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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에세이45

연세춘추와의 인연(III) I. 나는 가끔 /Annals 주간 시절이, 참으로 힘겹고 어려운 시간이었는데, 왜 강렬하고 아름다운 색깔로 내 뇌리에 자주 떠오를까 의아할 때가 많다. 또 그 때의 고생스러웠던 큰 기억들은 시간과 더불어 점차 퇴색하고, 당시에 소소하고 단편적이었던 한 컷, 한 컷의 즐거웠던 작은 순간들이 덧칠되고 미화되어 밀도 있게, 또 낭만적으로 추억되는지 신기할 때가 많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고통 속에서 겪는 작은 행복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존재인 것 같다. '연세춘추와의 인연(I)'올 올린 후, 당시 기자였던 안인자 교수가 내게 문자를 보내, “춘추와 함께 한 1년 반은 참으로 제 생의 황금기였어요”라는 술회했다. 나는 “와! 이 친구들도 그 시절을 아름답게 추억 하는구나”라는 생각에 조금 놀라고 크게 기뻤다.. 2021. 3. 23.
연세춘추와의 인연(II) I. 연세대 백양로를 따라 걷다 보면, 본관 가까이 왼편에 나지막한 언덕이 나온다. ‘시인의 언덕’이라 불리는 이 언덕 위에 윤동주 시비(1968년 건립)가 있고 그 뒤편에는 2층 규모의 고색창연한 작은 석조건물이 하나 있다. 당시 가 이 건물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건물은 일년 사계절을 늘 아름답게 품에 안았고, 돌집이라 특히 여름에는 시원했다. ‘핀슨홀(현 윤동주 기념관)’로 불리는 이 건물은 1922년 연희전문학교의 기숙사로 지어졌는데, 윤동주 시인이 1940년 후배 정병욱(훗날 서울대 국문과 교수)과 함께 하숙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까지 2년여를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연세대 캠퍼스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중 하나인 이 건물은 밖에서 보면 2층이지만, 내부로 들어가며 다락층도 있어 실제로는 3층인 .. 2021. 3. 23.
연세춘추와의 인연(I) I. 1976년 3월 초, 내가 한국외국어대학에서 연세대로 직장을 옮긴 후 한 학기가 지난 때였다. 총장(이우주)님이 나를 보자고 연락을 주셨다. 왜 나를 부르실까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아 의아해 하면서 찾아뵈었더니, 나보고 대학신문인 와 영자신문 Annals 주간을 맡으라는 것이었다. 그러시면서 내가 학창시절에 연세춘추 기자를 했던 이력이 있고, 나이도 젊어 학생기자들과 교감을 잘 할듯해서 발탁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얼떨결에 "네“하고 답하고 총장실을 나왔다. 나는 그 때까지만 해도 내 앞에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가시밭길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II. 나는 원래 어려서부터 언론에 관심이 많았고, 대학시절 한때는 장래 직업으로 기자를 꿈꾸기도 했었다. 그래서 대학신문의 주간을 맡는다.. 2021. 3. 11.
내 기억 속에 김구와 조소앙 I. 나는 어렸을 때부터 정치와 시사(時事)에 유달리 관심이 컸던 것 같다. 그래서 소년 시절 내 기억 속에 아이답지 않게 정치가 차지하는 비중이 무척 크다.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정(性情)인데, 거칠고 시끄러운 정치세계에 왜 그리 관심이 많았던지 내가 생각해도 이해가 잘 안 된다. 신문에서도 정치면만 즐겨 찾았고, 라디오에서 정치나 시국 얘기가 나오면 귀를 쫑긋 세웠다. 이렇듯 정치세계는 늘 나를 열광시키는 대상이었다. 정치라는 동네는 언제나 떠들썩하고, 변화무쌍하며, 역동적인 게 재미있었고, 정치무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고, 행태, 전략을 관찰하고 평가하는 일도 흥미로웠다. 하지만 꿈에도 내가 나중에 커서 정치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말하자면 나는 그때 이미 대국(對局)의.. 2020. 7. 17.
'초등영어' 출범의 뒷이야기 I. 2004년 나는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교육장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칠레 산티아고에 가는 길에 일본에 들려, 가와지마 일본 문부과학상과 만났다. 교과서 문제 등 한일 간에 여러 가지 난제가 얽혀 있었기에 소통을 위해 나종일 주일대사에게 부탁해서 마련된 자리였다. 그런데 가와지마 장관은 나를 보자, 대뜸 “당신이 1997년에 한국에 초등영어 교육을 도입한 장본인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정말 대단한 일을 했다. 일본에서도 같은 시기에 초등영어 시행이 치열한 사회적 쟁점이었는데, 좌고우면(左顧右眄)하다가 끝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뒤로 미뤘다. 그런데 우리는 부끄럽게도 아직 초등영어를 도입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화 경쟁에서 크게 실기(失期)했다. 천추의 한이다”라고 말했다. II. 나는 .. 2020. 7. 11.
1951년 초여름, 열 한살 소년의 고뇌 I 대구에 피난 온 후, 1951년 4월, 새로 이사한 곳이 종로 영남일보사 건너편 조광(朝光)양복점 2층이었다. 처음 몇 달 동안 살았던 칠성동 기찻길 옆 어두운 빈민촌에 비하면 주거조건이 훨씬 낳아졌다. 그 집 2층에는 피난민 세 가구가 살았는데, 우리는 길가 창문 옆 다다미 6장 방에 살았다. 윤동주가 일본 유학 때 쓴 시, ‘쉽게 쓰여진 시’에는 “육첩(疊) 방은 남의 나라”라는 시구(詩句)가 나오는데, 바로 그 규모의 크지 않은 방이었다. 여기서 어머니, 누나와 세 식구가 함께 살았다. 아버지는 우리를 이곳으로 옮겨 놓으시고 그해 3월 서울이 재탈환 (再奪還)되자 직장 선발대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셨다. 열 한살 소년인 나는 한복 삯바느질을 하셨던 어머니의 옷 주문, 배달과 잔심부름하는 것으로 소.. 2019. 1. 30.
1969/1970년 겨울, '빈 숲속의 이야기' I. 1969년 가을, 오스트리아 빈(Wien)에서 나는 박사학위 공부의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 때 나는 내 처와 막 첫돌을 지난 딸 수현이와 함께 빈(Wien) 교외 볼퍼스베르그(Wolfersberg)라는 동네에 살고 있었다. 그곳은 유명한 ‘빈 숲(Wiener Wald)’에서 멀지 않은 작고 아름다운 동화 같은 마을인데, 주위의 목가적인 풍경이 일품이었다. 내가 살던 집은 지방에 사는 돈 많은 출판업자의 작은 별장이었다. 나는 운 좋게 집과 정원을 보살펴 주는 조건으로 그 집 별채를 세내지 않고 빌려 쓰고 있었다. 제법 큰 정원에는 체리나무를 비롯해 다양한 종류의 과일나무, 꽃나무들이 가득했고 내가 사는 별채 앞에도 예쁜 장미 꽃밭이 있어, 봄, 여름에는 마치 집 전체가 꽃잔치를 벌리는 .. 2018. 12.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