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봄 그리고 원격수업(2020.4.10)-이규석 이규석 활동이미지

2020. 4. 10.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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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봄 그리고 원격수업(2020.4.10).

오늘 기온은 16℃로 전과 비슷하나 바람이 거의 없고 날씨가 맑은 화창한 봄이었고, 날씨에 걸맞게 철쭉, 영산홍, 복숭아꽃 등 많은 꽃들이 앞다투어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사진). 한편, 오늘 조간에(사진) 원격수업의 어려움이 나타나 있었고, 이 기회에 개선하고 가지 않는 길을 가겠다는 기사도 같은 신문에 났다(사진). 원격수업을 위해 정부는 1970년대 말 한국교육개발원 소속으로 출발, 그후 독립기구가 된 EBS와 이를 중심으로 각 시도교육청이 함께하는 유비쿼터스 교육 환경을 위해 노력해 왔다. 특히 1995.5.17 교육개혁을 추진하기 위하여 1995년에 영입된 안병영장관은 다시 교수로 봉직 중 2003.12 월에 2003.3월 취임한 노무현대통령의 부름으로 장관으로 다시 부임하여 학생부 전산화 정착과 교수학습의 획기적 개선을 위한 자료 개발 및 이의 온라인화를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그래서 모든 시도교육연구원, 과학교육원에 교육정보부를 병설하든가 또는 교육정보원을 독립기관으로 두게 되었고 교육부도 유비쿼터스교육을 위해 연구학교를 두어 노력하였다. 2003.9월부터 서울교육과학연구원장이었던 나는 서울이 앞장서도록 하는 시책으로 중학교 하나를 통채로 리모델링해서 교수학습지원센타를 만들어 2004년 안장관님과 경향 각지의 내외빈을 모시고 개관식을 크게 한바 있다. 넓은 국토에 우리 같이 집단 학교 교육이 어려운 곳이 많은 호주에 연수단이 가서 견학하였고 서울의 초중고 모든 학교 및 EBS와 교수학습지원센타를 연결하여 교육하는 작업을 했다. 나는 그때 이 일을 참으로 보람을 느끼며 했고 30개월 원장으로 봉직하며 체중이 3kg이나 빠졌고 이어서 서울시교육청국장으로 가서 이일을 계속 지원하였다. 그 후 이유는 있겠지만 온라인교육과 교수학습자료 개발을 더 이상 발전시키지 못하였고 2018년에는 자체 제작 시설이 폐기상태인 것으로 안다. 정말 차제에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했으면 한다. 어제 시작한 원격교육이 오늘(10일) 99%의 적응율은 보였다니 선생님들께서 고생했겠지만 참으로 다행이다. 우리에게서 열심히 배워간 말레지아는 2009년 모든 학생들에게 단말기를 보급하여 원격교육과 온라인교육을 세계에서 최초로 실시하였다.



 

[출처] 찬란한 봄 그리고 원격수업(2020.4.10)-이규석|작성자 교산이규석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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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葉書(Ⅴ) 안병영 전 부총리를 그리워하며.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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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은 전에 교육부에 나와 함께 계시던 김만곤 교장선생님의 정감넘치는 글이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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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6월 19일, 성균관대학교에서 열린 한국교육학회 2020 연차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기조강연 원고입니다.

거시 교육개혁의 길을 찾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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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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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진영 2020.07.21 19:00 Address Modify/Delete Reply

    현 정부가 교육개혁에 대한 철학적 기반이 없이 방황하는 것이 안타깝던 참인데,
    정말 시의적절한 현명한 조언을 하셨습니다. 다른 글에서도 말씀하신 교육의 수월성과 형평성의 조화는 여전히 필요한 양대 축인 것 같습니다. 4차산업혁명 시대의 도전과 코로나 이후의 뉴노멀에 대한 대비를 위해 교육의 효율성과 수월성이 필요하고, 날로 심각해지는 사회의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서 교육기회의 질적, 양적 평등과 공교육의 수월성 제고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사교육 시장이 날로 비대해지고 교육을 통해 신신분제가 나타나는 현상이 정말 안타깝습니다. 안교수님 말씀처럼 지나친 정치적 이념을 배제하고 나라의 미래를 위해 사회적 합의를 통한 거시적 교육개혁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을 정부에서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I.

나는 어렸을 때부터 정치와 시사(時事)에 유달리 관심이 컸던 것 같다. 그래서 소년 시절 내 기억 속에 아이답지 않게 정치가 차지하는 비중이 무척 크다.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정(性情)인데, 거칠고 시끄러운 정치세계에 왜 그리 관심이 많았던지 내가 생각해도 이해가 잘 안 된다. 신문에서도 정치면만 즐겨 찾았고, 라디오에서 정치나 시국 얘기가 나오면 귀를 쫑긋 세웠다.

 

이렇듯 정치세계는 늘 나를 열광시키는 대상이었다. 정치라는 동네는 언제나 떠들썩하고, 변화무쌍하며, 역동적인 게 재미있었고, 정치무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고, 행태, 전략을 관찰하고 평가하는 일도 흥미로웠다. 하지만 꿈에도 내가 나중에 커서 정치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말하자면 나는 그때 이미 대국(對局)의 참여자가 아닌, 관전자(觀戰者)로 스스로를 자리매김을 했던 것 같다.

1948년부터 1950년까지, 내가 여덟 살 때부터 열 살 때까지 어린 소년기에 나를 가장 매료시켰던 정치인은 김구와 조소앙이었다.

 

                                  II.

내가 처음 김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48년 여덟 살 때 집의 서가에서 백범일지를 꺼내 든 순간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그 책은 아마도 친필본 백범일지가 아니라 1947에 출간된 국사원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 책은 춘원 이광수의 교열과 윤문을 거쳤기에 문장도 유려하고 문체도 쉽고 간결했다. 따라서 어린 내가 읽기에도 그리 부담이 없었다.

 

나는 책을 읽으며 백범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그의 반일 투쟁에서 보여 준 불퇴전의 용기, 그리고 절절한 나라 사랑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 것 중 하나가 백범이 동학에 깊게 관여하다 몸을 피해 황해도 명문 안 진사 댁에 얼마간 몸을 의탁하고 있을 때 얘기다. 그 댁 큰 아들인 안중근이 나이는 어렸으나 매우 영특하고 사격술이 뛰어났는데, 안 진사가 다른 아들들에게는 글을 읽지 않는다고 걱정도 하였으나, 중근에게는 아무 간섭도 하지 않았다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며 안중근 의사가 어려서부터 남달랐고 부친인 안 진사가 그의 비범함을 이미 숙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꽤 인상 깊게 받아드렸던 기억이다. 아마 내가 워낙 그전부터 안중근 의사를 흠모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게 아닐까 한다.

 

이후 나는 백범 김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에 관한 뉴스나 떠도는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어른들에게 그에 관해 이것, 저것 귀찮게 묻곤 했다. 마침 그해 김구가 김규식 등과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하고, 방북하여 김일성 등과 남북협상을 시도하였다가 실패하고 돌아왔다. 그 일이 일파만파로 정치. 사회적 논란을 빚었는데, 나도 제 딴에는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사태의 전말을 추적하고 김구의 시도가 무위로 끝난 데 대해 안타까워하며, 그를 빈손으로 내친 김일성을 미워했던 기억이다.

 

다음 해, 내가 아홉 살이던 19496월에 백범이 경교장에서 육군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을 당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다. 나는 억장이 무너지는 심경이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빈소가 차려진 경교장에 조문을 가자고 졸랐다. 엄마는 그냥 명복을 비는 기도나 하라고 말씀하셨지만, 내가 계속 떼를 써서 함께 서대문 경교장을 찾았다. 조문객이 많아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영정 앞에 넙죽 절을 드렸다.

이어 백범의 국민장이 엄수되었는데, 이번에도 아빠에게 서울운동장 장례식에 꼭 참석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려 함께 일찍 식장을 찾았다. 그런데 워낙 인파가 몰려 식장에 진입을 못하고 서성대다가, 종로 6가 큰 길가에 있는 아빠 친구 <동원당 약국>을 찾아가 그 집 2층 창가에서 효창공원으로 향하는 영구행렬를 보며 울먹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날 부슬비가 엷게 내려 하늘도 슬퍼하는구나 했다.

 

나는 당시 어린 마음에 백범을 저격한 안두희가 나와 같은 안씨 성을 가졌다는 데 대해 매우 불편한 심경을 가졌다. 무척 화가 나고 부끄럽기까지 했다. 내가 평소에 안중근 의사와 같은 순흥 안씨라는 사실 때문에 가슴 뿌듯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느낌이었다.

이와 연관해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내가 다니던 혜화동 성당에 나와 동갑내기 백범의 손녀(백범의 장남 金仁의 딸)가 다녔는데, 하루는 주일 미사 후 그녀가 내게 다가와, “분도(내 천주교 영세명), 우리 할아버지 죽인 사람이 바로 너와 같은 안 가래, 알았었니?”하고 내게 물었다. 나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부끄럽고 마치 크게 죄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엄마가 그녀가 자리를 뜨자, 내게 괜찮다. 그냥 한 얘기일 깨다. 신경 쓰지 마라. 걔 엄마도 안 씨인데, !” 하며, 나를 다독거리셨다. 그러면서 그 애 엄마가 다름 아닌 안중근 의사의 조카라고 귀띔해 주셨다. 말하자면 김구와 안중근 일가는 사돈 사이였다. 훗날 확인해 보니 그 애 엄마가 백범의 자부(子婦)이자, 안 의사의 조카인 안미생(安美生) 여사였다.

 

                                           III.

열 살 되던 해인 1950년 해방 이후 두 번째 선거인 <5.30 선거>가 치러졌다. 내가 살던 돈암동은 성북 선거구에 속했는데, 이곳에서 당대의 거물 정치인인 조소앙과 조병옥이 맞대결을 하게 되어 전국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조병옥은 미군정청 경무부장 출신으로 해방 후 치안유지와 공산당 색출에 앞장섰던 강골의 한민당계 보수정치인이었다. 이에 반해 조소앙은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을 마련하고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주창한 임정 외무부장 출신으로 김구 등과 한독당을 창설하고 처음에는 남북협상을 지지했으나, 훗날 단정수립으로 선회한 중도계열의 정치인이었다.

 

처음부터 나는 조소앙의 광()팬이었다. 그의 이념에 공감하기보다 그에게서 풍기는 지사(志士)형의 품모에 반했던 것 같다. 올곧고 청빈한 선비의 인상을 주는 조소앙은 선거유세 때도 민족의 꿈과 희망을 이야기했다. 당시 조병옥 측이 경찰을 동원해 테러행위를 일삼는다는 소문이 파다해서 나의 조소앙에 대한 편향과 연민이 더 컸었던 것 같다.

 

나는 선거유세장을 열심히 쫓아다녔다. 인근의 삼선동, 성북동은 물론 멀리 정릉까지 원정을 갔던 기억이다. 유세장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렸는데, 키가 작아 연사가 안 보이면, 남의 자전거 뒷좌석에 올라가 양해를 구하고 자전거 주인의 어깨를 짚고 올라서 정견발표를 듣기도 했다. 조소앙의 연설은 지적이고 온유한 가운데 격조가 있었다. 첫마디에 늘 함께 입후보한 일곱 명의 후보자를 북두칠성에 비유하며, 그들 모두에게 존경과 사랑의 메시지를 보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에 반해 조병옥은 보다 직설적이고 공격적이었다. 힘차고 결의에 찬 모습이 사나이다웠으나 내 마음을 얻지는 못했다. 두 사람의 정견발표가 끝나면, 군중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선거전이 절정에 이르렀던 520일 쯤, 내가 큰 사고를 당했다. 옆집 아이와 장난을 치다가 드럼통에서 떨어져 관자노리를 뾰족한 돌 모서리에 찍혔다. 동맥이 끊어져 피가 낭자했다. 당시 서울에서 유명하다는 종로 김하등 외과에서 큰 수술을 받고 열흘 가까이 입원치료를 받았다. 어른들은 그때 내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입원실 침대에 누어서도 내 관심은 온통 선거에 가 있었다. 라디오를 귀에서 떼지 않았고, 찾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성북구 선거 추세와 전망을 묻곤 했다. <5.30 선거>에는 2년 전 <5.10 선거>에 불참했던 남북협상파와 중립계가 대거 참여해서 선거열기가 무척 높았다. 내가 입원했던 병원의 김하등 원장님은 종로 갑에 출마한 박순천 여사의 열렬한 지지지였다. 그래서 한글을 모르는 그 댁 가정부에게 박순천 여사의 기호를 주입시키려고 무척이나 애쓰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는 다행이 선거 전날 퇴원해서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선거 당일의 현지 분위기를 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퇴원한 바로 그날, 529일에 조소앙이 공산당의 정치자금을 받아쓴 것이 탄로나 투표일을 하루 앞두고 월북했다는 사실 무근의 벽보와 전단이 성북구 일대에 마구 뿌려져 난리가 났다. 당황한 조소앙은 선거 당일 새벽에 지프에 확성기를 달고 지역구를 돌면서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다.

 

선거결과는 조소앙 선생의 압승으로 끝났다. 그가 3만 여 표로 전국 최고득표를 했고, 조병옥 박사는 1만 여표밖에 얻지 못했다. 나는 그때 민심의 힘을 절감했다. 소년은 환호, 작약했고, 신이나서 한동안 그 얘기만 화제에 올렸다.

그 후 한 달이 못되어 6.25 전쟁이 터지고, 조소앙 선생은 납북되는 비운을 맞는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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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근우 2020.07.21 06:21 Address Modify/Delete Reply

    너무 흥미진진합니다.
    마치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보는 듯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특별한 경험을 가지고 계셔서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부총리님께서 말씀하시니 가슴에 쏙쏙 들어옵니다.
    어느 곳에서도 말씀하지 않으셨던 귀중한 보따리를 풀어놓으시는 느낌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2. 윤주명 2020.08.12 23:31 Address Modify/Delete Reply

    교수님 글을 다시 보게되어 기쁩니다. 김구선생님과 안중근 의사 가문이 사돈지간이라는 것도 교수님 글을 통해 알았습니다.

                       I.

2004년 나는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교육장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칠레 산티아고에 가는 길에 일본에 들려, 가와지마 일본 문부과학상과 만났다. 교과서 문제 등 한일 간에 여러 가지 난제가 얽혀 있었기에 소통을 위해 나종일 주일대사에게 부탁해서 마련된 자리였다. 그런데 가와지마 장관은 나를 보자, 대뜸 당신이 1997년에 한국에 초등영어 교육을 도입한 장본인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정말 대단한 일을 했다. 일본에서도 같은 시기에 초등영어 시행이 치열한 사회적 쟁점이었는데, 좌고우면(左顧右眄)하다가 끝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뒤로 미뤘다. 그런데 우리는 부끄럽게도 아직 초등영어를 도입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화 경쟁에서 크게 실기(失期)했다. 천추의 한이다라고 말했다.

 

                     II.

나는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초등영어 출범 전후의 숨 가빴던 과정을 되돌아보았다. 19953월 교육부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점진적 영어교육 실시계획>을 확정한 후, 19973월 실시를 목표로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때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초등영어 도입을 위해 막판 스퍼트를 하고 있었다. 준비 정도만 가지고 따진다면, 일본이 한국보다 한발 앞섰다. 하지만, 워낙 세심하고 조심스러운 일본인지라 이리 살피고 저리 재다가 끝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시행을 연기했다.

당시 한국의 상황도 무척 복잡했다. 특히 1996년 중반에 들어서면서 초등영어교육 실시 여부를 둘러싸고 사회적 논란이 격화되었고, 그해 후반 특히 10월경에는 그 갈등이 절정에 이르렀다. 초등영어 실시에 대한 우려의 분위기가 팽배해지자 청와대나 당. 정 어디에서도 장관의 등을 떠미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교육부 내에서도 장관이 무리수를 두지 않기를 바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당시 내 머릿속에는 두 가지 생각이 맴돌았다. 하나는 지금 미루면 자칫 아주 늦어질 텐데, 그 역사적 책임은 누가 감당할 것인가라는 근본적 우려였고, 다른 하나는 이를 강행하다가 실패하면 오로지 내 책임이 될 터인데, 일단 뒤로 물러나는 게 상책이 아닐까?’라는 기회주의적 생각이 그것이었다. 오랜 고뇌 끝에 예정대로 1997년 첫 학기에 초등영어 교육을 시행한다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결단을 내렸다. 당시의 상황을 간략히 복기(復棋)하면 다음과 같다.

 

                     III.

내가 교육부장관에 임명된 것은 199512월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체적 여론은 초등영어 도입에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실제 정책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이해관계 집단 및 여론주도 집단들의 입장은 보다 다양하고 복잡했다, 사안의 중요성 때문에 주요 이해당사자인, 교육부, 국회, 교육청, 학원, 출판사, 학부모 및 교육전문가 간에 매우 복잡하고 역동적인 상호작용이 전개된다. 그 과정에서 치열한 갈등과 공방, 그리고 설득과 조정이 거듭되었다. 그런 소용돌이 속에서도 1996년에 들어서자, 특별활동 영어교육 실시학교는 5,370 개교(전체의 95.2%)로 늘었고, 방과 후 상설 영어반 운영은 3,960개교(전체의 70.2%)에 이르렀다.

 

크게 보아 초등영어의 도입을 반대하거나, 그 실시를 늦추자는 쪽은 민족주의적(내지 국수주의적) 성향이 강한 국회의원 및 정치인을 비롯하여, 일부의 언론, 국어학계와 교육계 인사, 그리고 일부 학부모들이었다. 반대파는 어려서부터 영어를 가르치면, 작금의 과도한 서양화, 미국화의 격류 속에서 우리 말과 글, 그리고 우리 고유의 문화를 지키기 어려워진다는 점을 강하게 부각시켰다. 거기에는 반미정서도 한 몫을 했고, 그러다 보니 반대파 중에는 진보진영 인사들이 많았다. 야당인 민주당의 다수가 여기 합류했다. 한편, 유보파는 초등영어 교육은 필요하나 아직 준비가 충분치 못하므로 2, 3년 더 연기해야 마땅하다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또한 초등영어 실시가 가시권에 들어오면서, 조기영어 열풍이 몰아쳐서 학원가를 비롯하여 심지어는 일부 유치원에서도 영어 과외를 하는 등 그 부자용이 크다는 점을 지적하며 학부모들 교육비 부담이 크게 늘고 있다는 점을 심각한 현실적 문제로 제기하고 나섰다.

 

한편 초등영어교육을 찬성하는 측은 교육부를 비롯하여 일선 교육계, 그리고 다수의 학부모, 그리고 세계화에 민감한 시민들이었다. 그러나 시행에 앞장서고 있던 교육부를 제외하면, 대체로 찬성하는 측은 사안에 대해 침묵하는 편이었고, 기껏 입을 열어도 무척 소극적이었다. 그러니 교육부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 우군의 숫자가 많은데 이들 <침묵하는 다수>가 조직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언론과 시민사회 등은 오히려 반대와 유보의 입장만 강하게 부각시키는 형국이어서 교육부는 수세에 몰릴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이 감에 따라 초등영어교육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세력 중 적지 않은 수가 유보 쪽으로 돌아섰다. 그러다 보니 점차 <찬성 대 유보>의 대결양상이 두드러졌다. 유보하자는 쪽에서는 보다 착실히 준비해서 제대로 영어교육을 시행하자는데, 이를 반대하는 것은 명분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또한 교육부의 무분별한 강행 태세는 신자유주의의 이념적 공세 내지 성과주의의 전형이라고 세차게 공격하며, 심지어는 조기 영어교육기관의 로비에 포획되었기 때문이라는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특히 국회 교육위원회의 김한길 의원을 비롯한 몇몇 야당 의원들의 반대는 매우 치열했다.

 

나는 초등영어교육은 세계화 추세에 비추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초등영어 도입은 내게 주어진 역사적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나는 만약 야당인 민주당이 19982월에 정권을 잡으면 과연 초기영어를 도입할지에 대해 의구심이 무척 컸다. 따라서 모처럼 찾아 온 이 절호의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무엇보다 나는 초등영어교육을 더 늦추면, 도시와 농촌, 그리고 빈()과 부() 학생 간의 영어 격차가 더 벌어질 것이라는 점을 크게 우려했다. 이미 조기영어교육 열풍 속에 거의 모든 도시 중산층 자제들은 어려서부터 사설 학원이나 개인 과외 등을 통해 영어를 익히고 있는 데 반해, 농어촌 및 도시 빈곤층 자제들은 중학교 입학할 때까지 거의 영어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없지 않은가. 이 차디찬 현실이 나를 크게 압박했다. 지금이라도 초등영어교육 시기를 앞당기지 않으면, 이들 두 그룹 간의 영어능력 격차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벌어져 그 부정적 영향력이 중학교 입학 이후의 학업 및 대입과정, 그리고 멀리는 사회생활 및 세계 진출에 이르기까지 심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IV.

199610월로 접어들자 나는 다음 해 초등영어 시행여부에 대해 마지막 결단을 내려야 할 운명의 시간이 왔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당시 상황은 초등영어 출범시기를 늦추자는 여론이 증폭되는 분위기였고, 청와대나 당. 정 모두 그러한 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수성 총리와 박세일 수석은 내가 어떤 결정을 내려도 그 결정을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그런 가운데 이 총리는 너무 무리하지 않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덧붙였다. 우회적으로 유보 선호를 내비친 것이었다. 차관과도 의견을 나눴다. 그도 말을 아꼈지만 실시를 연기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주위가 이러니 내 마음도 조금씩 흔들리는 것을 스스로 느꼈다. 아무리 다잡으려해도 그게 쉽지 않았다. 초등영어 실시를 늦추자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이 즈음, 내 마음을 영어교육 실시 쪽으로 다시 선회하게 만든 두 가지 일이 있었다. 그 하나는 당시 내 비서관이었던 김정기씨의 충정어린 조언이었다. 그는 지근거리에서 흔들리는 내 마음을 읽고, 다음과 같이 직언을 했다.

장관님! 시행을 불과 5개월 앞두고 초등영어 실시를 미룰 경우, 그간 장관님만 믿고 오랜 기간 동안 열정과 헌신을 다해 각고의 노력을 해 온 일선 교육현장에 일대 패닉현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것은 교육부는 물론 이 정부에 대한 엄청난 불신을 불러올 것입니다. 그리고 기회있을 때 마다 내년 3월 초등영어 실시를 공언해 오신 장관님의 인격은 어떻게 됩니까

폐부를 찌르는 그의 발언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즉시 스스로를 다시 추스르면서, 초등영어 실시 준비상황을 세밀한 부분까지 총점검했다. 그리고 상황이 크게 우려할 정도는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다. 얼마간 자신감이 샘솟았다.

그리고 며칠 후, 예상치 못한 일이 터졌다. 1013일자 동아일보 저녁 가판에 '초등학생 영어교육 연기검토'가 일면 톱으로 대서특필된 것이었다. 나는 부랴부랴 글을 쓴 K 여기자와 편집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그 기사는 명백한 <오보>라고  항의하며, 내일 조간에서 삭제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확실한 소스에 근거한 것이라고 자신감을 피력하며, 쉽사리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다. 국회와 당. , 그리고 교육부 및 교육계에 초등영어실시와 관계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인터뷰한 후, 결국 장관이 19973월 초등영어 도입을 유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결론은 내렸다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이제 장관님도 속내를 드러내시지요라며 거칠게 역습했다.

동아일보와 옥신각신하면서 나는 하느님이 내게 이제 시행을 결단하라고 절호의 기회를 주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단호한 어조로 장관이 그렇게 말해도 구태여 오보를 내겠다면 당신들 마음대로 하시라며 전화를 끊었다. 나의 결연한 태도에 동아일보는 결국 다음 날 조간에 위의 톱기사를 거둬들였다. 바로 그날 나는 서둘러 초등영어 내년 봄 실시 확정을 만천하에 공표했다. 돌이켜 보면, 이날 동아일보와의 해프닝이 한국에서의 초등영어 실시 일정을 결정하는 데 매우 주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이후 5개월 동안 나는 배수진을 친 절박한 심경으로 교육부 및 교육청 관계자, 그리고 일선 초등학교 영어교육 예정교사들과 더불어 초등영어교육의 성공을 위해 올인을 했다.

 

                           V.

19973월 초하루, 마침내 초등학교 3학년을 대상으로 초등영어교육이 그 역사적 출범을 했다. 예상을 뒤엎고, 처음부터 학교 현장에서 매우 호의적인 반응이 나왔다. 반신반의했던 언론도 성공쪽으로 돌아섰고, 그간 치열했던 반대여론도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놀라운 반전이었다. 1997529일부터 612(15일간)까지 미디어 리서치가 전국의 초등학교 3학년 학부모 2,000명을 대상으로 하는 초등학교 영어교육 여론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절대다수(91,9%)가 찬성하였다. 늘 불신의 표적이었던 교육정책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이런 압도적 결과는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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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예찬

삶의 단상 2020. 6. 28. 09:55 |

                                  I.

요즘 농사일이 무척 바쁘다. 새벽 동트기 전에 농터에 나가 몇 시간 일하고, 늦은 오후 햇볕이 가라앉기 시작하면 다시 일하러 나간다. 잡초 뽑고, 이제 끝물에 이른 보리수, 오디와 지금 한창인 블루베리를 딴다. 가물면 물주고, 간간이 곁가지 전지도 한다. 온통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일거리다. 그 중 많은 일이 처의 도움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들이다. 가끔 힘에 부친다고 느껴지지만, 그런대로 아직 할 만 하다.

얼마 전 딸아이가 전화로, ‘아버지, 도대체 왜 아직 농사를 지세요. 너무 힘드시잖아요. 거기서 뭐 변변히 수확하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무리하실 이유가 도대체 뭐에요라고 따지며 농사를 접으라고 다그쳤다. 나는 그냥 허허 웃고 말았다.

 

                                   II.

농사일을 금전적으로 보면 밑지는 장사인 게 사실이다. 엄청난 노력과 시간을 투입하지만, 거기서 얻는 가시적 수입은 전혀 없고, 수확하는 것도 대단치 않다. 거두는 것은 전부 우리 내외가 소비하고, 남는 것은 가끔 서울 자식들에게 보낸다. 그러다 수확기에 때맞춰 손님이라도 오면 조금 싸주는 정도다. 그래도 농사지어 얻은 채소와 과일이 우리에게 요긴한 먹거리를 제공하고, 무엇보다 농사일은 나에게 일하는 재미, 시골 사는 의미를 부여하며, 내 공부에도 도움이 된다. 그래서 나는 남는 장사라고 생각한다.

 

내가 경작하는 땅은 약 300평 정도다. 그 중 채소밭이 한 30평 정도고 나머지는 모두 과수다. 우리가 아는 이름의 거의 온갖 채소는 고르게 다 심었고, 과일나무도 포스트 포디즘의 <다품종 소량생산>의 흐름에 따라 갖가지 종류가 다 있다. 다양한 과일이 초여름부터 늦가을까지 줄이어 열리는데, 그 중 가장 많이 수확하는 것이 요즘 한창인 블루베리다.

농약, 제초제는 전혀 쓰지 않고 채소밭에 비닐멀칭도 하지 않는다. 내가 농약 대신 쓰는 것은 목초액이 전부다. 말하자면 으로 농사를 짓는 셈이다. 그러자니 일이 엄청 많고, 병충해 때문에 큰 고생을 한다. 10년 이상 농사를 지었지만 제대로 모양을 갖춘 사과나 배를 따 먹어 본 기억은 없다. 대체로 바람과 새, 그리고 벌레들에게 반 이상을 헌납하고 나머지는 우리가 먹는다. 농사를 좀 아는 지인이 와서 내가 농사짓는 방식을 보고, 혀를 차며 사서 고생하는 미련 농법이라고 명명했다.

 

그런데 좀 자랑 같지만, 내 농터에는 잡초가 거의 없다. 한마디로 무척 정갈하다. 아침, 저녁 부지런히 뽑기 때문이다. 그리고 열매가 열리지 않는 나무도 병들어 찌든 나무도 수명이 다할 때까지 정성껏 열심히 가꾼다. 내 품에 들어온 나무면, 그 기여(寄與)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그리고 똑같이 소중히 다룬다. 그들도 나와 같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III.

나는 이곳 속초/고성에 오기 전에는 평생 책상머리에서, 함량 미달의 머리만 쓰며 살았다. 그러다가 몸을 부려 땀 흘려 농사를 지으면서 또 하나의 다른 세상에 눈을 떴다. 신세계의 체험이다. 그러면서 내가 마침내 균형적 삶을 살고 있다는 자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농촌생활이 내게 더할 수 없는 큰 선물을 준 것이다. 그래서 여름에는 열심히 농사짓고, 겨울에는 힘닿는 대로 글을 쓰는 삶을 택했다.

 

 아직은 농사짓는 일 자체가 내게 즐거움을 준다. 청신한 새벽공기 속에 멀리 운무에 쌓여 신비한 느낌을 주는 울산바위를 바라보며 일을 시작할 때는 늘 가슴이 설렌다. 자연 속 파묻혀 하루를 보내는 일도 내 정신세계를 맑게 한다. 온갖 잡념, 증오, 분노가 사라진다.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니, 쫓기지 않고 수확에 연연하지 않아 마음이 편하다. 그리고 스스로 땀 흘려 거둔 먹거리가 내 삶의 값진 양식이 된다는 사실이 나를 기쁘게 한다.

 

작년 고성산불로 내 삶의 기둥이었던 <현강재>가 소진된 후, 크게 좌절했던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도 바로 농사일이었다. 불탄 집의 잔해와 초토화된 주위 풍경을 보고 망연자실했던 나는 일단 서울행을 작정했지만, 결국 며칠 못 가 이곳으로 되돌아 왔다. 그 무서운 불길이 천만다행으로 우리 집 농터를 비껴갔고, 봄을 맞아 막 새싹이 돋아나는 그곳의 작물들과 나무들이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농사일은 실로 엄청난 힐링 효과가 있었다. 농터에서 일하면서 나를 무섭게 짓누르던 산불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황폐한 주위 환경에 아랑곳없이 힘차게 뻗어가는 새싹들의 아름다운 합창과 그 엄청난 생명력 속에서 나는 희망의 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IV.

농사일은 일응 육체노동에 틀림없다. 하지만 손과 몸을 부려 일하면서, 동시에 사람의 머리는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 때문에 일하면서 뇌 활동을 통해 온갖 상상력과 학습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그러므로 활용하기 따라서는 육체노동을 정신노동과 병행할 수 있다.

 

노동의 학습효과는 내가 20대 후반 외국에서 공부할 때 스스로 체득했다. 한창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던 1967년 여름 방학 때 나는 두 달 여 동안 오스트리아 린쯔(Linz)에 있는 훼스트(Voest)라는 세계적 규모의 제철공장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다. 백면서생인 내게 매우 과중한 노동이었다. 그런데 나는 철판을 나르는 일을 하면서, 일이 얼마간 익숙해지자 노동과 동시에 뇌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공부 걱정 때문에 생각해 낸 궁여지책이었다. 그러면서 그 기간 동안 학위논문의 기본 골격과 줄거리를 마련하고 주요 쟁점도 많이 정리했다. 고되게 몸을 움직이면서, 머리는 명징하게 돌아간다는 사실에 나 스스로도 크게 놀랐다. 가을 새 학기를 맞아 논문 지도교수와 상담을 하는데, 교수님이 내게 안군, 논문이 엄청나게 진척됐네. 방학 동안 도서관에서만 지냈던 모양이네,“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농사일을 하면서, 요즘도 나는 늘 뇌를 가동한다. 일상적인 상상, 공상, 심지어 망상까지 다 한다. 젊은 날의 아름다운 추억들, 옛사랑의 그림자를 더듬기도 하고, 얼마 남지 않은 내 여생을 얼마간 착잡한 마음으로 미리 내다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 중 많은 시간을 농사철이 끝난 후, 늦가을부터 쓰게 될 책과 논문에 집중한다. 비록 갖춰진 서재에서 책이나 학술자료와 더불어 하는 작업은 아니지만, 농터에서 일하며 자유롭게 하는 학습은 그 열린 시공만큼이나 천의무봉(天衣無縫)의 힘이 있다. 컴퓨터에 다가가기 전에 머리로 쓰는 글이라 다소 거칠지만, 큰 그림과 숨은 그림을 볼 수 있는 나름 야생(野生)의 특성이 있다. 그러다가 새로운 아이디어나 논리의 실마리를 찾으면 재빨리 메모를 해 둔다. 급격하게 쇠잔해 가는 기억력에 대한 대비책이다.

 

나는 농사일이 내 학문적인 활동에 손해를 끼치기보다는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여름 한 철 농사일로 단련된 몸과 그때 축적한 무수한 생각들의 조각들을 모아 겨울에 글을 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몇 년에 한 권씩 나오는 내 저작들은 여름 농사의 결실이다.

 

이렇게 볼 때, 분명 농사일은 엄청나게 남는 장사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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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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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강렬 2020.06.29 12:23 Address Modify/Delete Reply

    농사일을 하시면서 힐링하시는 것 100% 공감을 합니다. 저는 지금하고 있는 회사 일을 핑게로 8년전부터 짓던 농사일을 3년전에 잠시 접었지만 마음은 밭에 가 있습니다. 때가 되면 다시 농부가 되고 싶습니다. 분명 농사일은 어렵기는 하지만 남는 결과는 손해가 아닌 이익입니다. 다만 체력이 항상 문제입니다. 교수님 성격상 그러시지 못하겠지만 쉬엄쉬엄 하실 필요도 있습니다. 건안하시길 빕니다.

  2. 허욱 2020.06.29 23:31 Address Modify/Delete Reply

    코로나 19로 세상이 많이 어렵습니다. 5개월 이상 코로나 상황이 이어져 사람들이 많이 지쳐있고, 경제적 어려움과 미래의 불안감에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근자에 안부 인사를 못드려 궁금하던 차에 교수님께서 블로그 현강재를 다시 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방문했습니다. 올해 쓰신 글들을 다 읽었습니다. 성경 고린도전서의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 이란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사모님께서 지으신 멋진 집 현강재와 기적같이 구한 노르웨이 벽난로는 불에 타 사라졌지만, 오늘도 고성의 하늘아래에서 농사를 지으며 심신을 벼리고 계신 교수님이 바로 살아있는 현강재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뜨거운 여름, 농사 일로 수고하시는 교수님의 상상 속 한 켠에 우리 국민이 POST 코로나 시대를 살아갈 지혜가 깃들기를 소망합니다. 무더위와 장마 중에도 벌써 겨울이 기대됩니다. 더욱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기도합니다.

  3. 전영평 2020.06.30 18:34 Address Modify/Delete Reply

    현강재 재 개통을 뒤늦게 나마 축하드립니다

  4. 이근우 2020.07.21 14:17 Address Modify/Delete Reply

    농사와 학문, 옛 선비의 겸손한 모습이 그려집니다. 몸을 게으르게 놓아두지 않는 일종의 수행의 의미가 더욱 청정한 사고를 낳을 것 같습니다. 청빈낙도의 정신이 어두운 서울 하늘 위에 반짝입니다.

  5. 김항규 2020.08.22 11:09 Address Modify/Delete Reply

    아침과 저녁으로 열심히 농산물을 가꾸면서도 농민 스스로가 해야 할 일과 자연과 하늘에 맡겨야 할 일을 구분하여 겸손히 기다릴 줄 아는 진정한 농심을 교수님으로부터 배워봅니다.
    고린도전서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3:6)라고 말한 사도 바울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삼척 장미공원

포토갤러리 2020. 6. 13. 05:40 |

  산불이 났던 작년을 빼고, 매년 5월 말이면 삼척 장미축제를 갔다.  올해도 어김없이 장미공원을 찾았는데

코로나 때문에 생각보다 한산했다.  갖가지 장미들이 아름다운 자태를 뽑내며 우리를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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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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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근우 2020.06.19 17:44 Address Modify/Delete Reply

    장미가 색깔이 다양합니다.
    아마도 개량종이겠죠.
    일년 중 오월이 가장 좋던데
    장미는 오월의 꽃이네요.
    그렇다면 장미가 꽃의 여왕입니다.
    여왕은 가시가 있나 봅니다.

  2. 이강렬 2020.06.29 12:27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제가 사는 서울 송파구 올림픽 공원에도 매년 장미 축제를 하지요. 그런데 금년에는 장미 공원 안까지 못가게 줄을 쳐놓고 사람들에게 밖에서만 보도록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덜 봐줘서 그런지 장미도 예년처럼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5월은 장미의 계절이라고 합니다만 장미도 섭섭한 모양입니다. 참 사진을 잘 찍으셨습니다. 작품사진 같습니다. 행복하세요.

  3. 현강재 현강 2020.07.25 09:49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두 분 글 고맙습니다. 옛날 제가 1년간 개나다 뱅쿠버의 UBC에 가 있을 때, 학교 안에 조그마한 장미공원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장미의 아름다운 빛도 좋았거니와, 멀리 눈덮인 산의 풍경이 신비한 느낌을 더해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 집의 정원에 장미를 몇번 시도해도 생각처럼 잘 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장미꽃밭을 아름답게 가꾸는 사람들의 정성과 미적 감각을 높게 평가합니다. 장미는 절정의 아름다움에 비해 시들 때 모습이 너무 초라, 남루해서 그게 마음에 걸립니다. 그러나 사람을 포함해서 역사적 강성제국도 전성기와 쇠퇴기가 있으니, 그렇게 받아 들여야지요.

작년에 산불로 완전히 스러진 줄 알았던 연산홍이 제 모습을 되찾아 그 화사한 얼굴을 드러냈다. 혹시 살아날까 싶어 정성스레 돌보았더니 놀라운 생명력으로 기사회생하여 실로 고마움을 넘어 경외스럽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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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남수 2020.06.03 17:05 Address Modify/Delete Reply

    영산홍이 더 곱고 선명하게 피었네요. 저 역시 생각만 해도 현강재 옛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가을엔 뜰 앞 은행나무도 더 노랗게 물들겠지요?

  2. 홍선기 2020.06.05 18:04 Address Modify/Delete Reply

    교수님 사진도 잘 찍으시네요. 앞으로 종종 방문하겠습니다. ^^

  3. 이근우 2020.06.10 19:48 Address Modify/Delete Reply

    연산홍이 유난히 더 붉습니다.

  4. 양재진 2020.08.12 23:33 Address Modify/Delete Reply

    오랜만에 방문했는데, 꽃이 반겨주네요.

www.youtube.com/watch?v=innK6Nj74EA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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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는 모진 산불로 주변이 초토화되었고, 올해에는 '코로나 19'가 모두의 마음과 몸을 어지럽혔다.

그렇게 세상이 요동을 쳐도, 때가 되니 곳곳에 작은 꽃들이 화사한 얼굴을 내민다. 자연의 아름다운 생명력에

놀라고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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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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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근우 2020.06.10 19:45 Address Modify/Delete Reply

    네. 인간만이 조급하고 도모하려고 하지
    자연은 서둘지 않고
    의젓하더라고요. 부총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