넘어 공공성의 차원에서 체제개혁의 기수가 된 것이다. 또 이 과정에서 노사정의 사회협약을 주도하고, 기민당, 자유당, 민주당 등 다양한 이념적 색체의 정치세력과 연립하여 중도통합적 체제개혁을 줄기차게시도하였다.

빔 콕이 수상으로 재임하는 동안, 네덜란드 경제는 상승가도를 달렸고, 그는 이른바 ‘폴더 모형’(Polder Model")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성공의 비결을 사회적 파트너들과의 협의에서 찾는다. 그는 ”사회적 파트너들과의 협의 없이도, 의회에서 다수표만 확보된다면 이러한 조치들은 충분히 단행할 수 있다“는 식의 정부의 태도가 일을 그르친다고 말한다.

콕은 정계은퇴 후 2003 4월 명예장관직(Minister of State: 종신 국가고문격, 현재 네덜란드에 단 7)을 수여받았다. 특히 그는 2004 4월에서 11월까지 리스본 전략( 2000년 유럽연합 15개국 정상들이 합의, 서약한 유럽연합의 장기 발전전략)의 아제다 검토 위원회의 책임을 맡아 전 유럽차원의 제언을 하는 등, 글로벌한 차원의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여기서 빔 콕과 더불어 함께 떠오르는 네덜란드 중도정치의 파트너가 바로 루버스(Luud Lubbers)이다. 루버스 (1939 년생) 전 수상은 콕와 거의 동년배로 바세나르 협약 당시 기민당 내각의 수상으로 이 역사적 협약의 성공을 도왔다. 1982년부터 1994년까지 3기에 걸쳐 장장 12년간 네덜란드 역사상 최장기간 동안 수상직을 맡아 네덜란드의 경제부흥에 크게 기여했고, 그의 제 3기 내각(1989-94) 당시 부수상인 콕와 더불어 복지축소의 대개혁을 함께 수행했다. 그는 특히 바세나르 협약 이후 공무원 임금과 복지예산을 삭감하는 등 긴축 정책을 펼쳐 재임기간 중 재정적자를 국내총생산(GDP) 10.1%에서 3.8%로 끌어내려, 경제의 군살을 뺐다. 은발에 후리후리한 외무까지 닮은꼴인 루버스는 선명한 수사(修辭)보다 실리를 추구하는 ‘협상의 대가“라는 점에서 콕와 유사한 점이 많다. 그러나 콕과 루버스의 인생행로는 대조적이다. 중도우익인 루버스는 부유한 사업가 집안출신으로 34세에 경제장관을 지냈는데 반해, 중도좌익인 콕는 노동운동에 정열적으로 투신하던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35세에 네덜란드 최대 노동단체인 ’네덜란드 노동조합총연맹‘(FNV)의 위원장이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중도통합적 체제개혁과정에서 네덜란드 모형을 설계하는 데 함께 힘을 모았다.

위의 네 사람의 중도통합적 체제개혁가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이들은 교조나 역사철학을 배격하고 한결같이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가졌다. 그러나 그들은 미래에 대한 뚜렷한 비전과 전략을 가졌고, 그것을 다른 정파나 국민이 신뢰했다. 그들은 관념적이기 보다, 문제해결적이었고, 실사구시의 차원에서 문제에 접근했다. 그들은 역사적인 시기에 놀라운 결단과 용기를 선 보였고, 공공선을 위해 사리와 당략을 초월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역사에 대한 책임을 통감했고 고뇌하는 지식인들이었다.


5.
중도개혁 지향의 교육정책


필자는 1995 12월부터 1997 8월까지, 그리고 1993 12월부터 1995 1월까지 두 번에 걸쳐 약 2 8개월에 걸쳐 교육부장관로 재직하였다. 그렇다면 중도개혁론자라고 스스로 자처하는 필자가 추구했던 정책지향은 어떤 것이었던가. 또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추구되었는가. 그 중 몇 가지를 여기서 소개하고자 한다.


1) 5.31
교육개혁 방안과 교육복지 프로그램 균형 잡기

문민정부의 <5.31 교육개혁방안>은 대체로 보아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개혁 패러다임이 내 세웠던 자율화, 수요자 중심, 다양화, 특성화, 경쟁, 선택 등의 개념이 신자유주의가 선호하는 상징어들이다. 문민정부가 추진했던 교육개혁 패러다임 형성에 영향을 주었던 또 하나의 흐름은 민주화였다. 신자유주의의 자유와 자율화의 사조는 참여와 자치를 강조하는 민주화와의 흐름과 비교적 큰 무리 없이 수용되었다. 필자는 이러한 세계화와 민주화지향의 프로그램 중에서 세 가지를 중시했다. 그것은 교육정보화와 초등학교 영어 교육, 그리고 학교운영위원회 제도였다. 세계화, 정보화의 큰 흐름 속에서 우리 교육의 내일을 조망할 때, 교육정보화의 추진과 초등영어의 도입은 빠를수록 좋겠다고 생각했고 학교의 민주화를 위해 학교운영위원회의 도입도 필요한 조치라고 생각했다.

문민정부의 대통령 자문기구인 교육개혁위원회가 내 놓은 120개의 교육개혁과제들은 대체로 매우 유용한 프로그램들인 게 사실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경쟁력 강화에 너무 치중된 느낌이 강했다. 실제로 협력, 공존능력 내지는 인간화를 위한 프로그램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래서 균형을 위해 필자는 재임시 이른바 <교육복지 종합대책>을 개발했다. 중도탈락자, 특수교육, 유아교육, 학습부진아, 귀국자녀대책 들이 그것들이었는데, 이는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자, 그리고 특별한 배려가 필요한 자>를 위한 프로그램이었다. 이 중 중도탈락자 대책은 이후 대안학교운동으로 발전하여 10년이 지난 오늘 비교적 큰 결실을 수확하고 있다.

중도적 관점은 21세기를 <경쟁과 협력>의 세기로 보고, 경쟁에 치우친 교육개혁방안을 교육복지 프로그램을 통해 보정하고, 균형을 잡아보려 노력했던 것이다.


2)
교육개혁을 위한 세 가지 접근: 시기별 조합

교육개혁을 위한 접근은 대체로 세 가지가 두드러진다. 본질주의적 접근, 경제주의적 접근, 그리고 평등주의적 접근이 그것이다. 본질주의적 접근은 교육의 본령(本領), 즉 그 본연의 목적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이 관점은 교육은 마땅히 사람다운 사람을 키우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지적 능력이나 학력의 신장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는 인성의 함양, 인격적 성숙이 더 강조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런가 하면 경제주의적 접근은 시장주의와 경쟁력강화를 강조하고, 엘리트 교육에 역점을 두는 입장이다. 따라서 이들은 교육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할 것을 요구하며, 경쟁을 통하여 우수한 인재를 보기에 선발하여 이들을 집중적으로 키워야 세계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한편 평등주의적 입장은 보다 대중적 관점에서 교육기회의 평등과 뒤진 자에 대한 정책적 배려, 그리고 교육을 통한 사회통합을 강조하는 관점이다.

많은 이들은 심정적으로는 본질주의적 접근의 필요성과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수사(修辭)적 차원에 그치는 경우가 많고, 정작 논란이 빚어지면 이념적으로 치우쳐 경제주의와 평등주의로 갈라지는 경우가 많다. 얼핏 보기에 교육은 가치중립적인 영역처럼 보이나, 이 영역만큼 첨예한 이데올로기 갈등이 도사리고 있는 부문도 없다. 따라서 고교평준화, 이른바 3()정책, 교육개방, 사립학교법 등 대부분의 교육쟁점을 둘러싸고 경제주의와 평등주의는 정면으로 격돌한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 필자는 교육에 대한 위의 세가지 관점, 즉 본질주의, 경제주의 및 평등주의는 모두 중요한 사회적 가치이며, 그 어느 것도 폄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 어느 것 하나를 온전히 취하고 다른 것을 통 채로 버릴 수는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교육개혁이 균형과 조화를 바탕으로 한다면, 해답은 이들 세 가지 가치 중 그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 간의 적절한 조화와 조합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교육단계 마다 이들 세 가치의 우선순위를 다르게 배열하여, 전체적으로 최상의 교육적 성과를 기대하는 것이 슬기로운 접근이라고 생각하다.

여기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유아 및 초등학교의 경우, 본질주의적 접근을 우선으로 해야 하며, 중등학교, 즉 중학교 및 고등학교 교육에서는 평등주의와 경제주의를 조화롭게 배화하는데 역점을 두고, 대학교육에 와서는 경제주의에 우선적 가치를 부여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떠한 접근이 가능할까. 중등학교 과정을 예로 할 때, 아직도 자주 쟁점화 되고 있는 고전적 주제가 이른바 <고교평준화>문제다. 이념적 지향성이 강한 평등주의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평준화는 (순수형태로) 고수되어야 한다>는 입장인데 반하여, 역시 이념편향적 경제주의자들은 <평준화는 절대로 해제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강력하게 표명한다. 그러나 이 모두가 교조적 망집(妄執)이지,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하는 정책적 접근이 아니다. 이에 대한 적절한 대답은 <평준화는 보완, 개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평준화의 틀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민의 다수가 아직도 이를 지지하고 있으며, 우리 사회 안에는 이 틀을 고수하려는 전투적 성향의 사회세력이 만만치 않다. 따라서 이념성이 강한 우파정권이 들어선다 해도, 또 사회전체가 상당한 희생을 치른다 해도, 그 틀을 일거에 바꾼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얘기가 아니다. 더욱이 경제주의자들이 언필칭 주장하듯이, 평준화 이후 우리 중등교육이 <하향 평준화>되었다는 실증적 논거가 그리 뚜렷하지 않다. 그렇다면, <평준화 해제>라는 혁명적인 꿈은 일단 접어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평준화의 틀과 그 내용을 그대로 갖고 갈 것인가.

아니다. 그렇지는 않다. 평준화의 기본 틀은 유지하되, 그 안에서 다양화, 특성화, 자율화를 지속적으로 추구함으로써 내적 역동성과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수준별 이동수업, 선지원 후추첨, 학교별 교육프로그램의 다양화, 특목고 등의 운영개선, 실업계 특성화, 영재교육 프로그램의 활성화 등이 그 주요한 보완책이다. 말하자면, 대중교육의 견실한 보편구조 위에 수월성 구조를 효과적으로 접목하자는 입장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가능한 한 사회통합을 해치지 않으면서 경쟁력을 키우자는 것이다.

2004 4월 출범한 EBS 수능방송, 인터넷 서비스도 실제로 경쟁력과 평등성을 함께 추구하는 프로그램이다. 그것은 나라가 앞장서서 수준별로, 최고급의 <수능과외>를 실시함으로써 고교생들의 전반적 학력신장과 사교육비 경감에 기여하려는 목적과 함께, 교육소외지역의 학생들에게 서울 강남에 못지않은 교육기회를 제공하려는 교육격차 해소의 뜻이 함께 담겨 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중등교육과정을 경제주의나 평등주의 어느 한 가지 접근법으로 다가간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따라서 양자의 장점을 보완할 수 있는 실용주의적 방도를 강도하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이다. 또 이렇게 접근하는 경우, 대부분의 교육쟁점은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재론해 보자. 경제주의자는 엘리트 중심 교육을 주창하고, 평등주의자들은 뒤진 계급의 교육기회 제고에 온 정성을 쏟는다. 그러면서 상대방의 입장은 절대 반대한다. 그런데 여기 대답은 한 가지다. 어렵지만, 두 가지 다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재도 세계적인 재목으로 키우고, 조금 능력이 뒤지는 친구는 그 수준에서 자신의 잠재력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정성껏 키워야 한다. 그렇게 되면, 경쟁력도 키우고 사회통합도 달성한다. 멀리, 크게 보면, 사회통합은 국가 경쟁력의 가장 큰 원천이다.

다시 말해 <저출산·고령화시대>에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모든 학습자의 발전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키울 때> 가능하다는 얘기다. 세계에서 이것을 제일 잘 하는 나라가 <핀란드>이다. 이 나라는 영재교육도 열심히 하고, 학습부진아 대책도 세계에서 가장 철저하다. 추호의 인력 유실을 허용하지 않는다. 500만 조금 넘는 인구를 가진 이 나라의 교육관은, 나라 안에 모든 인력이 사회에서 제 몫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 나라의 교육성과는 실로 괄목하다. OECD의 국제교육 비교연구(PISA) 결과에 따르면, 고교 1년생의 학업성취수준이 세계에서 1위이다. 이 나라의 대표적 글로벌 기업인 <노키아>가 세계에서 가장 큰 디지털 휴대전화 제조회사로 성장한 이유도 바로 이 나라 교육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도 이제 교육과 연관해서 이념적 갈등을 불식하자. 그리고 한국의 미래를 향해 자유주의자와 평등주의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영재교육과 대안교육을 함께 궁리하자. 그 길만이 살길이고, <성숙한 사회>로 가는 지름길이다.


3)
-러닝과 교원개혁: 인프라의 구축

필자는 2003년 말, 교육부총리로 취임하자마자 서둘러서 <사교육비경감대책>을 마련했는데, 그 핵심 사업은 ‘EBS 수능강의 및 인터넷 서비스’ 였다. 필자는 2004년 초 “올해는 e-러닝의 해”라고 선포했다. 2004 4 1. 세계적 수준의 정보통신 인프라와 e-러닝 준비도를 갖춘 우리나라는 10만명 이상이 동영상에 동시접속할 수 있는 세계적으로 유래없는 대규모 교육정보화 사업인 ‘EBS 수능강의 및 인터넷 서비스에 성공하였다. 이로써 e-러닝 대중화가 촉발되었다. 이후 e-러닝 대중화는 교육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측면에서 다양한 파급효과를 불러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e-러닝 활성화는 관련 산업군의 확장과 더불어 복합적이고 연쇄적인 산업, 경제 확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국의 e-러닝이 이 수준에 오른 것은 10년에 걸친 교육부문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대한 지속적 투자, EBS가 위성을 통한 수능방송을 통해 이 방면에 엄청난 경험과 실행능력을 갖춘 점, 에듀넷을 통한 교수 및 학습자료 개발 등에 힘입은 바가 컸다. 2004년 교육인적자원부는 ‘사이버 가정학습’의 활성화에 온갖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여기서 함께 강조해야 할 것은, e-러닝이 교육적으로 보다 큰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인터넷 윤리 교육이 함께 병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역시 2004년 초에 그간 금기시되어 왔던 ‘교원평가’ 문제를 들고 나왔다. 적잖은 저항의 목소리가 있었으나, 한국교원의 질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그 길 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나는 교원평가와 더불어 교원양성체제와 교원연수체제를 한 몫에 함께 개혁할 채비를 하였다. 위의 3자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계되며, 따라서 가능한 한 함께 풀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필자의 계획으로는 2005 1월 어느 때 쯤, 그 해를 ‘교원개혁의 해’라고 선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그에 앞서 부총리직을 물러나게 되었다.

e-러닝 발전과 교원평가는 우리 교육의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절호의 인푸라 구축 사업이다, 특히 위의 두 사업은 이념적으로 편향되지 않은 중도개혁적 노력으로, 한국교육의 백년대계를 위하여 더 할 나위 없이 필요한 조치라고 생각한다.


4) 2007
학년도의 입시개혁: 사회적 파트너십과 사회협약

2007학년도 입시개혁은 공교육강화를 위해 내신성적을 강화하고, 상대적으로 수능의 비중을 줄였다. 그러다 보니 몇몇 이른바 일류대학교들이 변별력을 이유로 방향타를 논술강화 쪽으로 돌리고 있어 많은 이들이 사교육의 폭발적 증가를 우려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점은 이미 2004년 말, 2007학년도 입시개혁을 발표할 당시 예견되었던 바였다. 그래서 입시안 발표시 이 문제의 적절한 조율을 위해 고등학교와 대학교간의 사회적 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고교와 대학 이외에 학부모, 시민사회, 교육부가 함께 참여하는 ‘교육발전협의회’를 창설했다. 고교와 대학 간에 대화의 통로가 없으면, 우수학생의 선발에 일차적 관심이 큰 대학과 그 보다는 고교교육의 정상화에 집착하는 고교들 간에는 이해관계가 어긋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협의체를 구성하여 당사자들 간에 깊은 대화와 타협을 통해 자율적으로 일종의 ‘사회협약’식의 문제해결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지난 2년간 교육인적자원부는 이 협의체를 가동하지 않았고, 그 결과 최근의 논술파동이 야기되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최근 대교협 등이 나서서 고교와 대학 간의 격의 없는 대화와 공동의 문제해결을 추진하고 있어 그 귀추가 주목된다. 사회적 파트너십의 형성과 사회협약의 체결은 실제로 중도개혁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중도통합 전략의 하나다.


6.
한국적 상황에서의 제언

그렇다면, 최근 한국정치사회에서 양극화현상이 크게 두드러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또 그것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 것인가. 거기에는 해방전후사를 비롯하여 분단이후 오늘까지의 한국 정치사에 점철된 온갖 갈등과 승패, 좌절과 아픔이 깊숙이 배어있으리라 본다. 지면상 그 역사를 되돌아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된 데는, 우선 i) 우리 사회 내에 기본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부족하고, ii) 사회적 합의형성을 위한 제도나 관행이 정착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iii) 주요 정치적 행위자들 간에 합의형성을 위한 의지와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따라서 이들 조건들을 하나하나 개선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간략히 논의하면 다음과 같다.


1)
기본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합의

역사를 되돌아보자. 1989년 바로 소련 및 동구에서 현실사회주의(real socialism)가 종언을 고하던 바로 그 시점에, 한국에서는 많은 젊은이들과 재야 세력들은 급진적 좌파 변혁사상과 주체사상에 열광했고, 이들 중 다수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극복을 겨냥했다. 역사의 폭발적 시점에서 <세계의 시계> <한국의 시계>가 극명하게 반대방향으로 달렸던 것이다. 그 사회의 기본적 가치에 대한 내면적 합의가 없으면, 정치적 다툼은 <체제-반체제>의 험악한 투쟁으로 변하고, 생산적 정책논쟁은 실종된다. 따라서 어떤 사회에서나 그 사회의 <체제적 가치>에 대한 내면화가 요구된다. 우리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체제가치는 ‘다원적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외에도 이념논쟁을 촉발시키는 몇 가지 정치적 상징성이 높은 사회가치들, 예컨대 통일이나 세계화와 한국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를 높이는 일이 중요하다.


(1)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제도

여기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제도는 대한민국의 기본적 헌법질서이다. 따라서 좌파든, 우파든, 보수든 진보든 우리 사회의 기본적 체제가치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명제에 대해서는 흔들림 없는 신뢰가 전제되어야 한다. 여기서 자유민주의는 정치적 자유, 선거경쟁, 대의제도, 복수정당체제 등을 근간으로 하는 다원적 민주주의 제도를 뜻한다. 따라서 실제로 그 틀 안에서 자유주의 정부가 등장할 것인가, 아니면 사민주의 정부가 출현할 것인가는 정치과정 내에서 국민적 선택에 의해 결정하게 된다. 자유시장경제의 개념은 여기서 폭넓게 이해될 필요가 있다. 그 안에는 미국과 영국과 같은 ‘비조정된’ 혹은 ‘협의의’ 자유시장경제( uncoordinated or liberal market economies/LMEs)일 수도 있고, 유럽의 많은 나라가 그렇듯이 이른바 ‘조정된 시장경제’(coordinated market economies/CMEs)일 수도 있다. 이렇듯 체제내적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폭넓게 이해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기본 틀에 대한 정치적 합의와 신뢰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도 우리사회 일각에서 현실사회주의나 북한 주체사상에 대한 망집이 남아있는 정치세력이 있다면 그 세력은 마땅히 반체제 세력으로 배격되어야할 것이다.


(2)
통일

아직도 이 땅에는 <어떤 통일>인가를 묻지 않는 통일지상주의자가 적지 않다. 이들은 대체로 통일, 민족, 자주 등의 상징을 앞세우며 통일이 모든 가치에 초월하는 선차적(先次的) 가치임을 강조한다. 이들은 자주 <통일세력> <반통일세력>으로 편을 가르고, <친북, 반미>가 진보성의 징표로 간주한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할 것은 통일과 민족화해, 협력이 아무리 중요하다해도, 우리의 체제가치가 보장될 수 없는, 혹은 그것이 심각하게 위협받는 통일이나 통일방안에는 합의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평화의 이름으로 한국의 정신적, 물질적으로 최소한의 안보기반을 무장해제하려는 시도나, 민족의 이름으로 북한체제를 과도하게 미화, 정당화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도 분명히 선을 그어야 할 것이다.


(3)
세계화와 한국

세계화에 대한 입장은 체제가치 차원은 아니다. 그러나 세계화에 대한 전폭적 지지나 무조건적 반대는 그리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세계화는 빛과 그림자를 함께 하고 있다. 따라서 자아준거적(自我準據的) 입장에서 세계화에 슬기롭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계화를 우리의 삶의 질을 높이는데 중요한 기회로 활용하되, 세계표준(global standards)과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조화시키고, 세계화의 과실이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고르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은 한국이 세계화의 흐름에 보다 주체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국가능력을 제고해야 한다는 점이다.


2)
민주적 제도와 관행의 정착

우리의 경우, 사회적 합의를 창출하기 위한 제도나 관행이 아직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형편이다. 그동안 많이 진척되었다고는 하나, 정치개혁이 아직도 중요한 현안이며, 정부형태 및 선거제도 등 기본적 정치제도에 대해서도 아직도 저마다 이견이 분분한 형편이다. 무엇보다 대화와 타협의 문화가 크게 부족하다. 서구의 몇몇 작은 나라들, 예를 들면 스위스나 벨지움, 네덜란드 등은 종교적, 계급적으로, 혹은 인종적으로 이질적이고 단편적인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비례대표제, 연립정부, 상호비토권 및 하위체제의 자율성 등의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통해 이른바 ‘협의민주주의’(consociational democracy)를 발전시켰다. 이들 나라들은 승자(勝者)가 모든 것을 독식하기보다는 다수의 소수자가 함께 참여하여 권력을 공유하고, 대화와 타협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는 정치양식을 제도화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의 경우, 지역별, 계층별 혹은 세대별 갈등이 있다고는 하나 이들 나라들에 비해 훨씬 동질적인 정치문화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보다 적실성 있는 정치제도의 탐색과 관행의 정착이 이루어지는 경우, 그리 불가능한 일만을 아닐 것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의 주요 생활영역 내에서 이익갈등을 해결하고, 사회적 합의를 촉진할 수 있는 제도 및 중재장치를 마련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주지하듯이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은 노.사간, 호은 노..정 간의 사회협약을 통해 임금조정, 사회복지 개혁, 노동시장의 유연화 등 사회경제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코포라티즘’(corporatism)을 발전시켰다. 일종의 계급타협이라고 할 수 있는 코포라티즘은 지난 세기 서구 산업사회의 위기관리와 복지국가 발전의 불가결의 요소로 간주되었다. 우리의 경우도 김대중 정부가 창설한 ‘노사정위원회’가 바로 그 예인데, ..정 모두 공공성 추구 노력의 부족으로 <부동성>(immobilism)의 위기에 허덕이고 있어 안타깝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더라도, 사회적 합의형성의 제도와 관행을 계속 만들고, 이를 정성스레 가꾸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서구 여러 나라의 경우,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노.사가, 혹은 보수와 진보가 함께 만나 큰 합의를 일궈낸다. 이미 위에서 언급한 1938년 스웨덴의 <살트쉐바덴>협약이나 1982년 네덜란드의 <바세나르>협약이 그런 예이다. 이들 여러나라들은 국가위기에 처하면, 이른바 <역사적 화해>를 통해 국난을 극복하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것이다.

중도개혁은 타협과 문제해결을 지향한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관심을 모으고 있는 모델로서 ‘유연보장’(柔軟保障, flexicurity)과 ‘사회투자국가’(the social investment state)가 있다. 이미 언급한 유연보장의 개념은 파트타임 등 불완전 고용을 허용함으로써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확보하는 일방, 이들에게 실업수당 등 사회급여를 보장하는 형식이다. 그런가 하면 사회투자국가는 신자유주의와 구()사민주의와 구별되는 이른바 ‘제 3의 길’로서, 교육, 직업훈련 등 인적자원에 대한 투자를 통하여 사회정책의 생산적 기능을 강화함으로써 경제성장과 사회정책간의 선순환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국가모형 개념이다. 이러한 시도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3)
중요 정치행위자의 의지와 노력

건강한 중도의 목소리를 키우며 사회적 합의문화를 정착시키는데 제도나 관행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주요 정치행위자들의 결의와 노력이다. 필자는 여기서 한 가지 가설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것은 실제로 우리 사회내의 다수의 시민은 가치지향으로 볼 때 좌-우로 펼쳐지는 이념적 스펙트럼의 중간지대에 많이 밀집해 있으리라는 추정이다. 그러나 이들은 양극화의 기세에 눌려, 또 그들을 정치수면위로 부상시켜 줄 조직화된 세력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목소리를 드러내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주요 정치행위자들이 중간지대로 다가와서, 이들 중간집단, 침묵하는 건강한 다수를 정치의 수면위로 끌어 올리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1)
대통령

한국의 정치과정에서 대통령의 위치는 실로 막강하다.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 논의가 끊이지 않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오늘날 과거의 제왕적 대통령의 권력은 많이 약화되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 합의형성과 중도개혁을 위해서는 대통령은 중심을 바르게 잡고, -우 어느 쪽으로도 편향되지 않는 균형된 마음의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 따라서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균심>(均心) <공심>(公心) 이다.


(2)
정치권

보수, 진보 모두 중도적 공론의 장으로 다가와야 한다. 그리고 자유와 평등의 변증법을 바르게 학습해야 한다. 진보진영의 경우, 이제 대한민국의 체제가치에 대한 신념을 보다 분명히 하고, 아직도 그 안에 잔존하고 있는 몰() 체제적 통일관이나, 지나친 대북 편향성 등을 떨쳐 버려야 한다. 보수진영의 경우, 기득권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무한신뢰에서 벗어나야 한다.


(3)
언론

오늘 한국의 경우, 언론매체들의 지나친 이념적 편향성은 합의문화 형성과 중도적 공론형성에 큰 장애가 되고 있다. 언론은 사실과 분석을 바탕으로 정론(正論)을 펼쳐야한다. 미디어의 정론회복 없이 중도개혁정치의 내일은 어둡기 그지없다. 편향적 언론은 담론구조의 양극화를 부추기고, 국론을 분열시킨다.


(4)
시민사회

민주화가 진척될수록 시민사회의 영향력은 강화된다. 바람직한 시민단체의 대() 정부관계는 사안에 따라 공공성의 차원에서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비판하는 <창조적 긴장관계>이다. 그러나 시민단체가 정치권력에 의해 동원되거나, 그와 야합할 때, 혹은 시민사회 내부에 첨예한 이념갈등이 빚어지는 경우, 공론형성의 기반은 오히려 약화된다. 무엇보다 시민운동의 <포퓨리즘>과의 접목은 자칫 <위임민주주의>(delegative democracy)의 위험을 가중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단체는 어떤 계층이나 집단 혹은 정파와의 이해관계를 넘어 민생문제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루는데 기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5)
지성계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롭고, 역사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는 <비판적 지성>의 존재는 중도통합적 개혁정치의 요람이다. 그런데 지성계도 양극화를 거듭하고 있다. 이념갈등 속에 장기적 역사조망과 공공선을 바탕으로 사회적 합의를 추구하는 지성계가 사라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암울했던 1950, 60년대에 한 줄기 빛이었던 <사상계>가 그립다.


(6)
국민

국민의 힘은 위대하다. 한국 민주주의정치 발전의 금자탑인 4.19혁명이나 1987 6월 항쟁의 성공도 국민의 힘이 그 뒷받침이 되었다. 스웨덴의 경우를 보면, 이 나라 사회민주당은 주기적으로 이념적 지향을 좌측으로 되돌리곤 했다. 1920, 1928년 총선에서 일부 산업의 국유화를, 1946, 1948년 총선에서는 계획경제를, 그리고 1976년 총선에서는 임노동자기금안을 제안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지지율의 급격한 하락을 가져 왔고, 1976년에는 아예 정권에서 밀어내기도 했다. 스웨덴 사민주의가 장기간 중도통합적 개혁정치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국민의 정치적 예지와 균형감각에 힘입은 바 크다. 이처럼 국민은 정치변화의 마지막 조정역을 맡고 있다.


7.
결론


이제 한국사회에서 보수와 진보는 마음의 창을 열고, <완승>을 기하기보다 <윈 윈 게임>을 겨냥하며 상생(相生)의 정치를 추구해야 한다. 그러자면 그들은 스스로 관념의 웅덩이에서 벗어나서 사회적 합의를 추구하며, 중간지대로 다가서야 한다. 이들이 움직이면 침묵하던 다수도 스스로 부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들은 과도한 거품을 거두고, 민생의 바다로 힘차게 나가야 한다.

필자는 세계 현대사 연구에서, 그리고 필자 자신의 정책운영과정에서 <중도에 서면 해답이 보인다>는 명제를 터득했다. 그것은 대단한 발견이 아니라 너무나 상식적인 결론이다. 그러나 이 상식적 명제는 이념정치를 민생정치로 옮겨 놓는 묘약이다. 정치가 이념싸움을 거두고 교착정치에서 벗어나면, 체제개혁도 정책개혁도 가능하게 된다. 정치가 이념의 웅덩이에 빠져 있는 한, 체제개혁은 고사하고 이렇다 할 정책논의 조차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

가장 바람직하기는 정치세력들이 스스로 중간지역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언론과 시민사회가 그것을 부추기며 함께 동행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 대선이 가까울수록 이념논쟁은 더욱 격화될 공산이 크고 불임정치는 더욱 심각한 지경에 이를 것이다. 그것이 안타깝다.

그렇다고 침묵했던 중도가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국민또한 대선에서 마지막 조정역을 맡을 수 있을지언정, 정치와 정책과정을 현장에서 주재하기는 어렵다.

결국 정치인들이 이제 제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이를 위해서 지식인과 언론이 더 이상 이념적 갈등을 악화시켜서는 안되며, 중도적 가치 속에서 중심을 잡고 정치인들을 중도의 길로 안내해야 한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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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행정학보』(한국행정학회, 제 41권 제3호, 2007 가을) 1-40면 수록

안병영, 정무권


I. 머리말
한국은 2차 대전 이후의 신생국가로서 짧은 국가형성기를 가졌다. 때문에 모든 분야에서 압축적이며 역동적인 역사적 경험을 거치면서, 최근에 다시 중요한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한국은 신생국가로서 최빈국의 지위에 있었으나, 급속한 산업화에 성공하여 이제 선진국대열의 다가섰다. 산업화의 성공에 이어, 한국은 정치적 민주화에 있어서도, 아직도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으나, 짧은 시간에 거둔 놀라운 성과에 대하여 전 세계가 주목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압축적인 산업화와 민주화는 한국사회에 역동적인 변화와 성과와 더불어 동시에 숱한 모순들을 한꺼번에 노정시켰고, 이는 우리 사회의 정체성과 미래 비젼에 심각한 위기감을 자아내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 행정의 관계에 상호 역할의 재정립과 새로운 거버넌스 체제를 만들어 내야하는 역사적 시점에 처해 있다.

산업화 40, 민주화 20, 최근 여러 학계에서는 그동안의 산업화와 민주화의 역사적 공과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자신의 영역의 시각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사실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공에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영역으로서 관료제와 행정의 역할이 컸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거시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에서 관료제와 행정의 역할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평가와 심층적인 연구는 매우 부족했다. 그런데 최근 신자유주의의 무차별 수용과정에서 시장을 과도하게 찬양하며 관료제와 행정을 모든 문제의 원인인양 비난의 대상으로 돌리면서, 행정학의 위상과 정체성을 흔들어 놓고 있다. 그동안 한국의 행정학계는 기술관리적 수준의 미시적 연구주제에 천착하면서, 거시적, 철학적, 이론적 논의에는 등한히 해왔다. 때문에 최근 우리는 새로운 역사적 전환점에 있으면서도 관료제와 행정의 역할에 대한 행정학계의 비젼제시가 크게 부족한 형편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 행정연구에서 민주주의, 평등과 같은 중요한 정치적 가치와 관료제와 행정이 상호 어떻게 연계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역으로 관료제와 행정의 관점에서 민주주의와 평등을 재해석하기 위한 새로운 연구의제는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본다. 본 논문은 일종의 문제제기의 수준에서 민주주의, 평등, 행정의 상호관계를 역사적, 비교론적으로 검토하고, 이어 이에 대한 주요 이론적 이슈를 정리한 후, 한국행정의 역사적 맥락에서 그 의미를 재해석해본다. 그리고 앞으로 한국행정 연구에서 다루어져야할 주요 연구과제들을 제기해본다.

 

II. 민주주의, 평등, 행정: 상호작용의 역사적 전개

민주주의와 평등이라는 중요한 정치적 이념과 연관하여 관료제의 역사적 전개를 살펴보려면 근대국가의 뿌리인 절대국가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후 현대국가의 발전과정은 크게 경제적으로 자본주의체제의 발전과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발전의 상호작용으로서 마침내 오늘의 복지국가의 단계로 이르게 된다. 그 과정에서 관료제는 현대국가의 정치, 경제, 사회를 관리하는 중추적 조직체로 성장하게 된다. 이 절에서는 이와 같은 세 가지 역사적 단계를 구별한 후, 민주주의와 평등의 맥락에서 관료제의 성장과 각 단계에서의 기능들을 정리해 본다.

 

1. 국민국가의 형성

대체로 서구 관료제는 중앙집권적 절대국가의 등장과 함께 급속히 발전하였다. 중상주의 정책을 표방했던 절대국가는 국가형성, 국민형성의 주역으로서 경제발전의 초석을 쌓는다. 그러나 절대주의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관료제화 경향은 반전(反轉)되지 않는다. 관료제는 베버가 설명했듯이, 자본주의 발전과 민주주의 성장에 따라 복잡해지는 현대사회를 관리하는 핵심적 조직체로서 그 기능을 의연히 수행하기 때문이다(Weber, 1958).

절대주의 관료제는 18세기 초 프러시아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발전하는데, 공직과 연관되는 각종 법규의 제정, 임용시험체계, 전문성의 신장 등이 이 때 이루어진다. 나폴레온에 의한 <法典化>(codification)도 관료제 발전에 기여했다. 이러한 현상은 베버가 말하는 합리화과정의 진전으로 볼 수 있는데, 그 과정에서 장기간 새로운 실적주의와 낡은 정실주의가 공존한다.

토크빌의 지적대로, 정부형태는 봉건주의에서 절대주의로, 그리고 다시 민주주의로 전개하였으나, 관료제는 계속 발전을 거듭하며, 국민들의 다양한 삶의 영역에 관여하게 된다(Etzioni-Halevy, 1983: 109). 대부분의 서구 국가의 경우, 관료제와 민주주의는 거의 동시적으로 발전해 왔으며, 관료제가 보다 강력해 짐에 따라 민주주의 제도도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게 통설이다. 19세기 서구를 풍미한 자유방임주의 사조는 국가관료제의 시장개입에 제한을 가했지만, 이 시기에도 관료제의 확산은 멈추지 않았다. 자코비는 이를역사의 아이러니라 칭한다(Jacobi, 1973: 55). 경제발전과 조세제도, 민족국가의 대두, 그리고 민주주의의 성장은 대체로 관료제의 빠른 확산에 기여한다(Etzioni-Halevy, 1983 116-127).

 

2. 민주주의의 성장

19세기 중반이후 서구 여러 나라에서는 민주화와 산업화가 크게 진전된다. 의회제도의 성숙, 참정권의 확대, 대중정당의 대두 등이 두드러지는 가운데, 일찍이 의회민주주의의 꽃을 핀 영국은 입법국가화를 통해, 전형적인 3권분립 체제인 미국의 경우에는잭손니안 민주주의의 인사엽관제를 통해 관료제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시도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가부장적, 관료국가 전통이 강한 독일 등 유럽 대륙국가들은 대체로 법치국가 내지 법치행정을 통해 관료제에 대한 통제를 가하나, 관료제의 제한적 특권성은 그대로 유지된다(박동서, 1999: 16-20).

서구 민주주의와 관료제의 발전은 복잡한 상호관계를 함축한다. 양자는 때로는 상보적인 관계를, 때로는 갈등관계를 시현하였다. 그러나 주요 국가의 경우, 국가관료제는 시간과 더불어 민주주의의 진전 속에서 합법적, 합리적인 베버리안 관료제의 특성을 내면화하는 과정을 밟는다. 19세기 후반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자본주의의 어두운 측면이 부각됨에 따라, 노사 및 계급갈등, 빈부격차 등 사회. 경제문제가 크게 부각된다. 이에 정부관료제는 자원과 계급이익의 재배분 문제와 대면하게 된다. 이러한 정부관료제의 역할 변화는 정치체제의 민주화, 그리고 이에 따른 시민들의 정치참여의 증진과 평등관의 확산에 따라 가속화된다.

 

3. 복지국가의 전개

20세기에 진입한 이후 국가관료제의 확대와 성장은 국가의 경제개입의 증대에서 비롯된 바 크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국가가 제공하는 복지와 복지관련 공공서비스의 확대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관료제의 발전은 복지국가화 과정과 밀접히 연관된다. 1930년대의 극심한 경제공황과 대량실업, 민주주의의 붕괴와 파시즘의 대두, 그리고 처절한 제2차 세계대전 등 암울한 시기에도 복지국가로의 역사적 도정은 계속되었다.

전후 서구세계는 케인지안 정치경제 패러다임을 바탕으로복지국가의 황금기’(1950년대-1970년대 초반)를 구가하며 이른바복지자본주의’(welfare capitalism)를 제도화한다. 관료제는 크게 팽창하고 국가예산은 급증한다. 이 시기동안 유럽의 주요국가에서는 중도좌파 정당인 사회민주당(내지 노동당)이 크게 부상하여 많은 나라에서 국정의 주도적 책임을 지면서 폭 넒은 사회복지 정책을 시행한다. 복지국가의 진전은 사회권의 확립, --정 간의 사회협약체제인 조합주의(corporatism)의 제도화를 가져 왔고, 사회계급 간 간격을 줄여 불평등의 감소와 계급갈등의 완화, 계급 간 연대형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마샬(T.H. Marshall)은 영국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난 300년간에 걸친 근대화 과정을 시민권의 확장으로 이해한다(Mashall, 1950). 그에 따르면, 서구사회는 18세기에 공민권, 19세기의 정치권, 그리고 20세기의 사회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복지국가는 바로 이러한 3세기에 걸쳐누적적으로 진척된 시민권의 확장의 산물인 것이다.

1970년대 중반, 서구 여러 나라들은 평균적으로 GDP의 약 1/4을 공공사회복지에 지출했다. 전후 복지자본주의는 바야흐로 공고화ㆍ성숙화의 단계에 진입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도한 복지지출로 인해 조세부담이 급증하는 가운데 국가재정은 만성적인 적자의 늪에 빠진다. 특히 브레튼우즈 체제가 붕괴되고 오일쇼크가 찾아들면서 서구 복지국가는 재정적 위기 국면에 몰린다. 재정 및 경제위기에서 비롯된 복지국가의 위기는 정치적, 이념적 위기를 겪었고, 특히 1980년대 이후 세계화의 격류와 후기산업주의의 진전, 그리고 저출산ㆍ고령화 등 인구론적 요인과 맞물리면서 더욱 가속화된다.

기존의 케인지안 정치경제 패러다임의 대안으로 급부상한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 이후 서구경제의 저성장과 고실업의 원인을 과도한 복지국가화와 이로 인한 공공부문의 확대에서 찾는다. 따라서 그 해법으로 민영화, 정부규제와 완화, 그리고 복지재정의 삭감을 요구한다. 그런가 하면 세계화의 진전에 따라 국가수준의 거버넌스는 약화되고, 그 대신 국제수준 및 지방수준의 거버넌스가 강화되고 있다. 또한 이들 흐름과 궤를 같이 하여신공공관리론’(NPM)이 크게 부상하고 있다. 이는 공공관료제에 대한 철저한 회의에서 출발하여 효율과 경쟁, 기업주의와 고객정향 등을 강조하며, 공적 영역의 지속적 감소와 공적 기능의 사적 영역으로의 이관을 주장한다. 신공공관리론은 아직도 많은 나라에서 관료제 개혁의 지배적 담론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제반 흐름 속에서 기존의 사회권, 국민적 연대, 사회적 평등의 이념은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다.

그러나 이후 여러 나라에서 진행된 복지국가 위기에 대한 대응과 재편과정을 살펴보면, 복지국가가 축소지향적으로 수렴하기 보다는 다원적 경로를 취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역사적으로 볼 때, 유럽대륙국가, 특히 개인이나 집단의 자유보다 집합적 이익을 강조하는 공화주의적 전통(republican tradition)을 가진 나라들은 공익의 관점에서 복지관료제의 감축에 대해 유보적이다(Suleiman, 2003: Ch.7).

1990년대 중반 이후 서구 복지국가의 재편 패러다임으로사회투자국가’(Social Investment State)개념이 부상하고 있다. 이는 영국의 토니 불레어 노동당 정부의 3의 길노선이 천명된 이후 서구 세계에 넓게 확산된 새 사회정책 사조로서, 탈규제 위주의 신자유주의와 평등 추구의 전후 복지국가(舊 사민주의) 간의 3의 길로 이해된다. 사회투자국가 개념은 사회지출을 낭비와 의존의 원천이 아니라, 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는 인적자본에의 투자로 인식하고,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의 선순환구조를 전제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복지관료제의 감축을 추구하는 신자유주의적 국가재편과는 맥을 달리 한다.

 

4. 한국적 맥락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서구세계를 예로 할 때, 국가관료제는 국가형성 및 국민형성, 산업화, 민주화, 복지화의 주역으로서 체제 발전을 견인했다. 민주주의와 평등의 맥락에서 볼 때, 관료제는 18, 19세기까지는 주로 민주주의와, 그리고 20세기 이후에는 평등의 문제와 깊이 연관되었다. 이렇게 볼 때, 서구 관료제는 민주화의 동력을 바탕으로 복지국가의 도정을 밟았고, 최근 그 조정과정에 처해 있다 하겠다. 나라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으나 그간의 오랜 역사적 과정 속에서 서구 관료제는 민주주의를 일정 정도 이상 내면화했고, 그런 의미에서 이들 나라들은 확립된 민주주의 국가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 나라의 경우, 정치적 민주주의와 행정민주주의간의 수위 격차가 적다. 그러한 점에서 민주주의와 평등추구의 고단한 역사 없이 베버리안 관료제를 구축한 동북아의 발전국가와 차이가 난다.

반면에,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후발 산업화 국가는 산업화, 민주화, 복지화의 맥락에서 볼 때 모든 측면에서 후발국가들이다. 이들 후발 산업화 국가들은 산업화, 민주화, 복지화가 장기적,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서구화 달리 시간적으로 매우 압축적, 역동적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들 국가들은 단계적으로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고, 그에 상응하는 가치를 하나하나 내면화되면서 점진적으로 발전된 것이 아니라, 서구 선진국들이 여러 시대에 걸쳐 경험했던 제반 문제들을 한꺼번에 대면하고 동시에 해결해야 했다. 때문에 발전의 단계도 압축적, 중첩적으로 전개되었고, 가치의 내면화, 제도화 수준도 낮거나 미완(未完)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서구 선진국과는 발전의 시간(timing)과 경로(pathway)에서 다른 맥락을 가졌다.

일본은 서구보다는 늦었지만, 동아시아 국가 제2차 세계대전이후 국가관료제를 주축으로 경이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하였다. 이후 일본의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유형을 본받은 한국과 대만 등 동아시아 NICs 국가들은 국가관료제와 경제발전, 그리고 민주주의 간에 새로운 유형을 창출했다. 이들 나라들, 특히 한국의 경우를 보면, 사회적 이해관계와 압력으로부터 차단된 유능하고 자율적인 경제관료제를 주축으로 금융부문의 엄격한 통제, 산업화과정의 전략적 기획과 조정 등을 통하여 급속한 산업화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한국형 베버리안 관료제의 성공의 배후에는 그것을 비호하고 강력히 지원했던 고도로 권위주의적인 유신체제가 있었다. 그 결과 권위주의적 지배체제, 국가-기업 유착, 부패 및 반노동. 반분배 이데올로기, 시민사회의 약화 등은 이후 한국 발전국가의 제도적 유산으로 남는다. 한국형 발전관료제는 경이적 경제발전으로 신화를 남겼으나, 민주화, 평등화의 맥락에서는 치유하기 어려운 엄청난 결손을 빚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도 국가형성 및 산업화과정에서 형성된 강력하고 유능한 베버리안 관료제는 훗날 안정된 민주화의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된다 (Suleiman, 2003: 316). 이후 한국의 발전국가는 민주주의로의 이행과정 속에서 반노동, 반분배 이데올로기를 점진적으로 수정하면서, 뒤늦게 복지국가의 길로 다가선다. 이러한 압축적 성장과정에서 나타나는 제반 문제들의 정확한 이해와 바른 인식이 오늘날 급격한 환경변화에따른 대응양식을 선택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복지국가 위기에 대한 서구 여러 나라의 제도적, 정책적 대응 방식은 나라마다 사회문화적 유산, 정치제도의 특징, 복지제도 전개의 경로 등에 따라 비교적 다원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겠다. 그러나 민주화 후발국으로 뒤늦게 복지화의 길로 들어섰다가, 세계화, 후기산업화의 태풍을 맞은 한국 등 발전국가에 비해 형편은 훨씬 낳은 쪽이다. 서구의 경우도 많은 나라가 오늘날 시대정신 인양 엄습하는 신자유주의신공공관리론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를보편적 혁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대체로 유럽의 선진국가들은 성숙한 민주주의와 복지국가를 바탕으로 민주주의와 평등의 이념을 체제내적 가치로 내면화한 이후에 신자유주의의 태풍을 맞았기 때문에, 대체로 NPM을 선별적, 제한적으로 수용하는 여유가 있고, 시장의 역동성을 중시하나 사회정의와 평등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는다. 따라서 대부분 나라는 복지관료제를 해체, 감축하기 보다는 얼마간의 재편 내지 재조정 하는데 그치고 있다.

그렇다면, 서구와 같은 점진적 역사적 과정이 없었고,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라는 격류 속에서 민주주의와 복지국가를 동시에 이룩해야 하는 한국의 경우,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그것이 우리가 안고 있는 시대적 과제가 된다.

 

III. 이론적 검토

 

1. 지적 기원으로서의 베버와 마르크스

민주주의, 평등, 그리고 국가관료제와 연관하여 이론적으로 후세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학자는 베버와 마르크스이다. 두 사람은 다 같이 근대산업사회의 태동과 그 전개과정을 목도했고, 관료제의 전개와 연관하여 미래사회에 대한 통찰력 있는 조망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민주주의와 평등에 대해 대조적인 관점과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현대지성사 속에 두개의 가장 괄목할 만한 물줄기를 형성한 학자들이다.

베버는 이념적으로 자유주의적, 엘리트주의적 관점에 서 있던 학자이다. 반면에 마르크스는 주지되듯이 체제변혁을 추구했던 프로레타리안 사회주의적 입장의 사상가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념적 관점의 차이는 관료제에 대한 이들의 이해와 관심, 그리고 그 극복과 연관되는 모든 사유과정을 관통한다 하겠다. 이 글의 주제와 연관할 때, 베버는 보다 민주주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데 비해, 마르크스는 평등의 문제에 천착했다.

대체로 베버는 <근대화>라는 역사적, 거시적 과정 속에서 관료제를 조망한데 비해, 마르크스는 <계급지배> <계급갈등>이라는 폭넓은 이론의 틀과 세계사적 전개과정 속에서 관료제를 설명하고 있다(안병영, 1994: 8). 이들은 비록 관점은 다를지언정 관료제를 역사적ㆍ거시적 과정 속에서 그것이 수행하는 사회적 기능을 중심으로 이해하려는 입장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관료제에 접근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베버는 다분히 정치사회학적 접근과 조직사회학적 접근을 함께 사용하고 있는데 반해, 마르크스는 다분히 정치경제학적 접근으로 일관하고 있다(Beetham, 1987: 57-87).

주지되듯이 베버는 관료제 이론의 초석을 마련한 학자이다. 그는 관료제의 <합리성>에 크게 천착했으나, 그에 못지않게 관료권의 팽대와 여기서 비롯되는 <관료제의 자율성>(autonomy of bureaucracy)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다. 그의 관료제의 이념형은 이후 적지 않은 논쟁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이러한 논박과정에서 다양한 모습의 현대적 탈관료제이론의 생성ㆍ발전한다. 따라서 다소 역설적이기는 하나, 베버 이후 관료제 내지 탈관료제 이론의 대부분은 지적으로 베버의 극복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사실이다(안병영, 1994: 9).

한편 마르크스가 관료제를 분석하는 관점은 한마디로 노동계급의 관점이며, 그의 주된 관심은 자본주의적 생산체계 내에서의 노동계급의 종속의 관점이다. 이 종속은 일차적으로 자본자체에 대한 종속이며, 이차적으로 국가관료제 또는 기업의 특정 행정구조에 대한 종속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마르크스는 관료제의 극복을 후()계급사회에서 행정구조를 재구조화하는데서 찾는다.

베버가 중시하는 사회적 가치는 단연 자유이다. 이와 더불어 그는 사회적으로 창조적 역할을 하는 걸출한 예외적 개인의 활동영역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자유민주주의 맥락에서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자이며 엘리트주의자이다. 그는 보통선거의 확대와 정당정치의 출현은 합리적 관료제의 성장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이러한 근대 관료제의 성장과 관료권의 팽대로 인해 이들 귀중한 가치들이 위협당하고 있다고 믿었다. 이에 대한 민주주의와 관료제의 딜레마에서 민주주의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관료제는 적절히 통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베버는 자본주의 사회의 불평등의 문제가 자유민주주의와 관료제 통제만으로 해결되기 어렵고 경제민주화도 필요하다는 것을 경시하였다.

베버가 자유를 강조하는 자유민주주의자라면, 마르크스는 궁극적으로 <계급 없는 사회>를 표방함으로써 평등을 중심가치로 앞세웠다. 그러나 그는 자유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평등의 실현이 인간자유의 궁극적 조건으로 보았다. 그는 자유주의적 정치교리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자유시장만을 옹호함으로써 자유를 소수자에게 효과적으로 한정시키고 있다고 비난하며, “평등에 중심을 두는 자유개념만이, 모든 사람의 평등한 자유를 구상하는 자유개념만이, 자기 역사를 형성하는데 필요한 힘을 인간에게 회복시켜 줄 수 있다”(Held, 1996: 122)고 주장했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에 있어 자유는 궁극적으로 평등사회의 구현, 즉 사회계급의 붕괴와 이에 따른 모든 형태의 계급권력의 페기에 의해 확립될 수 있는 사회가치이다. 그는 산업사회에서의 <소외>의 연원을 사적 소유, 분업화 및 인간노동의 상품화 등에서 찾았으므로 결국 이 쟁점은 자본주의체제의 극복이라는 본질적 문제로 환원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베버가 강조한 관료제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간과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하였다.

두 사람의 민주주의관을 살펴보자. 흔히절망에 빠진 자유주의자”(Mommsen, 1970: 95ff)로 지칭되는 베버는 개인적 자유의 수호를 보장하는 정치체제를 추구하였고, 그 모습은 의회제 정부와 경쟁적 정당체제, 그리고 시장경제를 근간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체제이다. 현대 민주주의이론 중, 경쟁적 엘리트주의(competitive elitism)와 다원주의(pluralism) 사조 속에 베버의 사상이 가장 깊숙이 스며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 마르크스는 부르조아 민주주의가 내세우는 자유는 자본주의적 생산체계 속에서 소수자만이 향유하는 자유이며, 참된 자유는 사회계급의 붕괴, 그리고 궁극적으로 모든 형태의 계급권력의 폐기와 더불어서만 확립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정치의 종언> 내지 <국가폐기>에 언급할 때, 1871 <파리콤뮨>의 직접민주주의 모형을 염두에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천착은 매우 중요한 대목이 된다. 마르크스의 생산양식 및 사회구성체에 관한 기본이론과 국가관은 훗날 네오 마르크시스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마르크스의 소외론과 직접민주주의론 등은 참여민주주의 이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다음의 < 1>은 베버와 마르크스 사상 및 이론의 핵심들을 정리ㆍ비교해 본다.

 

< 1> 베버와 마르크스의 사상 및 이론의 비교

관 점

자유주의적/엘리트주의적

프로레타리안 사회주의적

접근방법

역사사회학

정치사회학+조직사회학

역사사회학

정치경제학

중시하는 가치

개인적 자유/예외적 개인의 창의성 제고

평등/소외의 극복

민주주의관

경쟁적 엘리트민주주의 및 다원적 민주주의에 큰 영향

직접민주주의적 성격

네오마르크시즘의 원류/

참여민주주의에 큰 영향

관료제

관료제 이념형 제시

이차적 관심-국가개념에 집착

관료제화 요인

多요인 모형

거시적 요인+조직내적 요인

자본주의적 생산체계

관료제의 자율성

관료의 조직성과 조직적 능력(위임자로부터 유리)

관료제의 계급수단적 성격

(위임자로부터 유리)

관료제화 방식

상쇄권력의 형성/정치적 리더십에 기대

혁명적 체제변혁/직접 민주주의/생산력의 증강

사회주의관

관료독재창출/사회주의 환상 엄중경고

탈관료제화의 기본조건

안병영. 1994. “현대행정조직의 탈관료제화에 관한 연구”. 『사회과학논집』25, p.14.

 

2. 주요 개념과 이론의 정리

민주주의와 평등만큼 그 개념과 이론을 한 몫에 명쾌하게 정리하기 어려운 것도 드믈 것이다. 이 두 개념은 인간사회의 오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철학자, 사상가, 이론가들에 의해 시대의 변화에 따라 개념과 이론들이 새롭게 정의되고 상호 논쟁들이 있어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와 평등의 개념과 이론들은 역사성을 가지면서 몇 가지 중요한 흐름으로 개념화, 유형화, 이론화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해 왔다. 여기서는 민주주의와 평등에 관한 주요 개념들과 이론들을 정리해 봄으로써 한국에서의 행정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 본다.

 

1) 민주주의의 개념과 유형

(1) 보호민주주의와 발전민주주의

그리스 아테네 도시국가에서 인류의 민주주의가 싹튼 후 민주주의 역사는 인류문명의 역사와 함께한다. 도시국가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는 거대 로마를 통치하기 위한 공화정으로 진화한다. 비록 황제의 시대를 거쳐 중세 기독교의 암흑시대를 맞이하지만, 민주주의는 르네상스와 함께 다시 부활한다. 그 후 민주주의는 절대국가라는 국민국가형성을 기반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함께 다양한 모델을 형성하면서 오늘날 까지 발전해 왔다.

민주주의는 그 역사적 진화과정에서 몇 가지 흐름으로 계보를 가지고 발전한다. 일단의 민주주의 이론가들(MacPherson, 1977;Held, 1996)은 근대국가 이후의 자유민주주의의 역사적 발전과정을보호민주주의’(protective democracy)발전민주주의’(developmental democracy)로 나누어 설명한다. 록크 등 초기 자유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는 보호민주주의 개념에 따르면, 정부활동의 기본원칙은 권력의 남용으로부터 시민적 권리와 경제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와 경제의 영역을 엄격히 분리하면서 국가의 경제개입의 최소화와 재산권 및 시장의 효율성을 강조하면서 평등보다는 자유를 우선으로 하는 소극적 자유민주의의 모형이 되었다. 보호민주주의의 지적 전통은 밀(James Mll), 공리주의적 지적 전통을 거쳐 베버에 이어지고 이후 엘리트 민주주의와 최근의 신자유주의의 지적 연원이 된다.

반면에 발전민주주의는 그 기원이 그리스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에서 시작하여, 근대에 와서는 룻소와 밀(John Stuart Mill)에 지적 기반을 두는데, 그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시민의 기본권 보호수준에서 더 나아가 개개 시민의 정치생활에의 참여를 강조함으로써 실질적인 정치적 평등이 보장되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전민주주의 모형은 이후 자유와 평등의 조화를 강조하는 참여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 개념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후 자유주의에서는 공동체적 참여를 강조하는 마르크스주의의 개량주의인 사회민주주의와 결합하면서 유럽의 사민주의 복지국가의 민주적 전통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오늘날 민주주의라고 해서 다 같은 민주주의가 아니며, 국가별로 민주주의 발전의 지적 기원과 진화과정에 따라 민주주의의 이념과 운영방식, 그리고 추구하는 목적은 매우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2) 형식적 민주주의와 실질적(참여, 사회) 민주주의

현대 민주주의 이론가들은 우선 최근 전 세계의 민주주의를 형식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로 나눈다. 또 어떤 이들은 전자를 정치적 민주주의, 후자를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로 지칭하기도 한다. 저마다 의미내용에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형식적, 정치적 민주주의(혹은 민주화)는 시민적 자유가 보장되는 가운데 다원적, 경쟁적 정치구도가 제도화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실질적 또는 사회경제적 민주화는 참여와 분배라는 관점에서 그동안 소외되었던 계층이나, 집단에게 실질적 몫이 돌아가는 변화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게 보통이다(Schmitter, et al. 1986, 안병영, 1994 b: 54-55, Przeworski et al., 1996: 50).

 

. 형식적 민주주의

형식적 민주주의란 민주주의의 기본이 되는 제도적 조건, 즉 보통선거권의 확보, 정기적 선거의 실시, 복수정당의 존재로 인한 상호 경쟁, 권력분립, 언론 및 집회결사의 자유 등의 제도들이 정착되어 시민들의 정치적 시민권이 보장되는 민주주의 수준을 의미한다. 이는 전통적으로 보호민주주의 시각에서의 민주주의 제도화를 의미하며, 엘리트 민주주의, 다원주의 시각에서 주장하는 기본적 민주주의 수준이다. 따라서 민주주의 절차적 차원에서의 개인의 권리보호와 기회의 균등, 그리고 합리성을 강조하며, 그 결과에 대해서는 덜 관심을 갖는다. 민주주의에 있어서 형식과 절차가 공정하면, 결과에 관계없이 기본적 개인의 권리가 보호되는 것이고 선택의 자유가 극대화 될 수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작동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 참여민주주의(participatory democracy)

참여민주주의는 그리스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와 루소의 민주주의론을 기원으로 자기발전을 위한 평등한 권리를 강조하며, 작업장과 지역공동체를 포함하는 사회의 핵심제도를 규제하는데 시민이 직접 참여할 것을 주창한다(Held, 1997). 참여는 일상의 바탕위에서 실행되며, 여러 양태로, 즉 정책의지지 혹은 반대를 통해 혹은, 다양한 조직을 통해, 한때 중앙정부의 배타적 책임이라고 생각했던 기능과 역할에 관여, 점유하면서 실천된다.

참여민주주의는 선거철 민주주의가 아닌상시민주주의(full-time democracy)', 또는 생활민주주의를 주장하며, 조직내 민주주의와 탈관료제화에 많은 관심을 표명한다. 참여민주주의를 주창하는 패트맨(Pateman, 1970), 바하라하(Bachrach, 1970), 아브라함손(Abrahamsson, 1977) 등은 흔히 자유주의 전통 내에서 급진 민주주의 이론가로 분류된다(안병영, 1994b: 23-24).

따라서 참여민주주의는 선거에 의해 위임된 소수의 엘리트에 의해 통치되는 엘리트 민주주의와 대비된다. 슘페터, 헌팅톤, 알몬드/버바 등 보호민주주의의 맥을 잇는 주류 정치학자들은 민주정치과정에서 직접민주주의는 일반 대중의 우민화와 파시즘을 우려하면서참여의 환상을 강력히 경고했다.

 

. 사회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는 민주적 참여의 결과 시민들에게 정치적 실질적인 정치적 참여를 보장한 결과로,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사회적 시민권(social citizenship)이 보장되는 민주주의 수준 또는 단계를 의미한다. 즉 민주주의가 정치적 차원의 기본권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보편적 사회적 위험들을 보장하고, 일정 수준의 평등이 보장됨으로서, 더욱 보편적으로 시민들의 정치적 참여와 자유가 보장된다는 것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복지국가가 지향하는 이념이 되고 있다. 이와 연관하여 경제민주주의는 경제적 소유권의 분산 및 공유, 또는 경제활동 즉 기업의 운영 및 투자결정에 있어서도 구성원들이 참여와 민주주의 원칙이 이행되는 것을 의미한다.

 

(3) 글로벌 시대와 민주주의

 

. 글로벌 민주주의

지금까지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논의는 국민국가 틀 안에서의 민주주의 정치체제와 제도를 의미하였다. 그러나 글로벌 시대가 되면서, 민주주의 원칙과 제도화가 글로벌 수준으로 옮아가기 시작한다. 헬드에 따르면, 오늘의 세계에서 민주주의는 경제로부터 정치에 이르는 상호 연계된 모든 권력체계의 책임성이 보장될 때 유지될 수 있다고 말하며, 이를 위하여국민국가와 초국적 기관 및 조직 등을 두루 포함하는 확대된 민주적 제도와 절차의 틀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Held, 1995). 따라서 민주화를 위한 노력은 글로벌 차원-지역공동체차원-국가차원-시민사회차원-지방차원이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앞의 글로벌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글로벌 수준으로의 확산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글로벌 시대에 신자유주의가 활개를 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하나? 글로벌 민주주의가 글로벌 시대의 국가단위의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민주주의의 확산이라면, 신자유주의는 글로벌 시대에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으로서 민주주의의 축소를 의미한다. 신자유주의는 헬드의 민주주의 모형에 따르면, 개인의 재산권 및 민주적 권리의 기본적 보장을 통해 시장의 영역의 확대와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보호적 민주주의와 친화성을 갖는다. 그동안 정치적 투쟁의 결과로 민주주의의 질적 발전을 이룩해 논 참여민주주의나 사회적 민주주의 보다는 시장의 효율성을 위해 공적 영역이 축소되고 민주성, 형평성이 폄화되며, 참여를 통한 시민의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킨다. 대신에 시장의 실패에 대한 국가의 최소한의 역할을 강조하며, 개인의 경제적 자유와 선택의 자유를 강조한다.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등장은 서구 선진민주복지국가들의 복지국가 위기와 경제의 글로벌화가 심화되면서 세계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정치경제 사조로서 등장한다.

 

. 참여와 분권화

민주주의의 핵심개념으로 흔히 논의되는 것이 참여(participation)와 분권화(decentralization)이다. 대체로 자유는 참여를 유발하고, 참여는 평등의 계기를 만든다. 따라서 참여를 중심으로 형식적ㆍ정치적 민주주의와 실질적ㆍ사회경제적 민주주의가 만나며, 참여를 매개로 민주주의와 평등도 가능하다.

패트맨은 참여의 개념을완전참여’(full participation), ‘부분참여’(partial participation), 그리고의사참여’(擬似, pseudo-participation)로 나눈다. 완전참여는 평등한 의사결정권자로 구성되는 집단에 의해 집단적인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경우이다. 이러한 형태의 의사결정의 경우는 사실상 모두가 관리자의 구실을 하기 때문에 관리자와 피용자간의 구별이 없어진다. 부분참여는 관리층이 최종적인 결정권을 유보하고 있는 상태에서 일반 성원들에게 조직의사결정에 대한 영향력의 행사를 허용하는 경우이다. 이에 비해 의사참여는 기존의 권한구조를 실질적으로 변화하지 않고 참여감만 부여하는 다양한 형태의 관리기법을 말한다. 대체로 관리층에 의해 이미 결정된 것을 구성원들이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상징적, 조작적 관리기법이 이에 해당된다.

분권화(decentalization)는 의사결정권한이 하위 단위에, 그리고 가능한 한 서비스 현장에 가깝게 위양되는 과정을 말한다. 분권화는 일반적으로 민주주의와 연관되는 것으로 인식되나, 선진 민주주의 국가 중에는 프랑스처럼 나폴레옹이 다져 놓은 중앙집권적 관료체제가 이후 왕정복귀, 3제국 시기를 거쳐 최근에 이르기 까지 연면히 이어지는 나라도 있다. 그러나 서구의 대부분의 지방정부는 서서히, 다양한 방식으로, 그리고 상이한 정도로 분권화를 제도화하였다. 분권화는 지방자치의 맥락에서 볼 때, 지방정부가 실질적 차원에서 얼마나 정치적 권한과 재정적 자율성의 확보했느냐가 중요하다. 한편 조직내적 맥락에서 볼 때, 분권적 조직은 계층수가 줄어들고, 통솔범위가 넓어지며, 상향적 의사소통 통로가 열리는 조직론적 특징을 가진다.

 

2) 평등의 개념과 종류

민주주의와 더불어 인류에게 중요한 가치로 인식되어 왔던 평등은 오랜 세월동안 고민되어왔던 대상이었다. 평등에 대한 개념화와 논의는 민주주의 개념과 같이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384-322 BC)에서부터 시작 된다. 그는 분배적 정의와 연관하여 수량적 평등(numerical equality)과 비례적 평등(proportional equality)으로 나눴다. 전자는 모든 이를 똑같이 취급하는 것, 즉 모두에게 같은 몫을 주는 것이다. 이에 반해, 후자는 비슷한 사람들을 같이 취급하는 것, 즉 개인의 장점에 따라 대우하는 것이다. 편의상 전자를 평등으로, 후자를 형평으로 개념화하는 경우가 많다. 이후, 평등 내지 불평등의 본질적 의미는 나라와 시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그리고 평등은 철학적인 개념이면서도 정치적 원칙이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Callinicos, 2000). 따라서 평등의 개념은 무엇이 정의(justice)인가와 긴밀하게 연계되는 것이다. 결국무엇에 대한 평등이냐(equality of what)”이라는 명제를 가지고 많은 철학가, 이론가, 정치가들의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Sen, 1992).

자유민주주의의 발전은 평등보다는 자유를 더욱 강조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가 발전하면서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가 정치적 참여의 권리를 보장하는 기본적인 민주주의 원칙에 배치되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경제적 평등의 논의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런 가운데, 앞에서 논의한 루소에 의해 발전된 민주주의에서 평등의 강조화 마르크스주의의 경제적 평등을 강조하는 시각들이 나오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평등의 개념을결과의 평등(equality of results)’과정의 평등(equality of process)’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급진적 좌파이론들은 평등의 개념을 결과의 평등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두드러지는데 반해, 자유주의 이론들은 평등의 개념을 기회의 균등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전자는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는 억압적 체제 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추구하기 어렵고, 후자는 실질적 평등화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형식적 제도화에 그치기 때문에 미흡하다. 복지국가가 지향하는 평등은 적어도 기회균등 이상의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평등의 개념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정치문화에 따라 또 다르게 인식된다. 자유주의와 개인주의가 강한 미국의 경우, 그것은 대체로 개인적 능력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된다. 따라서 가난한자는 흔히실패자(the loser)’로 이해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집합주의적 성향이 강한 유럽인들은 이를 계급적 맥락에서 파악하는 경향이 강하며, 따라서 자원이 얼마나 불평등하게 배분되었는지에 관심을 표명한다.

어쨌든 평등은 대체로 모든 사람이 충분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권리를 똑같이 지니고 있다는 신념에서 출발한다. 전통적으로 경제적 영역에서 요구되는 평등은 사회적 계급의 분화를 야기시키는 심대한 소득격차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토니는 평등의 개념을 단순한 계급논의를 넘어서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평등은 정당한 인간관계의 길을 인도한다. 평등은 동료애의 기반을 형성한다.”는 입장이 그것이다(Tawney, 1970: 15). 이러한 격차의 해소, 연대(solidarity)를 강조하면서 자유를 극대화 하는 것이 현대 복지국가의 평등의 개념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에스핑-안데르센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압력 속에서 복지국가의 딜레마를 설명하면서오늘날 복지국가는 다수의 평등주의적 긴장에 직면하고 있다. 그 하나 측면은 평등과 형평 간에 균형을 잡는 일이다. 다른 측면인 즉, 평등주의와 완전고용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의 문제다. 오늘날 자본주의 현실에 있어서 두 경우 다 둘 중에 하나는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어떤 종류의 평등을 희생해야 할지 아무런 지침도 신화도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Esping-Andersen 1999: 10-11).

오늘 날 우리에게 두 가지 경쟁적인 선택지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그 하나는파레토원칙(Paretian principle)이고 다른 하나는롤스원칙(Rawlsian principle)이다. 여기서 파레토 원칙은 어떤 이가 현상유지(status quo) 상황의 어떤 변화로부터 이득을 얻는다면, 그로부터 어떤 이도 손해를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롤스의 원칙은 현상유지의 어떤 변화는 마땅히 가장 형편이 나쁜 사람에게 최대의 혜택이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파레토 원칙은형평에 가깝고, 롤스의 원칙은평등에 더 가깝다. 전자는 자유주의적이고, 후자는 사민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 극빈자가 계속해서 굶주린 가운데 백만장자가 몇 배를 더 벌어도 문제가 없다는 식이다. 따라서 그 방식으로는 후기산업사회의 심화되는 사회적 양극화에 대처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복지국가의-전략은 당연히 롤스의 원칙 쪽으로 기울어진다 하겠다(Esping-Andersen, 1999: 168)

세계화, 후기산업화, 그리고 인구론적 변화가 빚어내는 위험구조 속에서, 어느 나라에나 저숙련노동자, 청년, 노인, 그리고 홀부모 가족 등 고위험 집단들이 존재한다. 문제는 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사회적 배재 내지 열패자 범주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것이다. 하층계급 혹은 사회내의 이른바 ‘B 으로 전락한 이들은 자칫 그 함정에서 영원히 헤어나지 못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회투자국가론자들은 복지국가 미래에 새로운 지평을 선보이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사회투자는 급여와 권리에 초점을 둔 재분배적이고 소비적인 사회복지를 넘어 인적 자본에 대한 투자를 통해서 인간의 참여능력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전이를 꾀한다.” 따라서 사회투자론은 결과의 평등 내지 소득의 재분배로부터 기회의 평등 내지 생애기회의 평등으로의 전이를 추구하며, 따라서기회능력의 분배 및 재분배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 강조하는 능력은 지식기반사회의 새로운 위험들, 예컨대 저숙련이나 저지식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며, 바로 이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 사회복지국가가 추구해야 할 새로운 유형의 안전(security)라는 것이다. 사회투자국가는 이념적으로 사민주의적 성향을 지니나, 이른바정치적 자유주의자인 롤스의 사회정의론의 핵심원리인최소극대화의 원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사회적 최약자의 복지 내지 사회적 배재의 방지에 우선권이 주어지는 입장이다. 그런가 하면, 고전적 복지국가에서 시민들의 배타적 권리로 인식되었던 복지권이 재해석되어 권리 못지않게 시민들의 의무를 강조하게 되었다.

 

3. 관료제(행정)와 민주주의

 

1) 관료제와 민주주의에 대한 제 이론들

관료제와 민주주의에 대한 이론적 논쟁을 신우파, 다원주의, 기술관료학파, 참여민주주의자, 마르크스주의의 순으로 간략히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 공공선택학파

인간의 합리성을 기반으로 정치 및 관료제의 행태를 설명하는 공공선택론학파들(Downs, Niskanen, Ostrom, Dunlevy)은 관료제를비영리 독점 공급자’(non-profitmaking monopoly)로 정의하고 그것은 마땅히 축소되어야 하며, 민영화가 필요하고, 서비스 공급에 있어 독점적 지위에 있는 거대관료제는 분절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신우파라고 불리우기도 한다(안병영, 1994 b: 19-20). 이들은 민주주의도 시장의 논리와 같이 개인의 합리성을 극대화 하는 과정에서 작동을 하고, 관료제의 성장은 민주주의의 효과적인 작동을 저해한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역으로 민주주의와 참여의 확대가 관료제의 과대성장을 가져왔다고 비판한다. 신우파와 맥을 같이 하는신공공관리학파는 시장주의와 관리주의에 크게 경도되어, 특히 시민의 지위를 고객 내지 소비자의 지위로 바꾸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적지 않은 민주주의 이론가들은, 이러한 시도는 단순한 능률추구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적, 규범적이며, 정치적, 사회적 함의를 가지며, 큰 사회와 민주주의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헌신을 약화시킨다고 우려한다.

 

. 다원주의

다원주의자들은 정치권력이 사적 개인과 이익집단들, 그리고 국가 사이에 나누어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Dahl), 린드블롬(Lindblom) 등은 다두제(Polyarchy) 개념을 통하여 서구, 특히 미국의 정치과정을 정당화하였다(Dahl, 1971, 1985). 전통적 다원주의의 입장은 상충하는 압력집단의 요구는 타협 내지 욕구의 최적만족을 유도한다고 본다. 린드블롬은 정부관료제의 문제점은 계속적인 행정개혁과 재구조화를 통하여, 그리고 다양한 정부차원들 간의 협조적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크게 줄일 수 있다고 전망한다(Lindblom, 1977). 한편, 이에 대비되는 입장이 조합주의이다. 조합주의는, 한마디로 소수의 비경쟁적이며 위계적 구조를 지닌 노, 사의 주요 이익집단들이 국가의 허가를 받아 국가의 주요 정책에 영향을 주된 영향을 미친다는 관점이다. 이러한 입장은 서구의 사회협약 내지 정책협의제의 입장으로 극단적으로는관료제 없는 국가통제체제라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 기술관료 학파

번햄(Burnham)에서 비롯되는 기술관료학파의 입장은, 기술관료들의 권력이 선출된 정치적 기구들을 대신하여 성장했고, 이것이 민주주의의 위협이라고 보았다(Burnham, 1942). “문자 그대로 현대의 정치체제는 본질적으로관료적’, 관료의 지배이다. 관료제의 확장은 선출된 엘리트가 아닌, 즉 선거민에게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피임명자들의 손에 권력이 들어간다는 면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어두운 위협이 된다(Etzioni-Halevy, 1983: 54-62). 더구나 관료제의 충원과정은 관료들이 다른 관료들을 임명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료제는 단순히 임명된 엘리트 체제가 아니라자기임명적(self-appointed)' 엘리트 체제가 된다. 관료제의 우월적 지위는 정책형성의 비밀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보다 큰 위협이며, 이는 민주주의의 반테제이다.

 

. 참여민주주의자

룻소, , 콜 등 고전적 민주주의 이론가들과 이들의 지적 전통을 이어받은 패트만( Pateman), 바하라하(Bachrach), 아브라함손(Abrahamsson) 등 참여민주주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선거라는 형식을 취하는 일정한 제도적 장치 내지 정치적 방법으로 이해사고, 대중들의 정치적 무관심은 사회체제를 위해 순기능을 수행한다는 민주적 엘리티즘의 관점에 대해 거부의 입장을 분명히 한다(Pateman, 1970; Bachrach, 1969; Abrahamsson, 1977). 이들은 본질적으로시간제 민주주의’(part-time democracy) 내지선거철 민주주의상시 민주주의’(full-time democracy), 형식적, 정치적 민주주의를 실질적,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입장이며,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탈관료제화 내지 관료제개혁을 통하여 민주주의와 평등이 만나야 된다는 입장이다.

유럽형 참여주의자인 아브라함손(Abrahamsson)에 따르면, 관료제는 그들이 마땅히 봉사해야 할 제 이익들, 즉 조직의 위임자(mandator)의 이익으로부터 이탈하려는 경향, 즉 대의성(代議性)을 상실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하고, 이를 엄중히 경고한다. 그는 관료제는 한낮 수단에 불과하므로, 그 스스로가 주인(위임자)로 행세하는자기탐익적 행정’(self-indulgent administration)은 정의상 비능률적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대의적 능률’(representative efficiency)은 집행결과가 위임자의 이익과 서로 부합되는 정도에 따라 가늠되며, 따라서 경제적 모티브와 민주적 모티브가 동시에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무엇보다의사결정에의 영향력의 평등성’ (Arahamsson, 1977: 224) 내지권력의 효과적 평등화’(Bachrach, 1969: 100)를 추구하며, 탈관료제화는 비단 국가관료제 뿐만 아니라 지방공동체와 산업체에서의 폭넓게 추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좌파류의 참여주의자들은 참여와 탈관료제화를 매개로 민주주의와 평등은 함께 이루어 져야 한다는 입장을 천명한다. 따라서 이들은 직접민주주의 방식의 급진적 참여메커니즘을 선호한다.

공동체주의(comminitarianism), 시민공화주의(civic republicanism)류의 미국형 참여민주주의자들은 대체로 정책과정에의 시민참여의 강화, 공동체의식의 창출 등을 통한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의 형성에 큰 관심을 표명한다(Putnam, Neonardi, and Raffaella, 1993).

 

. 마르크스주의자

마르크스에 따르면, 국가와 관료제는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복무하는 계급적 도구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계급은 국가속에 각인된다’. 그에 있어 자본주의체제의 붕괴와 사회주의혁명의 성공은 탈관료제화의 기본조건이다. 그러나 <루이 보나빠르뜨의 霧月 18)에서 이른바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을 제기하여, 네오 마르크시즘의 전개 공간을 마련하기도 한다(Poulantzas, 1978). 그는 탈관료제화의 방식으로 조건적 위임에 의한 대표체계, 대표자의 직접소환 등 직접민주주의 방식을 제시했다(Beetham, 1987).

 

2) 관료제와 민주주의: 딜레마와 필요조건

관료제의 이론과 관료제와 민주주의 간의 관계에 대해 가장 고전적인 논의는 베버에서 출발한다. 베버에 있어서 관료제는합리화 과정의 사회적 표현이다. 그런 의미에서삶의 전체적 관료제화경향은 근대화의 가장 분명한 표현이다. 그에 있어 개신교, 자본주의, 과학 및 관료제는 발전의 한 덩어리(one cluster of development), 즉 합리화과정을 구성하는 부분들이다(Weber, 1958).

그에 따르면 관료제는 민주주의와 동시에 발전하였으며, 민주주의는 무엇보다 전통적인 귀족지배에 대항하는 투쟁과정에서 관료제의 발전을 촉진했다고 설명한다. 그는 또한 많은 대중정당들은 그들 스스로 관료제적으로 조직되었다고 강조했다.

베버는관료제의 합리성그리고합리적ㆍ 합법적 관료제의 이상형을 부각시키는데 연구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그는 관료제는 전문지식과 그 조직적 능력에 의해 위임자로부터 유리되는 관료계급으로 군림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관료권의 팽대와관료제의 자율성’ (autonomy of bureaucracy), 그리고 이에 따른 민주주의에 대한 관료제의 위협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하였다(Albrow, 1977; Beetham, 1987).

그는 아울러 자본주의적 생산질서를 관료적 조직이 등장하는데 주요한 동인으로 보았다. “비록 역사적 연원은 다르지만, 근대적 발전단계에서 자본주의는 관료제를 필요로 한다. 반면에 자본주의는 관료제적 행정의 가장 합리적인 경제적 기초이며, 관료제로 하여금 가장 합리적인 형태로 발전하도록 유도한다”(Weber, 1958). 그러나 베버는 관료제의 대두가 자본주의, 대중민주주의 등 사회의 물질적, 정치적 발전뿐만 아니라, 조직규모의 확대와 같은내적 논리’ (inner logic)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을 아울러 밝히고 있다(Abrahamsson, 1977). 주지되듯이 베버는 자본주의가 폐지되어도 관료제는 살아남을 수 있는 독립적인 실체로 보았다.

베버는 관료제에 대한 통제장치로서 의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의회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본산으로 정당정치와 선거과정과 연계하여 관료제를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의 원천으로 보았다. 그는 아울러합법적 권위와 카리스마적 권위가 결합하는’(Momssen, 1970), ‘국민투표적 지도자민주주의’(plebiscitary leader-democracy)에도 관심을 표명하였다.

베버의 입장을 가장 현대에 맞게 전수한 에찌오니-할레비(Etzioni-Halevy)는 민주주의의 딜레마로서의 관료제와 관료제에 대한 딜레마로서의 민주주의를 대비하여 설명하고, 이러한 디렘마는 정치의 장()에 긴장과 권력투쟁을 야기시킨다고 설명한다. 그녀에 따르면, “관료제는 민주주의를 위해 불가피한 존재이면서, 아울러 위협적인 존재이다.” “관료제는 선출된 정치인들의 통제 하에 있어야 하며, 그러한 통제로부터 벗어나야 한다...정책형성에 참여하면서도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한다. 이는 관료제가 정치적이어야 하는 동시에 비정치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Etzioni-Halevy, 1983).

관료제의 성장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오랫동안 정치가는 더 이상 공공정책을 통제하지 못한다고 믿어졌다. 어떤 이는 이를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고, 다른 이는 이를 정책결정이 보다 합리적 기반위에서 이루어지는 새 시대의 출발로 보았다. 립셋은 이러한 상황을민주주의와 관료제간에 대투쟁이라고 정의했다(Lipset, 1996). 그러나 최근 서구 여러나라에서 급속히 대두되고 있는탈전문화와 정치화’ (deprofessionalization and politicization) 과정은 정치중립적이며, 유능성과 전문성에 바탕을 둔 베버리안 관료제의 전통에 강력히 도전하고 있다(Suleiman, 2003).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현대 정치이론가들은 대체로 관료제는 입헌적 민주주의를 위해 불가결한 요소이자, 전제라고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다. 슘페터도 국가가 전문적 관료적 수단을 소유하지 않고서는 민주적 질서는 성취될 수 없다고 보았다. 린쯔(Linz), 스테판(Stepan)도 민주주의로의 전이과정에서 전문적 관료제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였다(Stepan: "No state, no democracy")(Stepan and Linz, 1986: 18). 적어도 공고화된 민주주의는 그 중심기능들, 즉 시민의 보호, 조세추출, 서비스전달 등을 질서 있게, 예견가능하게, 그리고 합법적인 방식으로 수행할 수 있는 국가 및 관료제 없이는 존립할 수 없다. 민주적 공고화의 주요요소가 비정의적(impersonal) 방식으로 법규와 규정에 따라 일하고, 관료들이 자신의 정치적, 사적 이익과 그들이 점유하고 있는 관청을 분리할 수 있는 관료제의 존재이다(Stepan and Linz, 1986).

현대 민주주의와 관료제간의 관계에 대하여 술레이만의 입장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의 베버리안적 입장에서 민주주의 건설에서 관료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그에 따르면, 유능하고, 전문적이며, 정치중립적 공복관(公僕觀)이 투철한 베버리안 관료제의 존립은 민주주의의 초기단계 및 공고화과정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입장을 지킨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최근에 크게 대두되는 정부재창조 내지 신공공관리론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Suleiman, 2003).

그에 따르면 NPM의 핵심개념은관리주의’(managerialism)이다. 그것은 또한 구조적 유연성, 과정과 성과, 경쟁과 능률, 고객정향 등을 강조해서 일견 가치중립적이고 기술관리적 느낌을 선사한다. 그러나 모든 정부개혁이 그렇듯이 NPM은 강하게 정치를 포함하며, 철학적, 규범적 함의를 지닌다. 그에 따르면, NPM은 공익을 추구하는 집합적 규범을 시장의 규범으로 대체하고, 공적 영역의 지속적 감축과 공적 기능의 사적 영역으로의 이관을 추구하며, 시민의 고객화, 원자화를 지향한다. NPM이 집요하게, 그리고 일관성 있게 베버리안 관료제에 대해 맹공을 가하는 것도 이러한관료제 부수기’(dismantling bureaucracy)을 위한 것이며, 이는 자칫민주국가 부수기’(dismantling democratic states)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본다(Suleiman, 2003). 그는 NPM이 최근 서구 여러 나라에서 대두되고 있는 관료제 최상위층의탈전문화 및 정치화현상과 맞물릴 때 자칫 민주국가의 필수 조건인 전문적 관료제 및 국가능력의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이다. 그는 최근, 전세계적으로 NPM이 확산되고 있는 것은 나라마다 절실한 개혁필요성에 의한 것 이라기보다는, 이데로올기적 수준의 <아이디아>의 확산효과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술레이만은 강력하고, 공고화된, 말하자면 확립된 민주주의 국가의 경우 관료제의 쇄신을 위해 얼마간의 시장이론이나 관리이론을 수용할 수 있다는 점을 수용한다. 또 시민참여의 확산을 통한 대중민주주의와 정부개혁의 연계에 대해서도 비교적 긍정적이다. 그러나 국가가 민주적 권위를 키기며 국민적 신뢰를 바탕으로 국정 소임을 다하기 위하여 유능하고, 전문적이며, 비정의적(非情誼的) 관료제의 존재는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3) 정치적 민주주의와 행정적 민주주의

위에서 우리는 주로 정치적 민주주의 내지 제도적 민주주의와 관료제의 관계를 논의하였다. 그러나 정작 관료제를 대상으로 민주주의를 논의할 때, 상위 민주주의와 관료제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정치적 민주주의와 별도로 관료제의 조직내적 내지 조직 연관적 민주주의를 논의할 필요가 있다. 이를 편의상행정적 민주주의라고 칭해 본다. 그러나 실제로 행정적 민주주의 내지 행정민주주의라는 개념은 아직 학문적으로 보편화되어 있지 않을뿐더러, 이론적 논의나 합의수준이 낮다(임성한, 1994).

크게 보아 조직민주주의(organizational democracy) 및 산업민주주의(industrial democracy) 이론이 이 논의에 기여했고, 행정학에서는 주로 대표관료제, 시민참여와 분권화 논의, 그리고 행정통제론이 이와 깊이 연관된다. 행정절차법이나 공공윤리 등에서도 논의가 있었다. 따라서 행정적 민주주의 차원에서 민주주의와 관료제를 논의하는 경우, 무엇을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거의 새로운 논의가 필요하다.

이와 연관하여 우리는 몇 가지 논점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최근 최근에 크게 대두되고 있는 거버넌스와 네트워크 개념이다. 둘째로, 하나는 최상위 행정계층의 탈전문화와 정치화 현상이다. 셋째로, 부처 및 부서 간, 또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그리고 지방정부 간의 협력과 의사소통의 문제이다. 바꾸어 말하면, 최근 우리 관료제에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부처이기주의와 연관된다. 넷째로, 조직민주주의 시각에서의 부처내 또는 부서내의 상하계층간의 관계이다.

이러한 네 가지 문제들은 민주주의 정부에서 관료제의 정책결정에 대한 영향력과 능력의 증가하고 있는 시점에서 정치적 민주주의와 연관하여 관료제의 연관구조 내지 외연(外延)과 연관하여 부각되고 있는 새로운 현상이며, 행정적 민주주의와 깊이 연루되므로 얼마간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먼저, 많은 이들은 국정관리양식 또는 거버넌스의 양식이 기존의 계층적인 정부 패러다임에서 협력적 또는 네트워크 거버넌스 패러다임으로 바뀌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전통적인 계층적 정부 패러다임은 국민국가 중심의 통치체제를 전제로 한 국가관료제, 특히 중앙정부의 중심의 위계적 질서이다. 그러나 협력적 또는 네트워크 중심의 거버넌스 패러다임은 한편으로는 국가를 넘어 보다 상위의 지역공동체와 글로벌 차원, 그리고 하위의 지방차원 등을 포함하는 다계층적 통치구조를 상정한다(정무권, 2000). 뿐만 아니라 여기서는 정부관료제 내지 공공부문은 시장과 시민사회와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면서, 때로는 이들과 경쟁하고, 때로는 이들과 협력하면서 국정운영에 나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거버넌스는 네트워크 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네트워크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상호호혜와 신뢰가 필수적이며, 당사자간의 파트너십, 그리고-관계를 중시한다. 따라서 거버넌스 패러다임에 의할 때 관료제의 외연은 크게 확대된다.

다음으로 관료제의 탈전문화와 정치화 논점이다. 주지되듯이 영국과 미국 등은 19세기 후반 실적주의가 제도화되면서, 전문성과 능률성을 바탕으로 하는 베버리안 관료제가 정착하였다. 이후 관료권은 계속 선출된 정치적 기구들을 대신하여 성장 하였다. 여기서 관료의 비당파성, 공정성,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요구는 관료권의 팽대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최근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영국을 예로 할 때, 관료들의 헌법적 지위는 ‘자문’하는 것이고, 정치인인 장관은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관의 정책결정과정에서 전문관료제에 대한 의존도는 매우 높았다. 그러나 1979-1997년간의 보수당 정부 하에서 상황은 역전되었다. 명백한 정책 아젠다를 가지고 출발한 영국 보수당정부는 정책과정에 깊숙이 관여하였고, 그 결과 관료제의 정치화는 빠르게 진척되었다. 특히 대처 수상은 부처의 세세한 정책까지 관여하였고, “관료들은 점차 그들의 역할을 정책분석가로부터 집행자로 정의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현상은 독일을 비롯한 많은 유럽국가로 확산되었고, 전문관료제의 기반을 흔들어 놓았다.

주지되듯이 정부의 정책결정과정에서 가장 주요한 인사는 수상(대통령)/비서실, 장관, 그리고 고위관료로 구성되는 핵심집행부(core executive)이며, 이들 간의 역학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실제로 정치(정책)와 행정을 가르는 분할선은 결코 명확하지 않으며, 행정의 정점에서 이들은 서로 만난다. 내각책임제의 경우, 대체로 장관은 의회의원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그들은 당연히 정치인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대통령책임제의 경우, 정치인 출신이 아닌 전문인 출신 장관들이 흔하며 이들은 오히려 행정의 정점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경우에도 장관과 고위관료 간에는 공생관계를 바탕으로 얼마간의 갈등과 긴장이 수반된다.

관료제의 탈전문화와 정치화는 일응 국민이 위임한 정치기구에게 우선권을 준다는 의미에서 민주주의에 기여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친 관료제의 지나친 정치화는 관료제가 민주주의에 기여할 수 있는 전문성 내지는 잠재능력을 약화시킨다는 면에서 우려되는 바도 크다. 그러나 엽관주의와 실적주의의 역사를 두루 거치고, 관료의 정치적 중립성과중립으로부터의 해방의 시대롤 고르게 호홉한 서구에 경우 시대에 따른 얼마간의 편향을 있을지라도 정상관료제의 정치화가 체제위협으로 까지 발전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랫동안 권위주의정권의 절대권력 하에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의 뿌리가 아직 취약한 후발 민주주의 국가의 경우, 관료제의 정치화는 자칫 행정의 민주화에 앞서 행정의 권력예속으로 유도할 것이 불을 보듯 명확하다.

행정적 민주화의 논의에서, 중요한 대목은 정치와 행정의 만나는 접점이다. 내각책임제의 경우 당연히 장관과 고위관료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제의 경우, 나라에 따라 사정이 다를 듯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정치와 행정이 만나는 지점은 대통령/비서실과 장관이라고 할 수 있다. 대통령과 대통령의 인격적 연장인 청와대 비서실의 정치적 입장과 전문관료들의 보좌를 받는 장관의 전문성이 여기서 조정과정을 밟는다. 최악의 경우는 대통령/비서실이 공익을 무시하고 정치적 이해관계나 이념적 편향성에 입각해서 공익적, 전문적 관점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정책을 밀어 붙이는 경우이다. 여기서 대통령에 의해 임용된 장관은 상대적 권력관계에서 결정적 열세에 있기 때문에, 대통령의 권력에 저항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실제로 장관이 바로 이 지점에서 정치에 결정적으로 밀리면, 행정조직 내부의 민주화는 실제로 지난(至難)해 진다. 그렇게 되는 경우, 정부관료제는 일부 중범위, 그리고 미시정책차원이나 정책집행과정에 관여할 뿐, 주요한 거시정책 결정에서는 소외되기 쉽고, 따라서 부처내의 창의적 동력을 크게 떨어지게 된다. 전문적 관료제의 창의성과 역동력이 떨어지게 되면, 그 사회는 문제해결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 경우 정치인들이 단기적인 정치적 이해관계에 몰두하게 되면, 그 사회는 안정성이 떨어지고 오히려 민주주의는 후퇴하게 된다. 따라서 정치인의 이념적 선도성과 관료제의 전문성과 안정성이 상호 절묘하게 결합되어야 민주주의는 발전하게 된다.

이와 연관하여 우리 한국적 맥락에서 중요한 이슈는 민주주의와 행정개혁과의 상호 관계이다. 이번 특집 세션에서 임도빈 교수가 제기하였듯이, 한국의 관료제는 그동안 한편으로는 발전국가의 성립으로 베버리안 관료제를 완성하는 한편,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때 마다 행정 쇄신 및 행정개혁이 정치적 지배엘리트에 의해 관료제를 통제하기 위해 단골메뉴이었다. 민주화 이후에도 행정개혁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민주주의가 성숙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신자유주의적 행정개혁은 오히려 관료들의 권한과 책임의 문제를 계속 혼돈 속으로 몰아넣음으로서 관료제의 합리적 자율성과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앞에서 제기되었던, 정치적 민주주의와 행정적 민주주의의 접점인 정치적 관료와 실적주의 관료의 관계가 서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경우,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논의를 포함해서 행정적 민주화를 논의하는 경우, 행정적 민주화는 주로 참여와 분권화 개념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그 분석 대상은 크게 행정관료제의 조직내부와 외연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 필요할 듯하다. 행정조직 내부가 매우 중요하나, 그 외연의 중요성이 점차 커지고 있다고 보겠다. 행정관료제의 외연을 따져 보면, 대통령/비서실과 장관, 조직간(부처간), 관료제(이른바 street level bureaucracy)와 시민간, 중앙과 지방간, 그리고 정부와 시민사회 및 시장 간으로 나누어 것이 전체 그림을 조망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참여와 분권화 분석을 위해서는 권한위양의 수준, 참여의 정도와 그 실질 영향력, 정책협의제의 제도화 수준, 조직내부의 상향적 의사소통 통로 등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이런 맥락에서, 현재 우리의 관료제에서 증가하고 있는 부처이기주의, 더 나아가서 지방정부간의 이기주의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복잡한 사회가 되어 갈수록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기능적으로 분화된 부처 간의 긴밀한 의사소통과 협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부서 및 팀 등 조직내부에 있어서도 구성원간의 민주적 의사소통은 최근 관심을 끌고 있는 혁신적 조직의 조건으로서 학습조직화(learning organization)에 중요한 조건이다(정무권, 배득종, 한상일, 2006). 왜냐하면, 현대 사회의 복잡한 문제해결의 혁신들은 반드시 소수의 상위 엘리트 층만에서 나오는지 않는다. 오히려 국민과 대면을 하고 실제로 집행을 하는 조직의 하위층 및 중간층에서 그들의 현장경험에서 나오는 혁신이 매우 효과적이다. 때문에 관료제의 다양한 수준과 영역에서의 행정적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과 이론적, 경험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4. 평등과 관료제(행정)

이데올로기와 규범적 이론이 지배하는 시대에는 평등 내지 불평등이라는 사회문제는 무대 전면에 등장하지만, 이른바 탈이데올로기 시대에는 무대에 뒷전으로 물러가기도 한다. 전후 서구에서 혼합경제와 복지국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형성되고, 이른바이데올로기의 종언’(Bell, 1960)이 찾아들었을 때는 유럽에는풍요한 노동자가 넘쳤고, 미국사회는중산층화되었다. 당시 복지자본주의의 개념적 틀 안에서 개인주의와 집합주의, 자유주의와 사민주의가 제휴했다. 립셋이 복지국가로의 완성을 위한 새로운 정치구도를민주적 계급투쟁’(democratic class struggle)으로 표현하기에 이른다(Lipset, 1966). 그러나 1970년대 이후 복지국가의 위기가 도래하고,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가 풍미하면서 이념투쟁은 되살아나고 사회적 불평등 내지 사회적 배재(social exclusion) 문제는 다시 뜨거운 쟁점으로 부각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대체로 사회적 가치논의에서 평등의 개념은 자유의 개념과 대비되어 논의되는 경우가 많다. 고전적 자유주의가 자유를 앞세우고 평등을 폄하하는데 비해, 마르크스주의는 그 반대의 가치정향을 표방한다. 그런가 하면, 중도적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 양자를 다 중시한다. 다만 케인즈나 베버리지 등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자유주의는 얼마간 자유의 가치를, 그리고 전통적 사회민주주의는 평등의 가치에 더 강조점을 둔다. 주지되듯이 사회적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는 공히 복지국가를 강력하게 지원하는 이념적 세력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관료제 내지 공공부문의 성장은 상대적으로 평등의 가치를 중시하는 복지국가 내지 복지자본주의의 성장과 그 역사적 궤를 같이한다. 그리고 관료제 성장의 핵심 메커니즘은 개개 국가들의 역사적 형성과정에서 독특한 자본주의양식과 민주주의 발전의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헤클로가 복지국가의 성장을 함축적으로 관료제의 사회문제의 퍼즐풀기로 정의한다. 이는 복지국가의 성장에 정치적 이념도 중요하지만,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의 전문관료제가 잘 성장했을 때, 관료제의 전문가적 규범과 윤리(professional norms and ethics)가 실질적으로 합리적인 복지정책을 만들어 나가는 원인이라는 것이다(Heclo, 1983).

여기서는 세 가지 복지자본주의 유형, 즉 스칸디나비아형 사회민주주의 국가, 유럽대륙형 보수주의국가, 그리고 영미계통의 자유주의국가를 비교함으로써 시민들의 복지와 평등문제에 관료제의 역할에 대해 접근하고자 한다(Esping-Andersen, 1990). 사민주의, 조합주의, 자유주의 국가는 무엇보다 좌파정당의 정책영향력과 정책결정과정에서 조합주의의 제도화 정도에 따라 확연히 구분된다. , 좌파정당이 의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클수록, 그리고 임금협상 등 주요 사회정책에 관한 노사정간의 합의 정도, 즉 조합주의의 지수가 높을수록, 국가정책은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평등주의를 추구하고 정부는 적극적인 서비스 생산자와 조정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 경우 정부관료제의 규모는 당연히 커진다(안병영, 정무권, 한상일, 2007).

사민주의 국가들은 대체로 복지국가의 기본이념으로 사민주의 이데올로기인 평등과 연대를 강조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회복지 정책이 보편주의에 입각하여 폭넓게 펼쳐지며, 상대적으로 소득보장의 급여수준이 높고, 특히 보건, 교육, 탁아, 노인, 장애인 등에 대한 주요 사회서비스를 국가가 직접 제공한다. 그런가 하면 조세와 복지제도를 통해 재분배에도 열심이다. 따라서 국가관료제의 인력규모도 다른 국가유형에 비해 월등히 크고, 복지지출 또한 가장 높은 국가군이다(안병영, 정무권, 한상일, 2007). 이들 나라들은 세계화 시대에도 여전히 국가의 역할을 중시하고 있으며, 때로는 시장의 힘을 빌리기도 하지만 제한적이며, 정부구조와 운영메커니즘의 재조정 즉, 현대화방식을 통한 정부개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남궁근 외, 2006). 흥미로운 것은 한 국가가 평등과 연대의 가치가 정치이념 및 문화적으로 강조되어 제도화 되면, 관료제의 정책결정과정에서도 관료 개인이나 조직문화의 규범도 평등과 연대의 가치에 동화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Bostein, 1996; 이도형, 1993). 따라서 관료제 문화도 그 사회의 지배적인 정치문화에 영향을 받는다. 이는 그 사회가 민주주의 발전과정에서 어떤 종류의 민주주의로 발전하느냐에 따라 공공부문의 특징, 행정민주주의의 성격, 행정의 평등개념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전통적으로 기독교 민주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은 유럽대륙의 보수주의국가들은 사회적 위험들을 사회보험제도 중심으로 대처하면서, 복지제도의 수급권이 남성가장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사회보험제도가 계급 및 지위에 따라 분절적으로 운영되며, 복지의 재분배 효과도 제한적이다. 산업구조적 특징과 가족주의의 영향으로 여성의 사회참여가 낮기 때문에 국가가 직접 제공하는 사회서비스제도가 상대적으로 덜 발전되어 있다. 이들 보수주의 국가들은 기독교의 영향으로 사회적 계층(hierarchy)를 인정하지만, 갈등보다는 화합을 강조한다. 따라서 정책결정의 원리로서 평등보다는 보족성의 원리(subsidiary principle)를 강조한다. 복지제도의 특징에서도 나타나듯이, 일단은 각자의 노력과 수준에 의해서 해결을 하게하고, 이에 부족한 계층이나 집단에게 보충적으로 지원을 해줌으로써 사회 전체적으로 갈등을 줄이고 계층 간, 집단 간의 조화와 통합을 이루도록 한다. 따라서 사민주의와 같이 공공부문이 크다. 지출의 측면에서도 평균적으로 사민주의 국가보다 상대적으로 적지만, 큰 차이는 나지 않는다.

 

< 2> Esping-Andersen 의 세 가지 복지자본주의와 공공부문의 특징

유형

내용

앵글로색슨(자유주의)

대륙 유럽(보수주의)

스칸디나비아(사민주의)

급여대상

빈자(요구호자) 중심

피용자 중심

모든 시민

급여종류

극소화

공공부조 중심

중간적

사회보험중심

극대화

사회적서비스 중심

급여수준

최저생계비

계급과 지위에 따라 차이(보험원칙)

중간계급의 생활수준지향

국가역할 /공공부문

미약

강력

최강(最强)

공공사회보장체계

미발달

분절적

통합적(보편적)

본인부담

많음(시장구매)

많음(보험료)

적음(사용자-국가부담)

가족역할

강력(개인책임의최소단위로서 가족; 지원적음)

강력(전통적 가족; 가장을 통한 지원)

미약(개인적 사회권)

인적자원관리

시장중심(형식적 공교육)

공공역할 강조(무상교육)

포괄적 인적자본관리(무상교육+ALMP+여성해방)

노동연계

억압적(workfare)

전통적

생산적(activation)

복지의 재분배적 기능

매우 미약

제한적

강력

평등에 대한 강조

매우 약함/자유와 경쟁을 강조

중간수준/평등 보다는 보족성의원리(subsidiary principle)강조

매우 강함. 연대를 강조

속하는 국가

미국, 카나다, 호주 등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영미계통의 자유주의유형의 국가들은 이념적으로 개인주의와 시장의 효율성을 강조하기 때문에 국가보다는 시장 중심으로 경제성장과 분배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들 나라들은 빈곤층 중심의 최소한의 생계보장을 중심으로 제공하는 다양한 공적부조제도를 바탕으로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의 사회보험제도를 갖추고 있다. 국가 관료제의 재정적 규모나 인력이 공히 적은 편이다. 이들 자유주의 국가들은 평등에 앞서서 자유를 강조한다. 평등은 결과의 평등, 즉 결과적인 격차를 줄이는 것 보다는 과정상의 평등, 즉 누구나 격차에 관계없이 자유로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선택권 차원에서의 기본권의 평등적 보장에 더욱 초점을 둔다. 이상을 간략히 정리하면 < 2>와 같다.

이에 비해 일본과 한국 등 동아시아의 발전국가 유형은 공히 후발산업화 국가들로서 뒤늦게 국가주도의 산업화를 거쳤고, 민주화, 복지화의 도정도 늦었다. <선성장ㆍ후분배>라는 발전주의의 제도적 유산 때문에 서구 선진 국가에 비해 아직 복지부문에 대한 재정지출이 높지 않고, 인력규모나 재정구조의 맥락에서 볼 때 공공부문의 규모가 현저히 작다(안병영, 정무권, 한상일, 2007). 이들 발전주의 국가에서는 민주주의가 덜 성숙되었기 때문에, 개인의 권리와 보호적 차원의 평등보다는 국가적 집단주의가 더 강하게 나타난다. 물론 민주주의의 도입에 따라 개인의 기본 권리를 강조하지만, 국가적 목표, 집단적 목표를 위해 개인의 권리가 상대적으로 우선순위에 밀리는 경향을 보인다.

평등과 행정의 관계를 논의할 때, 단순히 공공부문의 크기와 큰 틀에서의 특징만으로는 부족하다. 사실 평등의 가치가 행정에 적용될 영역은 너무나 많다. 평등과 행정에 관한 다른 논문에서 권혁주 교수가 주장했듯이, 롤즈의 정의론에서 제기되었듯이, 과연 우선순위로 모두에게 보장되어야 할 일차적 재화(primary goods)가 무엇인가에 대한 다양한 논의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할 것이다. 기본적 소득의 보장(최저생활보장)에서부터 시작하여, 보건의료, 여성의 사회참여와 모성보호, 교육에서의 기회의 균등, 사회적 이동성(social mobility), 장애인, 노인, 아동 등 사회적 취약계층에 대한 배려와 보호, 다양한 영역에서의 인권보호와 차별의 금지, 다양한 행정서비스 공급과 절차상에서의 평등, 사회적 약자들의 법률구조권 등등, 행정의 영역에서 평등의 문제를 다루어야 할 영역은 사실 무궁무진 하다. 사실 평등의 측면에서의 행정학 분야에서의 연구는 매우 취약한 실정이라고 할 수 있다. 행정철학이나 행정윤리적 차원에서 행정과 평등의 연계가 일차적으로 이루어져, 다양한 정책영역과 행정과정에서의 연구들로 확산되어야 할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형성된 복지 및 공공부문의 레짐적 특징 때문에, 공공부문과 행정의 영역을 축소시키고자 하는 신자유주의의 공격에 대한 대응 또한 다르다는 것이다. 공공부문이 크고, 시민들에게 다양한 공공서비스와 복지를 보편적으로 제공하는 국가일수록 신자유주의에 대한 불가피한 대응은 점진적이다. 반면에, 공공부문이 작고, 이미 시장의 영역이 컸던 영미계통의 자유주의 복지레짐 일수록 더욱 급진적인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수용한다는 것이다.

 

5. 소결: 한국적 맥락에서의 함의

이와 같은 민주주의, 평등, 행정의 상호관계를 통해서 우리는 한국행정에서 민주주의와 평등의 이슈를 이해하려고 할 때, 어떤 함의를 가질 수 있는가? 비교역사방법론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보편성과 특수성의 변증법적 관계에서 한편으로는 서구 선진국가들의 역사적 경험 속에서 민주주의와 평등의 보편성을 찾아내면서 그 특수성을 이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특수성을 이해하면서 그 보편성을 우리에게 적용해보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서구의 경우 체제형성, 산업화, 민주화, 복지화가 순차적으로 전개되었고, 그것들이 얼마간 바탕을 다진 후에 세계화와 후산업주의 등이 도래되었으므로 국가관료제가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여력을 비축할 수 있었는데, 한국 등 발전국가 들은 그렇지 못해 더 힘들고 혼란스러운 반응을 보인다.

베버리안 관료제는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이 되면서, 그 위협이 될 수 있는 게 사실이다. 야누스의 얼굴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서구 역사를 개관할 때 그것은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불가결의 요소였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아직 미성숙한 나라(이행기 혹은 공고화 과정에 있는 나라)의 경우, 전문적이고 유능, 합리적인 관료제의 창설, 정착은 필수적이다.

서구 관료제의 경우, 초기 베버리안 관료제가 정착하는 시기에, 정치적 위임자로부터의 이탈을 관료권의 이탈과 전횡을 막기 위해 이에 대한 통제기제를 마련했고, 아울러 관료제에 대한 지나친 정치개입과 관료제의 전문성과 능률, 그리고 정치적 중립성을 제고하기 위해 또 한 차례의 개혁을 거쳤다. 따라서 정치권력과 전문 관료제간의 갈등조정을 위한 바탕이 마련되었다. 이에 비해 발전국가들은 무소불위의 정치권력에 행정이 예속되거나, 혹은 그 비호와 정치부재 상황에서 관료권의 지나친 팽대만을 경험했을 뿐, 통제나 정체성을 갖추기 위한 역사적 갈등조정 기간이 없었다. 한국의 관료제는 발전주의 국가를 통해 베버리안 관료제가 형성되어 산업화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료제 통제의 해법으로 관료제의 전문성과 내부적 민주성을 강화시키기 보다는 관료제를 불신하고 축소 및 약화시키려는 NPM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해법을 쉽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은 자유주의가 전통적으로 강했던, 영미계통의 자유주의 국가들이 신자유주의적 해법을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비교해 매우 흥미롭다. 권위주의적 발전주의 국가 하에서 정치적 권력에 대한 행정의 예속화와 정경유착에 의한 관료제의 부패, 관료제의 권위주의적 속성 등과 같은 관료제의 부정적 측면이 우리 사회에 역사적 경험으로 깊게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국민적 정서를 떠나, 우리 관료제의 성장과 특성, 그리고 우리의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과정에서 관료제 역할의 공적과 과실, 그리고 민주주의와 관료제의 관계에 있어서 장단점을 객관적이고 학문적으로 평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신자유주의나 NPM은 그 시장주의와 관리주의의 속성 때문에 공적 공간과 공익이 존재할 여지를 좁히고, 시민을 고객화 하며, 무엇보다 베버리안 관료제의 해체를 겨냥해서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최근 크게 대두되는탈전문화와 정치화현상도 같은 궤적이다. 민주주의가 이미 확립된 서구 여러 나라의 경우, 신자유주의나 NPM의 위협은 그리 심각하지 않을 수 있다. 또 나라마다 자신의 필요에 따라 다양하게 수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권위주의적 발전주의 국가의 경험으로 정치권력에 대한 통제장치도 제대로 마련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서구 민주주의 발전의 초석이었던 베버리안 관료제의 기반마저 무분별한 손보기는 자칫 민주주의의 기반을 해칠 수 있다. 물론 신자유주의적 행정개혁의 장점을 무조건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NPM이 추구하는 개혁노력 중 분권화(decentralization)는 관료제의 민주화와 유연화를 위해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다. 특히 행정적 민주화를 위해 더욱 그렇다고 본다.

정치적 민주화는 행정적 민주화를 위한 기본 장치라고 본다. 권위주의적 정치권력은 행정을 예속하거나, 그를 과대 성장시켜 민주화에 대한 이반의 바탕을 마련한다. 그러나 정치적 민주화가 반드시 행정적 민주화를 보장하지는 못한다. 행정적 민주화를 위해서는 별도의 제도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때문에 행정적 민주화에서 정치권력과 전문관료제가 만나는 지점은 매우 중요하며, 여기서 양자간의 협업이 가능해야 행정적 민주화의 단초가 열린다. 행정적 민주화는 조직내적 민주화와 환경과의 교섭(외연)의 민주화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평등의 경우는 정치적 민주주의의 확립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민주주의는 정치적 평등을 기본 조건으로 하는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가 충실히 실행되고 제도화 된 후 참여민주주의가 확보될 때, 평등의 가치가 자연스럽게 부상한다. 민주주의는 시민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갈등을 조정하는 제도적 장치이기 때문에, 모든 시민에게 고루 참여의 기회가 주어지게 되면, 자연스럽게 서로의 이해갈등을 타협하고 조정함으로써 다양한 집단들의 이해관계들이 두루 만족될 수 있는 보편적 평등의 가치를 창출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서구의 선진 복지국가들, 특히 스칸디나비아 사민주의 국가들과 유럽대륙의 국가들의 경험이 이를 잘 보여준다.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 확고한 확립위해, 이해 당사자 간의 합의를 이룰 수 있는 조합주의와 지방자치 등 다양한 수준의 참여민주주의 장치가 발전되고, 이를 바탕으로 평등을 지향하는 복지제도가 발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역으로 형식적 민주주의가 부재한 가운데 실질적 민주주의를 강조하면 전체주의화 될 수 있고, 사회적 갈등과 정치적 불안정을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우리의 경우, 평등가치를 더욱 지향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민주주의 수준을 높여, 보다 성숙된 민주주의를 만들어 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우선 정치 담론에서 평등의 가치가 제기되고 보편화 되는 동시에 노사정 위원회, 분권화, 지방자치와 같은 주요 사회적 의제와 정책결정에 이해 당사자들이 참여하여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사회적 협약과 합의주의적 제도를 공고화 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이에 대한 충분한 담론의 형성과 사회적 합의가 아직 약하다.

 

IV. 한국행정의 역사적 맥락에서 본 민주주의와 평등

여기에서는 한국행정 및 한국행정학 발전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민주주의와 평등의 이슈가 어떻게 나타났고, 행정 및 정책, 그리고 행정학 연구에 어떻게 수용되었는지를 거시적 맥락에서 간략한 해석을 시도한다. 이를 통하여, 앞으로의 우리가 다루어야 할 문제제기와 연구과제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한국행정의 발전단계를 다음과 같이 크게 네 단계로 나누어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국가형성기(1948-1961)

이 시기는 미소 양극체제 아래서 분단국 대한민국이 건국하고 얼마안가 3년간에 걸친 한국전쟁(1950-53)을 치룬 후, 전후 복구와 국가체제 형성에 주력하던 기간이다. 이 시대의 국가기구는 식민통치의 유산으로 과대성장한 억압적 관료기구를 중심으로 짜여졌고, 의회, 정당, 선거 등 대의제적 정치과정을 대체로 허구화된 가운데, 반공보수주의적 권위주의 체제성격이 두드러졌다.

대체로 정치와 행정은 미분화된 상황에 있었다. 이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과 일제 관료출신의 자유당 관료들은 과두(寡頭)지배체제를 형성하고, 관료제에 대하여 막강한 영향력을 구사했다. 1공화국 관료제는 일제식민지 시대의 관료제의 유산으로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베버리안 관료제의 기본 틀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 기능은 전형적인 과두제적 체제유지형 관료제로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한 채 국가체제의 기초형성과 체제안정을 추구하는데 주력하였다. 따라서 민주적 가치와 평등의 문제는 고려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당시 정치 엘리트나 관료 엘리트 그 누구도 역사의 발전이나 사회변동에 대하여 뚜렷한 관점을 형성하지 못했고, 따라서 스스로를 발전의 주역으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부의 토지개혁은 지주계급의 몰락과 자작농의 대두를 통하여 계급구조의 변화 내지 사회적 평등에 기여했고, 훗날 경제개발의 토대를 세웠다. 불붙는 교육열도 이와 밀접히 연맥 된다. 1950년대 후반에 들면서 국가관료제는 서서히 경제개발이라는 국가과제에 눈을 돌리게 된다. 1958, 부흥부 산하 산업개발연구원(KID)를 중심으로 외국의 자문을 받아 장기경제개발계획을 준비하는 등, 관료제 내부에서 발전주의 국가의 싹이 움튼다.

초기 국가형성 당시의 행정학에 대한 인식은 주로 일본식민지경험의 영향을 받아 대륙의 법학체계 내에서 행정과 행정법 중심의 행정학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미국 행정학이 도입되고, 한국 행정학의 주류로 자리 잡는다. 초기 한국 행정학은 행정의 능률에 역점을 두고 연구를 관리기술적 차원에 한정함으로써, 한국행정의 문제를 이론적, 본질적으로 설명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민주주의, 평등과 같은 민주주의 정부의 본질적 가치를 행정현상의 일부분으로 보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한국 행정학 연구의 태두인 정인흥 교수는 자신의 저서 <정치학>(1954) <행정학>(1956)에서 한국은 아직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않았기 때문에 행정학의 주요 과제는국가권력의 문제와 기능적 문제를 종합하는 것임을 강조했다(안병영, 2006). 놀라운 통찰력이 아닐 수 없다. 그의 궁극적 관심은정치적 민주화의 선행을 통해 정치권력 내지 관료제로부터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고, 개인의 행복이 극대화 하는 것이었으며, 행정학도 마땅히 이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의 이러한 선구적 고민은 그의 제자인 박동서 교수에 의해 이어진다. 이처럼 이들 한국행정학의 선각자들은 오늘날 민주화 시대에 한국 행정연구에서 고민해야 할 가장 중요한 화두 중 하나를 명백한 메시지로 제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중요한 관점은 이후 권위주의적 발전국가가 대두되면서 빛을 보지 못하고 발전행정을 중심으로 기능적 학문으로서의 행정학의 부흥기를 맞이한다.

 

2. 권위주의적 발전국가 시기(1961-1987)

이 시기는 5.16 군사구테타 이후 군정 및 제3공화국(1961-1972), 4공화국(1972-1980), 그리고 제5공화국(1980-1988)을 포괄하는 18년간의 권위주의 정권의 시기이다. 동시에 후발 산업화국가들이 선진국 따라잡기(catch-up)의 역사적 과정에서 추구하는 전형적인 모형인 <발전주의 국가> 내지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 형성이 그 정점에 이르고, 다시 해체의 길을 밟게 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발전국가를 이념형으로 볼 때, 크게 3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Johnson, 1972; Woo, 1998; Evans, 1995; Chung, 2002, 양재진, 2005). 첫째로, 발전국가는 주로 후발산업화 국가에 나타나는 국가형태로서 초기 국가형성과정에서 베버리안 관료제의 형성이 그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둘째로, 베버리안 관료제를 기초로 장기적으로 경제계획을 세우고 조정하는 선도기구(pilot/super agency)가 만들어지고, 이를 중심으로 국가가 장기적 경제발전이라는 국가목표 추진하는 가운데 그 사회의 주도적 사회계급이나 세력으로부터 자율적인 정책목표를 세울 수 있어야 한다. 셋째로, 국가가 의도한 정책을 실천할 수 있는 제도, 정책수단 및 다양한 사회조직과의 네트워크를 갖추어야 한다. 즉 발전국가의 중요한 제도적 조건은 베버리안 관료제를 기초로 한연계된 국가자율성(embedded state autonomy)'과 이에 상응하는국가능력(state capacity)'을 함께 갖추어서 장기적 경제발전을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경우, 1960년대 초에 5.16 군사구테타 이후 군정시기를 거쳐 경제발전을 위해 경제개발계획을 세우고 조정하는 선도기구로 경제기획원이 설립된다. 그리고 일련의 행정개혁을 통해 베버리안 관료제가 형성됨으로써 발전국가 형성의 초석을 쌓는다. 그리고 국가는 산업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재벌 및 산업자본가의 역할을 중시하고, 금융지원, 세제개혁 등을 통하여 이들을 정책적으로 강력히 지원한다. 이러한 과정들이 권위주의적 정치 하에서 국가와 재벌이 긴밀하게 연계되고 노동과 시민사회를 억압ㆍ배제하는 보수주의 지배연합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면서 추진되었다는 것이 한국의 발전국가의 중요한 정치적 특성을 갖는다.

따라서 이 시기의 국정이념은 민주주의의 주요 가치인 자유와 평등의 이념보다는 경제발전과 안보였다. 이에 따라 발전관료제는 철저하게성장-분배’ 2분법에 의하여 총량적 경제발전에 주력하였기 때문에 분배와 복지문제에 대해서는 소홀했다. 따라서 경제총량이라는 점에서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으나, 산업부문간, 계층간, 지역간 구조적 불균형이 심화되었으며, 정경유착과 재벌경제, ‘민중부문의 소외와 박탈, 크로니즘(cronysm)의 팽배, 도덕적 해이와 부패 등이 발전위기 내지 억압적 발전주의의 부정적인 제도적 유산을 낳았다. 즉 한국의 발전국가는 <억압>에서 기인하는 정치적 민주주의의 결손과 <발전주의>에서 비롯되는 사회적 형평성의 결손 때문에 줄곧 체제 정당성에 도전을 받는다.

발전주의 국가시대에 한국의 행정학은 정치적 민주주의 결손과 행정의 민주화라는 문제의식보다는 발전을 위한 기획과 제도형성, 그리고 정책적 자문역으로서 기여를 하게 된다. 이른바 발전행정이 그 전성기를 맞는 가운데 권위주의적 정권의 자문, 용역 등에 대거 참여하여 <관변학문>적 성격을 강화하며, 이른바 <근대화의 도구>로서 기능을 수행한다(백완기, 2005).

이러한 한국행정학의 모습은 아직 한국에서 행정학의 역사가 일천하기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학문적 규율과 패러다임을 성립하지 못한데서 비롯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탈정치화를 강조하는 기능주의적 미국행정학이 한국행정학의 주류를 점하고 있는데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다. 미국행정학의 도입은 한편으로는 한국행정의 근대화와 행정의 관리능력의 증진을 가져오는데 기여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행정학의 중요한 학문적 특성인 가치중립성과 기능주의적 특성 때문에 한국 행정연구에 있어서 정치와 행정 간의 관계, 그리고 민주주의의 주요 가치인 자유, 평등과 행정과의 연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소홀하게 만드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빚었다.

주지하듯이 미국행정학은 이미 제도화된 미국식 다원주의적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전제하고, 그 틀 위에서 기능적이며 관리적인 측면에 연구에 초점을 맞추어 발전한 학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행정학의 특징을 한국학자들이 수용하고 한국에 접목하는 과정에서 한국 행정학계는 가치중립성을 방패삼아 애써 정치권력의 문제, 민주주의의 문제를 외면하면서, 권위주의체제 내에 안주하며 그와 제휴, 연립해 왔던 것이다. 그동안 한국 행정학계는 미국행정학을 한국적 맥락에 수용, 이식하는 과정에서 <토착화>, <한국화>에 대한 자성적 문제제기가 있었지만, 한국의 정치적 맥락에 대한 깊은 성찰은 거의 없었다(이종범, 1977; 안병영, 1987; 백완기, 2005).

한국의 발전주의 국가는 유신체제에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면서 그 절정을 이루다가, 유신체제의 붕괴와 함께 서서히 해체의 길로 들어선다. 잠시 민주화 시기가 있었지만, 광주사태로 이어지면서 전두환 정권이 등장으로 다시 권위주의 체제로 회귀하면서 제5공화국이 세워진. 5공화국은 유신체제의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강력한 긴축 구조조정(산업구조조정, 긴축재정 및 임금억제)과 경제자유화 정책(무역개방 및 금융자유화)을 실시하면서, 당시에 이미 서구 선진복지국가들 사이에 제기되었던 신보수주의 내지 신자유주의 사조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Choi, 1987; 하연섭, 2006; Chung, 2002). 그러나 억압적 정치 하에 섣부른 긴축적 구조조정은 사회적 약자인 농민과 노동자의 저항을 불러왔고, 끝내 그간 산업화의 수혜자이기도 했던 중산층이 민주화의 대열에 합류하면서, ‘아래로부터의민주화라는 중요한 역사적 계기를 마련한다.

한국에서 억압적 발전국가의 형성과 이후 민주화 과정은 민주주의와 관료제와의 관계설정에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우선 베버리안 관료제를 기초로 한 발전국가적 특징은 한국의 산업화 성공의 중요한 제도적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발전국가의 억압적 성격과 병리적 현상은 일반적인 국민정서 안에 관료제 및 행정에 대한 강한 불신을 심었다. 이러한 발전국가의 '성공의 위기'는 한국 사회에 지배적 이념 수준에서 국가와 공공부문의 축소를 강조하며 실질적 민주주의의 후퇴를 의미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개혁과 신자유주의적 행정개혁이 쉽게 수용되는 역사적 아이러니를 낳는다.

 

3. 민주국가 이행기(1987-1998)

1987년 민주항쟁은 한국 민주주의역사의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다.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도정은 그리 순탄치 않았으나, 이제 적어도 경쟁적 자유선거가 정착되었고, 군이 문민통제 하에 들어갔는가 하면, 일정수준의 정치적 자유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이미 공고화에 이르렀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러나 민주화 이행이 시작된 이후, 시민사회가 그 정치적 공간을 크게 확장하였고, 의회 또한 얼마간 활성화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정치의 동력인 정당정치는 아직도 취약하기 짝이 없고, 핵심 정치적 영역에서의 실질적 민주주의의 정착은 아직 요원하다. 행정제도의 운영과 그 안에서 움직이는 중요한 행위자들의 행태에서 민주주의의 에토스 대신 권위주의적 발전국가 시대의 부정적 잔재가 그대로 남아있다.

이러한 특징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한국의 민주화의 초기 이행기적 특징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에서의 민주화의 개막은아래로부터의 충격에 의해 촉발되었다. 그러나 민주화의 실제적 이행과정은 귄위주의 시대의 지배엘리트와 야()측 정치엘리트간의 보수주의적 정치협약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비교론적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의 민주화는거래에 의한 (민주화)이행“(transition by transaction)의 경우라고 말할 수 있다(Maiwaring, 1992). 이러한 민주화 전이는 전환과정에서 오는 격돌과 희생을 크게 줄일 수 있었던 반면, 그 태생적 한계 때문에 권위주의체제의 척결과 민주개혁에 있어서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권위주의체제의 청산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그 성과는 대체로 미완(未完)에 그쳤고, 그 수준도 미흡한 것이었다. 그 때문에 제6공화국의 시작을완화된 군부정권혹은 기껏의사 민주주의체제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안병영, 2002).

이와 같은 한국의 민주화 초기 이행기의 특성은 신자유주의 아이디어를 더욱 한국사회에 공고화시키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노태우 정권은 기존의 보수주의 지배연합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억압적 발전국가 이후에 성장과 복지와의 관계와 국가와 시장관계를 재정립하고자 하는 창조적 반성이 없이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던 단순한 경제개방과 자유화의 길을 재촉했다. 그런가 하면, 민주화 세력에게도 민주화는 정치적 억압의 본산이었던 발전주의 국가의 해체를 의미하였다. 따라서 민주화를 통해 국가의 억압적 기능은 많이 약화되었지만, 정경유착, 부패, 대기업들의 도덕적 해이 현상과 같은 발전주의국가의 병리현상은 지속되고 오히려 더욱 강화되었다.

따라서 집권한 제도권 내에서 발전주의 국가의 공과에 대한 창조적 반성과 발전주의 이후에 대한 대안적 모델에 대한 아이디어와 담론이 형성될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민주주의를 더욱 성숙시키고 민주복지국가로 가기 위한, 성장과 복지의 조화, 자유와 평등에 대한 변증법적인 인식에 따라 국가와 시장, 국가와 시민관계의 재정립에 대한 아이디어와 담론형성의 장이 크게 부족하였던 것이다. 어쨌든 민주화는 나름대로 평등에 대한 정책적 관심을 만들어냈다. 복지제도의 측면에서 민주화는 사회보험제도의 확대를 가져왔다. 의료보험제도가 전국민제도로 확대가 되었고, 연금제도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복지제도의 확대방식은 질적 전환 없이 이전의 국가재정의 최소부담과 최소한의 사회적 위험 보장을 강조하는 발전주의적 사회보험체제의 연속이었다.

김영삼문민정부는 출범직후신한국건설의 기치아래 군부의 탈()정치화, 고강도의 사정, 공직자의 재산공개, 금융실명제의 도입, 통합선거법과 정치자금법 등 정치관계법의 개정 등 일련의 개력조치를 강도 높게 수행하였다. 김영삼 정부의 개혁정치는 군을 확고하게 문민통치하에 둠으로써 권력의유보적 영역을 없앴고, 정치적 자유와 다원성 제고를 위한 다양한 정치개혁을 통하여 민주주의의 절차적 합리성을 높이는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경제정책은 기본적으로 당시의 대세였던 신보수주의/신자유주의를 추종하였다. 세계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그 정책적 역점이 시장주의와 경제적 효율성에 주어졌고, 그 결과 복지나 분배문제 등 실질적 민주화를 위한 개혁의제가 뒷전으로 밀리게 되었다. 이렇게 볼 때, 김영삼 정부의 개혁정치는 정치적 내지 형식적 민주주의의 진전에는 긍정적으로 기여하였으나, 그것이 정경유착, 부정부패, 지역주의, 연고주의 등을 타파하는 정치경제적, 문화적 차원의 민주화로 심화되지 못했고, 특히 사회경제적 내지 실질적 민주화에는 별로 기여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김영삼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세계관은 행정의 영역에서도작은 정부론’, 또는작고 강한 정부라는 영국의 대처주의식의 신자유주의적 행정개혁이 도입된다.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 전략은 국가구조에 있어서도 실질적인 발전주의 국가의 해체를 재촉했다. 우선 한국 경제발전과정에서 기획과 조정의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던 경제기획원을 폐지한다. 이어 그동안의 한국의 경제성과를 토대로 선진국 클럽인 OECD의 가입하고, 그 가입 조건에 따라 더욱 급격한 경제자유화와 금유규제완화를 실시한다. 이는 결과적으로 IMF 외환위기의 제도적 토대를 마련한다. 따지고 보면, 외환위기는 자율적이며 합리적인 시장의 작동기제가 제도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경제를 감독하고 규제해야하는 국가의 역할을 급격히 무장해제 시켜 버린 데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경제자유화와 시장의 확대를 함에 있어서, 다시 시장을 규율하고 조정해야 하는 국가의 역할에 대한 인식이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이념적 담론의 수준에서는 한국의 외환위기는 발전주의 국가의 폐해인 과도한 규제와 부패, 그리고 관료제의 무능으로 인식되는데 그쳤다.

민주화 이후 한국행정학계는 적어도 외관상 전성기를 맞는다. 학자 및 학회회원수의 증가와 더불어 주제와 방법론에서도 매우 다양해진다. 특히 지방자치 실시와 연관하여, 지방정부, NGO, 새로운 거버넌스(new governance) 등 이슈 또한 매우 다원화 된다. 그런 가운데 세계적 신자유주의 사조를 그대로 수용하면서 특히 미국과 영국의 영향으로 신공공관리론이 급속도로 유행하기 시작한다. 반면 거시적 차원에서 세계화와 국가역할에 대한 논의는 본격화되지 않았고, 학계의 관심 수위도 낮았다. 발전국가의 부분적 해체과정에 대한 구조적 설명이나, 그에 대한 거시정책적 대응에 대해서 논란이 별로 없었다. 그런가 하면, 민주화의 이슈는 자유를 강조하는데 그쳤고, 그동안 억압되어 왔던 인권 및 기본권의 보장, 그리고 평등의 이슈는 없었다. 정치적 민주화에 있어서 참여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정권차원의 문제의식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더 나아가서, 정치적 민주화의 성숙에 따라 증가하는 시민참여의 욕구와 다양한 행정수요에 대응할 수 있는 관료제 내부적 차원에서 행정적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

 

4. 국가재편기(1998-)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 이르는 최근의 시기는 민주화 이행기에 이어 국가, 시장, 시민사회 관계에서 새로운 관계정립과 그런 가운데 국가역할을 재설정해야 하는 중요한 재편기(restructuring)라고 할 수 있다.

우선 김대중국민의 정부의 출범은 한국 정치사에서 여야간의 수평적 정권교체라는 점에서, 그리고 기존의 다른 정권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진보적 성격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그리고 미증유의 경제위기와 IMF 차관 조건아래서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불가항력적으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경제구조조정은 한국경제체제와 국가의 역할 변화에 대한 중요한 전환점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남북화해와 북핵위기, 동아시아에서 한국의 위상이라는 대외적인 측면에서도 국가의 역량과 역할을 재정립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다.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개혁은 IMF라는 외부적 압력도 있었지만, 김대중 정부의 의도적인 선택이었다. 김대중 정부 역시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한국에서의 발전주의의 위기에 따른 신자유주의 수용의 큰 흐름에 한 가운데 있었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의 경우, 이전의 정부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진보적 세력과 민중적 지지가 그 주요한 정치적 토대였기 때문에, 평등이라는 맥락에서 이전의 정권과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민주주의의 공고화와 연관하여 김대중 정부의 국정관리에서 두드러진 것은 경제정책과 산업정책, 그리고 노동시장정책에 있어서는 신자유주의적 접근을 하면서도, 사회복지정책에 있어서는 국가개입의 증대와 복지확대를 꾀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원적 접근은 신자유주의적 경제구조개혁을 보상적(補償的) 복지개혁과 조합하는 방식으로, 신자유주의정책이 결과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었다.

김대중 정부의 복지개혁의 가시적 성과는 4대 국가사회보험(고용, 연금, 산재, 의료 보험)을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확대적용하고, 기존의 공공부조제도를 쇄신하여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를 실시한 것, 그리고 사회협약기구로노사정위원회를 창설하여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복지개혁의 기본틀에 대한 사회적 합의에 나선 것 등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간 민주화의 진척으로 시민사회가 활성화되면서 이러한 개혁과정에서참여연대등 진보적 시민단체들의 정책결정과정에의 참여가 활발해졌다는 사실이다. 이는 참여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유의할 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에 의해 여성정책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다. 여성부의 신설을 통해 여성의 사회적 참여와 양성평등에 대한 정책적 관심이 증가한다.

결과적으로 볼 때, 김대중 정부는 복지개혁 등을 통하여 사회경제적 내지 실질적 민주주의의 진전에 얼마간 기여하였으나, 실질적 민주주의가 제도화되는데 필요한 정치개혁 차원에서는 별로 기여한 바가 없다. 후자의 실패와 연관하여 간과하기 어려운 것은 김대중 정부의 정치 속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진보주의와 연고주의>의 이중주(二重奏)이다. 그가 추구했던 개혁정치는 이념을 실용주의적으로 발현시켜 줄 수 있는 합리주의와 결합되지 못하고 구래(舊來)의 연고주의와 접목됨으로서 소기의 결실을 맺기 어렵게 만들었다. 연고주의는 합리성의 결여로거버넌스의 일관성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개혁정치에 저항하는 수구세력 및 부정부패와 연계되어 개혁정치의 명분과 실질을 두루 훼손하게 된다.

한국의 민주화는 아직까지도 참여민주주의를 거쳐 사회민주주의로 가기에는 아직 그 여정이 멀다. 김대중 정부의 불안정 지배연합과 연고주의 속성 때문에, 사실상 성숙된 민주주의와 평등의 가치가 시민사회에 주요 어젠더로서 헤제모니를 갖게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엇보다 지역주의와 고질적인 후견인-고객 중심의 정치구조를 타파하기 위한 정치개혁에 실패하였기 때문에 제도권 내에서 참여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동력을 마련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김대중 정부 후반기에는 진보적 성격은 쇠퇴하고 보수주의-기득권 세력의 부활을 가져온다.

그러나 보수주의-기득권세력의 부활은 김대중 정부를 계승한 노무현 정부가 등장함에 따라 좌절된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 역시, 불안정 지배연합의 연속이었고 견고한 정치적 지지기반을 가지지 못했다. 노무현 정부의 지지세력은 이념적으로나 계급적 이해관계에서 이질적인 다양한 집단의 혼합이었다. 어떻게 보면, 노무현 정부의 집권은 한국의 압축성장 과정에서 지속되어온 보수주의적 지배연합의 산물인 우리 사회 전반적인 기득권층에 대한 도전의 승리였다. 그것이 노무현이라는 인물적 특성과 결합되면서 지지세력이 모아지고 보수세력의 부활을 저지할 수 있었다.

노무현 정부는 환경변화에 대한 시대적 흐름을 이해하면서 참여민주주의, 국가균형발전, 정부혁신, 동반성장론 등 새로운 국정과제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집권 직후에는 한국의 특수한 맥락에서 이념적으로 더 첨예한 한미관계, 북핵위기, 이라크 파병 등 외교, 안보적 이슈들이 전면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민주주의와 평등에 대한 정책적 이슈들은 정권 후반부로 밀려나게 된다.

노무현 정부는 국가보안법, 과거사규명법, 사립학교법, 언론관계법 등 이른바 ‘4대 입법의 성취를 위해 전력투구를 하였다. 그들은 이들 이슈들이 실질적 민주화와 평등추구의 진보적 체제개혁을 위해 앞서서 해결해야 할 가장 절실한 과제로 여겼다. 그러나 여야간의 격돌과 국회파행 등을 거치는 등 엄청난 정치적 소모전을 치렀으나, 끝내는 소기에 목적의 일부만을 달성하는데 그쳤다. 실제로 이들 입법안들이 국정개혁을 위해 가장 선행되어야 할 의제였던가에 대해 이론이 있을 수 있다. 또 이들 이슈들이 처음부터 정치적, 이념적으로 갈등의 여지가 큰 예민한 의제들이었는데, 참여정부는 사회적 합의 형성을 위한 보다 정밀한 노력 없이 의식만 앞서 밀어붙이기 식으로 접근하는 정치적 미숙을 연출했다.

참여정부는 저출산ㆍ고령화사회의 도래와 양극화문제에 대해 강력한 문제제기를 했다. 성장과 복지의 조화를 표방한 장기 계획인 <비전 2030>도 그 노력의 산물이다. 아울러 참여정부는 과거 발전주의 유산인 성장과 복지의 이분법을 극복하기 위하여 복지를 사회적 투자(social investment)의 개념으로 제시한다. 그런 가운데, 지금까지 축소지향으로 경도된 국가역할의 재정립의 필요성을 인식한다. 한국경제의 지속적인 성장, 양극화문제, 저출산ㆍ고령화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필요한 국가재정의 증대 필요성과 국가역할을 다시 조정한다는 것이다. 전체적 균형과 현실성이 떨어지고, 정교하게 다듬어 지지 않았다는 문제점은 있으나, 참여정부는 국가재편이라는 거시적 국정과제를 가지고 힘겨운 씨름을 한 게 사실이다.

반면에 행정개혁의 측면에서는 여전히 신자유주의적 신공공관리론에 매우 집착한다. 특히 관리적 측면에서 성과평가와 팀제도의 도입, 인사제도의 개혁 등을 시도하면서, 다양한 관리적 측면의 신공공관리적 개혁을 통해 베버리안 관료제를 성과주의적 관리주의 관료제로 전환시키려 한다. 그리나 이러한 신공공관리론은 의도하지 않았던 부작용들을 낳고 있다. 개혁의 형식화와 베버리안 관료제의 전문성과 자율성을 훼손시킴으로써 관료제를 정치화 시키는 것이다. 이미 신자유주의적 행정개혁을 실시하였던 선진국가들의 경험적 연구는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효과가 별로 없다는 것으로 드러났다(Suleiman, 2003; ch. 10). 평등성을 강조하면서 투명하고 유능한 관료제를 가진 국가일수록 정부 및 관료제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오히려 더 강하다는 점을 바르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진보성향의 이른바 민주화 세력이 신자유주의적 행정개혁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들에게 관료제는 여전히 강한 불신의 대상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모든 문제의 원인을 관료제와 행정의 탓으로 돌리려는 정치엘리트들의 비난회피정치(blame avoidance politics) 현상이 그들에게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에 이어 노무현 정부에 있어서도 관료제를 품에 안고 개혁을 유도하면서 그들의 전문성과 합리성을 극대화하여 활용하기 보다는, 비난회피의 대상으로 또는 적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다. 인사문제에 있어서도 관료제의 민주적 통제를 위해 일정수준의 정치적 임용(소위 코드인사)은 필요하나 지나친 남용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는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많은 개혁과제들 중 의도하지 않았던 많은 실패사례들을 통하여 우리는 개혁의 성공을 위해 정치적 영역과 행정적 영역이 만나는 접점을 슬기롭게 관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려준다. 아울러 실제 정책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합리적 관료제와의 협조와 그들의 자발적 혁신이 성공의 전제가 된다는 사실을 학습하게 된다. 이는 정치적 민주화와 함께행정적 민주화에 대한 바른 인식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현실세계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이 부족한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를 연구하고 해법을 제시하지 못한 우리 행정학계의 책임일 수도 있다.

이에 대해 박동서 교수는 현 한국행정의 문제는영미의 감축관리가 급선무가 아니고, 우리의 당면과제, 국정이념에 비추어 볼 때, 법치, 권력기구의 중립화, 정책결정의 민주화를 통한 합리화 및 부패의 감축이 현 단계의 처방이라고 제시하고 있다(박동서, 1999: 34). 한국 관료제가 안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 그 미해결의 숙제를 외면한 채, 영미학계가 제시하는 관리기술적 처방에만 매달린다고 근본적인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이는 1950년대 정인흥 교수가 제시한 한국행정의 좌표로 제시했던 관료제의 민주화의 화두가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V. 결론: 한국행정의 진로와 미래연구과제

지금까지 한국행정연구에 있어서 민주주의와 평등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이론적 논의들을 정리하고 한국행정의 경험적 차원에서 시대적 변화에 따라 민주주의와 평등의 문제가 어떻게 다루어져 왔고, 어떤 문제와 한계들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검토해 보았다.

한국행정연구에서 민주주의와 평등에 대한 관심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소홀히 다루어 진 게 사실이다. 그 연원을 따져 볼 때, 한편으로는 우리의 행정학이 기능주의적 관리적 차원에 초점을 더욱 둔 미국행정학을 도입한 것에도 기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적 맥락에서 발전주의 국가의 성공의 위기라는 역사적 현실에 기인하기도 한다.

우리의 경우 발전주의 국가 형성과정을 통해 산업화의 성공과 민주화의 초석인 베버리안 관료제의 발전을 가져온 반면, 바로 우리의 억압적 발전주의 국가의 특성 때문에 행정의 정치적 종속과 정경유착, 그리고 부패라는 부정적 현상도 함께 낳았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민주주의의 성숙과 평등의 가치와 역행하는 신자유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되는 역사적 아이러니를 갖게 된 것이다.

우리는 국가형성과정에서, 그리고 산업화와 민주화의 과정에서 관료제와 행정의 역할을 좀 더 객관적으로, 또 과학적으로 이해하는데 소홀했다. 서구 유럽국가들의 경우, 역사적으로 산업화 초기에 민주화가 실현되고, 민주주의가 참여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로 성숙하면서, 민주복지국가를 만들어 냈다. 그런 가운데, 전문적이며 합리적인 베베러리안 관료제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최근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압력에도 점진적인 대응을 하면서, 그 근본 틀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다. 오히려 신자유주의적 해법을 급진적으로 도입했던 영미계통의 국가들이 초기에는 성공사례로 인식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민주주의와 평등의 문제에서 많은 문제점들이 나타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우리 사회에는 신자유주의적 경제해법과 행정개혁이 지배적 담론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화 시대에 신자유주의만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신화를 깰 필요가 있다. 정치적 민주주의 성숙과 평등의 가치가 우리 사회에 더 확대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보다 더 절실한 것은 공공성에 대한 인식이 투철한 유능한 관료제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정치적 민주주의 성숙과 행정적 민주주의는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국가와 시민사회에서 주요 행위자들의 끊임없는 문제의식과 투쟁의 결과로서 가능하다. 정치적 민주주의가 참여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로 성숙되어야 행정적 민주주의도 가능하며, 정책과 행정의 영역에서 자유와 평등의 변증법적 적용인 민주복지국가로의 진화가 가능하다. 현재 신자유주의 세례는 하나의 신화일 뿐이며, 슬기로운 극복이 요구되며, 또 그것은 가능한 일이다.

우리 행정학계에 절실한 연구과제는 한국적 맥락에서 민주주의와 행정과의 관계에 대한 역사적 연구이다. 그것 없이 민주주의의 다양한 수준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새로운 환경변화에 대비할 수 있는 국가와 시장, 국가와 시민관계의 재정립은 가능하지 않다. 아울러 민주주의와 평등의 가치를 행정현상에 도입하기 위한 행정철학에 대한 좀 더 깊은 연구도 필요하다. 이러한 지적 노력은 한국행정 특유의 새로운 거버넌스 모형정립에 견고한 토대를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다양한 방법론과 수준, 그리고 영역에서 파편화되면서 진행되고 있는 행정학자들의 귀중한 연구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하면서, 민주주의, 평등, 행정이라는 문제의식과 대안들에 대하여 서로 공유할 수 있는 담론의 장이 형성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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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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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jaket terbaru 2012.11.07 16:32 Address Modify/Delete Reply

    이 게시물은 웹 프로그래머와 관련된 모든 새 개인 홈 페이지의 지원에 좋은 결실이며 그들이 연구하고 연습을 수행해야합니다.


  전에 대학에 나갈 때 나는 아침에 출근하면 으레 교수 휴게실에 들려 우편함에서 각종 우편물을 한아름 안고 연구실로 향했다. 가끔 반가운 편지나 주문한 책, 유익한 자료도 있지만, 대체로 별 쓸모없는 자료들이 대부분이고,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선전물도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배달된다. 그때부터 내가 연구실에서 하는 첫 번째 작업은 필요한 자료를 고르는 일이다. 한 마디로 버릴 것은 버리고, 챙길 것은 챙기는 작업인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버릴 것을 제때 과감히 버리는 것이다.


  
우선 잡다한 선전물이나 한 눈에 불필요한 자료나 문건은 그냥 휴지통에 넣는다. 그리고 나면 내게 크게 도움이 됨직한 것부터 그런대로 쓸모가 있는 것, 그리고 당장엔 별 필요가 없지만 언젠가 참고가 될 수 있어 보이는 것 까지 다양한 종류가 남는다. 욕심 같아서는 많은 것들을 거두고 싶지만 실제 내 연구실 공간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잡다한 자료가 훗날 오히려 짐이 된다는 그간의 경험 때문에 자료 선별과정에서 나름대로 신중을 기하게 된다.


  
곧 제법 큰 휴지통에 버려진 자료들이 수북이 쌓인다. 그리고 나머지는 일단 필요한 정도에 따라 두어 뭉텅이로 나눠놓고 하나하나 다시 살펴본다. 조교에게 “혹시 자네 이것 필요한가” 물어 건네주기도 하고, 어떤 것은 휴지통 가까이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그러다가 가끔 의외의 수확에 쾌재를 부를 때도 없지 않다.


  
그런데 당장 버리기 아까워 여기저기 꾸겨 넣었다가 나중에 책상부터 서가, 연구실 바닥까지 잡동사니 천국을 만들기 일쑤다. 그렇게 되면 산더미처럼 쌓인 별 쓸모없는 자료의 숲, 그 미로 속에서 제대로 된 것 하나를 찾아내려면 온갖 고생과 시간낭비를 해야 한다. 결국 이들 자료들 대부분은 내손 한번 닿지 않은 채 몇 년 만에 한번 하는 연구실 총정리 때 한몫에 버려지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자료를 고르면서 항상 스스로에게 되뇌던 말이 “버리자, 과감히 버리자”다


  
돌이켜보면 젊은 나이에는 일에 대한 욕심 때문에 이것저것 많이 챙겼던 것 같다. 그러다가 정년 가까워지면서 보다 많은 것을 제법 과감히, 그리고 별 망설임 없이 버렸던 기억이다. 적은 것을 더 채우려고 애쓰는 것보다 크게 버려 스스로를 비우는 것이 더 슬기롭다는 것을 몸소 체득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서 확실히 버릴 것이 많아진다. 여년이 길지 않으니 일을 더 벌리기 보다는 줄여야 하고, 거기에 맞춰 욕심도, 집착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훨훨 털고 한껏 비워 삶을 더 단순하게, 그리고 소박하게 만드는 것이 노년의 자연철학이 아닐까 한다. 거기에는 순리대로 사는 인생의 아름다움이 있다


  
같은 맥락에서 볼 때, 나이가 들어가면서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이 노욕이 아닌가 한다. 노인이 <제 일>을 찾아 그 일을 열심히, 보람 있게 하는 것은 노욕이 아니다. 문제는 온갖 세속에 대한 늙은이의 헛된 욕심과 추한 집착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욕되게 하고 주위를 어지럽게 만든다. 때문에 노년의 아름다움은 노욕에서 벗어나서 자신을 온전히 비우는 데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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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heap nfl jerseys 2012.10.17 12:21 Address Modify/Delete Reply

    어느정도 무감각해진답니다~

다산초당에서

포토갤러리 2010. 7. 14. 10:04 |

  다산은 이 땅의 모든 사회과학자들에게 가장 많은 영감을 불어넣는 큰 스승이다. 여기가  긴 유배시절, 처절한 개인적 아픔 속에서도 나라의 앞날과 민생을 걱정했던 바로 그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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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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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wholesale jerseys 2012.10.12 18:28 Address Modify/Delete Reply

    해당 URL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면 누구나


이미 학기도 저물고 내 경우 종강도 했다. 이번 학기가 정년을 앞둔 마지막 학기이니 대학강단 에서의 내 역할은 사실상 끝난 것이다. 처음 시간강사로 대학 강단에 선지 42년, 전임교수 생활 35년의 긴 여정이 이제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다. 얼마간의 아쉬움이 남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그 보다는 홀가분한 마음이 앞선다. 이제 정말 자유로운 영혼으로 얼마 남지 않은 <내 시간>을 갖게 되었다는 생각에 교수 초년병일 때처럼 가슴이 부푼다.

이 지면을 통해 행정학과 학생들에게 마지막 강의삼아 학창생활을 하는데 유의해야 할 몇 가지 당부를 하고자 한다. 그래서 제목도 종강록이라 정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 데 다섯 가지로 줄였다.

첫 번째 부탁은 <초심을 잃지 말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처음처럼> 살라는 얘기다. 큰 맘 먹고 처음 시작했을 때의 꿈, 목표, 희망, 열정, 의욕을 잃지 말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무엇보다 긴장과 결의가 있다. 그것은 새벽 창문을 열고 처음 느끼는 신선한 찬 공기처럼, 우리를 무섭게 흔들어 새로 깨우는 힘이 있다. 초심에서 멀어져 가는 자신을 다그치며, 초심으로 회귀하는 노력을 줄기차게 계속해야 한다. 그것 없이는 우리는 일상의 늪에 빠져 <그날이 그날>인 삶을 살게 된다.

두 번째 부탁은 <deep play를 하라>는 것이다. 매사에서 피상적인 것, 겉치레하는 것, 상투적인 것을 피하고, 가능하면 본질에 접근하는 노력과 진지함, 의미 찾기, 파고들기를 얼마간 내면화할 필요가 있다. 요새 많이 쓰는 말로 진정성이 배어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게 좋은 것>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사회는 <deep player>들에게 사회적 신뢰로 보상한다.

세 번째 부탁은 <가까이에서 행복을 찾자>는 것이다. 바로 내 주위에 행복의 값진 실마리들이 곳곳에 있다. 내 가족과 이웃들, 집근처, 통학 길, 친구들이 모두 내 행복의 보금자리들이다. 그것들을 그냥 스쳐가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연세대학교가 제공하는 수많은 기회들을 고르게 <착취>하자. 자과(自科)중심의 강의나 교육과정에 파묻히기 보다는 폭넓은 강의선택을 하고, 교내에서 일년 내내 진행되는 각종 국제회의, 세미나, 특강에 관심을 기울이고, 도서관의 각종 프로그램, 서클활동, 연구모임에도 선택적으로 참여하자. 아직도 꽤 남아있는 연세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자신만의 산책로를 개척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네 번째 부탁은 <시간을 관리하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자기 시간의 관리사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을 어차피 <시간싸움>이다. 지나치게 촘촘한 미시적 시간계획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가끔 시간의 여백을 마련하고 정신적 이완을 취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큰 줄거리의 시간계획은 꼭 필요하다. 중장기, 그리고 하루의 시간의 배열, 우선순위의 설정,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참고로 나는 전형적인 <새벽형>이다. 대체로 늦어도 새벽 5시에 일어나 7시 반까지는 공부를 한다. 그 시간에는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나만의 <절대 시간>이다. 그러면 그 날 다른 일로 쫓겨 다시 책상 앞에 앉지 않아도 네트(net)로 최소한 몇 시간은 챙길 수 있다. <틈새 시간>을 이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내가 정부에 있을 때, 항상 잠이 부족했다. 그래서 차로 이동할 때는 언제나 잠시나마 <조각잠>을 잤다. 그게 얼마나 달콤했던지. 내 제자 한 사람은 먼 곳에서 통학을 했는데, 붐비는 버스 간에서 항상 리시버를 귀에 꽂고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면서 어학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는 지금 유엔 차석대사를 일 하고 있다.

다섯 번째의 당부는 <미래를 낙관하라>는 것이다. 비관적 미래조망, 자포자기, 쉬운 포기는 금물이다. 미래에 대한 낙관은 일의 성취를 위해서도 필수적이지만, 우리의 정신건장을 위해서도 최상의 묘약이다. 미래를 지나치게 낙관하고 준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되지만, 미리 지나치게 걱정하고, 안되거니 생각하면 정말 될 일도 안 된다. 만사는 <빛과 그림자>가 있다. 빛을 최대한으로 키우고, 그림자를 줄이는 노력을 열심히 하면 점차 성취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무엇보다 인간은 엄청난 발전잠재력을 갖고 있다. 정체절명의 위기를 인생최대의 기회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미래에 대한 낙관적 확신을 가지고 최선을 다 할 때, 여러분은 모두가 <성공사례>가 될 수 있다.

쓰다보니 할 얘기가 너무 많다. 한 가지만 더 보태자. 행정학이 실용적 학문이라, 좋은 점도 많지만, 걱정도 많이 된다. 여러분들은 인생의 여정에서 지나치게 <이(利), 불리(不利)>를 따지기 보다는 <의(義), 불의(不義)>를 가리는 노력도 함께 했으면 한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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