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작년 말 가까운 제자 C군이 내게 전화를 걸어 아들 주례를 부탁했다. 이곳 속초/고성으로 온 후 웬만해서는 주례를 사양해 왔는데, C군과의 각별한 관계 때문에 이번에는 거절하지 못하고 순순히 응락했다. 혼주인 C군은 연세대 행정학과 75학번 옛 제자인데, 특히 내가 <연세춘추> 주간을 할 때 학생기자로 유신말기의 어려운 시기를 함께 헤쳐나갔기에 나와의 인연이 무척 깊고 오래되었다. 더욱이 내가 30여 년 전 C군 주례를 했기 때문에 아들 주례까지 맡게 되면 ‘부자’ 주례를 하게 되는 셈이다. 결코 흔치 않은 일이 아닌가. 그런데 더 신기했던 일은 결혼 예정일이 다음 해(2020년) 2월 29일이었다. 이 날은 4년마다 윤년이 되어야 찾아오는 달력에서 가장 드물게 등장하는 날짜인데, 그날이 바로 52년 전에 내가 멀리 이국 땅 알프스 산록의 작은 성당에서 내 처와 손을 맞잡았던 나의 결혼기념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그 날을 기쁘게 마음에 새겼다.

 

                     II.

작년 말 중국 무안에서 발생한 ‘코로나 바이러스’는 올 2월 중순에 들어서면서 우리나라에도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청정지역으로 알려진 이곳에서도 2명의 확진자가 발생해서 점차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급기야 2월 23일 정부는 감염 위기경보를 ‘심각’으로 격상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오후부터 나는 약간의 발열과 오한, 그리고 얼마간의 인후통을 느꼈다. 기침은 없었다. 며칠간 겨우내 크게 자란 잡초들을 뽑느라고 조금 무리했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처음에는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런데 웬걸 밤새 몸을 뒤척이며 앓는 소리를 냈다. 아침에 인후통은 가셨는데 열이 떨어지지 않았다. 작년 고성산불에 체온기도 타버려 실제로 재보지는 못했지만, 체온이 좋이 38도 가까이 될 듯싶었다. 거울로 보아도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급한대로 해열제를 먹어도 열이 조금 내려가다 다시 올라갔다. 기분이 영 언잖았다. 하필 코로나가 창궐하는 이 때에, 그것도 주례를 며칠 앞선 이 시점에서 발열이라니, 이게 무슨 변고인가.

 

자연히 코로나 19가 우려되었지만, 지난 몇 주 간의 나의 생활궤적에 비추어 바이러스에 감염될 가능성은 거의 전무했기에 스스로 고개를 모로 저었다. 그러나 불편한 심경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다음날 (25일) 아침 서울서 아들이 들이 닥쳤다. 제 엄마한테서 내 이야기를 듣고 걱정이 돼서 온 모양인데, 내 이마를 만져보더니 일단 서울로 가자고 서둘렀다. 며칠 후 결혼식에 가자면, 어차피 시외버스를 이용해야 하는데, 아들 승용차로 안전하고, 쉽게 갈 수 있기에 우리 부부는 주저 없이 따라나섰다.

서울에 온 후, 그 다음날(26일) 까지 열도 조금 내리고 한결 몸이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그렇게 낳는가 싶었는데, 다음날(27일) 아침부터 다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해열제를 먹어도 별 소용이 없었다. 불길한 생각이 자꾸 고개를 들어, 잘 아는 동네 내과를 찾았다. 의사 선생님은 그간의 정황이나 몸상태로 보아 코로나 19는 분명 아닌 듯하나, 검체검사를 받기 전에는 확언을 하기는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하도 답답해서 모래 결혼식 주례가 예정되어있는 내 형편을 얘기하면서, “선생님이시면 어떻하시겠어요?”라고 유치한 질문을 던졌다. 그는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제가 어떻게 그 대답을 합니까? 교수님 스스로 결정하셔야지요.”라며, “주례를 하지 않으실 수 있으시면, 그게 최선의 방법이지요.”라고 답했다. 정답은 분명한데, 내가 실천하기 어려운 답이었다.

 

                       III.

나는 실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결혼식을 이틀 앞두고, 주례를 하지 않겠다고 통보를 하는 것은 너무 얄팍하고, 어른답지 못하다고 느껴져 그것은 일단 대안에서 제외했다. 그렇다면 주례를 해야 하는데, 내 스스로의 느낌은 물론, 객관적으로도 코로나 감염 확률이 무척 낮으므로 눈을 딱 감고 감연히 주례에 나서는 것이 어떨까, 그것도 분명 하나의 대안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뇌리에 담는 순간, 동시에 이에 맞서 최악의 시나리오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런데, 내가 만약에, 백에 하나 코로나 19에 감염되었다면?”이 그것이었다. 순간 나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만약 바이러스 비말이 불과 수십 센치 앞에 서서 주례사를 경청하는 신랑, 신부에게 튀게 된다면, 아니 더 나아가 식장을 가득 매운 하객들에게도 그 음습한 영향이 미친다면, 그것은 실로 상정하기 조차 무서운 참담한 상황이 아닌가. 그리고 비록 미세하지만 그 작은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내가 주례로 나선다면 그것은 범죄행위와 다름없는 게 아닐까. 생각이 이에 미치자, 즉시, 내가 가능한 빨리 검체검사를 받아 비감염자인 것을 스스로 확증하는 이외에는 달리 해답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서대문구청 옆 선별진료소는 제법 붐볐다. 일단 등록을 마치고 집에서 세 시간 기다려 연락을 받고 진료소로 갔다. 27일 오후 4시였다 그런데 여기에 새로운 암초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담당 의사에게 검사결과가 언제 나오느냐고 문의하니, “이틀 정도”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간곡하게 내 사정을 얘기하며, 좀 더 일찍 알 수 없겠느냐고 묻자 그 분은 단호한 어조로, “당장 주례를 할 수 없다고 말씀하세요. 아무리 빨리 챙겨도 내일 밤까지 결과가 나올 가능성은 반이 안 됩니다”라는 것이었다. ‘아차, 한발 늦게 왔구나’라는 생각이 엄습하며 무척이나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일단 검체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별 소용이 없을 것 같았으나, 구청 보건소 담당직원에게 가능한 한 빨리 결과를 알려 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집에 돌아오니 암담한 심경이었다. 만약 검체검사 결과가 내일 밤까지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리 궁리해도 답이 안 나왔다. 고심 끝에 나를 대신해서 주례를 맡아 줄 착한 후배 교수 한 분을 머리에 담아 놓았다. 그러면서 제발 내일 한밤중에 그에게 곤궁한 전화를 거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다. 스트레스가 쌓여서 그런지 열은 38도 근처를 오르락내리락하며 떨어질 기세를 보이지 않았고 입술과 목이 타서 계속 물만 들이켰다. 그렇게 안절부절 서성거리며 28일 하루를 천년처럼 보냈다.

 

오후 6시, 애타게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 예상대로 음성판정이었다. 나는 고맙다는 말을 연발했다. 진정으로 감사한 심경이었다. 굳게 닫혔던 세상이 훤히 열리는 기분이었다.

신기한 것은 결과 통보를 받고 나자 그토록 끈질기게 나를 괴롭히던 발열 증세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잠자리에 들 때쯤은 평온을 다시 찾았다. 그리곤 실로 엿 세 만에 긴 단잠을 푹 잘 수 있었다.

 

                     IV.

다음 날, 코로나 소용돌이에도 불구하고 결혼식장은 놀랍게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행복한 얼굴로 해맑게 웃는 신랑, 신부의 모습이 돋보였고, 이들을 축복하러 식장을 찾은 친지, 동료들로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붐비고 있었다. 나는 주례사 말미에, “신랑, 신부는 오늘 코로나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이 자리에 함께하신 하객 여러분들께 평생 감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나의 어줍잖은 코로나 해프닝은 끝났다. 내가 평생 약 300회 주례를 섰는데, 이번처럼 크게 혼난 것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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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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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만곤 2020.05.26 13:01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부총리님의 글은 당연한듯 그렇긴 하지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이런 글에서 더욱 빛난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결례를 무릅쓰고 대놓고 말씀드리면
    "부총리님! 이 글은 최곱니다!" 했으면 좋겠습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도 걸핏하면 잘난 척하기만 하고 별 수 없구나 싶은데
    이런 글이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을 것입니다.
    부총리님, 외람된 말씀, 죄송합니다.

  2. 이근우 2020.05.31 18:09 Address Modify/Delete Reply

    네. 부총리님,
    그 마음 고생하신 것 충분히 실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종 통보를 받으신 순간의 그 안도는
    비슷한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당일 예식장 맨 앞줄에 가만히 앉아 계시는 모습을
    보고 황급히 인사만 드렸을 때 실은 많이 편찮은 기색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 때는 코로나 창궐로 초비상 시기라서 자세히 여쭙지도 못했습니다. 이제 그 사정을 알 수 있게 되어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아무리 아수라장 같은 세상이라도 코로나 이전 세상이 그립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닥친 커다란 시련입니다.
    이번 시련을 용케 극복한다면 자연에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이 필요해 보입니다.
    부총리님, 또 한번의 구사일생 경험 어쩔 수 없었지만
    이제는 다시는 하시지 않으시기를...

  3. 서남수 2020.06.02 17:54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부총리님, 현강재를 다시 열어주셔서 감사하고 또 반갑습니다^^ 현강재를 통해 자주 뵙겠습니다.

  4. 이근우 2020.06.03 06:33 Address Modify/Delete Reply

    장관님께서도 들어오셨네요.
    반가운 분들 뵐 수 있어서 좋습니다.
    이곳이 만남의 광장이 되면 옛 정을 떠올리며 하루하루가 일촌이 될 것 같습니다.
    코로나로 멀어지고 있는 빗속의 돌담길 다정하게 끝까지 걸을 수 있겠 습니다.

  5. 서남수 2020.06.05 09:26 Address Modify/Delete Reply

    이근우 감사를 여기서 보네^^ㅎ 반갑네!

  6. 최대용 2020.06.30 22:37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정작 당사자인 저는 이제 글을 보고 황송한 마음으로 댓글을 올립니다.
    지인의 귀뜸이 없었으면 황당한 무례로 일관할 뻔 했습니다.
    교수님께서 코로나 말씀은 하셨습니다만 미욱한 저는 교수님의 이런 고뇌와 곤혹은 간과하고 아들 결혼식에만 신경썼었습니다.
    교수님께서 생사위중의 심각한 고뇌와 염려를 안고 코로나 검사의 난관을 넘어 결혼식 주례를 하여 주신 데 대해 거듭 거듭 감사드립니다.
    이글을 진작 보았으면 지난 번에 뵈었을 때 인사와 화두가 되었을텐데 일언반구도 못하여 죄송하고 아쉬운 마음입니다.
    존경하옵는 교수님의 사랑과 지도에 감사드리며 저희 가족과 각별한 인연에 교수님 결혼기념일과 아들 내외의 결혼식 일자가 같은 것도 기쁜 의미 이상으로 생각합니다. 아들 내외는 직장생활 잘하며 알콩달콩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곳에 새싹과 새순이 돋듯 사모님이 특기를 발휘하시면 푸른 과원에 성채가 세워지리라고 봅니다.
    교수님과 사모님 오래 오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기회되는 대로 자주 찾아 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
    최대용 올림

  7. 현강재 현강 2020.07.01 01:51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최박사가 내 글을 보지 않기를 바랐는데, 결국 보고 말았군. 검체검사 여부를 두고 얼마간 마음고생을 한 건 사실이지만, 전혀 "생가위중의 심각한 고뇌와 염려" 수준과는 거리가 먼 얘기네. 그리고 일이 어쩌다 그렇게 진행된 것이지, 최박사가 잘못한 것은 1도 없네. 내겐 이제 재미있는 추억으로, 그리고 최박 일가와의 각별한 인연으로 아름답게 뇌리에 남아있는 에피소드이네. 지난 번 이곳에 왔을 때, 최박 부부와 원우내외의 행복한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네. 늘 건행하기를 비네.

  8. 김영래 2020.07.12 21:48 Address Modify/Delete Reply

    안 교수님께

    최근 올리신 글 잘 읽었습니다.
    지난 2월 마음 고생이 크셨습니다.
    코로나19로 일상이 바뀌어 저는 주로 수원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요즈음은 그곳 강원도 고성에 계시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습니다.
    의미있게 삶은 사시는 안 교수님과 사모님에게 천주님의 가호가 있기를 바랍니다.

  9. 현강재 현강 2020.07.17 11:21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김만곤 교장선생님, 서남수 장관님, 그리고 김영래 교수님, 이렇게 제 블로그에서 뵙게 되어 무척 반갑고 고맙습니다. 어려운 시기를 건강하신 가운데 잘 넘기시기를 빕니다.

  10. 양재진 2020.08.12 23:42 Address Modify/Delete Reply

    교수님께 들었던 얘기인데, 글이 더 재미있네요. 소설이 영화보다 재밌는 이유겠지요. 그건 그렇고, 당일에 주례서라면 주례서주실 그 착한 후배 교수님이 누군지 궁금합니다. 나중에 만나뵈면 알려주세요. 건강하시구요.

                                l.

2008년 이곳 원암리에 새집, 현강재를 짓기 시작할 무렵부터 나는 벽난로를 간절히 원했다. 그러면서 하얗게 눈덮힌 겨울 따스한 벽난로 옆에 비스듬이 누워 한가로이 책을 읽어나 음악을 듣는 정경을 떠올리곤 했다. 설계부터 시공까지 집 짓는 과정을 도맡았던 처에게 내가 주문했던 것은 단지 그것 하나였다.

 

공사가 꽤 진행되었을 때, 내가 벽난로를 잊지 말라고 다시 일깨웠다. 그러자 처는 걱정 말라며 벽난로가 들어앉을 자리와 벽에 연통이 나갈 구멍까지 마련했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하루는 벽난로를 보러 가자며 서울 강남의 어느 건축자재 전문 백화점으로 데리고 갔다. 다양한 철제 벽난로 중에 내 마음에 들었던 것은 놀웨이제 벽난로였다. 무엇보다 요란스럽지 않고 간단해서 좋았다. 가게 주인도 잘 고르셨습니다. 성능도 뛰어나고 작아도 기품이 있지요라며 한껏 부추겼다. 그런데 값이 너무 비쌌다. 내 기억으로는 700만원을 요구했던 것 같다. 그 반값 정도를 예상했던 우리는 결국 벽난로 사는 일을 뒤로 미루고 되돌아 왔다. 아쉬웠지만 별도리가 없었다.

 

공사가 막바지에 들어서면서, 내 처는 자주 자금이 딸린다고 걱정을 했다. 그러더니 하루는 미안한 얼굴로, “아무래도 벽난로 설치는 뒤로 미루어야 겠다고 말했다. 나는 볼멘소리로 내가 당신한테 주문했던 게 딱 그거 하난데 그것도 어려워라고 불평을 했지만, 꽤나 돈에 쪼들리는 것을 알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현강재가 완공되어 입주한지 한 달 쯤 됐는데, 고성군에서 연락이 왔다. 내용인 즉, 우리 집이 경관이 아름다운 집으로 선정이 되었으니 상금을 타러 군청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 내 처에게 군에 그런 것 신청을 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처는 그런 적이 없다며, 다만 얼마 전에 토성면에 건축 관계하는 분이 집 안팎 사진 몇 장을 보내달라고 청해서 준공검사에 필요한 듯싶어 그대로 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럼 그 분이 우리를 대신해서 신청한 게 아닐까라고 추정했다. 나중에 보니 그 주측이 맞았다.

 

다음 날, 우리는 함께 군청으로 갔다. 가는 도중 내 처가 상금이 얼마나 될까. 100만원, 아니 그래도 200은 되지 않을까라며, 무엇보다 자기 작품(?)이 인정을 받아 기분이 좋다고 즐거워했다. 그런데 의외로 상금은 거금 500만원이었다. 우리는 크게 놀랐다. 그러면서 거의 동시에 벽난로!”를 외쳤다.

                       

                                      ll.

며칠 후, 내 처가 양평에 벽난로를 보아 둔 것이 있다며, 나를 그곳으로 데리고 갔다. 전에 강남에서 내가 골랐던 바로 그 놀웨이산 벽난로인데, 흥정은 의외로 빨리 진행되어 500만원으로 낙착됐다. 바로 경관이 아름다운 집상금, 바로 그 가격이었다. 우리는 모든 게 그림처럼 맞아 떨어져 신기 가득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다음 날, 양평 난로 가게 사장님이 직접 벽난로를 차에 싣고 와서 설치해 주셨다. 무쇠 벽난로가 워낙 무거워 나와 둘이 땀을 뻘뻘 흘리며 겨우 일을 마무리했다. 그런데 떠나기에 앞서 그가 웃으면서, “교수님! 오늘 저는 난로가 아니라 낭만을 설치하고 갑니다라고 말했다. 예사롭지 않은 말투였다. 나는 멋진 말씀이네요. 그런데 혹시 저를 아세요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제가 작년까지 시사저널기자였습니다. 전에 교수님이 정부에 계실 때 제가 단골로 몇 번 인터뷰를 했었는데, 혹시 알아보실까 했더니 끝내 못알아 보시더군요라는 게 아닌가. 나는 너무 민망해서 제가 워낙 면치(面癡)라서, 죄송합니다를 거듭했다. 그러면서 예상치 못했던 인연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III.

그 해 겨울, 새로 설치한 벽난로 곁은 우리 세 식구, 나와 내 처 그리고 작년에 하늘나라로 떠난 반려견 애리가 가장 선호하는 명당 자리였다. 그 해 따라 큰 눈이 기록적으로 자주 내렸다. 현강재가 며칠 동안 원전히 눈에 갇혔는데, 난로 곁은 언제나 천상의 낭만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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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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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익로 2020.05.18 20:45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부총리님!!!
    드디어 현강재가 다시 문을 열게 되었음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꼭 1년하고 1달이라는 시간이 '잃어 버린 천국'의 공간을
    침묵으로 지켜왔군요!!!
    새글이 올라온지 달포가 지난 오늘에야 현강재를 방문케 되었지만~~~
    너무다 다행이고 제 마음 또한 기쁘기 한량없는 것은 어쩜일까요?
    그간의 상심을 잘 관리하시었기에 이 아름다운 봄 날, 돋아오른 새 순처럼
    말끔히 치유되었으리라 믿고 싶습니다!!!

    부총리님!!!
    벽 난로의 낭만에 대하여~~~ 흥미로운 일화입니다!!ㅎㅎ
    말 그대로 낭만 그 이상입니다!!!
    그러나 사모님의 솜씨가 빛을 발한 명작인데~~~너무 아쉽!!!ㅇㅇ

    부총리님~~다시 현강재를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심에 감사를
    드리오며, 예전보다 더 여유롭고 풍성한 원암리 농사꾼이시길 기원드립니다!!!

    김익로 올림

  2. 현강재 현강 2020.05.20 09:12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김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간 많은 분들께 심려를 끼쳤습니다.
    앞으로는 좋은 소식만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요즘 이곳은 코로나 우려에도 불구하고, 봄 향기가 천지에 가득합니다.
    부디 건강, 성취, 행복을 두루 누리시길 빕니다.

  3. 이근우 2020.06.03 09:42 Address Modify/Delete Reply

    추억이 가슴에 저며듭니다.
    벽난로의 낭만이 빨리 되돌아오기를
    기원합니다.

  4. 최 종 률 2020.06.29 14:03 Address Modify/Delete Reply

    반가, 반가, 반갑습니다. 우선 제 꿈인 난로가 바로 안박사댁에 모셔졌군요. 축하합니다. 저는 어린시절부터 불장난을 좋아해서 평생 난로가 꿈으로 살아 있습니다. 서초동에 살때 한 10년 벽난로있는 집에서 살
    았는데 난로는 역시 눈 오는 날이 제격입니다. 한데 그 난로때문에 집사람과 자주 부부싸움을 했습니다. 추운 겨울날 눈이 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만사제치고 벽난로를 피웠는데 문제는 나중에 뒷처리하는 것이 제몫이었습니다.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재를 치우고 나면 다시 장작을 피우곤 했는데 그때마다 누가 재를 치우느냐로 아내와 아웅다웅 했습니다. 일을 도와주는 아주머니는 일주일에 두번 오는데 아주머니가 올때는 날씨가 좋아 벽난로를 피울 일이 없었습니다. 또하는 장작을 사는 일인데 교수님이 말씀하신 강남 난로집에 부탁하곤 했습니다. 장작은 반드시 참나무(oak tree)라야 하는데 난로집에서 보낸 참나무속엔 30% 정도 소나무를 끼워넣었어요. 이게 우리나라 상인들의 수준이지요. 그때마다 난로집에 전화를 걸어 불평을 해도 별수 없었습니다. 서초동 집을 떠나면서 벽난로도, 핀란드 난로도 꿈에만 남아 있습니다. 몇해전에 기흥에 쬐꼬만 cottage를 장만했는데 아무리 봐도 난로 놓을 자리가 마땅찮아 늘 아쉽습니다. 밖에 나가 어디에 굴뚝을 뚫을까 아무리 둘러봐도 자리가 없고 안에서도 난로 놓을 자리가 없어 답답합니다. 난로가 있으면 눈 내리는 날은 꼭 기흥집에 가고 싶을텐데 그게 없으니까 눈이 와도 무덤덤합니다. 괜히 난로 얘기에 맘이 들떠서 수다를 떨었습니다. 많이 즐기시며 더러운 세상을 잊고 지내시길 빕니다. 서울 최종률 드림

      I.

51, 오전까지 날씨가 멀쩡했는데, 오후에 접어들면서 건조주의보가 내린 가운데 바람이 점차 거세지기 시작했다. 저녁녘이 되자 흔히 화풍이라 불리는 양강지풍의 진면목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몰아치는 강풍에 이제 막 아름다운 연두색으로 옷을 갈아입은 나무들이 허리가 휘도록 흔들리고, 바람소리도 마치 괴기영화에서처럼 공포스런 굉음을 내며 고막을 휘저었다. 봄철 이곳에서는 늘 겪는 현상인데, 그날따라 불안한 마음이 잔물결처럼 일렁였다. 그러면서 작년 44. 고성 산불의 악몽이 머리를 스쳤다.

 

9시가 넘어 침대에 편하게 누어 jtbc‘팬덤싱어를 시청하고 있는데, 서울의 C형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급한 목소리로 지금 TV에서 그곳 토성면에서 또 산불이 났다는데, 알고 있지라고 내게 물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며 몰랐는데, 고맙네라고 전화를 끊고, 부리나케 밖으로 뛰어나갔다. 사위를 들러보니 다행히 어디서도 화염이 내뿜는 붉은 기운이 감지되지 않았다. 아주 가까운 곳은 아닌 듯싶어 일단 안심하고, TV를 뉴스로 돌렸다. 발화지점이 도원리였다. 북쪽으로 약 6, 7km 지점이고 그 사이에 저수지와 군부대, 그리고 지난 불로 벌거숭이가 된 산이 있으니 당장 위급한 상황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전화에 불이 붙었다. 서울의 아들, 딸과 친지들이 tv를 보고 걱정이 돼서 야단이 났다. 문제는 이미 태풍급으로 거세진 강풍과 바람의 방향이었다. 그런데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솟뚜껑보고 놀란다라는 얘기처럼 작년의 악몽이 자꾸 떠 올랐다. 지난 해 산불 때, 병원약속 때문에 서울에 갔었던 내 처는 더 불안한 듯, “일단 대피할 준비를 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그렇게 위급한 상황은 아니라고 얘기했지만, 이미 한 밤중이고 이런 강풍이 계속되면, 작년의 경험으로 불길이 몇 km 질주하는 것은 순시간이라는 사실 때문에 나도 마음이 흔들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서울서 아들애가 전화로 일단 대피하세요라고 성화를 했다. TV를 보니 불길은 더 확산되고 있고, 그곳 인근 주민들은 이미 대피를 했다고 한다. 10시경, 우리도 대피하기로 마음을 모았다. 그리 화급한 상황은 아니었는데도, 나나 내 처나 이것저것 챙길 생각이 없었다. 작년 산불로 모두 불타 귀중한 물품도 없었거니와, 그간 갖추지 않고 살아도 별로 불편하지 않았던 경험이 작용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이 나이에 대피하면 죽을 일도 아닌 데 황급하게 수선 떨기가 싫었다. 나는 급한대로 설합속에 usb와 최근 작업하던 자료들을 넣어 한 가방 들었고, 내 처는 추을지 모른다며 겨울 오버 하나를 달랑 들었다.

 

 

차를 타고 속초로 나왔고, 아들애가 tv를 보며 핸드폰으로 중계를 했다. 다행히 바람이 도원리 북동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고 했다. 산불은 여전히 기승을 부리며 확산되고 있었으나, 바람 반대 편에 있는 우리 집은 위험권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었다. 새벽 130분경, 우리는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다시 tv를 켜고, 그간 못 받은 전화와 문자 메시지에 답을 하며 빨리 날이 밝아 헬기가 떠서 본격적인 진화작업을 하기를 학수고대했다.

 

 

       II.

밤새 수 십통의 전화와 문자 메시지를 보낸, 친지 여러 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작년에 이어 이번에 다시 심려끼쳐 죄송하기 짝이 없다.

늙마에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이색체험을 거듭하는 내 팔자도 스스로 흥미롭다. 오늘도 아직 새벽 시간인데, 밖에는 또 예의 '양강지풍이 그 위세를 떨치며 휘몰아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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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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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동면 2020.05.04 16:10 Address Modify/Delete Reply

    밤 늦도록 뉴스를 보며 마음을 졸였었는데, 다행입니다. 화마로부터 고성 지역이 안전하기를 기원합니다.

  2. 김만곤 2020.05.10 09:56 Address Modify/Delete Reply

    무얼 들여다보고 있는데 아내가 뉴스를 보며 "저곳이 그 어른 계시는 곳 아닌가?" 했습니다.
    얼른 지도를 열어놓고 뉴스를 보고 있었습니다.
    부총리님!
    부디 편안하시기 바랄 뿐입니다.

  3. 현강재 현강 2020.05.13 07:22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김만곤 교장 선생님!

    번번히 심려끼쳐 죄송합니다. 늘 고마운 심경입니다.
    건강과 행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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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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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남수 2020.06.02 18:24 Address Modify/Delete Reply

    이 사진들이라도 남아 있어 그나마 다행입니다. 참 아름다운 현강재였는데.....

  2. 양재진 2020.08.12 23:34 Address Modify/Delete Reply

    다시보니, 또 다시 안타깝네요. 다른 좋은 일이 있으려고 그랬겠죠....

현강재의 추억

삶의 단상 2020. 4. 26. 14:20 |

현강재가 불탄 후, 잊으려 해도 자주 생각이 난다.  10년 반 쯤 그곳에 살았는데, 그 기간이 내 인생에서 매우 소중했던 시절이기에 더 그런듯 싶다.  많은 이들이 현강재를 찾았는데, 아래에 몇몇 신문과의 인터뷰 기사를 싣는다. 인터뷰 내용은 다 생략하고 현강재를 묘사한 부분만 여기 옮긴다.  마지막 인터뷰는 산불 후, 전화로 인터뷰한 것이다.

 

 

* 조선일보(2008/09/25) 한삼희의 환경칼럼

안병영씨네 손수지은 다섯 번째 집

 

몇 가지 묻고는 집 지은 현장으로 갔다. 미시령터널을 나와 속초 시내로 들어가기 전 어느 마을 외곽이었다. 안 교수 부인이 설계도 하고 인부도 직접 부려 지었다는 집이다. 1m쯤 쌓은 석축 위에 올린 단층집인데 겉 벽엔 투박한 연갈색 석재를, 지붕은 스페인 양식의 황색 기와를 썼다. 어떻게 보면 황토집을 닮았고, 어떻게 보면 세련된 현대식 주택이었다. 뒤쪽은 얕은 산이고 둘레는 소나무밭, 마당엔 키 큰 감나무가 서 있었다.

내부는 대담하게 설계했다. 가로 5m, 세로 3m 정도의 유리창으로 덮은 거실 천장이 가장 눈에 띄었다. 눈이라도 와서 쌓인다면 눈 속에 사는 셈이 된다. 내벽은 흰색 페인트를 질감을 살려 칠했고 기둥, 대들보는 옹이 무늬가 살아 있는 소나무를 썼다. 방마다 큼지막한 유리창을 내서 눈 가는 곳마다 설악의 사계절이 보이게 돼 있었다. 집 전체가 환하고 자연 친화적으로 지어졌다는 느낌이었다. 부부가 서로 어느 방에 있건 고개만 돌리면 말을 걸 수 있도록 공간도 통하게 만들었다. 원목 느낌을 살린 수납장 하며 방문을 울퉁불퉁한 두꺼운 유리로 만든 것까지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안 교수 부인 윤정자씨는 평생 5번 집을 지었다. 젊어서부터 집 짓기와 마당가꾸기에 관심이 많아 집에 건축, 원예잡지가 쌓였다고 한다. 유럽 등지에서 외국생활을 할 때도 TV 채널은 '하우징 &가드닝' 프로에 고정됐다. 처음 집을 지어본 것은 1973년 서울 우이동에서다. 없는 돈에 집을 지으려다 보니 직접 나섰다. 빨간 벽돌집이었는데 예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1978년엔 연희동에 집을 지었다. 영종도에서 캔 차돌을 쪼아 겉벽에 붙였는데 지금은 아들이 산다. 그 뒤로 아파트 살던 부모님과 딸네한테도 각각 집을 지어줬다. 이젠 윤씨가 일을 한다면 모이는 전속 팀이 생길 정도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9/25/2008092501503.html

 

* 조선일보(2012/10/27)

문갑식의 하드보일드

농부가 된 부총리 왜 몰랐을까 은둔의 즐거움’‘

 

만산홍엽(滿山紅葉)이란 말은 이맘때의 설악산에 딱 맞는다. 상강(霜降) 추위가 덮쳐 더 선명해진 풍경과 알싸해진 공기에 둘러싸인 '현강재(玄岡齋)'는 볕 좋은 야트막한 언덕 위에 있었다.

40평 남짓한 공간은 천장이 높아 시원했고 창틈으로 햇빛이 쏟아졌다. 비 내리는 날에는 자연의 풍금 소리가, 눈 쏟아지는 밤에는 묵화(墨畵)처럼 추억이, 맑은 날에는 별의 합창이 들릴 것이다. 둥그런 공간 사이 자리 잡은 창틀은 산수화 한 폭을 담은 액자였다. 가깝게는 달마봉, 멀리는 울산바위가 계절에 따라 변색하는 것이다.

거기서 안병영(安秉永·71) 전 교육부장관은 네 번째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농부(農夫)가 된 부()총리는 새벽 4시 일어나고 한철에는 8시간쯤 땅을 가꾼다. 400평 중 250평엔 과실수, 100평엔 농사를 짓는다. 설악과 동해와 제 힘으로 가꾼 결실을 함께 맛보는 삶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0/26/2012102601693.html

 

* 중앙SUNDAY(2016/05/01)

중앙SUNDAY 편집국장 인터뷰 선비 안병영

 

새벽길을 달려 2시간여-.미시령 넘어 웅자한 울산바위를 뒤로하고 닿은 곳 고성군 토성면....내외가 직접 욕조·변기·벽난로 같은 소품과 인테리어 마감재를 골라 하나 하나 꾸몄다는 집은 그 자체로 갤러리입니다. 벽을 두지 않아 단절되지 않고 하나의 공간으로 흐르듯이 꾸민 실내 구조에,높이 솟은 천장 한가운데를 유리창으로 덮어 채광 효과를 더했습니다. 굳이 집 밖으로 나가지 않더라도 거실에서 변화무쌍한 하늘시계의 움직임과 절기의 변화를 느낄 수 있게 말이죠.
집의 바깥 둘레로는 철따라 피어나는 갖가지 꽃들과 나무들,과실수가 어우러져 무릉도원에라도 온 듯 황홀경에 빠지게 합니다.

 

* 동아일보(2019/04/06)

귀농안병영 부총리 집도 불타지나가는 차 타고 가까스로 대피

고성=한성희 기자 , 고도예 기자 입력 2019-04-06 03:00 수정 2019-04-06 03:00

 

선생님, 얼른 대피하세요.”

4일 오후 8시경. 강원 고성군 원암리 자택(사진)에서 책을 읽고 있던 안병영 전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78)은 제자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자택 인근에서 큰 산불이 났으니 빨리 피하라는 다급한 목소리였다. 산불이 난 지 40분 이상 지난 때였다. 산불은 이날 오후 717분 원암리 일성콘도 인근에서 시작됐다. 안 전 부총리의 집에서 걸어서 약 30분 거리인 곳이다.

 

안 전 부총리는 전화를 끊자마자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자 바람에 불씨가 날려 왔다. 멀리서는 큰 불길이 솟고 있었다. 안 전 부총리는 바로 도로까지 뛰어나가 손을 흔들었다. 마침 지나던 승용차를 얻어 타고 동네를 벗어났다. 아내는 서울에 가고 집에 없었다.

 

안 전 부총리는 2006년부터 아내와 함께 강원 속초에서 살다가 2008년 원암리에 집을 짓고 거처를 옮겼다. 안 전 부총리가 책을 내기 위해 2년간 준비해 온 자료들은 모두 재로 변했다. 서울의 자녀 집에 머물고 있는 안 전 부총리는 농사지으며 글 쓰고 자연을 벗 삼아 지낼 수 있었던 보금자리가 사라져버려 허망하다면서도 마지막으로 달려 나가는 차 하나를 천우신조로 잡아타고 빠져나왔으니 집이 사라진 건 아무것도 아니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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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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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2003.12.23 4 

 

파격이 사라지고 있다. 23일 교육부총리로 발탁된 안병영 교수나 최근 기용된 이희범 산업자원부 장관은 모두 전직 장.차관들이다. 그동안 경시됐던 국정경험이 다시 중요하게 고려되는 양상이다

 

교수는 한국행정학회장을 지낸 학계의 주류인사다. 현 정권 들어 지방대 중심의 비주류 인맥이 약진해 온 것과는 대조적이다. '코드인사'와도 거리가 있다. 교수는 저명 학자.법조인 등이 발간한 인터넷 신문 '업코리아'의 대표다. 이 신문은 극단적 보수나 진보를 모두 배격하고 중도와 균형을 표방하고 있다.

교수는 지난 8월 업코리아 창간기념식에서 "이념과 세대, 집단 간 갈등이 심화하면서 국론이 분열되고 국정이 표류하고 있다"고 했다. 1128일 한 학술회의에서 "노무현 정부는 처음부터 개혁을 소리 높여 외쳤으나 개혁의 비전이 아직 불분명하고 국가관리체제가 안정적 틀을 구축하지 못한 채 국정이 표류하고 있다는 인상이 짙다"고 현 정권의 실책을 비판했다. 이런 교수가 발탁된 것은 안정지향형 인사, 예측가능한 인사로의 전환을 예고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그의 업무능력도 발탁요인이다. 교수는 교육부 공무원 대상 여론조사에서 1위를 했었다. 장관 재직 시절 교육개혁의 골격을 마련했고, 전인교육 중심의 '대안학교'를 제도화했다.
가장 잡음이 많던 교육부총리 인선이 완료된 만큼 나머지 개각은 순조로울 듯하다. 문제 장관들의 정치권 연착륙을 돕기 위해 '개별 사퇴찔끔 개각'이란 기묘한 절차를 밟으면서 사실상 개각은 절반 이상 마무리된 상황이다. 교체가 예상되는 최종찬 건설교통부 장관은 강릉 출마가 유력하다.

한나라당 최돈웅 의원이 상처를 입은 상태라 결심이 앞당겨졌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영탁 국무조정실장은 취약지인 대구.경북(TK) 공략을 위해, 김화중 보건복지부 장관은 여성인사 수혈의 맥락에서 출마가 유력시된다.

개각 이후 청와대 수석들의 거취에도 변동이 예상된다. 유인태 정무, 박주현 참여혁신수석이 선발대로 거론된다. 열린우리당은 부산.경남(김혁규.김두관), 대구.경북(이강철), 전북(김원기.정동영)의 경우 간판주자 선정이 끝났으나, 충북과 경기도가 비어 있다. 그래서 수석을 충북의 대표주자로, 문희상 대통령 비서실장을 경기도 선거를 이끌 인물로 지목하고 있다.

수석은 결심을 굳혀가는 단계로 알려졌다. 실장은 본인이 부인하나 선거구도와 연계돼 있는 문제라 출마설이 그치지 않는다. 수석도 지역구 차출 가능성이 크다는 전언이다. 이정우 청와대 정책실장은 정책기획위원장에 내정됐고, 박봉흠 기획예산처 장관의 정책실장 기용 가능성이 유력하다.

강민석 기자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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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고성 산불이 난지 벌써 오늘로 만 1년이 되었다. 간신히 목숨은 건졌지만, 집이 전소되고 무엇보다 그간 책을 쓰려고 모았던 온갖 자료들, 특히 애지중지 간직해 온 USB 열 개까지 모두 잃은 후 너무 허망해서 한동안 넋이 나간 느낌이었다. 곧바로 새로 컴퓨터를 사고 다시 글을 쓸 채비를 했으나, 도무지 책상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컴퓨터 앞에 앉았다가도 한숨 크게 쉬고 손가락만 몇 번 만지작거리다가 그냥 일어나기가 일수였다. 몸은 멀쩡한데 마음이 따르지 않았다. 그렇게 1년을 보냈다.

 

그런데 그나마 내 마음을 잡아준 것은 농사일이었다. 산불이 났을 때, 이미 농사철에 접어들었고, 그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농터와 알뜰히 가꿨던 대부분의 과수는 다행히 큰 피해 없이 화마를 피했고, 파릇파릇 솟아오르는 나무의 새싹들이 초토화된 주위 산림과 묘한 대조를 이루며 내 마음을 움직였다. 자식들이 이 기회에 시골 생활을 거두고 서울로 올라오라고 성화를 했지만, 단 나흘 서울에 머물다가 다시 고성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열심히 농사에 전념했다. 그러면서 마음이 가라앉았다.

 

   II.

작년 오늘, 이맘때면 늘 찾아오는 양강지풍(양양과 간성사이에 부는 국지성 강풍)’이 기승을 부려, 초속 30m에 이르는 대형 태풍급 강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게다가 몇 달째 비가 오지 말라 산천초목은 바싹 메말라 있었다. 나는 그날 속초의 K형과 C형과 함께 속초에서 점심을 하고 벚꽃구경차 영랑호를 찾았다. 어제까지 한창 흐드러지게 피었던 영랑호변에 벚꽃도 강풍에 힘없이 나부끼며 흩날리고 있었다. 바람 때문에 차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그냥 스치듯 호반을 한 바퀴 돌고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내 처는 병원약속 때문에 서울에 가서 나 혼자 간단히 요기를 끝내고, 어둑해 지는 7시 반경 커튼을 닫았다. 그러면서 집안에까지 크게 들리는 세차고 요란한 바람소리에 마음이 불안했다.

 

8시를 조금 넘어설 때쯤, 전화가 왔다. 몇 년 전 퇴직 후 귀촌해서 산 너머 신평리에 사는 제자 노성호 군이었다. 그는 매우 다급한 목소리로, “저는 마침 일이 있어 창원에 내려왔는데, 방금 집사람 전화를 받고 말씀드립니다라며, “교수님! 원암리 위쪽에서 큰 불이 났어요. 빨리 피하세요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다급히 윗도리를 챙겨 입고 상황을 살필 겸 오른편 작은 현관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바람이 워낙 세서 아무리 힘을 써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바람의 영향이 적은 뒷창문을 간신히 열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순간 상황의 심각성을 직감할 수 있었다. 주위는 온통 연기로 가득했고 불길도 멀지 않은 곳 여기저기서 치솟고 일고 있었다. 무엇보다 사방으로 흩날리는 불씨가 온 세상을 뒤엎고 있어 눈 앞을 가릴 지경이었다. 나는 뒤 돌아보지 않고 그냥 정신없이 큰 길가로 뛰었다. 200m 거리를 폭풍처럼 질주했다. 막상 큰길에 나와보니 자옥한 연기 속에 우선 내가 피신할 길목조차 분간이 어려웠다. 무엇보다 불길이 바람 방향 따라, 솔나무 숲길 따라, 또 불씨가 튀는 대로 마구잡이로 번져 가기 때문에 산불 발원지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성천리 쪽도 이미 곳곳에 불길이 퍼져 있었다. 근처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절체절명의 위기감 속에 고립무원이라는 절박한 느낌이 엄습했다. 마치 재난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이 판국에 뛰어 봤자 소용없고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혹 뒤늦게 달려오는 차가 있으면 그 편에 위기를 탈출하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둠이 더 짙어지면서, 여기저기서 솟아오르는 시뻘건 화염이 더 극명하게, 더 위협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마침 울산바위 쪽에서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차가 있었다. 나는 길 한가운데로 다가가서 힘껏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그 차는 오히려 무섭게 가속을 하며 거침없이 앞으로 치닫는 게 아닌가. 나는 놀라 황급히 길가로 몸을 피했다. 절망감이 무섭게 엄습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자옥한 연기 사이로 또 하나의 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지막 차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길 한가운데로 나가 손을 한껏 흔들었다. 그런데 이 차는 가까이 오면서 속도를 크게 줄여 내 앞에 천천히 멈쳐섰다.. 그리고 젊은 운전자는 타시지요라고 내게 나직이 말했다. 나는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며 재빨리 차에 올랐다. 구사일생이자, 천우신조가 아닐 수 없었다,

차가 성천리로 향하는 동안, 불길이 때로는 가까이서 동행했다. 나는 마음이 다급해서 운전자에게 좀 더 빨리 달리시지요라고 청을 했다. 그랬더니 운전자는, “. 연기 때문에 잘 보이지가 않아서라고 짤막하게 대답을 했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해지는 부끄럽지 짝이 없는 염치없는 주문이었다.

차가 용천 바닷가에 이르니 큰 불길 하나는 우리를 앞질러 이미 속초 시내 진입을 서두르고 있었다. 나를 태워준 고마운 운전자는 나를 속초 시외버스터미널까지 데려다주었다. 그에게 이름과 전화번호를 청했더니 거듭 고사하다가 마지못해 내게 알려주었다.

 

   III.

고성 생활 12년 동안 세간살이, 옷가지, 소장품 등은 물론 책들도 쓸만한 것은 모두 서울에서 이곳 현강재(玄岡齋)로 옮겼다. 그간 집 안팎도 정성껏 아름답게 가꿨다. 그래서 바야흐로 내 집 현강재의 완성도(完成度)가 소박한 내 꿈의 경지에 가장 근접하게 이르렀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했다. 어디 그 뿐인가. 내가 늘 아끼고 자랑삼던 집 뒤에 울창한 소나무 숲도 그 청정한 기운과 함께 모두 사라져 버렸다. 나이 80을 몇 달 앞두고 이런 일을 당하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는 잔인한 현실 앞에서 나는 실로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다음 순간 스스로 숙연해 짐을 느꼈다. 그리고 고마운 마음이 샘솟았다. 만약 그 날 저녁 제자 노성호군의 원거리 전화가 없었다면, 그리고 극적인 상황에서 나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던 마음 착한 운전자 김 선생이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때문에 나는 그날 밤부터 이튿날 새벽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걸려오는 친지들의 휴대폰 안부전화를 받으며, 비교적 밝은 음성으로 걱정마시게, 아무 일도 없네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 * *

이 기회에 불초 소생은 고성 산불 이후 전화, 문자 메시지를 통해, 혹은 직접 어려운 발걸음을 통해 저를 위로하고 격려해 주신 수많은 친지, 제자 들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의 덕택으로 저는 얼마간의 설레는 가슴과 새로운 결의 속에 목하 <인생 4모작>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간 휴면 상태에 있던 <현강재>도 다시 개통합니다. 여러분의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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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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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무권 2020.04.11 15:03 Address Modify/Delete Reply

    드디어 현강재가 다시 문을 열었군요. 많은 분들이 다시 열리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교수님의 인생 4모작이 더욱 풍성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 신동면 2020.04.19 13:25 Address Modify/Delete Reply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화마가 남긴 아픔에서 벗어나셔서 감사합니다. 현강재에 올라 오는 고성 소식을 기대하겠습니다.

  3. 이준연 2020.04.24 06:56 Address Modify/Delete Reply

    할아버지 외손자 블로그 구경왔어요! 머리가 복잡할 때 할아버지 글보고 힐링하고 가요! 항상 사랑합니다!

  4. 김만곤 2020.05.10 09:47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부총리님!
    들은 이야기인데도 가슴을 두근거리며 읽었고,
    끝부분에서는 눈물겨웠습니다.
    오래오래 마음 편안하신 생활을 하시게 하려는 무슨 운명 같은 걸 느낍니다.

이글은 필자가 <철학과 현실> 2019년 봄호에 실린 것으로, 나의 정치적 관점을 밝힌 글이다.

 

안병영 선생님 원고(철학과현실120호 창간30주년 특별판).pdf
0.70MB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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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진영 2020.07.09 15:51 Address Modify/Delete Reply

    많이 공감합니다. 시민사회의 지적 성숙과 정치의 중도 실용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안교수님 말씀에 전에도 그랬지만 다시 한번 깊이 공감합니다.

  2. 현강재 현강 2020.07.10 13:08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김교수님, 그간 격조했습니다. 안녕하시지요.
    제 글에 공감하신다니 반갑습니다.
    옛날 시라큐스 시절이 벌써 거의 30년전 일이니, 정말 세월이 무상합니다.
    저도 이미 8학년이 되었습니다.
    늘 건안하시기 빕니다. 좋은 일 있으시면 연락주시구요.

어제는 봄날 같았는데, 오늘을 겨울날씨다.  꽃샘추위 속에 봄은 문턱에 왔다.

먼산에는 아직 잔설이 남아있는데 집 주변과 농터에 나무와 꽃들은 이미 봄을 노래하고 대나무도 더 청청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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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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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창휘서휘 아빠 2019.04.06 09:05 Address Modify/Delete Reply

    교수님, 어제 집사람과 고성 산불 뉴스보고, 이번 산불로 피해 입으신 건 아닌지 걱정되어 모처럼 들어와 봤습니다. 교수님과 사모님, 아무 피해 없고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2. 김만곤 2019.04.06 18:02 Address Modify/Delete Reply

    목요일(4일) 밤에 인터넷에서 고성에 산불이 났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자리에 들어서도 그 생각을 계속했습니다.
    금요일 새벽에 산불 뉴스를 보았습니다.
    걱정이 되어 김익로 선생님께 연락을 해보고 싶었는데 너무 일찍해서 실례가 될까봐 기다렸다가 일곱 시쯤 문자 메시지를 보냈더니 한 시간 여 지나자 전화가 왔고, 겨우 부총리님 음성만 들었다고 했습니다.
    알려주어서 고맙다고 제가 인사를 해야 하는데, 김 선생님이 저에게 고맙다고 했습니다.
    다시 또 소식을 알려주겠지 하고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3. 현강 2019.04.07 04:35 Address Modify/Delete Reply

    고마운 많은 분들의 간절한 기원에도 불구하고 화마는 저희 집과 책, 그리고 그간 정성드려 뫃아 온 온갖 자료들을 모두 삼켜 버렸습니다. 그러나 천우신조로 가까스로 몸은 피해 나왔습니다.
    <천국>을 상실한 충격은 큼니다만, 이제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간 염려해주신 많은 분들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일일히 고마운 마음을 전하지 못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한동안 <현강재>에 글을 올리기는 어려울 듯 합니다.

  4. 창휘서휘 아빠 2019.04.08 10:08 Address Modify/Delete Reply

    어제 저녁 교수님 글을 읽고, 저나 집사람 모두 너무 황망하여 잠시 멍하니 서로 바라봤습니다.
    오랜 기간 교수님과 사모님의 정성과
    노력의 결정체인 현강재가 화마의 피해를 받았으니 얼마나 상심이 크시겠습니까.
    크나 큰 피해이지만, 교수님과 사모님이 무사히 대피하셔서 불행중 다행입니다.
    멀리서지만 우리 가족 모두 교수님과 사모님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겠습니다.
    교수님, 사모님, 화이팅 하세요~~~

                             I

언론계 출신인 내 가까운 친구 S 는 독실한 불자 (佛者 ). 천주교 신자인 나도  그를 따라 이곳저곳 전국의 사찰을 자주 찾는다 . 나는 고즈넉한 산사의 법당에서 서양 작은 마을의 오래된 옛 성당이나 공소를  찾았을 때와 흡사한 느낌을 갖을 때가 많다 . 아래 글은 오래 전에 S 로 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인상적으로 뇌리에 남아  여기 옮긴다 . 아래 II 의 화자 (話者 )S .

 

                             II  

1993 11 , 한국 불교계의 큰 별 성철스님이 입적하셨다 . TV 를 통해 성철스님의 다비식을 지켜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 그의 다섯 상좌 중 한 분이 눈에 익어 , 자세히 살펴보니 TV 화면에 등장한 W 스님은 나와 중학교 동기동창으로 재학시설 무척 가깝게 지냈던 죽마고우 K 가 아닌가 . W 스님이 면벽좌선 10 으로 유명한 선승 (禪僧 )으로 해인사 선원장을 지냈다는 것은 한참 후에 알게 되었다 . 그가 절에 들어간 이후 외부와의 접촉을 일체 끊고 오직 수행에만 전념했기에 그동안 수소문을 해도 행방이 묘연했던 것이다 . 하루라도 빨리 스님을 만나보고 싶어졌다 .

 

그해 12 월 어느 날 나는 집사람의 해인사 참배 길에 대신 안부를 전하고 가까운 시일 안에 뵐 수 있을지 물었다 . 그로부터 마침 상경할 일이 있으니 그때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 1993 12 월 중순 여의도에서 저녁을 함께하며 40 년만의  해후를 즐겼다 . 그는 가볍게 술 한잔을 나눌 만큼 소탈했고 정다움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 시간 가는 줄도 모른 채 정담을 나누었다 . 모처럼의 짧은 만남이 무척 아쉬웠다 .

 

마침 이날은 월급날이라 내 속 주머니에는 두툼한 월급봉투가 들어 있었다 . 이대로 헤어지기가 섭섭해 수표한장 (10 만원 )을 꺼내 스님의 주머니 속에 불쑥 집어 넣었다 . 스님은 무슨 돈을 내게 주느냐 , 기자가 웬 돈이냐 고 극구 사양했지만 나는 모처럼 서울에 왔으니 요즘 잘나가는 책도 사보고 남대문시장도 둘러보고 영화도 한편 관람하고 내려가라 고 권했다 .

나는 절에 다니면서 여러 스님들과 교류했다 . 나는 평소 스님이라고 산속에만 묻혀 살 것이 아니라 세상과 자주 만나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

그런 심정으로 스님에게 감히 (?) 용돈을 드린 것이다 .

 

그날 밤 그렇게 스님과 작별했다 . 밤늦은 시간 귀가해 집사람에게 W 스님과 만난 얘기를 나누고 월급봉투를 내놓았다 . 봉투를 열어본 집사람이 큰돈 한 장이 빈다는 것이었다 . 나는 월급봉투를 일일이 세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 그런데 100 만 원이 모자란다는 것이었다 . 나는 봉투 속에 100 만원 짜리 수표가 들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 내가 기억하는 것은 10 만원 짜리 수표 한 장을 스님께 건낸 것이 전부인데 ....... 나의 불찰이었다 . 10 만원이 100 만 원이 되었으니 참으로 난감했다 . 당시로서는 100 만원이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 무엇보다 집사람은 내가 월급을 타면 둘째 놈에게 그동안 미뤄왔던 컴퓨터를 사주기로 굳게 약속했던 터라 평소에 안 하던 바가지까지 긁었다 . 심지어는 스님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면 안 될까 라고 까지 말했다 .

 

다음날 아침 이른 시간에 스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 “S 기자 , 무슨 그런 큰돈을 내게 주었어 ”. 그러나 나는 그래 잘못 갔어 , 10 만원만 제 하고 나머지 90 만원을 돌려주게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 그 대신 유용하게 쓰시게 라고 짤막하게 속에도 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 쏟아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는 게 아닌가 .

 

그 날 아침 출근길 , 도로확장공사장을 지나게 되었다 . 도로 한편에서는 크레인이 대형 H 빔을 반대편 도로로 운반하고 있었다 . 그런데 크레인 기사의 조작실수로 들어올린 H 빔이 공중에서 도로 한가운데로 떨어지면서 내 승용차를 덮쳤다 .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고 나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 . 119 구조대가 도착 , 찌그러진 차문을 부수고 어렵사리 나를 끄집어내는 순간 눈을 떴다 . 승용차는 악살박살이 났는데 , 나는 외상 하나 없이 멀쩡했다 . 천운이었다 . 지켜봤던 모두가 기적이라고 했다 . 나는 나도 모르게 부처님 고맙습니다 를 몇 번이나 되뇌었는지 모른다 . 아웅산 사건 때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후 , 10 년 만에 다시 한번 죽음의 골짜기를 벗어난 것이다 . 그러면서 어제 저녁 스님에게  의도치 않게 크게  보시 (?)한 공덕이 날 살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났다 . 들리는 말에 의하면 스님은 지병을 앓고 있었는데 늘 주머니가 비어있는 학승이라 누구에게 손 내밀 수가 없어 차일피일 수술을 미루다가 마침 목돈이 생겨 입원 수술을 받게 되었고 그 이후 건강을 회복했다는 것이다 . 그 소식에 내 입에서 나도 모르게 나무 관세음보살 이 나왔다 .

 

                    III

나는 위의 이야기를 역시 불자인 C 형에게 전했다 . 불교에 공부가 깊은 C 형은 곧장 이를 '부주상 (不住相 ) 보시의 위력 '인과의 엄중함과 불보살의 가피력 으로 설명했다 부주상보시란 상 ()에 얽매이지 않는 조건 없는 보시를 의미하는데 , 그 복덕이 마치 동방 허공을 젤 수 없음과 같이 한량없다고 한다 . 또 인간이 겪는 세상만사는 내가 지어 온 업 (, 인과 )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인데 , S 형의 착한 마음 , 보시하는 마음이 곧 불보살의 마음이기 때문에 그런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빚어졌다는 것이다 .

 

출처 : 현강재 (2015/08/01)

 


* 위의 스님 W 는 어제 (3 5 ) 입적한 대한불교종 해인총림 수좌 (首座 )

  원융 (圓融 )스님이다 . 삼가 스님의 명복을 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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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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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윤주명 2019.12.24 10:49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정말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든 따스하고 신비로운 이야기입니다. 교수님 덕분에 이야기 거리가 하나 더 생겼습니다. 감사합니다.

  2. 성기옥 2020.12.30 13:06 Address Modify/Delete Reply

    감동적이네요
    1993년에 값진 보시를 하셨군요
    네이버를 통해 뵙게되어 반갑습니다
    건강하시고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