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되돌아보니, 80년 가까운 내 생애에서 8년을 조금 넘는 기간을 해외에서 보냈다. 처음 오스트리아 빈(Wien)에서 5년 남짓 유학 생활을 했고, 이후 독일 만하임(Mannheim), 미국 시라큐스(Syracuse), 그리고 캐나다 벤쿠버(Vanquver)에서 각각 1년씩 그곳 대학에 연구교수로 있었다. 이들 유럽과 북미의 여러 나라, 도시들은 저마다 삶의 양식과 지적, 문화적 특성에 차이가 있어, 거기서 보낸 세월은 내 삶을 풍성하게 하고, 공부와 생각을 여물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많은 영감과 숱한 추억을 남겼다.

영국의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해마다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를 순위를 매겨 발표하고 있다. 안전과 보건, 문화, 환경, 교육, 인프라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하여 랭킹을 정하는데, 빈이 몇 년째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고, 벤쿠버도 늘 호주의 멜버른과 더불어 최상위 2, 3위를 다툰다. 그리고 만하임 옆 도시로 내가 한때 제집 드나들 듯했던 하이델베르크도 자주 최상위권에 진입한다. 이렇듯 내가 주거환경 및 삶의 질의 관점에서 세계 최상의 도시들에서 살았던 데 대해, 뒤늦게 놀란다. 그것은 분명 하나의 행운이었다.

사정이 이럴진 데, 보기에 따라서는, 내가 의도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만 골라 마음먹고 찾아다닌 느낌 마저 준다. 사실은 전혀 그게 아닌데 말이다.

여기서는 이들 도시 중 내가 가장 오래 머물렀고, 또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빈 얘기를 하고자 한다.

 

                                    II.

빈은 참 아름다운 도시다. 풍광도 그렇고, 문화와 예술도 그렇다. 도시 면적의 절반 이상이 공원, 숲 등 녹지로 이루어져 얼마 전 세계 최고의 녹색도시로 선정되기도 했다. 알프스에서 제공되는 신선한 식수는 예부터 명성이 높아, 빈의 말()은 파리에 가면 좀처럼 물을 마시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물을 담은 물통을 따로 매달고 갔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그런가 하면 도시 곳곳이 빼어난 역사유적지이자 문화유산의 보고(寶庫)여서, 도시산책 자체가 역사기행의 의미를 지닌다. 무엇보다 이 도시의 음악과 미술, 건축, 연극 등은 그 미학적 특성과 창의성이 돋보여, 빈에서는 세계 어디서도 향유할 수 없는 최상의 문화와 예술을 일상 속에서 즐길 수 있다.

 

나는 빈에서 유학 생활을 하면서, 학문과 지식의 함양 못지않게, 격조 높은 문화와 예술에 접하고 그것을 통해 문화적 감수성을 높일 수 있었던 것을 큰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게 나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한동안 나와 기숙사에서 한방을 썼던 독일 유학생 슈미트는 빈의 문화와 예술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 빈 대학에서 이른바  문화학기’(文化學期 / Kultursemester)를 보내려고 한 학기 예정으로 왔었다. 그런데 그 기간이 턱없이 모자라 한 학기를 더 연장했다. 그는 주말이면, 으레 콘서트, 오페라, 연극을 찾거나. 미술관을 비롯한 각종 전시장과 공연장을 순회했다. 당시 빈 국립 오페라 하우스학생 입석 입장료가 우리 돈으로 단돈 몇 천원 정도였으니, 누구나 별 부담 없이 세계 최고의 오페라를 감상할 수 있었다. 이처럼 빈은 고급문화를 대중문화로 전환시키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었다. 슈미트는 유학을 마치고 독일로 돌아가면서, 내게 자기는 이제 문화인으로 거듭났고, 그것은 자신의 일생일대의 자산이 되었다고 흡족해 했다.

 

                                      III.

나는 그곳에 살면서, 특히 세기말(世紀末) 의 지성문화와 예술에 깊이 빠져있었다. 세기말, 노쇠한 합스브르크 제국은 바야흐로 황혼길에 접어드는데, 그곳에서 문화와 지성이 미증유의 황금기를 구가했다는 것은 자못 역설적이다. 빈은 그 이른바 벨 에포크’(좋았던 시절) 시대에, 루네상스 시대의 피렌체에 견줄만한,  천재들과 반항아들의 경연장이었다. 세기말 빈의 두드러진 특색은 융합과 재창조였다. 모든 예술장르와 학문분야가 서로 분리되지 않고 긴밀하게 상호 교류했고, 이 통섭과 융합의 과정을 통해 놀라운 혁신과 재창조를 이룩했다. 그 과정 속에서 그들을 지적 경계를 거침없이 넘나들며 새로운 세계를 창조했다. 기존의 전통은 파괴되거나 훼손되기보다는 새 작품 속에 녹아 들어갔고, 옛것과 새것은 절충되기보다는 융합되었다,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빈의 '카페하우스'는 바로 이러한 지적, 문화적 경계를 뛰어넘는 담론의 장이자 새 역사의 창작공간이었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 출간된 1900년 앞뒤 세기말 빈은 유럽지성사에서 감히 어떤 도시도 범접할 수 없는 독보적 자리를 차지한다, 전통의 해체와 재구성 속에서 현대적 자아를 추구했던 세기말 빈은 모더니티를 넘어 포스트모더니즘을 앞서서 형상화하고 있었다. 클림트, 실레, 코코슈카, 지테, 바그너, 브루크너, 볼프, 말러, 쇤베르크, 프로이트, 마흐, 볼츠만 등이 새 문화의 지평을 여는데 큰 몫을 했다. 오늘 많은 이가 말하는 통섭은 바로 세기말 빈 지성문화의 공통분모였다.

 

19191차대전이 끝난 후, 거대제국 합스부르크의 잔해 위에 오스트리아는 인구 7백만의 작은 나라로 다시 태어난다. 빈은 생존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약소국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정신적 제국이었다. 나라는 나락으로 떨어졌는데, 빈은 거의 모든 학문과 예술, 지성과 문화영역에서 지적 황금기를 구가했다. 음악과 문학 및 각가지 시각 및 공연예술은 물론 의학, 심리학과 정신분석학, 논리학과 철학, 자연과학, 경제학과 법학 등 주요 학문분야 마다 고유의 학파를 형성하며 학문적 위세를 떨쳤다. 물론 거기에는 세기말 빈의 연속과 심화라는 측면이 크게 작용했다. 1930년대 초 히틀러의 침공이 있기까지 지속된 빈의 지성문화는 마치 꺼지는 불꽃이 마지막 힘을 다해 찬연한 광채를 발하는 것과 같은 신비한 힘을 지녔다.

당시 빈의 사회과학의 학문적 세계만 보아도, 빈 경제학파의 계보는 미제스, 슘페터, 하이에크로 이어졌는데, ‘기업가 정신창조적 파괴의 개념으로 경제 및 경영학의 혁신의 물결을 일으킨 슘페터는 1919년 오스트리아의 재무부장관을 지냈다. 그는 훗날 민주주의 이론을 발전시켜 정치학자로서도 대가의 경지에 이른다. 현대 경영학의 창시자 드러커도 빈에서 생장하며, 어린 시절 슘페터로부터 깊은 영감을 받았다. 그런가 하면 현대 법학의 태두, 켈젠은 법실증주의와 순수법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 일반체계이론(genral system theory, GST)의 창시자 베르탈란피, 게임이론의 대가 모르겐슈타인, 경험주의 사회학의 거장 라자스펠트도 그 시절 모두 빈 대학 교수로 활동했다. 이들은 한결같이 학제간(學際間) 연구와 혁신적 방법론을 통해 새로운 학문세계의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빈 특유의 문화적 유전자인 융합과 재창조를 웅변적으로 실천한 학자들이다.

오스트리아의 지성사를 집필한 존스턴은 책에서 한 시대에 혁명적 영향력에서 프로이트, 후설, 비트겐슈타인, 켈젠 또는 노이라트에 버금갈 만한 철학자나 사회이론가를 배출한 나라는 없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여기서 나라이라는 도시로 바꾸어 써도 크게 다르지 않다.

 

                                      IV.

나는 빈에서 5년 남짓 살면서, 거기서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을 낳았다. 공부하면서 가정도 꾸려야 했기에 하루하루 정신없이 지냈다. 그러다 보니, 이 도시가 선사하는 갖가지 살기 좋은 조건들을 고르게 누리지 못했음은 물론, 내가 열망했던 빈의 정신세계 속에도 제대로 깊숙이 진입해서 그 진수(眞髓)를 파지하기보다는, 늘 그 언저리에서 맴돌다 말았다. 그래서 아직도 아쉬움이 크다. 그러나 내 찬란한 20대 후반, 5년간을 그 격조높은 정신적 공간에서 실존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큰 축복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미 반세기 저 너머, 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맴돈다. 무엇보다 나는 빈에서 살면서, 고단한 삶이라 힘들었으나, 별로 불쾌했던 기억이 없다. 내가 만났던 은사, 친구, 이웃 모두가 호의적이었고, 인정이 넘쳤다. 한 마디로 그곳  사람들이 그렇게 좋았다.그래서 내게 빈은 내가 살았던 가장 좋은 사람들의 도시로 추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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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영랑호를 찾았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영랑호는 조용히 가을에 물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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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실로 천의 얼굴을 지녔다. 격랑이 밀려올 때는 분노의 화신 같다가도, 잔물결도 깃 속에 감추는 고요의 바다는 평화로운 천사의 얼굴이다. 그런데, 만약 바다가 늘 같은 모습이면 얼마나 재미 없을까. 변화무쌍한 바다의 역동적 풍경이 바로 바다의 마력이자 신비가 아닐까.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후, 바다 그림이 궁금해서 인근의 아야진 해변을 찾았다. 한가한 오후, 땅 위는 이제 청명한 가을 날씨인데, 바다는 아직도 어제의 태풍의 기억을 떨치지 못한 듯, 계속 경련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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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며칠 사이에 마이삭’, ‘하이선두 역대급 태풍이 동해안을 스치고 지나갔다. 언론 보도로는 스쳤다지만,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훑으고지나간 느낌이다. 닷새 전 마이삭 때는 모진 광풍에 나무 몇 그루가 쓰러지고 대추가 다 떨어져 올해 대추 농사를 완전히 망쳤는데, 어제 하이산은 시간당 60-70m 폭우를 몰고 와, 끝내 우리 내외 대피 소동까지 벌어졌다.

어제(97) 오후 1시 반경, 고성군에서는 근처 저수지가 범람위기에 있음을 알리며, 원암리 전 주민에게 대피명령을 발령했다. 문자메시지로 보냈는데, 우리는 전혀 모르고 있다가, 국회연수원 김교수님이 연락을 해줘 급히 뛰쳐나왔다. 비는 억수처럼 오는데, 대명콘도 방향 다리는 일부 훼손되어 길이 차단됐고, 집 가까이 폭이 무척 넓은 하천도 물이 가득 차 넘실대며 흐르고 있었다. 급한 대로 방향을 돌려 지대가 높은 파인리즈 리조트로 향했다. 고맙게 그곳까지 찾아온 제자 노성호군 부부와 로비 카폐에 머물다가, 다행히 4시 가까이 대피령이 해제되어 귀가했다. 하이산은 그렇게 물러갔지만, 밤새 태풍 뒤에 으레 찾아오는 이른바 뒷바람과 그것이 동반한 굉음 때문에 잠을 설쳤다. 작년 4월과 지난 5월에는 불난리, 그리고 이번에는 물난리를 겪었다. 이 갖가지 이색체험도 이젠 끝났으면 좋겠다.

 

이제 겨우 가을 초입인데, 그 무성하던 나무 잎이 반쯤 떨어졌다.

호박들은 왠만해선 넝쿨에서 떨어지지 않는데, 이 모진 태풍에는 대부분이 넝쿨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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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강렬 2020.09.14 14:36 Address Modify/Delete Reply

    태풍이 '스친 것'이 아니라'훑고 지나갔다'는 말씀에 공감이 갑니다. 두 개 태풍이 지날 때 걱정은 되면서도 미처 연락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홍수 대피를 하실 때 얼마나 황망했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말에 위로의 말로 '불행중 다행'이라고 하지요. 그 말밖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늘 높은 가을, 가을걷이를 하시는 교수님께 행복이 내려앉기를 기원합니다.

  2. 현강재 현강 2020.09.14 19:42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이 박사! 늘 마음써줘 고맙네. 덕택에 태풍은 그렇게 지나갔고, 오늘은 좋은 가을날씨를 즐기며 영랑호를 돌았네. 어려운 시기네. 부디 연구소 잘 가꾸고, 무엇보다 가내 두루 건.행하기 비네.

덕수궁 돌담길

포토갤러리 2020. 9. 3. 13:04 |

오랜만에 서울을 바삐 다녀왔다. 광화문 근처에 약속이 있었는데, 시청역에서 전철을 내리니 약 20분 가량 시간 여유가 있었다. 기회다 싶어 나는 모처럼의 틈새 시간을 이용하려고(長技 중의 하나다) 급히 덕수궁 옆 돌담길로 접어들었다.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나는 덕수초등학교 뒤에 잠시 자리 잡았던 경기중학교 가()교사에서 공부를 하며, 자주 이 길을 누볐다. 이후에도 정동 돌담길은 내 청소년기에 숱한 추억과 낭만을 간직하고 있는 나의 꿈의 보금자리다. 헌데 정말 오랜만에 이곳을 찾았다.  코로나로 한산한 길을 따라 정동교회까지 빠른 걸음으로 갔다가, 약속시간에 대려고 아쉽게 발걸음을 돌렸다.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언덕위 정동길엔 아직 남이있어요. 눈덮인 조그만 교회당이영훈의 광화문 연가가 등뒤에서 들려오는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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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정부때 교육부총리로 재직하면서, 교육정책에 대해 관심이 큰 인사들과 지인들에게 정책수행과정에서

당면하는 어려움과 안타까운 심경을 토로하기 위해 가끔 <장관의 편지>를 보내곤 했었습니다. 아랫글은 당시 한 분이

제 편지를 읽고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던 글과 그에 대한 댓글입니다.

한 중도주의자의 고뇌 - 안병영 네이버 블로그.mht
2.50MB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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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백재현 2020.09.03 08:17 Address Modify/Delete Reply

    우리의 아픈 그리고 나쁜 유산인 '진영 프레임'은 마치 자석의 음극과 양극 같아서 도시 가운데에 서 있기를 불가능 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념의 양날에 깊은 상처를 입었던 역사적 경험과 어릴적부터 승자와 패자로, 합격자와 불합격자로 이분법적 구분에 익숙한 문화적 토양 때문이 아닌가 싶다가도 현실이 너무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조그씩 조금씩 그 간극이 좁혀지는 듯 느껴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교수님의 고뇌를 자양분으로 우리 사회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안병영 전교육부총리는 정년퇴임을 앞둔 인터뷰에서 "정부가 대학에 지시하는 시대는 지났다"라고 말했다..

안병영 前교육부총리 “정부가 대학에 지시하는 __ 네이버블로그.m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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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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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장마와 뒤이은 폭염 틈새에도 조금씩 가을 기운이 감돌더니, 처서가 되니 이제 가을 빛이 도처에서 감지된다.

헌데 태풍이 다가오고 있다니 걱정이다. 가을맞이 통과의례를 한번 쯤 건너 뛰면 안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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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항규 2020.08.24 14:24 Address Modify/Delete Reply

    설악산에는 이미 가을이네요.
    코로나로 우울해지려 하는 요즈음인데 위 사진들을 보니 제 마음에도 가을이 온 것 같습니다.
    고추와 호박 그리고 사과 하나 하나에 교수님의 수고의 손길이 느껴지네요~~

농사 삼재(三災)

삶의 단상 2020. 8. 20. 03:27 |

                                      I.

이곳 고성에서 농사를 지으며 겪게 되는 크고 작은 어려움 중에 가장 힘든 것 세 가지를 꼽으라면 바람병충해’, 그리고 새떼가 아닐까 한다. 이들 세 가지 재해들의 피해는 정말 장난이 아니어서 가뜩이나 변변찮은 내 농작물 수확을 늘 반 토막 내곤 한다. 처음에는 꿰나 안타깝고 화도 치밀었지만, 이젠 앙앙불락하기보다는 그러려니하고 편하게 받아들이며 친환경적 차원에서 느긋하게 내 방식대로 대응한다.

 

                                       II.

우선 바람 얘기부터 시작하자. 이웃 속초 학사평과 내가 사는 고성 원암리는 워낙 바람이 세기로 이름난 곳이다. 과일나무에 막 꽃이 피기 시작하는 봄철과 과일 열매가 한창 익어가는 가을철에 여지없이 찾아드는 모진 강풍은 낙화(落花)와 낙과(落果)를 불러 과일 농사를 망쳐 놓는다.

그중 봄철 양간지풍’(양양과 간성 사이에서 부는 국지성 강풍)은 가히 전설적이다. 해마다 3월 중순에서 5월 초에 불어오는 이 바람은 불을 몰고 온다는 의미에서 화풍(火風)’이라고도 하는데, 2005년 양양 낙산사를 잿더미로 만들었고, 작년에는 우리 집(현강재)을 포함해 토성면의 몇 개 마을과 산지를 초토화했다. 광풍이라 불려 마땅할 이 거친 봄철 바람은 비단 화마만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막 개화하는 과수 꽃잎들을 여지없이 유린해 열매를 맺을 근거를 아예 없애 버린다.

이곳 가을바람도 만만치 않다. 특히 늦여름, 초가을 남쪽 열대 해상에서 발생한 태풍이 자주 한반도를 스쳐 동해 쪽으로 빠져나가는데 그때 이곳 속초/고성이 그 영향권에 드는 경우가 잦다. 비를 머금은 태풍이 휘몰아치면 잘 익어가던 과일들이 우수수 떨어져 다 된 농사를 망쳐 버리곤 한다.

 

그러다 보니 나도 바람 피해를 줄이는 방향으로 농사전략을 짜게 된다. 우리 집 과수 농사의 주종이 점차 봄철과 가을 강풍에 잘 견디는 블루베리, 아로니아, 보리수 등으로 바뀐 것도 그 때문이다. 그 중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사고에서도 끄떡없이 혼자 살아남았다는 아로니아는, 가히 명불허전, 모든 자연재해에 극강의 모습을 보여준다.

 

                                      III.

사람이 병으로부터 자유로 울 수 없듯이 채소나 과수와 같은 농작물도 한 해 내내 병충해의 위협 속에서 생명을 지탱한다. 그런데 나는 화학 약제, 살충제, 제초제를 전혀 쓰지 않고, 채소에 비닐멀칭조차 하지 않는다. 내가 병충해 방제를 위해 쓰는 것은 오직 희석한 목초액과 EM(effective micro-organisms)용액이 전부다. 말하자면 자연생태계에 피해를 줄 수 있는 일은 그 어느 것도 마다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일은 많고, 병충해의 피해는 막심하다. 속초에 아는 종묘상 주인은 내게 농사짓는다고 벌레 치다꺼리만 한다고 농담한다. 아무리 정성을 들여도 해마다 과수 두, 세 그루는 병충해로 시들시들 앓다가 죽는다. 사과, , 복숭아 등 과일들도 병충해에 시달려 한 귀퉁이가 벌레 먹던가 찌그러지는 등 제 꼴이 아니어서, 누가 와도 따서 권하기가 민망스러울 때가 많다. 내 농터에 오디()나무도 제법 되는데, 봄철이면 으레 힌 색 벌레가 번지고, 잎이 하얗게 변하며 말려 들어간다. 목초액을 뿌리고, 어떤 때는 호스로 물대포를 쏘기도 한다. 그래도 늘 수확은 반타작이 고작이다.

 

허나 해마다 수없이 농약을 살포해서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다른 집 과수나 채소보다 거칠고 못생겼으나 자연 친화적이고 속이 건강한 우리 집 농작물들이 ()’임을 실감하기에 앞으로도 지금까지의 농사방식을 바꿀 생각은 추호도 없다.

 

                                       IV.

시골에 살면 재잘거리는 새들의 새벽 합창 소리에 눈을 뜰 때가 많다. 또 이름 모를 작은 새의 매혹적인 모습에 흠뻑 빠질 때가 자주 있다. 이렇듯 새들은 자연이 선사하는 고마운 선물이고 그 중요한 일부이기도 하다. 그렇게 볼 때, ‘새떼를 재해로 치부한다는 것은 반자연적이며 몰인간적인 발상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한여름 폭염 속에서 땀 흘려 애써 가꾼 농작물을 쏜살같이 날라와 순식간에 먹어 치우는 새떼들은 안타깝게도 농사꾼에게 재해로 인식될 때가 많다.

새들은 무리 지어 움직일 때가 많고 그래서 그 피해도 크다. 한번 새떼가 돌개바람처럼 휘몰아치면 자칫 농작물이 초토화되기 일쑤다. 많은 이들이 허수아비 세우기, 나무에 종()달기, 그물망 치기 등을 해보지만 어떤 방제 방식도 그리 성공적이지 못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들 새들이 엄청난 미식가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체리, 딸기 등 가장 맛있는 과일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고, 그것도 가장 맛있을 때 때맞추어 취식하고, 때 지난 것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나는 농사 초기에 두어 이랑 딸기 농사를 해 보았는데, 딸기가 익어 제맛이 돌기 시작하면 새때가 여지없이 몰려들어 게걸스럽게 해치웠다. , 세 해 동안 이 놈들에게 진상을 거듭하다가 끝내 딸기 농사를 접었다. 항복을 선언한 셈이다. 촘촘히 그믈망을 치거나 온실재배를 하면 낳겠지만 그럴 생각까지는 없었다.

이들 미식가 조류들은 체리도 무척 좋아해서 빨갛게 익었다 하면 떼 지어 달려든다. 그런데 새들에게 비교적 관대한 우리 내외도 최상 진미(眞味)의 체리는 이들 난폭자들에게 통째로 양보할 생각이 없어 소극적이나마 우리 방식으로 맞서보곤 한다. 즉 새들은 대체로 접근하기 쉬운 나무 윗부분부터 공략하는데, 우리는 처음부터 손닿기조차 어려운 위쪽은 아예 포기하고, 중간 아래쪽 지키기에 전념한다. 그래서 나무 아래쪽 체리가 막 익기 시작하면, 서둘러서 선제적으로 그것부터 따먹는다. 말하자면 나무를 위, 아래 양대 세력권으로 나누고 공존, 공유 전략을 구사하는 셈이다. 그러나 그러다 보니 새들은 여유롭게 가장 맛있는 체리를 즐기는 데 비해, 우리는 조급한 마음에 덜 익은 체리를 허겁지겁 따 먹는 신세가 된다. 주객이 전도된 셈이다.

새들은 무화과도 무척 좋아한다. 그런데 얄미운 것은 이놈들이 무화과가 맛있게 익기가 무섭게 엄습하는데, 그것을 통째로 먹는 것이 아니라, , 두 입 쪼아먹고 날아간다는 것이다. 무화과는 과일이 무척 실해서 몇 개면 한 끼 요기도 되는데, 새들이 조금 비어 먹었다고 그냥 버리기는 너무 아깝다. 그래서 우리는 궁여지책으로 그놈들이 먹은 부분만 잘라내고 찜찜한 대로 나머지를 챙겨 먹는다. 말하자면 미식가 주인들이 드시고 남긴 잔식(殘食)을 아랫사람이 꾸역꾸역 찾아 먹는 셈이다. 이 또한 주객전도의 예가 아닌가.

 

새떼들의 농사 피해도 만만치 않으나, 그들도 우리처럼 자연에 기대어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적대시하기보다는 기본적으로 공존전략 아래 공유경제의 길을 모색하는 편이다. 그렇게 볼 때, 새들은 재해라기보다 껄끄러운 공생자(者)라고 할 수 있다.

 

 

 

                                      V.

농사를 지으며 겪게 되는 어려움은 이들 농사 삼재 이외에도, 봄철 가뭄, 한여름의 폭염, 때 없이 찾아오는 수해, 냉해 등 갖가지 자연재해들이 허다하다. 그 뿐인가. 일하다 보면, 늘 날고 기는 각종 벌레들에 시달리게 되고, 뱀과 말벌, 악성 진드기 등의 위험도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이들 어려움을 갚고 남을 농사가 선사하는 큰 기쁨들이 너무나 많다. 무엇보다 몸으로 부딪혀 자연과 호흡하고, 자신의 실존적 의미를 확인하며 영성을 키울 수 있다는 점은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천상의 선물이다.

뿐만 아니다. 내 나이에 아직도 흙냄새를 맡으며 건강하게 일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자연생태계를 해치지 않으면서 내가 일군 농터에서 손수 가꾼 깨끗한 농작물을 가장 신선할 때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세속적 즐거움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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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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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백재현 2020.08.28 16:56 Address Modify/Delete Reply

    교수님,
    죄송해서 어쩌죠? 글을 읽으면서 자꾸만 입가에 미소가 번져서 말입니다.
    고생 고생하시면서 농사 일 하셨을 것을 생각하면 죄송해서 한숨이 나와도 시원치 않을 판에 새떼와 싸우시는 모습, '주객전도'로 난감해 하시는 교수님 모습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그만...사실 제 머리속에는 아직도 농부 교수님이 잘 매치가되지 않습니다.
    그 맑으셨던 얼굴이 어떻게 검게 타셨을까 싶기도 하구요.
    글의 말미를 읽으면서 비로소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어쩌면 대학 강단에서보더 더 큰 가르침을 주고 계시는 건지도 모르겠다 싶습니다.
    코로나19로 나라가 온통 혼란스럽습니다. 교수님 건강 하십시요.

  2. 2020.09.17 16:42 Address Modify/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찬란한 봄 그리고 원격수업(2020.4.10)-이규석 이규석 활동이미지

2020. 4. 10. 18:20

https://blog.naver.com/ksyesks/221901260251

 

 

찬란한 봄 그리고 원격수업(2020.4.10).

오늘 기온은 16℃로 전과 비슷하나 바람이 거의 없고 날씨가 맑은 화창한 봄이었고, 날씨에 걸맞게 철쭉, 영산홍, 복숭아꽃 등 많은 꽃들이 앞다투어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사진). 한편, 오늘 조간에(사진) 원격수업의 어려움이 나타나 있었고, 이 기회에 개선하고 가지 않는 길을 가겠다는 기사도 같은 신문에 났다(사진). 원격수업을 위해 정부는 1970년대 말 한국교육개발원 소속으로 출발, 그후 독립기구가 된 EBS와 이를 중심으로 각 시도교육청이 함께하는 유비쿼터스 교육 환경을 위해 노력해 왔다. 특히 1995.5.17 교육개혁을 추진하기 위하여 1995년에 영입된 안병영장관은 다시 교수로 봉직 중 2003.12 월에 2003.3월 취임한 노무현대통령의 부름으로 장관으로 다시 부임하여 학생부 전산화 정착과 교수학습의 획기적 개선을 위한 자료 개발 및 이의 온라인화를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그래서 모든 시도교육연구원, 과학교육원에 교육정보부를 병설하든가 또는 교육정보원을 독립기관으로 두게 되었고 교육부도 유비쿼터스교육을 위해 연구학교를 두어 노력하였다. 2003.9월부터 서울교육과학연구원장이었던 나는 서울이 앞장서도록 하는 시책으로 중학교 하나를 통채로 리모델링해서 교수학습지원센타를 만들어 2004년 안장관님과 경향 각지의 내외빈을 모시고 개관식을 크게 한바 있다. 넓은 국토에 우리 같이 집단 학교 교육이 어려운 곳이 많은 호주에 연수단이 가서 견학하였고 서울의 초중고 모든 학교 및 EBS와 교수학습지원센타를 연결하여 교육하는 작업을 했다. 나는 그때 이 일을 참으로 보람을 느끼며 했고 30개월 원장으로 봉직하며 체중이 3kg이나 빠졌고 이어서 서울시교육청국장으로 가서 이일을 계속 지원하였다. 그 후 이유는 있겠지만 온라인교육과 교수학습자료 개발을 더 이상 발전시키지 못하였고 2018년에는 자체 제작 시설이 폐기상태인 것으로 안다. 정말 차제에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했으면 한다. 어제 시작한 원격교육이 오늘(10일) 99%의 적응율은 보였다니 선생님들께서 고생했겠지만 참으로 다행이다. 우리에게서 열심히 배워간 말레지아는 2009년 모든 학생들에게 단말기를 보급하여 원격교육과 온라인교육을 세계에서 최초로 실시하였다.



 

[출처] 찬란한 봄 그리고 원격수업(2020.4.10)-이규석|작성자 교산이규석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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