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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에세이45

<아우토스톱>(Autostopp)의 추억 I. 은 독일어로 ‘차’(Auto)와 ‘멈춰!’(Stopp)의 합성어다. 말하자면 남의 차를 세워 편승하는 것을 말한다. 영어 'hitchhiking'과 같은 말이다. 흔히 젊은이들이 여름 철 여행할 때 돈을 아끼려고 많이 쓰는 방법인데, 1960년대 후반 내가 오스트리아에서 유학할 때도 그곳 대학생 사이에 크게 유행했다. 나도 1966-1968년간 여러 차례 을 통해 이웃 나라 여행을 했는데, 그와 얽힌 얘기가 적지 않다. II. 1966년 초, 베르린에서 언론학을 공부하던 친구 L군이 빈(Wien)으로 나를 찾아 왔다. 외국생활 석 달 만에 가까운 친구를 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사흘째 되는 날, L군이 내게 잘쯔부르크를 함께 놀러 가자고 청했다. 그러면서 함께 을 시도해 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L군.. 2012. 12. 1.
<신동아>와 나 -1980년대의 <신동아>를 회상하며- I. 나와 의 인연을 각별하다. 우선 나는 아마도 에 글을 가장 많이 쓴 필자의 한 사람일 것이다. 이 글을 쓰는데 도움을 주려고 며칠 전 가 내가 그 동안 쓴 글의 목록을 보내왔다. 살펴보니 1976년 이래 에 최근까지 40편의 글을 썼다. 그런데 그 중 23편이 한국 정치가 오랜 권위주의의 질곡에서 벗어나 민주화를 향해 숨 가쁘게 질주하던 1980년대에 집중되어 있었고, 특히 민주화의 불꽃이 가장 높게 치솟았던 1985년 초부터 1987년 6월 항쟁 직전까지 9편의 글을 썼다. 글은 대부분 신군부 정권을 강도 높게 비판하고 민주화의 당위와 그 나아 갈 길을 설파하는 정치평론이었는데, 글 목록 속에 그 질풍노도의 시기에 내가 느꼈던 분노와 절박감, 열망과 감동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1980년대는 내 .. 2012. 10. 30.
안해균(安海均) 교수님 영전에 내 대학원 은사셨던 안해균 서울대학교 명예교수님께서 지난 12일 86세을 일기로 영면하셨다. 안 교수님은 내게 학자로의 길을 열어 주신 고마운 분이다. 앞의 글은 14일 영결식에서 내가 읽은 이고, 뒤의 글 은 18년전(1994) 안 교수님께서 정년 퇴임하실 때 선생님을 추억하며 썼던 글이다. 영결사 (永訣辭) 오늘 저희들은 실로 애통한 심경으로 저희 모두가 진정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선생님의 영정 앞에 서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간 오랜 병고로 크게 힘드셨지만, 놀라운 정신력으로 잘 견뎌 오셨기 때문에 이처럼 빨리 저희들 곁을 떠나시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가족과 친지 그리고 수많은 제자들의 슬픔과 안타까움, 허망하고 아쉬운 심경은 그만큼 더 큽니다. 저희 제자들은 이 자리에서 선생님의.. 2012. 10. 19.
장관의 코드는 무엇입니까 I. 2004년 가을 내가 참여정부에서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장관으로 재직할 때 이야기다. 교육부 출입기자들과 기자회견을 끝낼 즈음이었다. 어떤 기자가 내게 물었다. “장관님, 제가 보기에 장관님은 ‘노무현 코드’는 아니신 것 같은데, 그럼 어떤 코드십니까” 나는 곧장 서슴없이 대답했다. “저는 국민코드입니다.” 그러자 와 하고 웃음이 터졌다. 그들은 내가 그냥 농담하는 것으로 느낀 듯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내 진지한 낯빛을 보고 그들의 웃음기는 빠르게 걷혔다. 나는 다시 힘주어 말했다. 저는 국민코드입니다.” 예상했던 질문도 아니었고, 준비했던 대답도 아니었다. 그런데 대답을 하면서 이게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II. 나는 김영삼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 교육부 수장을 지냈다. 그런데 나를 임명한 두 .. 2011. 2. 21.
나의 좌충우돌 복지국가 체험기 I. 내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학했던 때 이야기다. 그곳에서 결혼하고 1968년 10월 첫 딸을 낳았다. 아이 낳고 퇴원한 지 닷새쯤 지났을까 구청 복지과로부터 제법 큰 부피의 소포가 배달되었다. 뜯어보니 출산 축하 편지와 함께 분유와 옷가지 등 갓난아이에 필요한 각종용품이 가득했다. 아무 신고도 안 했는데 관청에서 어떻게 내가 아이 낳은 걸 알고 이런 걸 보냈을까 신기하기 짝이 없었고, 또 그냥 덥석 받는다는 것도 염치없는 짓 같아 어찌 된 일인지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담당 직원은 산모의 퇴원 서류가 병원에서 자동 복사되어 자신들에게 넘겨진다면서 빈에서 출산한 모든 아이에게 주어지는 복지혜택이니 걱정하지 말고 받으라고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달부터 매달 같은 날짜에 아.. 2011. 1. 16.
<사회정책연구회> 열돌 I. 사회정책연구회가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사회복지분야를 연구하는 학자들 몇 명이 모여 이름도 없이 조촐하게 출범했던 연구 소모임이 이제 리스트 회원이 100명에 육박하고, 연구발표회 때마다 발표공간이 꽉 찰 정도의 회원들이 모여 활기찬 토론을 펼치는 생명력 있는 연구회로 발전했다. 그간 이 연구회가 공식명칭이나 공식조직, 정관이나 규칙 등 모든 공식성을 배제한 채 오직 회원 간의 자발적 참여와 연구열정, 그리고 상호 신뢰와 인간적 유대만으로 오늘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이 연구회는 다른 기존 학회와 확연히 구별되는 고유성을 지닌다. 이처럼 비공식적이고 느슨하기 짝이 없는 연구회가 매달 월례 발표회 때마다 대형 학회 보다 더 많은 열성적 회원을 모을 수 있다는 것은, 참여빈곤으로 몸살을 앓는 작금의 학회.. 2010. 11. 12.
소년 정치마니아 II I. 9.28 수복으로 서울로 돌아온 후 몇 달도 못 되어 1.4 후퇴로 다시 피난길에 올랐다. 천신만고 끝에 대구에서 약 10개월 머물다가 부산으로 내려갔다. 1951년 11월 부산에 정착한 곳이 우연히도 당시 임시수도 부산의 정치 1번지인 부민동이었다. 당시 구 경남도지사 관사였던 곳에 대통령관저가 자리 잡았고, 그 근처에 국회가 있었는데, 모두 우리 집에서 100M 이내였다. 그런데 한국 정치사에 큰 획을 그었던 부산정치파동이 바로 그 때 그곳에서 시작되어 이듬해인 1952년 전반기에 집중적으로 펼쳐졌다. 실로 적기, 적소에 한국 정치의 분화구로 찾아 들어 간 셈이다. 부산정치파동은 1950년 5.30선거에서 야당이 압승하여 이승만의 재선이 어려워지자, 정부가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2010. 11.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