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나는 내가 예전에 살았던 곳을 무척 그리는 편이다. 이제 나이가 80 문턱에 이르렀고 그런대로 변화무쌍한 세월을 보냈으니 국내외에서 내가 그간 머물었던 곳도 꽤나 많았다. 따져보니 한 20여 차례 옮겨 살았다. 그런데 되돌아보면 그 한 곳 한 곳이 다 내 마음의 고향같이 느껴진다.

 

어쩌다가 옛날에 살았던 도시나 동네 근처에 가는 길이 있으면, 나는 무리를 해서라도 옛집과 옛터를 찾아 나선다. 외국의 경우, 대체로 내가 살던 집과 이웃 동네가 마치 그간 시간이 멈췄던 듯 옛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데 비해, 한국에서는 변화의 폭이 커서 몇 년 후에 찾아가도 완전히 딴 세상이 되어버린 경우가 많다. 그러나 어떤 공간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옛 시간은 그 언저리에 그대로 남아 맴돌며 나를 반기고 낭만을 곁들여 옛 추억을 쏟아 놓는다. 그곳에서 나는 옛날로 돌아가 전에 그곳에 남겨 두었던 나의 영혼의 한 조각과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눈다.

 

어떤 이는 자신이 곤고한 삶을 보냈던 곳은 끔찍하고 진저리가 나서 다시 돌아보기도 싫다고 하는데, 나는 내가 어렵고 힘겨운 시간을 보냈던 옛 장소가 더 나를 무섭게 끌어당기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옛터를 찾을 때면 늘 가슴이 설레고 마음 한구석이 찡하다. 어쩌다 10대초에 피난시절을 보냈던 대구나 부산에 가면, 으레 까마득한 옛날 내가 살았던 가난한 동네, 내가 다녔던 산비탈 판자집 피난학교 터를 찾아 나선다. 이제 천지개벽을 한 듯 완전히 딴 세상이 되어 버렸지만, 그 근처에서 옛 추억으로 이끄는 작은 흔적이나 한 가닥 실마리라도 찾아보려고 기웃거린다. 그러다가 아직 남아있는 비좁은 골목이나 계단, 허물어진 돌담이라도 만나면, 오랜 친구를 만난 듯 기쁘고 반갑다. 눈물이 핑돌 때도 있다. 그리고 나는 곧 그 자리에서 티 없이 맑은 10대 소년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옛터를 뒤에 하고 돌아설 때면, 늘 쓸쓸하고 아쉽다. 그러면서 다시 그곳에 남기고 가는 나의 분신이 안쓰럽다. “다시 와야지” 속으로 다짐한다.

 

             II.

며칠 전 낮 시간에 T.V를 켜고 채널을 돌리는데, 분위기 있는 영화 하나가 스쳤다. 되돌아가 보니, 제레미 아이언스 주연의 <리스본행 야간열차>였다. 아이언스는 내가 좋아하는 배우다. 훤칠한 키에 지적이면서 중후한 멋을 지닌 ‘꽃 중년’(이젠 ’꽃노년‘?)이다. 가톨릭 고위 성직자로도 잘 나오는 그는 영화 ’미션‘에서 내게 큰 울림을 주었다. 영화는 이미 끝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때 기가 막힌 명대사가 나왔다. 나는 그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을 받았다. 내가 옛터를 찾을 때 마다 느꼈던 감정을, 이 보다 더 문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아니 실존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포털사이트에 접속해 보니,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을 쓴 이는 베를린대학의 철학교수이자 작가인 파스칼 메르시아였다. 그러니 이 명대사도 그의 작품이다. 그럼 그렇지. 역시 철학 냄세가 나더니. 이  책은 2004년 출간 이래 독일에서만 150만부를 판매, 현재까지 3년 연속 아마존 베스크셀러 10위권을 고수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즉시 책을 주문했다.

 

나를 열광시킨 그 명대사는 아래와 같다. 다시 읽어보아도 역시 일품(逸品)이다.

 

우리가 어느 곳을 떠날 때

우리 스스로의 무언가를 뒤에 남기고 간다.

우리가 가버린다고 해도 우리는 거기서 머문다.

거기에 다시 가야만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우리 안의 물건들이 거기에 있다.

어느 장소에 간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에게

여행을 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여행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고독을 마주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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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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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스마트폰?

삶의 단상 2019. 2. 26. 08:28 |

                         I.

  얼마 전 교육부에 같이 있던 분이 나를 찾아와서 함께 담소를 나누던 중, 내 핸드폰이 울려 전화를 받았다. 그랬더니 옆에 있던 분이 대뜸,

  “아니 한때 교육정보혁명에 앞장서던 분이 아직 폴더폰이라니요. 요새 그 폰 쓰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어요. 빨리 바꾸세요.” 라며 펄쩍 뛰었다.

나는 무안해서 하루에 한, 두 번 전화하고 받는 게 고작인데, 무슨....” 하며 얼버무렸다. 그러면서 스스로 내가 문명의 이기에 대해 감수성이 무딘 편이라는 것을 자인했다.

 

                      II.

  그런데 보다 근원적으로 따져 보면, 모든 게 내가 기계치(機械癡)라는 데서 시작하는 것 같다. 나는 누구나 쉽게 사용하는 전기 기구나 전자제품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절절맨다. 내 손이 가면 으레 고장이 나거나 오작동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집에서 그냥 수동으로 한 번에 작동되지 않고 절차가 조금 복잡한 각종 전기.전자 및 생활용품들은 내 손에서 거리가 멀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전구를 갈아 끼거나 부서진 의자를 고치는 일도 다 내 처의 몫이다. 내 손이 가면 더 말썽이 나니까  아예 건드리지 못하게 한다. 홈뱅킹은 물론 버스표 인터넷 예매도 할 줄 모른다. 길가의 자판기도 사용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내가 만사에 워낙 서툴러서 그랬는데, 그러다 보니 테크놀로지에 적응하기를 꺼리는, 아니 얼마간 그것을 혐오하는 러다이트(ludite)’가 되어버린 것 같다.

 

  나는 자동자 운전도 못한다. 실제로 처음부터 아예 배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연구년에 내가 갈 외국 대학을 선택할 때도, 대중교통이 좋은 도시, 교수 아파트가 대학 구내에 있는 대학을 찾았다. 내가 살 집을 오랫동안 연희동에서 찾았던 것도 내가 봉직했던 연세대학교에 걸어서 다니기 위해서였다. 여행을 좋아하는데, 웬만해선 혼자 외국여행 하는 것은 꺼린다. 출입국 절차나 항공기 갈아타는 과정을 생각하면 정부터 떨어지기 때문이다.

 

 

                             III,

  그러나 꼭 해야 하는 일은 비록 그것이 기계/전자 놀이라도 작심하고 한다. 내가 인터넷을 1990년 즈음부터 시작했는데, 당시 내 나이 또래의 동료 교수들 대부분이 컴맹이었다. 시대의 흐름으로 보아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료 교수들에게 앞으로 교수 노릇을 제대로 하자면 이것 못하고는 불가능하다며 극구 권했던 기억이다. 그에 앞서 내가 학교에서 교무처장 보직을 맡고 있었는데, 그 때도 유능한 전산 전문가 직원을 활용해서 주요한 교무자료를 많이 전산화했다. 그래서 교무위원회에 올리는 안건들을 한결같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전산자료로 뒷받침해서, 사안마다 처장이 누누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도록 했다.

 

  두 번 교육부장관을 하면서도 나는 교육정보화에 온 힘을 기울였다. 교육정보화에는 여.야가 따로 없고, 이 혁명적 변화과정에서 한발 늦으면 영원히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그 성과는 실로 놀라웠다. 20044월 칠레 센티에고에서 열렸던 APEC 교육장관회의에서 내가 <E-learning in Korea>라는 주제 발표를 했는데, 뒤이은 토론에서 각국의 장관들이 이의 없이 한국의 교육정보화 수준이 세계에서 가장 앞섰다는 것을 공인했다. 그 때 벅차던 감회는 지금도 새롭다. 내가 주도했던 1997EBS TV 수능방송과 2004EBS 인터넷 수능방송이 성공적으로 출범할 수 있었던 것도, 그동안 쌓아 온 교육정보화의 저력 때문이었다.

 

 

                       IV.

  이처럼 내가 내 평생직업을 위해 필수라고 느꼈을 때, 혹은 국정에 참여하면서 그것이 '나라의 운명'과 결부된다고 생각할 때, 결연하게, 또 재빨리 평소에 꺼리는 기계/전자놀이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 놀이는 내겐 거기 까지였다. 그것이 그냥 내 일상의 필요와 편익을 위한 것이라면, 나는 늘 그것 없이 견디는 편을 택했다. 조금 불편해도 천성적으로 기계에 매달리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 핸드폰이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 나갈 때, 대학도 그 거센 바람에 휩쓸렸다. 강의가 끝나면 모든 학생들이 부산하게 핸드폰부터 챙겼고, 복도나 교정에서도 핸드폰을 귀에 달고 다녔다. 나는 학생들에게, “자네들, 그러다가 생각하는 능력을 잃게 된다고 수없이 경고했다. 그러나 마이동풍이었다.

 

  나 자신은 핸드폰 없이 쭉 지냈다. 그러다가 정년퇴직하고, 2007년에 이곳 속초/고성으로 귀촌했다. 당시 이곳에 연()착륙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서울과 필요 이상 교류를 하지 않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핸드폰이 없어서 별로 불편하거나 아쉬울 게 없었다. 그런데 내가 워낙 산을 좋아해서 자주 설악산에 오르는데, 서울의 자식들이 내가 맨몸으로 산행하는 것을 무척 걱정했다. 급기야 핸드폰을 사 들고 와서 지참할 것을 강요했고, 거절할 이유가 마땅치 않아 내가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 때, 그 애들이 나를 설득했던 명분인 즉, “그것 없이 아버지는 편할지 몰라도, 우리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우격다짐으로 핸드폰을 사용하게 된 지도 어언 10년이 넘었다.

 

  그러나 내 구식 핸드폰은 전화를 걸고 받을 때, 글자 그대로 (phone)’으로 쓰일 뿐 다른 용도로는 쓰이지 않는다. 늘 지니고 다니지도 않는다. 그래서 어쩌다 전원이 끊어져도 2, 3일 모르고 지내는 일이 허다하다. 그런가 하면 가끔 핸드폰으로 내게 긴 글이나, 동영상, 사진들을 전송하는데, 내 구식 폴더폰으로는 그것들이 잘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결례할 때도 적지 않다.

SNS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옛날에 한 선배의 성화 때문에 페이스북에 등록을 했는데, 곧 그게 실수인 것을 알았다. 수많은 사람이 친구요청을 하는데, 그들 모두와 소통하자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 정성이 필요했다. 거기서 노닥거리기에는 내 여생이 짧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장 끊었다.

 

 

                        V.

그런데 나는 요즈음 스마트폰으로 말을 바꿔 탈까 고민하고 있다. 내 마음을 크게 움직인 것은 스마트폰의 사진 기능 때문이다. 이곳 동해안, 설악산의 풍광이 일품인데, 그것을 담으려면 번번히 사진기를 따로 들고 나가야 한다. 그런데 요사이 스마트폰 사진기능이 출중해서 그것 하나면 족할 것 같다. “마침내 스마트폰?”이 될지, 아니면 어쩌다 스마트폰?”이 될지 모르나, 스마트폰 자체는 이제 폴더블로 바뀌는 마당에늦깎이로  때 지난 스마트폰이라도 하나 장만할까 목하 궁리 중이다.

 

이래저래 처음 귀촌할 때 내가 가졌던 단순한 삶(simple life)”에 대한 순수한 꿈은 자꾸 허물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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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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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익로 2019.03.03 19:04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부총리님!!!

    기대됩니다~~~곧, 새 스마트폰이요!!!
    저도 몇 번이나 말씀드리려고는 했지만``` "차마"였습니다.
    부총리님의 ~"단순한 삶"~ 이 부분을 저도 최대한 지켜드릴려고
    참아 왔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이제는 운을 떼셨으니 빨리 바꾸시길 요구합니다.ㅎㅎㅎ
    제가 찍은 멋진 사진들로 보답해 드리겠습니다!!!
    부총리님, 고대하겠습니다.
    김익로 올림

  2. 현강 2019.03.07 11:05 Address Modify/Delete Reply

    이번달 안에 바꿀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기계라고 바꾸고 조작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심기가 불편해 지네요.

눈이 내리네!

포토갤러리 2019. 1. 31. 16:17 |

이곳 영동에는 그간 두 달 넘어 비/ 눈이 오지 않아 가뭄이 극심했다. 해서 연일 건조경보가 발령되곤 했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눈이 내린다. 금방 그치거니 했는데 제법 눈이 쌓인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하면서

주위 풍경이 더 없이 아름답다. 정말 혼자 보기 아깝다. 어디선가 <아다모>의 '눈이 내리네'가 들려 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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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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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대구에 피난 온 후, 19514, 새로 이사한 곳이 종로 영남일보사 건너편 조광(朝光)양복점 2층이었다. 처음 몇 달 동안 살았던 칠성동 기찻길 옆 어두운 빈민촌에 비하면 주거조건이 훨씬 낳아졌다. 그 집 2층에는 피난민 세 가구가 살았는데, 우리는 길가 창문 옆 다다미 6장 방에 살았다. 윤동주가 일본 유학 때 쓴 시, ‘쉽게 쓰여진 시에는 육첩() 방은 남의 나라라는 시구(詩句)가 나오는데, 바로 그 규모의 크지 않은 방이었다. 여기서 어머니, 누나와 세 식구가 함께 살았다. 아버지는 우리를 이곳으로 옮겨 놓으시고 그해 3월 서울이 재탈환 (再奪還)되자 직장 선발대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셨다.

 

열 한살 소년인 나는 한복 삯바느질을 하셨던 어머니의 옷 주문, 배달과 잔심부름하는 것으로 소일했다.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어려운 형편이라 그 얘기는 입밖에도 내지 못했다. 그러자니 한가할 때는 무료를 달랠 겸 창턱에다 턱을 괴고 번화한 종로 거리를 내려다볼 때가 많았다. 종로는 온종일 사람과 차로 붐볐고 늘 장바닥처럼 시끌벅적했다. 내 관심은 특히 마주 보이는 길 건너편 영남일보 앞마당에 쏠려 있었다. 신문이 나올 시간이 가까워지면 내 나이 또래에 남루한 차림의 피난민 신문팔이 소년들이 몰려와 왁자지껄했다. 그러다가 신문을 받아 들면 마치 단거리 선수처럼 한껏 내달려 순식간에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난리법석이 끝나면 신문사 앞마당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텅 빈 고요가 깃들고 초여름 햇살이 한가하게 내려앉는다. 매일 거듭되는 그 역동과 반전의 모습을 거의 놓치지 않고 보는 것이 내 일과였다.

 

                    II

5월 하순 어느 날, 나는 영남일보사 앞마당 신문팔이 아이들 무리에서 조금 떨어져 혼자 서성이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서울 돈암동 같은 동네에 살던 가까운 친구 세영이었다. 반가운 김에 나는 한걸음에 달려가 그를 부둥켜안았다. 그의 사연은 무척 기구했다. 피난길에 온 식구가 뿔뿔이 헤어져 혼자 천신만고 끝에 대구까지 왔고, 우연히 먼 친척을 만나 그 집에 머무는데, 눈치가 보여 오늘 처음으로 신문을 팔러 나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바삐 신문을 받아 파는 요령을 알려주고 오늘 일이 끝나면 우리 집에 들르라고 얘기했다. 그날 저녁 내가 만난 세영이는 여리고 착해 빠졌던 과거의 그가 아니었다. 세상 풍파를 다 겪은 듯 담대하고 초연하기까지 했다. 손을 잡고 위로하는 내 어머니에게, “걱정 마세요. 몇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렇게 살아남았는데 이제 두려울 게 없어요라며 짐짓 웃음까지 지어 보이며 사는데 자신감을 내보였다. 그를 보내고 어머니는 모진 세상이 아이를 저렇게 바꾸어 놓았구나하시며 한참을 우셨다.

 

그 후 세영이는 내게 자주 들려 당시 우리 집 주메뉴였던 수제비를 함께 먹으며, 그가 신문팔이와 갖가지 막일을 하며 겪은 무용담을 털어놓곤 했다. 그러면서 대구 가까이 까지 함께 왔다가 피난민 인파 속에서 안타깝게 손을 놓쳐버린 세 살 위 형 얘기를 자주했다. “분명 대구 어디엔가 있을 거야. 내가 신문 파는 이유도 그 형을 만나기 위해서야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 나올 때가 가까이 되자,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창턱에 턱을 괴고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길거리에 씩씩한 모습으로 세영이가 나타났다. 나는  밑을 내려다보며 손을 입에 모으고 세영아하고 그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도 병영아하고 맞장구 치며 손을 크게 휘저었다. 이어 그는 펄쩍펄쩍 뛰면서 , 어제 우리 형 만났어. 멀쩡히 잘 있어라고 외쳤다. 그 말에 나도 기뻐 축하해를 연발했다. 그러자 세영이는 이따 들릴 게, 기다려라고 짧게 소리치며 고개를 돌렸다. 종로 한복판, 차와 사람 소리가 얽혀 악머구리 끓듯 하는 북새통에서 우리는 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가 형을 만났다는 기쁜 소식을 잠시라도 빨리 어머니에게 알리려고 고개를 안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한, 두 걸음 옮기는데, 길거리에서 -하며 차가 급정거할 때 들리는 금속성의 마찰음이 들렸다. 나는 급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웅성거리는 가운데, 군인 찦차 앞에 세영이가 피를 흘리며 흐트러져 누어있었고 차에 탔던 군인 두 명이 황급이 차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순간 나는 온몸이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겨우 정신을 차려 외마디 소리처럼 엄마, 엄마를 외쳤다. 그리고 말을 잃은 채 엄마에게 손가락으로 그 쪽을 가리켰다. 어머니는 아니 세영이 아니냐고 크게 놀라시며, 내 손을 잡고 급히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우리가 사고현장에 도착했을 때 찦차는 이미 승준이를 싣고 떠난 후였고, 바닥에는 두어 군데 선연한 핏자국만 남아있었다. 아직 그곳에서 서성이는 몇몇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워낙 삽시간에 일어난 일이고, 사고가 나자 군인들이 즉시 차에서 내려와 그를 싣고 사라졌기 때문에 그 이상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정황으로 볼 때 중상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어머니와 나는 물어물어 대구 시내 외곽에 있는 육군 병원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모른다는 대답만 들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심경이었으나 아무 힘없는 피난민 모자는 안타까워 발을 종종 구르는 외에 달리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III

그날 그 사건은 나, 열한 살 소년에게 엄청난 마음에 상처를 안겨 주었다. 무엇보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양심의 가책에 견딜 수가 없었다. 시간상으로 따져 볼 때, 그가 나와 몇 마디 대화를 마치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찦차가 덮쳤으니, 애초에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아니 설혹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더라도 그 이상 대화를 이어가지 않고, “당장 내려갈 게하며 급히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면 아마도 별일이 없었을 것 같았다. 그러니 내가 그 참혹한 사고의 유발자였다.

나 어제 형을 만났어라고 작약(雀躍)하던 그의 밝은 모습과 길거리에 쓰러져 있던 그의 흐트러진 모습이 계속 오버랩 되면서, 가슴이 쥐어짜듯 저리고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나는 그가 죽었을까 걱정이 되었다. 사고 현장을 물들였던 핏자국으로 보아 중상이 확실하고, 그것이 자칫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미치면 나는 미칠 것 같았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부정적인 상상이 증폭되어 급기야 나는 그가 죽었을 것이라는 확신에 가까이 이르게 되었다. 그러면서 급기야 내가 그를 죽였다는 망령된 생각이 계속 엄습했다.

 

그날 이후, 나는 하루 한순간도 이 처절한 고뇌의 심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말수가 적어지고 밤잠을 설치는가 하면 끼니마저 자주 걸렀다. 그러니 옆에서 내 심경을 헤아리는 어머니의 걱정은 태산 같았다. 어머니는, “네 잘못이 아니야. 번잡한 길에서 빨리 자를 몰았던 그 군인들이 잘못한 거야. 그리고 세영이는 좀 다쳤겠지, 죽었을 리 없어. 너무 괴로워하지 말고 대신 하느님께 기도해하시며 나를 달래셨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내 마음을 어루만질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양심(良心)’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확연하게 인식했던 것 같다. ‘내 양심에 가책이 되는데, 어떻게 내 마음이 편안할 수가 있을까’. 그런데 문제는 내가 그 양심의 가책을 보상할 수 있는 아무런 수단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나는 갈수록 자책(自責)과 자학(自虐)의 깊은 늪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러면서 열한 살짜리 소년은 그때 양심’’삶과 죽음에 대한 온갖 철학적 사유를 그 나름의 방식으로 다 체험했던 것 같다. 훗날 내가 실존철학에 접하면서 즉시 ‘1951년 초여름의 나를 추억했고, ‘실존의 개념이 전혀 생소하지 않게 내게 다가왔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후 한 달이 가까워도 그로부터 아무 소식이 없었다. 나는 분명 그가 죽었기 때문이라고 단정했다. 그런 가운데 나는 점점 더 야위고 파리하게 시들어 갔다.

 

                         IV

사고 후 꼭 한 되던 날, 나는 집 근처 만경관(영화관) 옆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뒤에서 병영아!”하고 내 이름을 부르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순간 나는 세영이임을 직감했다. 그러면서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뒤를 돌아보니, 서너 발자국 뒤에서 그가 밝게 웃고 있었다. 나는 꿈같은 현실 앞에 압도되어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내게 다가오는 그는 한 다리를 크게 절고 있었다.

 

극장 앞 작은 공터에서 그는 그간의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사고 순간 정신을 잃었고 눈을 떠보니, (우리 모자가 찾아갔던 바로 그) 육군병원 침대 위였다는 것이다. 양다리와 팔목 등의 복합골절로 장시간 수술이 끝난 후였는데, 다행히 생명에 지장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후 병원 측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거의 치유가 되어 어제 퇴원을 해서 우리집을 찾아가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급한대로 형은 만났어?”, “다리는 어때?”하고 두서없이 물었다. 병원측이 연락해서 형은 곧 만났고, 아직 심하게 저는 한쪽 다리도 시간이 지나면 완쾌된다고 말했다.

 

그의 사연을 들으며 내 가슴은 계속 벅차올랐고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었다. 그리고 연상, “세영아 미안하다, 모든 게 내 잘못이다”, “고맙다를 연발했다. 그는 오히려 걱정 많이 했지, 미리 연락하지 못해 미안하다, “네가 사고와 무슨 상관이 있어, 그날 내가 재수가 없었던 거지라며 웃으며 나를 달랬다.

그러는 그가 내게 관세음보살처럼 느껴졌고, 나 자신은 무간지옥 (無間地獄)에서 단숨에 극락(極樂)에 오른 기분이었다.

                      

                        V.

그의 무사한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크게 기뻐하시며 연상 흐르는 눈물을 닦으셨다.

그러면서,

 

세영아, 정말 고맙다. 네가 우리 병영이를 살렸구나라고 말씀하셨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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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진영 2020.07.21 18:39 Address Modify/Delete Reply

    어린 시절로 돌아가 '소년세계', '새소년' 같은 어린이 잡지에 나온 이야기를 읽는
    느낌입니다. ^^

  2. 현강재 현강 2020.07.23 04:59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김 교수님, 바쁜 분이 제 글을 구석 구석 찾아 읽어 주시고 댓글도 달아주시니 고맙습니다.
    이 글에 나오는 그 때, 저는 '양심'의 의미를 제 나름으로 깨우쳤고, 이후 그것을 지켜보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 때 한 달 간의 고뇌를 매우 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늘 건행하시기
    빕니다.

  3. 김항규 2020.09.13 19:20 Address Modify/Delete Reply

    6,25를 배경으로한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한 편의 영화를 본 듯한 느낌의 글입니다.
    그 친구 분과는 그후 어떻게 지내시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4. 현강재 현강 2020.09.14 14:49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그 해 가을, 제 가족은 다시 부산으로 피난지를 옮겼고, 그러는 과정에서 세영이와 연락이 끊겼습니다. 그 후, 1년 반이지나 전쟁 막바지에 서울로 환도해서 세영이를 찾았으나 어디서도 소식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전쟁이라는 참혹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렇게 어렵게 찾았던 인연의 끈을 다시 놓쳤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별일 없었다면, 그 친구도 어디서 저처럼 늙어가고 있겠지요.

얼마전에 양양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몇 년 후면 춘천-속초 고속화철도가 건설된다는 소식에 속초, 고성, 양양 일대의 땅값이 크게 올라가고, 우후죽순처럼 아파트 건립이 추진되었다. 그러더니 급기야 아파트 과잉공급으로 속초에 미분양 아파트가 늘어난다는 소식이다.

그런데 아파트 미분양 문제는 우리집에도 생겼다. 작년에 마음먹고 집 주변 두 군데에 새(類) 아파트 단지를 조성했는데, 1년이 가깝도록 한마리도 입주하지 않고있어 아파트가 텅 비어있다. 풀섶 잠자리도 마련하고, 집안과 주위에 먹이로 유혹도 해 보았지만  미분양 사태가 바야흐로 장기화되고 있다.

아마도 영리한 새들이 아파트 조성의 일차적 목적이 자신들의 주거복지보다, 집 주변 미화를 위한 장치미술적 음모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간파하고 단체로 보이코드한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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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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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2.19 10:03 Address Modify/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2. 현강재 현강 2019.03.02 06:02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반갑습니다.YS씨. 이렇게 만나는 것도 인연이네요.

  3. 착한곰 2019.03.05 15:56 Address Modify/Delete Reply

    너무 낮아서 새가 안 온것 같네요

  4. YS Lee 2019.03.07 10:25 Address Modify/Delete Reply

    안녕하세요 부총리님^^ 음. .새 인형을 두 마리 정도 근처에 두면 어떨까요?? 미관상 새 아파트가 너무 새(new) 아파트여서 새들이 주저주저 할 가능성도 조심스레 예상해봅니당~ 좋은 하루 보내시구요^^*

                     I.

  1969년 가을, 오스트리아 빈(Wien)에서 나는 박사학위 공부의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 때 나는 내 처와 막 첫돌을 지난 딸 수현이와 함께 빈(Wien) 교외 볼퍼스베르그(Wolfersberg)라는 동네에 살고 있었다. 그곳은 유명한 ‘빈 숲(Wiener Wald)’에서 멀지 않은 작고 아름다운 동화 같은 마을인데, 주위의 목가적인 풍경이 일품이었다. 내가 살던 집은 지방에 사는 돈 많은 출판업자의 작은 별장이었다. 나는 운 좋게 집과 정원을 보살펴 주는 조건으로 그 집 별채를 세내지 않고 빌려 쓰고 있었다. 제법 큰 정원에는 체리나무를 비롯해 다양한 종류의 과일나무, 꽃나무들이 가득했고 내가 사는 별채 앞에도 예쁜 장미 꽃밭이 있어, 봄, 여름에는 마치 집 전체가 꽃잔치를 벌리는 것 같았다.

 

  말하자면 내가 그 집 관리인이었는데, 정원사가 계절마다 와서 전지(剪枝)를 하는 등 정원을 보살펴 주기 때문에 실제로 나는 그곳에 그냥 사는 것 외에 딱히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주인내외는 한 달에 한번 정도 주말에 와서 하루 자고 갔는데, 그 때마다, 그 집이 한동안 비어있었는데 우리가 집을 잘 지켜줘서 이제 안심이 된다며 고맙다고 인사를 하곤 했다.

 

  돌이켜 보면 그 집에 살았던 약 1년 반이 내 빈 유학시절 중 가장 평온하고 행복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공부도 순조로웠고 삶도 안정되었다. 그 때 한 가지 걱정은 내 처가 두 번째 아이를 가졌는데, 이듬해 6월경 출산 예정시기가 내가 공부를 마칠 때 쯤, 말하자면 내게 가장 힘겹고 벅찬 시기와 겹친다는 것이었다. 이 부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내가 공부에 피치를 올려 둘째가 출산하기 한, 두 달 전에 공부를 끝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다가오는 겨울이 내 유학생활의 마지막 고비라고 생각하고, 한껏 마음을 다잡고 공부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II.

  호사다마(好事多魔)랄까. 그러나 이 호(好)시절이 오래가지 않았다. 그해 10월 중순 경 오랜만에 별장을 찾았던 주인내외가 집을 돌아 본 다음에, 다소 상기된 얼굴로 내게 “혹시 별장 안채를 쓰지 않았냐” 고 물었다. 나는 그런 적이 없었으므로 아니라고 대답했다. 주인과 처음부터 안채는 쓰지 않기로 약속해서 우리 내외는 당연히 그 룰을 지켜왔는데, 주인의 의외의 물음에 조금 황당하게 느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주인은 집을 떠나며 매우 굳은 얼굴로 내게 다가와 “대단히 미안하지만 10월 말까지 집을 내 주어야 겠다”고 말했다. 예상치 못했던 통고에 나는 무척 당황했지만, “알겠다”는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주인의 갑작스런 통고를 들으며, 우리 내외는 곧장 일이 이렇게 된 경위를 쉽게 추론할 수 있었다. 몇 주 전, 빈(Wien) 의대에 다니는 주인집 아들이 여자 친구와 함께 와서, 안채에서 하루 동안 시험공부를 하겠다고 말했다. 조금 꺼림직 했지만, 나는 굳이 마다 할 이유가 없어, 그렇게 하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그 날 저녁 어스름이 내릴 때 쯤 인사를 하고 집을 나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내 처가 “애인사이인 것 같지”라고 말했던 기억이다. 그 후 이 주쯤 지난 후 그들이 또 한 차례 찾아와서 공부 명목으로 하루 종일 안채에 머물다 돌아갔다. 그런데 그들이 아마 안채에 머물면서 집안을 조금 어지럽혔던지, 그렇지 않더라도 누가 왔다간 흔적을 남기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리고 주인집 내외는 그것을 우리가 한 일로 오해를 한 게 틀림없었다.

 

  우리의 추론은 실제로 확인됐다. 집주인 내외가 집 바로 건너편에 있는 성당 노(老)신부님께 우리를 믿고 집을 맡겼는데, 안채까지 사용해서 나가라고 통고했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신부님이 “베네딕트(내 세레명)가 그랬을 리가 없다”고 강하게 나를 변호하며 곧 추위가 닥치는데 너무 심하다고 말씀하셨는데도, 주인은 “이미 끝난 일”이라고 차갑게 말했다는 것이다. 나는 경위를 묻는 신부님께, 주저하다가 그 집 아들이 두 번 다녀간 얘기를 했다. 그랬더니 신부님은 환하게 웃으시며, “그러면 그랬겠지. 이제 아무 걱정 말게나, 내가 전화를 해서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주인 생각을 바꾸어 놓을게”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정작 내 마음은 이미 그 집을 떠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었다. 우선 그 집에 더 머물기 위해 주인에게 구차하게 지난 일을 들먹이는 것 자체가 내 자존심에 허락지 않았다. 또 내게 그 얘기를 듣고, 크게 곤혹스러워 할 집 주인 내외의 얼굴을 떠 올리니, 내가 힘들더라고 그냥 덮어버리는 게 낳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말씀드리니 신부님은 펄쩍 뛰셨다. 말씀인 즉, 그렇게 내가 물러나면, 그 주인이 이 사람, 저 사람에게 “ 한국 청년에게 집을 빌려 주었더니 이런 일이 있었다”며 떠들고 다닐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국 “네 나라까지 욕보이게 된다”는 것이었다. 신부님 말씀이 마음에 크게 걸렸으나, 나는 떠날 생각을 굳혔고 내 처도 동의했다. 그래서 조촐한 선물을 가지고 주인내외를 찾아가 그간 고마웠다는 인사를 드렸다.

 

                             III.

  그런데 두 주(週) 사이에 새 보금자리를 구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동분서주했으나 월말이 다 되도록 마땅한 방을 구하지 못했다. 입술이 바짝 마르고 있었다. 그럴 즈음 맞은편 성당의 신부님이 내게 긴히 할 말씀이 있다고 나를 부르셨다. 가서 뵈었더니 정 갈 데가 없으면 빈 숲 초입에 있는 공소(公所) 사택(舍宅)으로 가는 게 어떻겠냐고 물으셨다. 공소는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외진 지역의 교회 지소(支所)를 말하는 데, 대체로 지역 교우(敎友) 중심으로 운영되며, 일요일에 한번 신부님이 오셔서 미사를 집전하는 곳이다. 내게 공소 내의 사택에 거주하며 공소를 관리해 달라는 말씀이셨다. 순간 나는 ‘궁즉통(窮則通)’이라더니 바로 이런 것이 구나 싶어 즉석에서 쾌히 승낙했다. 엄동설한이 닥치는데, 임신부와 간난아이를 데리고 갈 곳이 없어 막막하기 그지없었는데, 우선 거처할 곳이 마련될 수 있다니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그런데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신부님이 “고맙네, 고맙네”를 연발하며 와락 나를 껴안으시는 게 아닌가. 신부님의 의외에 반응에 나는 다소 의아했으나,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내가 공소를 찾은 후였다.

 

  다음날 아침 신부님을 도와 부제(副祭)로 성당에서 일하는 친구 발터(Walter)가 나를 찾아왔다. 공소로 안내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내가 왜냐고 물으니, “가보면 알 걸세. 실은 그 공소 사택이 무척 열악해. 그래서 벌써 두 해째 비워두고 있어. 갓난아기랑 한 겨울을 거기서 나기는 크게 무리야. 신부님이야 공소를 자네에게 맡기면 큰 짐을 덜게 되어 다행이다 싶으신 모양이지만, 네 친구로서 나는 걱정이 태산 같아,” 하는 게 아닌가.

 

                              IV.

  공소는 동네에서 얼마간 떨어져 빈 숲 초입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외지고 황량해서 마치 ‘그림’ 동화의 <헨델과 그레텔>이 길을 찾아 헤매던 깊은 숲속에 들어 온 듯 했다. 공소, 사택 모두 무척 낡고 쇠락했고, 집 모습은 마치 옛날 강원도 화전민이 살던 너와집과 비슷했다. 평소 당찬 내 처도 첫마디가 “여기서 어떻게 살지”라며 고개를 모로 저었다. 나도 순간 마치 천국에서 지상으로 떨어진 느낌이었다. 그러나 내겐 입주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겨울 숲 속은 침울하고 음산했다. 바람이 세차게 불면, 주위의 나무들이 서로 부딪혀 마치 괴기영화에나 나옴직한 무시무시한 소리를 냈다. 거기에 멀리 들짐승 우는 소리까지 들리면 온몸에 소름이 돋곤 했다. 그런가 하면 워낙 낡고 오래 된 집이라 문과 창틀이 모두 취약해서 위부 침입에 대해 제대로 방비를 할 수 없어, 늘 긴장과 불안을 안고 살아야 했다. 열 손실도 커서 난로에 아무리 불을 때도 방의 온도가 17도 이상 오르지 않았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춥고 눈이 자주 왔다. 또 눈이 왔다하면 무릎 까지 찼다. 교우들이 언제라도 공소에 참례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아랫마을로 이어지는 길목까지 눈을 말끔 치워야 하는 데, 이 일이 정말 힘겨웠다. 눈이 많이 온 날은 꼭두새벽에 나서서 동이 훤히 틀 때까지 몇 시간 동안 정신없이 눈을 치웠다. 어떤 때는 애써 한껏 눈을 치고 돌아서면, 방금 치운 곳에 다시 눈이 소복이 쌓여 다시 되돌아가 눈을 치워야 했다.

  내가 맡은 <공소지기>일도 만만치 않았다. 공소 안팎을 늘 청결하게 청소를 해야 하고 때 없이 찾아오는 교우들을 응대해야 했다. 특히 신부님이 오셔서 미사를 집전하는 일요일이 다가오면, 이미 토요일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당일에도 제의(祭衣)준비부터 시작해서 대체로 부제와 복사가 해야 할 온갖 사제 보조 역할을 혼자 도맡아서 해야 했다. 전 과정에서 시나브로 내 처의 도움이 컸던 것은 물론이다. 교우들은 그간 을씨년스럽던 공소에 생기가 돌고, 일요일 미사도 격식을 갖춰 빈틈없이 진행된다며 무척 좋아했다. 제일 기뻐하시는 분은 역시 본당 신부님이셨다. 나는 그 때마다 내 소소한 역할에 대해 얼마간의 보람과 자부심을 느꼈다.

실제로 가장 마음이 시렸던 것은 한 겨울에 처와 아기를 숲속 집에 놓아두고 시내로 나가는 일이었다. 한 주일에 적어도 두 번은 대학에 나가야 되는데, 특히 수요일 오후 세미나가 저녁 6시가 넘어 끝나기 때문에 나간 김에 시장까지 들려 집에 돌아오자면 대체로 9시경이 된다. 겨울 산 속은 오후 4시가 조금 지나면 어둡기 때문에, 몸까지 무거운 안식구는 내가 돌아 올 때까지 아기와 함께 5, 6시간 공포에 떨어야 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빈 숲은 베토벤의 교향곡 6번 <전원>과 요한 스트라우스의 유명 왈츠곡 <빈 숲속의 이야기>의 무대이다. 봄의 향기와 생동감,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 새들의 지저귐이 잠자던 우리의 미적 감성을 일깨워 주는 생명의 요람이다. 그러나 그 해 겨울 빈 숲속의 이미지는 다분히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나그네>의 음울하고 어두운 정조(情調),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곳 숲 속의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 보고 싶었다. 어떤 때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느껴보려고 애써 보기도 했고, 또 때로는 스님의 동안거(冬安居)에 비유해 자위하기도 했다. 그러나 눈앞의 현실은 너무나 냉혹했다.

정황이 그러하니 실제로 그 겨울 동안 내 가장 절박한 목표는 공부보다도 세(네?) 식구가 별고 없이 이 혹독한 동절기를 견뎌내는 것이었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 겨울, 내 삶의 목표 중 가장 앞선 순위는 단연 ‘생존’이었다.

 

  결국 나는 빈 숲 속에서 아름답고 찬란한 생명의 봄을 맞이하지 못하고, 긴 겨울의 끝자락 2월 말에 시내로 거처를 옮겼다. 박사학위 논문을 마무리하고 학위시험(Rigorosum)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생존’을 넘어 ‘성취’에 전념하는 새 보금자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석 달 후 마침내 나는 고단했던 5년 여의 공부를 끝냈다. 그리고 한 달 뒤 둘째 광선이가 태어났다.

 

                     VI.

  2012년 나는 아내와 오스트리아를 방문했다. 오랜만에 볼퍼스베르그의 옛집과 정든 성당, 그리고 빈 숲의 예의 공소를 찾았다. 옛 집과 성당은 시간이 멈춘 듯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빈 숲 속의 공소 자리에는 현대식의 새 성당이 들어섰고 주위도 많이 변해 있었다. 새 성당, 빈 14구의 ‘코르돈 교회’(Kordon Kirche) 앞에서 나는 '그 겨울의 공소‘를 추억하며 깊은 감회에 젖었다.

 

<사진 1> 1968년 가을, 꼭 반세기 전에 내 처가 갓난 첫 아이 수현이를 안고 옛 집 현관 앞에 서 있는 모습이다.

 

 

 

 

 

<사진 2> 집 맞은 편의 성당(St.Josef am Wolfersberg)

 

 

<사진 4> 빈 숲속의 새 성당(Kordon Kirche)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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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행정학회보>(2018, 제52권 제3호)에 실린 <복지국가와 사회복지정책>에 대한 서평을 옮긴다.

 

 

서평

복지국가와 사회복지정책

 

「복지국가와 사회복지정책」. 안병영·정무권·신동면·양재진 저.

서울: 다산출판사. 2018. 648쪽. 34,000원. ISBN: 978-89-7110-557-3.

김태일(고려대 교수)

 

복지정책을 가르치는 학자들은 좋은 우리말 교과서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물론 좋은 우리말 교과서가 필요한 것은 다른 사회과학 분야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복지정책은 특히 필요성이 큰 몇몇 분야 중 하나다. ‘정책’을 다루기 때문이다. 경제학의 경우 ‘맨큐의 경제학’이 거의 전 세계 대학의 경제원론을 평정했다. 자연과학이나 공학만큼은 아니라도 주류 경제 이론은 자본주의 국가라면 전 세계 어디서든 통용되기 때문이며, 경제원론은 90% 이상은 범용 이론을 다루고 극히 일부만 현실을 다루기 때문이다.

 

정책학은 다르다. 정책에는 개별 국가·사회의 특성이 깊이 배어있다. 그래서 이론을 논의할 때도 개별 국가·사회의 맥락에서 이뤄져야 하며, 그에 더하여 각 국가·사회의 사례가 중요하게 논의되어야 한다. ‘정책학’ 자체가 아닌 분야별 정책에 대한 원론이라면 더욱 그렇다(그런 면에서는 행정학도 마찬가지다).

복지정책은 학제적인(interdisciplinary) 분야다. ‘복지’라는 영역 자체도 학제적인데 여기에 정책이 덧붙여져서 더욱 학제적인 특성을 지닌다. 그래서 복지정책 교과서 집필에는 특정 분과학문만을 공부한 학자보다는 다양한 분야를 섭렵한 학자가 좀 더 적합할 수 있다.

 

내가 재직하고 있는 행정학과에는 복지 관련해서 딱 두 과목이 개설되어 있다. ‘복지국가론’과 ‘복지정책론’이다. 행정학과에서 복지를 논의한다면 이 둘이 기본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복지를 연구하는 학자라면, 특히 행정·정책학에 뿌리를 두고 복지를 연구하는 학자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20세기 이후 자본주의 국가는 복지국가다. 복지는 정부 지출항목 중 압도적인 1위이며, 행정학의 핵심 이슈인 ‘큰 국가 vs, 작은 국가’도 근본적으로 복지 정책을 두고 벌이는 논쟁이다.

 

신간 ‘복지국가와 사회복지정책’은 이상에서 내가 말한 특성들을 모두 갖춘 복지정책의 원론서이다. 복지국가 논의로 시작해서 복지정책으로 마무리하는데, 일반 이론과 함께 ‘한국’의 특성과 사례를 충실히 소개하고 있는데다가, 사회복지학, 정치학, 정책학 등 각 학문의 장점들이 적절하게 배합되어 있다.

이 책은 총 4부로 이뤄져 있다. 2개 챕터로 이뤄진 1부는 복지정책이란 무엇인가, 즉 복지정책의 개념과 철학을 다루고 있다. 어느 분야든 원론이라면 해당 학문의 개념 정의부터 시작하는 게 순서다. 그런데 복지 정책은 다른 분야보다 특히 개념 정의와 밑바탕에 깔린 철학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선별인가 보편인가, 시장이냐 정부(복지)냐 등 복지 정책의 방향에 대한 논쟁이 팽배한데, 이에 대한 나름의 견해를 갖는 데는 복지정책의 개념과 철학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 기본이기 때문이다.

4개 챕터로 이뤄진 2부는 복지국가의 이론과 역사를 다루고 있다. 먼저 서구 복지국가의 형성 과정을 설명한 후, 이를 바탕으로 복지국가의 핵심 이론인 복지국가 유형론과 복지자본주의의 정치경제를 논의한다. 그다음에 한국 복지국가의 형성 과정과 현재 모습을 설명한다. 이러한 2부의 내용은 ‘복지국가’ 원론이 담아야 할 핵심내용들로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복지정책의 개념과 철학을 알고 복지국가가 무엇인지에 대한 지식을 갖췄으면, 이제 복지정책을 배울 준비가 된 셈이다. 이어지는 3부와 4부는 복지정책을 설명한다. 복지정책을 배우는 데도 순서가 있다. 복지정책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이해한 후에 개별 복지정책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5개 챕터로 이뤄진 3부는 복지정책이 무엇인가에 대한 일반 이론을 다루고 역시 5개 챕터로 이뤄진 4부는 개별 복지정책의 실제를 다룬다.

전술했듯 1부에서 이미 복지정책의 개념과 철학을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3부에서 다루는 ‘복지정책이 무엇인가’는 1부에서 쌓은 지식의 바탕 위에 구체적인 복지정책의 체계, 과정, 구성요소를 설명한다. 3부의 시작인 7장은 복지정책의 체계와 과정을 설명한다. 정책 형성 및 정책 과정에 관한 정책이론을 복지라는 특성에 맞춰 설명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정책에 대한 일반지식을 갖추도록 한 다음, 이어지는 챕터들에서는 복지정책의 구성요소를 하나씩 설명한다. 복지정책은 정부 ‘재정’을 재원으로 정책 ‘대상자’에게 현금 또는 서비스 ‘급여’를 ‘전달’하는 것이다. 즉 복지정책은 대상자, 급여, 전달체계, 재정으로 이뤄진다. 각 구성요소 중 대상자는 8장, 급여는 9장, 전달체계는 10장, 재정은 11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복지국가부터 복지정책 이론까지의 여정을 지나오면 마침내 4부에서 한국의 개별 복지정책과 맞닥뜨리게 된다. 4부의 12장과 13장은 각각 핵심적인 사회보험인 건강보험과 연금을 설명한다. 이어지는 14장에서는 산재보험과 고용보험, 아울러 이와 밀접히 관련된 적극적 노동정책을 설명한다. 15장은 사회서비스를 다룬다. 대표적인 사회서비스인 보육 및 장기요양과 함께, 오늘날 점점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평생학습을 설명한다. 가장 오래된 복지정책인 공공부조는 마지막 장인 16장에서 다뤄진다. 이 책은 16장으로 이뤄져 있다. 그런데 여기에 5쪽에 걸친 에필로그로서 한국 복지국가의 현실을 평가하고 나아갈 길을 제시하면서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내용을 소개했으니, 이제는 이 책의 장점을 얘기할 차례다.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원론 역할에 충실하면서 각 챕터의 내용이 매우 단단하다는 점이다. 원론은 개론과 다르고 각론과도 구별된다. 개론은 입문자에게 해당 학문이 무엇인가를 소개하는 것이고 각론은 세부 분야의 내용을 깊게 파고드는 것이다. 이에 비해 원론의 역할은 해당 학문의 내용을 폭넓게 소개하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역할에 충실하다.

아무리 뛰어난 학자라도 특정 학문의 세세한 분야를 모두 꿰고 있기는 힘들다. 그래서 단독으로 원론을 집필하 아무래도 다소는 약한 챕터가 있기 마련이다. 이 책은 다르다. 각자가 단독 집필해도 모자람이 없는 쟁쟁한 학자들이, 특히 자신 있는 분야들을 나눠서 집필했다. 그런 만큼 모든 챕터의 내용이 충실하다. 다른 원론 책에서는 찾기 힘든 미덕이다. 이 책의 출간사에서 저자들은 “독자들이 곁에 두고 복지 문제가 궁금해질 때마다 맨 먼저 들춰보는 책”을 만들고자 했다고 밝히고 있다. 나는 이러한 저자들의 의도가 십분 달성되었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이 책의 아쉬운 점을 얘기해 보자. 모든 챕터의 내용이 충실하다는 것은 공동저술이기에 가능한 장점이다. 하지만 공동저술은 아무래도 일관성 측면에서는 약점이 되기 마련이다. 저자들과 긴 시간 교류해온 나로서는 각 챕터를 읽을 때마다 누가 썼는지를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챕터마다 글쓴이의 개성이 분명히 드러났다. 각자의 개성이 담겼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장점이며, 서로를 비교하며 음미하는 것은 나름의 책 읽는 즐거움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복지정책 원론을 배우는 학생에게는 어려움이 될 수 있다. 어떤 챕터들은 논문처럼 저자의 주장이 또렷이 담겨있다. 또 어떤 챕터들은 짧은 지면 속에 많은 이론들을 담고 있다. 그래서 이미 그 분야에 상당한 지식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면 글쓴이의 논의를 충실히 따라가기에 버거운 경우가 있다.

아울러 각자가 분담해서 쓴 것을 모아놓다 보니 챕터들의 연결에 미진한 부분이 다소 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번에 보완하기를 바라는 것 두 가지를 언급하자. 하나는 4부에서 개별 복지정책을 하나씩 설명하기 전에 개별 사회복지 정책이 무엇이며 서로 어떻게 관련되어 있고 또 다른 정책들과는 어떤 관계를 형성하는가에 대한 개괄적인 모습을 그려주는 것이다. 통상 한국의 사회복지정책은 사회보험, 사회서비스, 공공부조로 이뤄진 것으로 이해한다. 이들이 바로 4부에서 다루는 개별 정책들이다. 이 정책들은 각각 배경, 목적, 특성이 다르다. 그래서 3부에서 다루는 대상자, 급여, 전달체계, 재정이 각기 다르다. 그러므로 4부의 개별 정책으로 들어가기 이전에 각 정책이 왜 어떻게 다른지를 종합적으로 논의한다면 한층 이해도가 높아질 것이다. 혹은 3부의 대상자, 급여, 전달체계, 재정 챕터에서 각 정책영역별(사회보험, 사회서비스, 공공부조) 차이를 설명하고 있으므로 아예 3부의

앞부분에서 사회복지정책을 구성하는 개별 복지정책들을 개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하나는 사회적 위험에 대한 보다 상세하고 친절한 설명이다. 복지정책은 사회적 위험에 대한 대응으로 나왔다. 산업사회의 구사회적 위험에 대한 대응으로 사회보험과 공공부조가 나왔고, 탈산업사회의 신사회적 위험에 대한 대응으로 사회서비스가 나왔다. 따라서 복지정책을 이해하려면 ‘사회적 위험’에 대한 이해가 필수다. 이 책에서도 전반에 걸쳐 사회적 위험을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사회적 위험’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1장에서 아주 간략하게 다루고 있다. 이에 대한 논의가 좀 더 길게 그리고 친절하게 이뤄진다면 한결 이 책의 주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다음으로 아쉬운 점은 아니나 희망 사항을 하나 덧붙이고 싶다. 에필로그의 확장이다. 이 책의 에필로그는 저자들 스스로 이 책의 장점 중 하나로 꼽고 있는 것인데, 복지국가 한국의 진단과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복지국가와 복지정책을 다루는 교과서라면 마땅히 마무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너무 간략하다. 이 책이 겨냥하는 독자층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나야 이 분야를 연구하는 학자이니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듣는다. 그러나 대학생이나 일반인 독자들은 그렇지 못할 것 같다. 저자들이 복지국가 한국에 대해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담았다면, 이해하기 쉽도록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것이 좋다. 2판에서는 에필로그의 분량이 길어지길 희망한다.

 

이제 이 책의 저자들을 소개하면서 서평을 마무리하자. 이 책은 안병영, 정무권, 신동면, 양재진 교수가 집필했다. 정무권, 신동면, 양재진 교수는 행정학 분야에서, 아니 분야를 한정하지 않더라도, 한국에서 가장 진지하게 복지국가와 복지정책을 연구하는 학자를 꼽으라면 모두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분들이다(이 분야 전공자라면 틀림없이 내 말에 동의할 것이다). 그리고 이 세 학자는 모두 안병영 교수님의 제자다. 행정·정책학 분야에서 복지를 연구하는 40대 이상 학자들의 태반은 직간접으로 안병영 교수님의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다. 박사학위를 받고 교편을 잡기까지 안병영 교수님과 아무런 인연이 없던 나조차도, 그 이후 지금까지 복지정책을 연구하면서 안 교수님과 제자들이 만든 연구모임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고 있다(정무권, 신동면, 양재진 교수는 모두 이 연구모임의 회장직을 맡았거나 맡고 있다). ‘복지국가와 복지정책’ 분야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원로와 중진 학자 넷이 뜻을 모아서 한 권의 원론을 저술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학계의 기쁜 일이고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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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일: 미국 카네기 멜론 대학교에서 정책학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고려대학교 행정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관심분야는 복지, 재정, 그리고 양적 정책분석 방법론이다. 최근 저서로는 사회과학을 위한 통계학(2018), 한국경제, 경로를 재탐색합니다(2017).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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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전 2003년 9월 <중도>를 표방하며 뜻 맞는 사람들과 인터넷 신문 '업코리아'를 창간했다.

김수환추기경님이 발기인으로 참여하시고 첫호에 필자와 인터뷰를 해 주시며 격려해 주셔서 큰 힘이 되었다.

 

'업코리아'대표 안병영 연세대 교수 가톨릭평화신문.url

중도성향 인터넷신문 창간 시동.url

 

김수환 추기경 “盧 소신 너무 강해 개선 어려워” 뉴스 동아닷컴.url

인터넷 중도신문 '업코리아' 닻올렸다.hwp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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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를 추억하며

삶의 단상 2018. 11. 23. 05:52 |

           I.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 3주기가 되었다. 나는 그의 문민정부에서 교육부장관으로 1년 8개월 동안 일했기 때문에 그에 대해 남다른 감회를 느낀다. YS는 정치인으로서 한국 현대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논의와 평가는 그동안 다양하게 펼쳐졌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정치학자로서 나는 장관으로 있는 동안 비교적 지근거리에서 YS의 정치적 리더십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그래서 할 얘기가 많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의 인간적 면모와 연관해서 내가 겪은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할까 한다.

 

         II.

나는 1995년 말, YS로부터 임명장을 받을 때 처음 그를 대면했다. 그 전날 개각발표하기 약 1시간 전 그로부터 전화를 받고, 10여분 대화를 나눴던 것이 그와의 사전 접촉의 전부였다. 그러나 워낙 오랫동안 언론을 통해 그를 자주 접했던 탓에 초면임에도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후 내가 장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그와는 많은 공식적, 비공식적 만남이 있었다. 특히 내가 YS대통령 공약사업인 <5.31 교육개혁>의 주무 장관이었기 때문에 다른 장관들 보다는 잦은 접촉이 있었던 편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와 단둘이 대면해서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눌 기회는 별로 없었다. 그 때문에 그와는 <일의 관계>를 넘어서는 인간적 상호작용은 거의 없었던 기억이다.

 

YS의 리더십 스타일이 부처 일에 일일이 간섭하기 보다는 장관을 믿고, 그에게 일을 맡기는 편이였으므로 나는 장관직을 수행하면서 대통령을 의식하거나 눈치를 보는 일이 별로 없었다. 특히 당시에 청와대의 내 상대역이 박세일 수석이었는데(그 때, 그는 청와대에서 가장 진보적인 인사였다), 그와는 오래 가까운 사이였고 그가 매사에 나를 적극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에 청와대를 부담스럽게 느낀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장관으로서 나의 정책자율성은 매우 높았고, 인사에 관한 권한도 컸다.

 

그런데 하루는 우연히 마주친 동료 O장관이 내게 “영감님(대통령)이 왜 자네를 그렇게 좋아하지?” 라며 말을 건네는 게 아닌가. O장관은 나와 중고등학교 동창으로, YS와는 5년 임기를 같이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나는 반신반의하면서 “그럴 리가” 했더니, 그는 “아냐, 내가 괜히 빈말 하겠나”라고 답했다. 나는 쑥스러워 더 묻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III.

이후 나는 장관직에서 물러나서 연세대로 돌아갔고, YS도 임기말에 IMF 사태로 큰 홍역을 치루고 상도동옛집으로 귀환했다. 나는 실의에 젖어있을 그를 부담 없이 한번 찾아뵙고 싶었다. 그런데 댁을 몰라 박세일 수석에게 동행을 청했더니, 그가 흔쾌히 앞장을 섰다. 그래서 이름만 듣던 상도동댁을 찾아갔다. 집이 생각보다 크지 않았고 조촐했다. 응접실도 무척 수수하고, 약간 협소한 느낌이었다. 어느 한구석도 대갓집 분위기가 없어 편했다. YS가 매우 반겨서 정말 잘 왔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몇 년 후, 가친이 돌아가셨다. 그런데 세브란스 빈소에 아무 예고도 없이 YS가 문상을 오셨다. 나는 황망히 그를 맞으며 “웬일이시냐”고 했더니, “그럼 내가 와야지, 누가 오나” 고 담담히 대답했다.

일이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 후 내 아들이 명동성당에서 결혼을 하는데, YS의 K 비서실장이 내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는 “각하가 곧 식장으로 떠나십니다”라는 게 아닌가. 나는 크게 놀라서 그에게, “백번 고마운 일이나, 격에 맞지 않으시고 송구스러워 내가 불편하다”며 제발 말려달라고 간청을 했다. 얼마 후 K실장이 겨우 그를 안으로 다시 모셨다고 전화가 왔다,

 

             IV.

2003년 12월 중순을 넘어 갈 즈음, 이수성 전 국무총리가 내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는 연말도 되었으니 문민정부 때 함께 일했던 장관들이 한번 YS를 모셨으면 좋겠다며, 23일 저녁으로 날짜를 정했으니 꼭 나오라고 말했다. 나는 참석하겠다고 답하면서 오랜만에 YS를 만나게 되어 내심 무척 기뻤다.

 

그런데 그 후 며칠 사이에 예상치 못했던 일이 빚어졌다. 내가 노무현 참여정부의 교육부총리로 입각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개각 발표 날이 YS를 뵙기로 한 23일, 바로 그날이었다. 나는 무척 괴로웠다. 그날 그 모임에 참석하자니 우선 YS를 뵙기가 민망했다. YS 입장에서 볼 때, 내게 얼마간 배신감이 들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더욱 그러했다. 그렇다고 불참하지니 그것도 예가 아니었다. 나가겠다고 약속해 놓고 불편한 자리라서 피한다는 게 얼마나 얄팍한 일인가.

그날 온 종일 가슴에 그늘을 안고 지냈다. 그러잖아도 온 가족이 반대하는데 입각을 결정해서 마음이 불편하기 그지없는데, 이 일까지 겹치니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고민 끝에 결국 나는 그날 저녁 YS를 뵙기로 결정했다. 그러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하게 느껴졌다. “가야지, 가서 YS의 언짢은 눈총을 받는 편이 낳지”.

 

나는 시간에 맞춰 약속장소로 나갔다. YS는 미리 와 계셨다. 나를 보자 YS는 손을 번쩍 들고 빙긋이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모두가 들을 정도로 큰 소리로 “내가 오늘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어. 아니, 안 장관을 발탁하다니. 내가 노무현 대통령을 다시 봤어. 정말 기쁜 날이야”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오늘은 내 옆에 앉으시게”하며, 옆 자리를 내 주었다.

 

예상을 뛰어 넘는 YS의 반응에 나는 무척 놀랐고, 크게 감동했다. 그는 역시 큰 구경(口徑)의 정치가였다. 그러면서 나는 그가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숱한 격랑을 헤치며 우뚝 솟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그 특유의 금도( 度)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 순간 나는 그의 좌우명 '대도무문(大道無門) '을 떠 올렸다.

 

 

서거 3주기를 맞아 여유 만만한 모습으로 빙긋이 웃는 YS가 무척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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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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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윤주명 2019.12.24 14:39 Address Modify/Delete Reply

    교수님 글 잘 보았습니다.

고성 통일전망대

포토갤러리 2018. 11. 19. 05:47 |

지난 11월 3일 사회정책연구회 모임이 고성 국회연수원에서 열렸다. 25명이 왔으니 큰 식구였다. 다음날 일행들과 통일전망대를 방문했다. 내게 보내 온 사진 몇장을 올린다.  첫째 사진에 멀리 보이는 것이 금강산 해금강이 아닌가 싶다. 마지막 사진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이른바 <마지막 화장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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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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