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학의 어머니' 박완서 (1931-2011) 10주기를 맞아,

  부끄럼을 자주 타며, 그러면서도 늘 당당하고 더없이 따듯했던 그녀에게 아랫글을 바칩니다.

 

.                        I.

나는 어려서부터 부끄럼을 꽤 많이 탔다. 그래서 남들 앞에 나서기를 망설일 때가 많았고 별스럽지 않은 일에도 자주 얼굴을 붉혔다. 나이가 들면 나아지려니 했는데, 아직도 별로 나아질 기미가 없는 것을 보면 이것이 천성인 듯하다.

신문에 글은 자주 썼지만 1995년 처음 정부에 들어갈 때까지 한번도 TV나 라디오에 나간 적이 없었다. 여러 번 출연 요청이 있었으나 언제나 한 마디로 거절했다. TV 출연한다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렸고 얼굴이 달아올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TV에 자주 출연하는 다른 ‘스타 교수’들에 대해 비난하거나 질시하는 감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다만,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거니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천만다행인 것은 내가 꼭 해야 할 일을 할 때는 그 부끄럼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이다. 대학에서 강의할 때나, 학회에서 발표 할 때, 또 가끔 외부에서 특강을 할 때는 별다른 부담 없이 자연스럽게 임하곤 했다. 정부에 들어가 두 번 장관직을 수행하는 동안 수없이 TV에 출연했는데, 내심 불편한 심경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이게 내 일이다’라고 생각하니 수줍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때 수없이 대담, 토론, 특강 등에 나섰는데, 주저하는 마음이 생길 때 마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정치가였던 ‘앙드레 말로’를 떠올렸다. 말로는 드골 정권하에서 매우 성공적으로 문화상(文化相)직을 수행했는데, 당시 그는 시민과 잦은 소통을 통하여 대중의 의식 속에 정부의 문화정책을 깊숙이 심었다.  

 

그러나 정부에 있을 때도 천성적 부끄럼 증은 항상 나를 따랐다. 장관의 공식적 역할을 할 때는 멀쩡하다가도 비공식적 모임이나 사적인 어울림에서는 늘 이 병이 도지곤 했다. 장관을 하다 보면 직접 일과 연관되지 않는 외부 행사나 리셉션에 참여하는 일이 적잖은데, 그런 날이면 아침부터 마음이 불편하고 도통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특히 정치인, 재계 인사 등이 많이 참여하는 리셉션 때는 더 그랬다. 그런데 가게 되면, 별로 아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분위기에도 익숙하지 않아 주변에 잠시 머물다가 슬그머니 빠져나오곤 했다. 

장관을 그만 둔 후에는 TV 출연을 한 적이 없다. 생각만 해도 ‘부끄럽기’ 때문이다. 택시를 탔다가 기사가 우연히 내 얼굴을 기억하고 말을 걸어오면, 반갑기보다는 부끄러워 좌불안석이 된다. 이곳 속초/고성에 살며 마음 편한 것 중 하나가 여기서는 ‘익명성’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부끄러울 계기가 없기 때문이다. 

 

부끄럼을 타는 내 성격이 나를 소극적으로 만들고, 행동반경을 좁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 스스로 그런 습성을 그리 나쁘게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부끄럼을 아는 마음을 잘 가꾸면 매우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기 때문이다.  

                             

                               II.

성격 탓인지, 나는 부끄럼을 아는 사람, 얼마간 ‘shy'한 사람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얼마 전에 돌아가신 박완서 선생님이 부끄러운 듯 짓는 수줍은 미소를 무척 좋아했다. 그 분은 팔순에도 언제나 소녀의 부끄러움을 간직하고 계셨다. 돌아가신 후, 박 선생님이 새색시 때 아기를 안고 찍으신 사진이 공개되었는데 거기에도 예의 때 묻지 않은 수줍은 미소가 빛나고 있었다. 박완서 선생님은 글이나 언행 모두 바르고 당당하셨던 분이다. 나는 그 분이 자신의 강직하고 올곧은 속내를 수줍고 따듯한 미소로 감싸고 계셨기에 더 좋아했던 것 같다. 박완서 선생님의 글,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는 그 분의 생활철학이 담긴 작품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 일으켰을 것으로 생각한다.  

 

<간디 자서전>을 보면 간디도 꽤나 부끄럼을 많이 탔던 사람이다. 영국서 공부하고 돌아와서 변호사 일을 시작했는데, 첫 변론에서 눈앞이 캄캄해 져서 아무 말도 못하고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주저앉는다. 스스로 자질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개인적 이득을 위해 다른 사람 앞에 나서는 일이 부끄럽고 떳떳치 못하다고 느꼈다. 결국 생계의 수단으로 변호사직을 하는 일을 포기했다. 그러던 그가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정책에 분노하면서, 결연히 인종차별 반대투쟁에 앞장을 선다. 공공선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천성적인 부끄러움을 극복한 것이다. 이후 그는 인도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도자로, 인도 건국의 아버지로, 그리고 금세기 마지막 성자로 보람찬 생애를 이어간다. 그의 비폭력저항운동의 근간이 되었던 ‘사티아그라타’(‘진리의 파지把持’) 정신은 ’불상해‘(不傷害), ’극기‘, ’금욕‘를 바탕으로 하는데, 나는 이 원칙들이 모두 부끄럼을 아는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간디는 자서전에서 자기가 워낙 부끄럼을 타기 때문에 유리한 점이 있는 데, 그것은 무슨 말을 할 때 그냥 내뱉지 않고 조심스럽게 되씹어 보고 말을 하기에 별로 말실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새겨 둘 만한 얘기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간디는 단순히 부끄럼을 탔던 순진한 사람이 아니라,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진리 파지’의 지렛대로 승화시켰던 위대한 사상가였다. 

 

석가는 두 가지 ‘깨끗한 법(二淨法)’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것’과 ‘남에게 부끄러워하는 것’이며, 이 두 법에 의해 세상은 보호된다고 설파하셨다. 우리는 흔히 남에게 부끄러워하는 것만을 생각하기 쉬운데,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자기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지난날을 되돌아보면서 낮 뜨거워 견디기 어렵고, 스스로 환멸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나는 스스로 부끄러워 할 줄 아는 마음은 실로 보배 같은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부끄러움이라는 잣대 없이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자기 성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III.

 

부끄러움은 우리의 피폐한 마음을 정화(淨化)시키는 위대한 힘을 갖고 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노래했던 윤동주의 시심이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것도, 바로 ‘염치’(廉恥)를 갈구하는 우리 내면의 순수한 욕구 때문이 아닐까.

 

박완서는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에서 중년여성인 화자(話者)를 통해 모처럼 찾아 온 ‘부끄러움의 통증’과 그것을 만인이 공유하고 싶은 간절한 심경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처음엔 나는 왜 내가 그 말뜻을 알아들었을까 하고 무척 미안하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몸이 더워오면서 어떤 느낌이 왔다. 아 아 그것은 부끄러움이었다. 그 느낌은 고통스럽게 왔다. 나는 마치 내 내부에 불이 켜진 듯이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나는 각종 학원의 아크릴 간판의 밀림 사이에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는 깃발을 퍼러덩 퍼러덩 휘날리고 싶다.”

                                             

 

                                       

                                                        <박완서, 새댁시절 시어머님과 함께>

                                                              < 첫 따님을 안고>                         

 

                                                   

                                                                        <영정사진> 

 



출처: https://hyungang.tistory.com/search/부끄럼에 대해 [현강재]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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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양재진 2021.02.05 16:00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부끄러움이 사라진 시대에 자신을 되돌아 보게 되네요.

  2. 이승종 2021.02.06 13:17 Address Modify/Delete Reply

    염치없이 살면서 염치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세상에 좋은 가르침 주시는 글 감사드립니다. 남 염치없는 것은 잘 알아왔는데 제가 염치없는 것 잘 몰랐던 것 새삼 돌이키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더욱 행복한 새해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3. 현강 2021.02.07 05:31 Address Modify/Delete Reply

    두 분 교수님, 제 글에 공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박 선생님 생전에 이런 저런 인연으로 꽤 여러 번 뵈었습니다.
    세상에는 글과 행동이 다른 작가들도 많은데, 선생님은 글 속에 당신이,
    그리고 당신 속에 글이 그대로 녹아있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부끄러움, 겸손,
    절제 속에 늘 바르고, 당당, 솔직하셨던 분입니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 가장 생각나는 분이 김수환 추기경님이시다.

평생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 편이셨다. 더없이 온유한 분이시지만,

불의에 대해서는 추상같으셨다. 언제 우리가 그 같은 어른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내가 장관 재직 때도 힘들 때는 늘 그 분을 찾아뵈었다.

그가 내게 손수 써서 보내주셨던 성탄절 답장 카드를 펼쳐본다.

그리움만 쌓인다.

 

   위의 카드는 2006년 초에 보내주신 카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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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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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트롯트 열풍이 대단하다. T.V 방송국마다 토롯트 경연을 펼치고 성악, 발라드 등 다른 장르의 가수들도 이제 별로 주저하지 않고 트롯트의 세계를 기웃거린다. 서민들의 정서와 애환을 품속에 담아 그 100여년의 역사가 바로 한국의 사회사(社會史)이면서도 ‘유치’의 팻말을 떼지 못하고 뒷전에 밀렸던 트롯트가 단걸음에 실지회복(失地回復)을 했고, 트롯트 스타들이 하루아침에 줄지어 탄생했다. 트롯트의 폭발적 열기는 코로나의 질곡 속에서도 식을 줄을 모른다.

 

트롯트가 치솟는 인기의 배경에는 오랫동안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2, 3류 인생으로 살다가 일약 스타덤에 오른 몇몇 어제까지의 ‘무명가수’들의 인생 스토리텔링이 한 몫을 했다. 오랜 무명의 모진 세월을 딛고 마침내 인생역전에 성공한 그들의 인생사가 우리 마음을 촉촉이 적시고, 또 많은 이에게 희망의 불씨를 지피기 때문이다.

 

                  II.

비단 트롯트 뿐 아니라, 근래에 부쩍 늘어난 각종, 다수의 T.V 음악경연 프로그램을 보면서 세상에 가수를 꿈꾸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크게 놀랐다. 그리고 음악적 자질이 뛰어난 지망생들도 하늘의 별처럼 많다는 사실에 함께 놀랐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무명으로 출발한다. 개중에는 드물게 일찍부터 각광을 받고, 비교적 순탄하게 대가수로 성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대부분은 중도에서 좌절, 탈락, 포기하거나, 아니면 꽃 같은 세월을 무명가수로 전전하며 힘든 인생역정을 거치게 된다.

 

그런데 무명가수들의 모습도 무척 다양하다. 어떤 이는 세찬 파도에 지치고 한 맺힌 모습인데, 다른 이는 묵묵히 한길을 정진하는 구도자의 초탈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세상에 크게 알려 지지 않았지만, 그들의 작은 세계에서는 이미 높은 평가와 유명세를 타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언더그라운드의 스타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그런데 뒤늦게 무명의 설음을 디디고 스타로 입신에 성공한 사람들은 대체로 몇 가지 특징을 공유하는 것 같다. 우선 그들은 대체로 긍정적, 낙관적인 사고를 지녔고, 어려움 속에서도 꾸준히 절차탁마(切磋琢磨)를 계속해 내공을 쌓으며 자신을 가꾸어 온 사람들이다. 말하자면 늘 준비하며 때를 기다렸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러한 덕성과 능력을 지녔다고 모두 큰 가수가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실제로 많은 이는 스타가 될 수 있는 온갖 좋은 조건을 갖췄으면서, 갖가지 사회적, 개인적 이유로 인생역전에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도 무수히 많다. 아니 어쩌면 그런 경우가 대부분일지 모른다. 그래서 인간사에는 늘 짙은 그림자와 애잔한 멜로디가 함께 한다.

 

나는 새로 탄생한 토롯트 스타들 중에 장민호에 주목했다. 그는 아이돌 가수로 출발하여, 발라드, 토롯트를 전전하며 20여년 무명생활을 딛고 눈가에 잔주름이 생긴 40대 중반에 이르러 빛을 보게 된 반전인생의 주인공이다. 그런데 그는 노래도 잘하지만, 오랜 동안 겪어야 했던 무명의 설음과 풍찬노숙(風餐露宿)의 세월 속에서도 인간으로서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바른 모습을 보여 준다. 단정한 용모, 따듯하고 배려 깊은 행동거지, 진솔한 심성이 화면에 그대로 묻어났다.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미스터 토롯트 '진'에 오른 임영웅도 상대적으로 무명의 세월은 짧아도, 노래실력이나 반듯한 언행, 서정(敍情)의 깊이가 그가 그동안 얼마나 성실하게 내공을 쌓아왔나를 알려준다. 결코 쉽게 그 자리에 오른 청년이 아니다.

 

                III.

최근 트롯트 세계에서 벌어지는 풍경이, 실제로 우리 사회의 많은 영역에서 비슷한 곡조로 끊임없이 펼쳐진다. 자신의 소우주(小宇宙)에서 스타로 발돋움 하려는 수많은 젊은이들, 그 치열한 경쟁과정에서 많은 이가 일찍 포기하고 딴 길을 찾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 길목에서 머뭇거리며 늙도록 끝없이 세월을 낚는다. 과거 사법고시, 행정고시가 그 대표적 예다. 고시라는 신기루를 쫓다가 좌초한 수많은 인생, 그들의 깊은 한(恨)과 뼈를 깎는 아픔, 그들이 마주했던 ‘통곡의 벽’은 아마도 당사자 말고는 누구도 헤아리기 어려울 것이다. 또 국가적 차원에서 볼 때도, 그 과정에서 터무니없게 사라져간 인적 자원의 손실이 얼마나 클까.

 

나는 이 세상에서 펼쳐지는 온갖 ‘경연’이 보다 공정하고 투명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숨어있는 보석’들이 제대로 빠짐없이 발굴되기를 염원한다. 그리고 단계마다 적절한 ‘패자부활전’이 있어서 아깝게 탈락하는 이들에게 재기의 기회를 줄 것을 기대한다. 그리고 젊은이들의 꿈의 표적이 될 수 있는 멋진 일거리, 그냥 일자리가 아니라 그들의 꿈을 품어 줄 그런 ‘꿈자리’가 더 늘어나고, 자칫 그 꿈을 찾는 길목에서 길을 잃거나 헤매는 친구들에게 제때 적절한 길로 인도해 줄 사회적 장치가 더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요원한 얘기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전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경연에서 당장 밀린 후보자도 다음 기회를 찾거나, 아니면 다른 꿈자리를 넘볼 수 있기 때문에, 승자와 패자 간의 아스라한 격차도 줄어들고 패자가 승자를 보다 좀 더 격의 없이 축하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러면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오늘의 살벌한 경연무대가 보다 축제에 가까워 질 수 있지 않을까.

                   

               IV.

그리고 우리 사회가 오랜 무명의 세월을 떨치고 찬연한 새 운명을 개척한 극소수의 송가인, 임영웅을 환호하는데 그치지 말고, 아직 어둠 속에 묻혀있는 대다수 <무명가수>의 오늘의 삶과 그들의 내일에 대해 보다 따듯한 관심을 기울였으면 좋겠다.

솔직히 나는 최근 T.V에 펼쳐지는 많은 음악경연무대를 보면서, 그 치열한 경쟁 과정에서 연출되는 온갖 극적인 장면, 전율의 순간, 그리고 특히 승패가 엇갈리는 그 마지막 클라이막스를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이긴 자의 인간승리와 환희에 공감하기에 앞서, 패배한 자의 좌절과 아픔이 밀물처럼 가슴으로 밀려왔기 때문이다. 교수시절에도 그랬다. 내가 행정학과 교수이기 때문에 매년 행정고시가 끝나면, 많은 제자들의 희비가 갈린다. 그때 마다 나는 합격한 제자에게 짧게 축하하고, 불학격한 제자들을 길게, 그리고 깊게 위로했다. 마음은 늘 <무명가수>의 편에 있었다.

 

           V.

오늘도 언젠가 찾아 올 해뜰날을 희원하면서 고군분투하는 수많은 젊은 <무명가수>들에게 진심을 담아 따듯한 위로와 격려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내일은 정말 좋은 일이 너에게 생기면 좋겠어” (김윤아의 ‘Going home'에서).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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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봄학기에 나는 연세춘추 및 Yonsei Annals(영자신문) 주간에 임명되었다. 당시 유신말기 가장 엄혹했던 시기에  2년 가까이 대학언론을 맡아 무척이나 힘든 시간을 보냈다. 퇴임할 때, Annals 기자들이 내 주간발령 기사가 게재된 신문으로 감사패를 만들어 내게 주었다. 그 때 내 나이 36세, 한창 홍안의 청년이었는데, 곧 닥쳐 올 고난의 시간을 예견하지 못하고 밝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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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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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경자년, 한 해가 저문다. 내가 태어난 후 여든 번째 맞는 세모(歲暮)다. 대체로 세모에는 덧없이 보낸 지나는 해에 대한 아쉬움과 새로 시작하는 한 해에 대한 희망이 함께 교차하는데, 올해에는 새해를 향한 불빛은 어득한 채, 깊은 상실감 속에서 온통 울적한 기분에 휩싸인다.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에 갇혀있는 느낌, 아니 칠흑 같은 어둠속에 침잠해 있는 무거운 심경이다.

나이 탓일까. 코로나 때문일까, 아니면 시국 탓일까. 아마 이 모든 게 다 겹쳐 증폭된 탓일 게다. 여하튼 보내는 해는 유례없이 힘겨운 한 해였다. 오죽하면 며칠 전 <타임(Time)>지가 2020년을 역대 <최악의 해>라고 정의했을까. 정말, ‘테스’형에게 “세월이 왜 이래”라고 묻고 싶은 심경이다. 할 말이 많아 글이 분명 길어질 것 같아 그 걱정부터 앞선다.

 

II.

세모에 나를 울적하게 만드는 요인들 중에 내 나이가 한 몫 하는 게 사실이다. 내일이면 여든에 하나가 더 보태질 테니, 도대체 어쩌다 이 나이가 됐나 내 스스로가 믿기 어렵다. 돌이켜 보면 내 나이 20, 30 대에는 60세 이후의 내 삶에 대해 생각조차 해 본 기억이 없다. 40대에 들어서면서 간혹 60세 이후를 머리에 떠올려 보았지만, 그냥 50대의 연장선 위에서 ‘이어지는 삶’ 정도로 생각했지, 그 나이에 짊어질 내 존재의 의미와 삶의 양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해 본 기억이 없다. 60대 내지 정년 이후의 삶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 50대에 들어서면서부터가 아니었나 싶다.

그 때 내가 내린 결론은 단순했다. “서울을 떠나자, 가능하면 멀리, 그리고 보다 자연에 가깝게. 그러면서 내 마음이 가리키는 대로, 가능한 한 내 의지대로 살자”가 그것 이었다. 나의 속초/고성 행에 대해 많은 지인들이 어려운 결단이라고 했는데, 내겐 그것이 당시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내 마음속에 깊이 잠겨있던 숨은 욕구와 바람이 자연스레 현화(現化)한 것이기 때문이다.

시골 생활이 새해면 15년째 접어든다. 그 사이 나 자신은 물론 이곳 시골의 풍정도 많이 변했다. 해가 갈수록 농사짓기에 힘이 부치고, 특히 작년 큰 산불을 겪고 난 후 부터는 몸도 마음도 예전 같지 않다고 느낄 때가 많다. 기후변화도 약여(躍如)해서, 겨울이면 으레 몇 차례 찾아오던 폭설이 지난 몇 해 동안 깜깜 무소식이고, 금방 쏟아질 듯 빽빽이 밤하늘을 가득 채웠던 별들도 그 수가 눈에 띠게 줄었다. 이제 동화 같은 설국(雪國)의 풍경도 밤하늘을 보석처럼 수놓던 별들의 잔치도 점차 옛 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그런가 하면 농촌의 주택이나 삶의 양식이 빠르게 현대화되어 이젠 도시와 별로 다를 게 없고, 서울 가는데 처음에는 5시간 가까이 걸렸는데, 요즈음은 2시간 반으로 크게 줄었다. 시골스러운 분위기는 점차 줄어들고, 이젠 서울 변두리쯤으로 바뀌는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의도했던 ‘탈(脫) 서울’의 벅찬 꿈은 반쯤 실패한 셈이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것은, 나를 이곳 원암리로 유인했던 집 뒤에 울창한 청정 소나무 숲이 지난 번 산불로 완전히 사라졌고, 군데군데 아직 베어가지 않은, 껍질이 반쯤 벗겨진 칙칙한 모습의 나목(裸木)들이 을씨년스럽게 줄지어 서있는 모습이다. 이 모든 게 나를 울적하게 만든다.

 

III.

세모에 내 마음을 어둡게 만드는 데 큰 몫을 한 것은 역시 코로나 19라는 희대의 국제 역병이다. 올 초까지 만해도 오늘 같은 ‘대참사’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머지않아 전 세계에 이 역병에 걸린 확진자가 1억에 이를 전망이고, 먼 나라도 옆집 드나들듯 했던 세계화 시대에 나라마다 빗장을 걸어 잠그기에 바쁘다. ‘언택트’, ‘뉴노멀’이 생활 속에 파고든지 이미 오래고, 이제 전 세계가 애타게 백신에 목을 매고 있다. 그 동안 세계대전도 경제공황도 인간을 이렇게 비참하고 왜소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이 격변과 반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그간 인류가 쌓아올렸던 찬란한 문명과 과학, 그리고 이성이 하염없이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음을 목도한다. 세계 일류국가인 미국이, 그리고 유럽의 선진 국가들이 오늘처럼 초라하고 같잖게 보인 적이 있었던가. 무릇 인간의 부족함을 절감하는 나날이다. 어쩌면 세계사가 코로나를 분수령으로 그 '이전 시대'와 '이후 시대'로 크게 나뉠 개연성이 없지 않다. 

우리 눈을 주변으로 돌릴 때, 무엇보다 소상공인들, 고용취약계층이 하루하루 겪어야 하는 현실적 고통과 실존의 불안은 보다 절실하다. 코로나 19라는 팬데믹이 드리운 온갖 어둠의 그림자가 그간 인간이 이웃과 약자, 그리고 자연에게 저지른 온갖 만행들, 핵무기 무한경쟁, 생태계 파괴, 이기적 욕망에의 탐닉 등이 빚어낸 업보라는 입장에 본질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그 충격과 피해가 일차적으로 우리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계층들을 향하고 있다는 아이로니에 좌절하지 않을 수 없다.

 

IV.

돌이켜 보면, 가는 해 내내 우리는 마치 아수라장과 같은 정쟁(政爭)터에서 부대끼며 살았다. 우리는 민주화가 진척되면, 정치가 안정되고 사회, 경제적으로도 더 발전하고, 민심도 더 온유해 지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이 모든 기대를 철저하게 배신하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 진영화는 이제 그 첨예화의 극을 달리고 있다. 정계는 물론, 언론계, 종교계, 시민사회, 아니 가족 사이도 좌, 우 양극으로 나뉘어 대립과 불신, 증오와 비타협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중원(中原)은 한껏 비좁아지고, 중도(中道)는 길을 잃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권력욕과 독선, 그리고 비이성과 비관용이 자리 잡았다. 정치의 세계가 날이 갈수록, 뻔뻔하고, 포악 해져서 마치 흉물스러운 괴물을 보는 것 같다. 이제 그 동네에서 국리민복, 공공선과 휴머니즘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무엇보다 정치 영역에서의 이성(理性)의 복원이 가장 시급하다. 이렇게 된 데는 권력분점과 협치를 가볍게 여기는 집권세력의 책임이 가장 크다. 그러나 야당은 물론, 다수의 시민 개개인도 이 진영화(陣營化)정치의 아수라장에서 취한 자신들의 편향된 정치행위에 대해 자성해야 할 여지가 크다. .

그런데 안타깝고, 서글픈 일은 정치 영역에서의 이성의 상실이 우리만 의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세계 강대국의  지도자들, 예컨대, 곧 자리에서 물러 날 트럼프나 푸틴도, 시진핑도, 그리고 얼마 전 그만 둔 아베도 글로벌 비전과는 아랑곳없이 예측불허의 정치공작과 눈앞의 이익에 급급 하는 저급 정치의 고수들이 아닌가. 세모에 나를 경악시킨 가장 큰 우스개는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 1호가 다름 아닌 트럼프라는 사실이다. 이처럼 우리가 눈앞의 현실에서 눈을 돌려 세계를 조망해도 그 어디에서도 희망의 불꽃은 보이지 않는다.

 

V.

쓰고 보니 넋두리로 점철된 요설(饒舌)만 늘어놓은 느낌이다. 바로 내일이면 새해인데, 한풀이 굿판을 벌리고 있는 것 같아 스스로가 부끄럽다. 그러나 한 해의 끝자락에, 바로 새해 첫날에 앞서, 허심탄회하게 요즈음 내 심경을 훌훌 털어놓고 보니 마음은 홀가분하다. 이렇게 자신이 서있는 자리를 다시 확인하고, 그것을 매개로 타인과의 교감의 발판을 마련하는 일도 그리 무의미한 일만을 아니지 않을까 여겨진다.

그러나 이 엄중한 시기에 우리가 정작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이 어둠의 심연에서 몸을 일으켜 보다 겸허한 심경으로 우리 주변에서부터 꺼져가는 작은 희망의 불씨를 하나하나 찾아 정성스레 지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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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윤주명 2021.01.02 13:44 Address Modify/Delete Reply

    교수님 글 잘 읽었습니다. 요즘처럼 어지러운 정치현실을 보면서 1980년대 교수님께서 자유민주주의의 바탕에서 여야를 아우르는 대화합의 담론을 용기있게 펼치시던 때가 그립습니다.

  2. 김항규 2021.01.03 09:36 Address Modify/Delete Reply

    2021년 늦게 새해 인사드립니다.
    새해 첫날은 잘 보내셨는지요?
    교수님은 저에게는 늘 자신있어 하시고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시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80줄에 들어서시면서 약간 의기소침해 하시는 개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게 되니 저 또한 우울해지는 기분입니다.
    교수님의 사고와 행동을 바라보며 노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늘 배워가며 흉내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올 해도 저희들에게 강건하심과, 소망을 선물해주시는 분이 되셔야 합니다.
    모쪼록 건안하십시요~~

  3. 제자 2021.01.04 09:43 Address Modify/Delete Reply

    선생님, 2021년 새해 건강하세요

  4. 현강재 현강 2021.01.10 02:48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부족한 사람과 변변찮은 글에 관심과 사랑을 안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부디 새해에 가내에 건강, 사랑, 행복이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나 있을 때, 고건 총리와  이헌재, 안병영, 오명 부총리로 구성되는 코드와 거리가 먼 이른바 전문가 '재수' 내각은 난국을 수습하고, 그 빈틈을 매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재수'내각의 힘.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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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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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파 지식인들과 온건개혁성향의 시민운동가들이 19일 서울 4·19혁명도서관에서 세대간 통합 및 중도와 균형을 지향하는 인터넷 신문 'Upkorea'(www.upkorea.net) 창간 발의자 대회를 열고 8월 창간을 목표로 본격 준비에 착수했다.Upkorea 발간을 주도해온 안병영(安秉永) 전 교육부 장관은 발기문에서 "양극화·원심화가 계속되는 우리 사회에서 그 동안 침묵했던 중도가 목소리를 내야 한다"며 "이념간 세대간 통합을 추구하는 논의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인터넷 신문을 창간한다"고 밝혔다.

Upkorea는 학계 문화예술계 종교계 법조계 시민단체 출신 109명이 발의자로 참여했으며 8월15일(창간준비호)부터 온라인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부문에서 이슈분석과 칼럼을 싣는다.

 

/김지영기자 koshaq@hk.co.kr

<학계> 권영준 경희대 교수 권오승 서울대 교수 권태준 서울대 명예교수 고충석 제주대 교수 김성국 부산대 교수 김용호 인하대 교수 김일수 고려대 교수 김태길 서울대 명예교수 김필동 충남대 교수 마인섭 성균관대 교수 문진영 서강대 교수 박명진 서울대 교수 박세일 서울대 교수 박은정 이화여대 교수 박지향 서울대 교수 박찬석 전 경북대 총장 서병훈 숭실대 교수 서지문 고려대 교수 안경환 서울대 교수 안병영 연세대 교수 양건 한양대 교수 염재호 고려대 교수 유성종 주성대 학장 윤경로 한성대 교수 이강래 원광대 교수 이만열 국사편찬위원장 이삼열 숭실대 교수 이성락 아주대 교수 이영선 연세대 교수 이정희 한국외국어대 교수 이종범 고려대 교수 임종률 성균관대 교수 임지순 서울대 교수 임현진 서울대 교수 장가용 서울대 명예교수 장오현 동국대 교수 장회익 녹색대 총장 장 훈 중앙대 교수 주철환 이화여대 교수 하성규 중앙대 교수 허 영 명지대 교수 황경식 서울대 교수 홍원탁 서울대 교수

<종교계> 김규칠 불교방송 사장 김명혁 목사 박청수 원불교 강남교당 교무 성타 불국사 회주 송월주 전 조계종 총무원장 영담 석왕사 주지 오경환 신부 옥한흠 사랑의교회 목사 이한택 천주교 서울대교구 보좌주교 인명진 갈릴리교회 담임목사 정련 내원정사 주지 지하 법융사 주지 최일도 다일공동체 목사 최창무 천주교 광주대교구장

<법조계> 강원일 변호사 강용현 변호사 강지원 변호사 이석연 변호사 이세중 전 대한변협회장 한승헌 변호사

<시민단체> 강문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이사장 김영래 한국NGO학회장 김진홍 두레공동체운동본부 대표 박용훈 교통문화본부 대표 박인주 서울흥사단 대표 서경석 경실련 상임집행위원장 손봉호 바른선거시민연합 상임공동대표 신혜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 이용선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사무총장 이형모 시민의신문 대표 전풍자 인간교육실현학부모연대 이사장

<문화예술계> 김금지 연극인 김병익 문학과지성 상임고문 김영동 음악가 박완서 소설가 박정자 연극인 오정희 소설가 이광모 영화감독 이주헌 학고재화랑 관장 임헌정 부천시향 상임지휘자 정현종 시인

<언론계> 장명수 한국일보 이사 김진현 전 문화일보 회장 유승삼 전 대한매일 사장

<경제계> 강정원 전 서울은행장 남상만 실업인 명호근 쌍룡양회 사장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 박종규 바른경제동인회 부회장 염진섭 디젠트 회장 이청승 베세토·고려피앤택 회장

<기타> 김영호 전 산자부장관 김성훈 전 농림부장관 손봉숙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이사장 신지호 KDI연구위원 양요한 녹향신천연합병원장 이각범 IT전략연구원장 이기주 한마음카운슬링센터원장 이병혜 KBS시사앵커 이용부 청소년단체협 사무총장 이인호 국제교류재단이사장 이종훈 국정연구원장 전영구 서울시 약사회장 정재영 인터넷신문 편집준비위원 조순형 국회의원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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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
처음 청남(菁南) 선생으로부터 ‘현강(玄岡)’이라는 아호를 받고, 나는 급한 대로 옥편을 찾아보았다. 그랬더니 한자로 ‘현(玄)’은 검(붉)다, 멀다, 아득하다, 심오하다, 하늘 등의 뜻과 함께 노자. 장자의 도에 이르기 까지 실로 다양한 의미를 지녔고, ‘강(岡)’은 산등성이, 고개, 작은 산 등을 뜻했다. 쉽게 ‘아득히 보이는 작은 산’ 정도로 이해해도 그 그림이 낭만적으로 가슴에 다가왔다. 또 여기에 노장철학을 곁들여 보다 심오한 뜻을 부여해도 내 생활철학의 관점과 그리 멀지 않게 느껴져 그 철학적 무게가 크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현강’이라는 음(音)또한 듣기에 그리 경박하지 않고, 다분히 진중하고, 사려 깊은, 그러면서 어딘가 결의에 찬 울림이 있어 좋았다. 그래서 무척 마음이 끌렸다. 하지만 누구에게 내 아호를 대놓고 말하기가 쑥스럽고, 부끄러워 마치 혼자 숨겨놓은 보물처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2007년 내가 정년퇴직을 하자 제자 40명이 글을 모아 내 정년기념 문집을 냈는데, 놀랍게도 그 제목이 <큰 스승 현강 안병영>이었다. 알고 보니 청남선생과 인연이 있었던 그 제자가 거기에 필자로 참여하면서 내 아호를 공개했던 것이었다.. 그 책의 출간이 내게 알리지 않은 채 진행되었기 때문에 나는 인쇄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이 책의 제목은 물론, 이 책 속에 옛날에 청남선생과 함께 찍은 사진(아래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청남 선생은 안타깝게도 그 때 뵌 후 얼마안가 타계하셨다.

  


                            II.
그때 청남선생은 설명을 곁들인 아호, ‘현강재(玄岡齋)’라는 내 서재 이름, 그리고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구절을 변용한 ‘처무위지행학불언지교 (處無爲之行學不言之敎)’를 크고, 작은 것으로 두 장을 써 보내 주셨다. 대서예가의 작품들이기 때문에 하나 같이 명품이었다. 청남선생은 서예가를 넘어 심오한 구도자의 풍모를 지녔는데, 한 때 해인사에 출가했다가 환속 후 노장사상에 크게 심취하셨던 분이다. 그가 내게 보내 주신 위의 글귀도 그의 이러한 사상적 바탕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된다.
모두 액자에 넣어 고성 내 서재에 걸어 놓았는데, 안타깝게도 아호 뜻풀이 액자와 현강재 액자, 그리고 작은 <도덕경> 액자가 모두 작년(2019) 고성 산불에 사라졌다. 그러나 다행히 큰 <도덕경> 액자는 서울집에 있었기에 화마를 피했다.

                         

                            III.
아호는 삶의 지향 내지 수양의 방법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인물에 대한 특성을 반영하기도 한다고 한다. 청남 선생이 내 아호를 지으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일단 내 아호를 내가 지향해야 할 내 삶의 지침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깊은 뜻은 알지 못하나 평소에 “있는 그대로의 자연” 내지 “자연 그대로의 삶”을 뜻하는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사상은 내게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고, 또 말년의 내 삶의 방식과 흡사해서, 청남 선생이 내 앞날을 미리 꽤 뚫어 보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래 액자는 아호에 대한 설명 글귀이다. 실물은 불에 타버렸으나 다행이 사진이 남아 있었다. 나는 한국지성사를 공부하는 제자인 안동대학교의 이병갑 교수에게 뜻풀이를 청했다.

 


내 아호는 <주역>의 58번째 중택태괘(重澤兌卦)〔태는 형통하니, 곧아야 이롭다(兌亨 利貞). 두 못이 나란히 있어 한 못이 마르면 다른 한쪽이 채워주는 형상이니, 군자는 이런 이치로 벗들과 학문을 하고 익힌다.(麗澤兌 君子以朋友講習)]에서 비롯되는데, 의역을 하면 교육활동을 통하여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줄 괘로 해석된다. 이어 아호를 해설한 글귀는 “큰 인품은 천 사람을 담고, 어진 덕성은 사해를 길하게 한다〔大盛千人, 仁吉四海.〕”는 뜻이 된다.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내용이나, 내 부족함을 채워줄 지향 목표라면,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서재에 걸어 두었던 아래의 액자도 화마에 사라졌다. 자주 올려다보며 흐뭇해 했는데 아깝기 그지없다.

 

그러나 아래의 노자 도덕경 액자는 서울에 두었기에 다행히 불길을 피했다. 백번 다행한 일이다.
이 글귀는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성인은 무위의 일을 하며, 말하지 않는 가르침을 행한다 〔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라는 구절을 변용한 것인데, 굳이 해석하자면, “무위의 행위를 하고, 불언의 가르침을 배운다〔處無爲之行, 學不言之敎〕”라는 뜻이다. 실로 금과옥조와 같은 내용이 아닌가. 


                                  IV.
이제 나는 아호를 누가 불러주지 않아도, 내 마음 속에 고이 담아 나를 바르게 세우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도구로 삼으려 한다. 그러면 더없이 유용한 삶의 지침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또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아호의 참뜻이 내 안에서 체화될 날이 오지 않을까.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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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근우 2020.12.06 15:36 Address Modify/Delete Reply

    현강 선생님,
    참 멋있는 호를 지니셨습니다.
    이글은 그런 멋있는 스토리가 있는 연유로
    한편의 아득한 아름다운 인생소설을 읽는 듯합니다.
    우리들이 너무 재미없는 삶을 살고 있구나
    하는 허전함이 항상 있는데
    아쉬움과 진한 울림이 있어 또 한번
    되돌아보게 되며 부럽습니다.

  2. 김만곤 2020.12.08 21:37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부총리님!
    부총리님의 아호에 대해 오랫동안 볼 적마다 제가 다 자랑스러웠습니다.
    부총리님은 어떻게 생각하신다 해도 이미 세상 사람들은 다 기억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멋진 호는 길이 남을 것이어서 어떤 학자는 수많은 호를 지어 자신과 견주어보지 않았을까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그 멋진 아호의 이미지처럼 늘 강건하시기 바랄 뿐입니다.

  3. 현강재 현강 2020.12.09 05:31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이 박사님, 김 교장선생님, 여기서 만나니 더 반갑군요.
    연말 잘 보내시고 새해에는 코로나 시름에서 벗어나 더욱 건강.행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I.

과거에는 문인, 학자, 예술가들은 이름 외에 별칭으로 아호(雅號)를 가졌다. 흔히 집안 어른이나, 스승 혹은 친구들이 지어서 불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아호에는 자신의 인생관, 좌우명, 출신(지), 선호 등을 담았는데, 많은 이가 2종 이상의 아호를 가졌다.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서화가인 김정희(金正喜)는 추사(秋史)를 비롯하여 완당(阮堂)ㆍ시암(詩庵)ㆍ예당(禮堂)ㆍ노과(老果) 등 200여개(일설에는 503개)를 가졌다. 단연 기록보유자가 아닐까 한다. 그런가 하면, 김소월(金素月 김정식), 김영랑(金永郎 김윤식), 이육사(李陸史 이원록), 박목월(朴木月 박영종) 등 한국의 대표 시인들은 우리에게 주로 아호로 기억되고 본명은 거의 잊혀졌다. 역시 천하의 묵객들에게는 돌림자를 따라 정해지는 본명보다 자신의 숨결이 감도는 풍아(風雅)한 아호가 제 격이 아닐까 한다

 

우남(雩南 이승만), 백범(白凡 김구), 해공(海公 신익희), 인촌(仁村 김성수), 몽양(夢陽 여운형) 등 한국 현대사의 이름있는 정치인들도, 본명 보다 아호로 불릴 때 우리에게 그 정치적 이미지가 더 선명하게 부각된다. 한글학자 주시경(한뫼), 최현배(외솔), 허웅(눈뫼)은 아호를 순수 우리말로 지어 우리의 얼을 아로새겼고, 사상가 함석헌은 아호를 씨알, 바보새로,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은 옹기로 지어, 민초(民草)를 연상케 하는 토속적 은유를 통하여 자신의 추구하는 세계관을 담았다.

 

                                    II.

 

아호가 때로는 짓궂은 유머로 혹은 풍자로 쓰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선생(1892-1968)이 하루는 가까이 지내는 정인보(鄭寅普)선생(1893-1950)를 찾아, 위락당(爲樂堂)이라는 아호를 권했고, 정인보 선생은 이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그 후 얼마 후, 가람선생이 정인보 선생을 다시 찾아 크게 웃으면서, “여보게, 자네 아호를 거꾸로 읽어보게!”라는 것이 아닌가. 거꾸로 읽으면, ‘당나귀’가 되는데, 워낙 정(鄭)씨 성(姓)이 당나귀를 뜻하기 때문에 이에 빗대어 놀려댄 것이다. 그런데 이에 못지않게 흥미로운 일은, 정인보 선생이 크게 놀림을 당하고도, 가람이 건네 준 아호 위락당에서 가운데 ‘락’ 자만 빼고, 자신의 호를 위당(爲堂)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당대의 국학의 대가, 두 분이 아호를 둘러싸고 주고받은 수 싸움이 역시  고수답지 않은가. 무엇보다 끝내 서로를  격의없이 품에 안은 그 결말이 너무 아름답다.

 

                                    III.

 

우리 앞 세대만 해도 아호를 지닌 분들이 꽤 되었던 것 같은데, 우리 세대에 이르러는 이미 아호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문인, 학자, 예술가 들 가운데 아호를 가진 사람도 드물거니와, 아호를 지녀도 누가 기억하고 불러주는 이가 별로 없어 그냥 사장(死藏)되기가 일쑤이다. 

 

나는 일찍부터 아호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그 필요성도 별로 느끼지도 않았다. 또 마음 한 구석에 아호를 갖는 것  자체가 괜히 잰체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그 때문에 따로 아호를 갖지 않았다. 그런데 약 30 년 전에 영남 제일의 서예가인 청남(菁南) 오재봉 (吳濟峰) 선생(1908-1991)께서 내게 손수 ‘현강(玄岡)’ 이라는 아호를 지어 주셨다. 내 제자 한 사람과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청남 선생은 나를 한번 만나 보신 후, 따로 청을 드리지도 않았는데, 손수 아호를 지어 내게 보내셨다. 고맙게 그지없었다. 음과 뜻 모두 내 마음에 꼭 들었다. 그래서 은밀하게 가슴에 안았다.

 

이후 10여년 지나, 이곳 속초/고성으로 온 후, 나는 새로 지은 집을 현강재로, 그리고 새로 개설한 블로그 역시 현강재라 부르면서, 은연중에 내 아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혼자 좋아서 읊조리는 수준이지, 아호를 뭇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장광설(長廣舌)하거나 많은 사람이 불러주기를 기대하지는 않았다.

 

 

                           IV.

그러면서 내심으로 적어도 가까운 친구나 제자 몇 명 정도는 내 아호를 기억하고 장난스레 불러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작은 기대마저 산산이 깨졌다. 내 아호가 공개된 지 10여년이 지나도 나를 현강이라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면서 나는 이미 아호의 시대는 지났다는 것을 절감했다. 보다 직설적, 직면(直面)적이고 단순화, 명료화를 지향하는 오늘의 세태에서 얼마간 여유를 가지고, 넌지시, 조금은 은밀하게, 그리고 뭔가 함축성을 지니며 은근히 다가가는 아호 접근법은 전혀 맞지 않는 게 분명하다. ‘현강재’는 그냥 안병영의 불로그 이름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안병영이라는 공식적 명칭 이외에 어찌보면 그 이름보다 더 의미 있는 인간의 총체성, 즉 그의 꿈이나 인격, 인간적 향기를 표상하는 또 하나의 의미복합체는 불필요할 뿐 아니라 세상을 복잡하게 만드는 군더더기일 뿐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불현듯 김춘수의 ‘꽃’이 연상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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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수장을 정치희생양 삼다니

 

“이렇게 1년 만에 교육부총리가 바뀌면 교육정책을 장기적으로 소신있게 추진하기가 어렵습니다.” “국민들은 백년대계를 원하는데, 권부는 조금만 문제가 있어도 교육수장을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습니다. 이래서야 정책이 어떻게 일관성을 유지하겠습니까.”

4일 오후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 이임식이 끝난 후 교육부 공무원들은 신임 부총리에 대한 예우 때문에 말을 아끼면서도 장탄식을 금하지 못했다. 이날 이임식에서 안 전 부총리는 “너무 모질게 일을 시켜서 미안하다. 여생 동안 빚을 다 갚지 못하겠지만 밖에서 열심히 돕겠다”고 간단히 말을 마쳤으나 끝내 눈시울을 붉혔다. 대부분의 직원들과 기자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안 부총리는 그동안 직원들로부터 ‘워커 홀릭(일 중독자)’이란 표현을 들어가면서 사교육비 경감, 대입제도 개선, 대학구조 개혁, 교원평가제, 직업교육 개편 등 각종 교육개혁정책을 추진해왔다. 직원들은 그로부터 “장관이 밤잠을 못 자는데 여러분들은 잠이 오느냐”는 소리를 일상적으로 들어야 했다. 그러나 이날 직원들은 떠나는 부총리에 대해 눈물로 아쉬워했다.

“안 전부총리의 중도 통합 노선은 진보, 보수로 나뉘어 갈등을 보이고 있는 교육단체의 조정 역할을 나름대로 해 냈습니다. 김영삼 정권에서 교육부장관을 지냈던 경륜으로 교육단체의 협조도 쉽게 이끌어냈습니다. 앞으로 그게 가능할지 솔직히 걱정입니다.” 한 교육단체 대표는 이렇게 우려를 표명했다.

안 전 부총리는 이임식에 앞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각 시·도교육청이 관할하는 수능은 교육부총리에게 직접 책임이 없는데 그 이유로 교체하는 것을 수긍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교육수장이 책임을 지는 게 마땅하다”고 대답했지만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교육계 안팎에서는 “교육수장 교체 이유가 교육정책 실패 때문이 아니라 수능 부정에 대한 국민정서를 달래기 위해서라면 지나치게 정치적인 것”이라는 비판 여론이 높다.

더욱이 새 부총리 인선 과정에서 대안 부재가 명백히 드러났음에도 이를 강행한 것은 참여정부의 아마추어리즘을 반영한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교육부의 한 고위 직원은 “새 교육부총리가 기초 업무를 파악하는 데만 최소한 6개월이 걸릴 텐데, 그 이후에 돌출 사건이 발생하면 민심 수습 이유로 또 교체할 것이냐”며 한숨을 쉬었다.

 

            장재선기자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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